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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의 기적 (요한복음 6:1-13절)
여러분!
저는 오늘 이 빌립에 대해 적용을 하면서 여러분들에게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저께 금요기도회때 연말이면 공동의회를 통해 장로님을 세우게 될 것이기 때문에 기도를 부탁드리고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교회가 장로님을 처음 세우는 일인만큼 정말 신중해야 하고 기도를 많이 하면서 준비해야할 줄 압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읽을 수 있는 판단을 달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교회의 장로님은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분이어야 합니다. 교회의 어려움이나 힘든 일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굳은 의지가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의 일에 거룩한 부담감을 가질 수 있는 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배에 잘 출석하고, 중직을 맡아 있다고 해서가 아니라 정말 남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느냐? 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고 책임있는 자세로 앞장서서 희생도 하고, 헌신도 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세워져야 합니다. 계산은 하고, 심부름은 하는데 책임은 지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목회자로서도 그렇고, 장로로서도 합당한 자세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빌립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시험이었습니다. 우리 안에 어떤 것이 들어있는지를 드러나게 하시는 주님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계산도 잘 하고, 합리적인 생각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일을 위해 자신이 조금이라도 희생하려거나 책임을 지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안드레가 한 소년이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내 놓았습니다. 사실 그것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그것을 주께 드렸습니다. 소년이 가져온 보리떡과 물고기를 주께 드릴 때 그것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드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마치 갈치 다섯 마리로 여러 명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모두 준 것처럼 그것을 가지고 그곳에 모인 큰 무리를 만족시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보고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9절에 보면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 많은 군중들을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그 자리에 앉게 하신 후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 앉은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저희가 실컷 먹고도 열 두광주리가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2절과 13절을 보면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주린 배를, 그들의 필요를 모두 채워주시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조금 전에 살펴보았던 빌립과 대조해서 안드레의 모습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그 많은 사람에 비해 자신이 내어 놓은 것은 너무도 형편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정도면 식사량이 많은 사람의 경우로 따지면 한 사람의 몫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안드레 자신도 그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아마 그것을 내놓을 때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 저런 것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한 소년이 가져온 것이기에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받아서 주께 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은 빌립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안드레의 보리떡과 물고기를 받아서 엄청난 일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아마 안드레가 보리떡과 물고기를 내 놓았을 때 가장 비웃었던 사람이 빌립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빌립의 계산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빌립의 합리적인 계산방식에 의하면 이것은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빌립의 제안을 거절하시고 안드레의 작은 것을 받아들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떡에 대한 문제를 물으실 때 주님은 나름대로 방안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물으시는 이유는 그 일에 제자들을 동참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어떠했습니까? 자기는 그 일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통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신이 희생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말도 되지 않는 일이지만 그 일에 동참하려는 생각이 분명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비웃어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그는 주님의 일에 어떻게 해서라도 동참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소년이 가져온 작은 것을 주님 앞에 들고 나갔고, 주님은 안드레의 작은 정성을 받아 놀라운 일을 펼쳐 보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오병이어의 사건 속에 나타난 사람들 중에 어디에 속하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책임질 일이나 감당해야 할 일에 대해 그저 팔짱만 끼고 구경하는 사람은 아닙니까? 미리 따져보고 계산해 보아서 나에게 유익이 될 것 같으면 뛰어들고 그렇지 않으면 한 발짝 물러나서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사람은 자신에게 분명한 유익이 있지 않는 한, 책임있게 어떤 일을 수행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신앙이 냉소적이지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드레는 작은 것이라도 주께 드리면서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문제 해결에 대해 매우 냉소적이었습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남의 문제인 것처럼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자신은 절대로 뛰어들지 않습니다.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에게 그런 모습이 없는지를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적어도 우리 온유한교회 모든 성도들은 빌립과 같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세워지게 될 장로님은 더더욱 그런 분이 아니길 소원합니다. 주님은 안드레의 작은 정성과 헌신을 기뻐하셨습니다. 아니 주의 일에 직접 동참해서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안드레의 모습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교회의 장로는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 아니라 발 벗고 나서는 사람입니다. 책임을 져야 할 일에 앞장서서 책임을 지고, 헌신해야 할 일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문제에 직접 동참을 해서 함께 고민하고 함께 해결해보려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 모든 성도들도 함께 나타내 보여야 할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때 작은 정성을 통해, 책임지고 참여하고자 하는 모습을 통해,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자리에 참여하고 있는 수 많은 군중들과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주님을 따라온 것은 병자가 고침을 받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동안 주님은 병자를 고치신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그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어떤 이들도 자리를 뜨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지금 그들은 말씀에 너무도 갈급해 있습니다. 왜 말씀에 갈급해 있습니까? 너무나 오랫동안 목자없는 양처럼 방황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도 오랫동안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들은 것이라곤 유대지도자들로부터 율법을 들었고 그 율법으로 인해 자신들의 목이 점점 조여져 가는 고통만 느끼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 주는 은혜의 말씀은 너무도 들어본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말씀으로 은혜 받고 기쁨이 충만해도 배가 고파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배 고픈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와서 은혜 받았다고 여러분들의 먹는 문제가 해결되어집니까? 예배시간에 '아멘'하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하면 먹을 것이 저절로 생깁니까? 아무리 눈감고 오래 기도해도 눈 뜨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가 쌀이라도 한 가마 갖다 줄 것 같은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비꼬아 하는 말이 '교회가면 밥을 줘, 아니면 떡을 줘'하며 비아냥거립니다.
그것이 우리가 만나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교회가서 은혜받는 것은 은혜 받는 것이고 먹는 문제만큼은 나의 노력과 힘을 통해서 얻는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는 영적인 일에만 관심을 갖고 생각해야지 먹는 문제는 신앙이나 믿음과는 상관이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 앞에서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들의 육체적 필요에 관심을 갖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은혜만 받고 끝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육체의 필요에 대해서도 해결해 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이 두 가지를 함께 해결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현실문제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문제에만 관심이 있지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현실문제에 대해서는 안하무인격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오해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만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 삶을 인도하시고 필요에 따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생활이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먹는 것은 먹는 것이고, 말씀은 별개의 것으로 취급되어져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먼저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필요를 채우시기에 앞서 영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육적인 일에 필요한 것을 먼저 채우는 사람들은 영적인 일에 등한히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주님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가 다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참 이상한 것은 육적인 필요를 먼저 채운 사람들은 반드시 또 다른 육적인 필요를 위해 나아가지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영적인 일을 돌보는 일에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육적인 필요를 먼저 채우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영적인 필요를 먼저 채우는 분이십니까? 주님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를 가볍게 취급하거나 무시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선순위입니다. 영적인 필요를 채우지 않고, 육적인 필요를 채우는 사람들은 신앙의 깊은 체험과 의미들을 깨닫기도 전에 지리멸렬(支離滅裂)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안드레의 작은 정성과 헌신을 통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먹고 나면 그것으로 될터인데 왜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나 되었을까요? 어떤 분들은 '12' 이라는 단어에 굉장한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건데 여기서 '12'라는 숫자에 의미를 둘 것이 아니라 먹고도 남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합당할 줄로 압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도 고백하기를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먹고도 남을 만큼 주셨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엔 순전히 우리의 입장을 고려한 주님의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5천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유대인들은 숫자를 헤아릴 때 여자나 아이들은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보리떡과 생선을 나누었을텐데 그렇다면 뒤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아무리 축사하고 떡을 떼시지만 언제 없어질는지 어떻게 압니까?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강냉이빵을 무료로 배급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닌 학교는 하루에 한 개씩 주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몇 개가 모자라서 그 다음날 받지 못한 학생부터 다시 나눠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빵의 숫자가 일정한 것이 아니라 꼭 한두개 차이가 났습니다. 어떤 날은 한 개가 더 많고, 어떤 날은 한 개가 적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빵을 나눠주실 때 반대쪽부터 나눠주면 제일 끝자리에 앉은 몇 몇 학생들은 불안합니다. 왜 불안합니까?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봐서 그렇습니다. 원래 계산대로라면 자기도 받을 수 있는데 한 두개가 모자라기 때문에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빵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많으면 안심이 되어도 적으면 불안합니다. 왜 그 많은 사람이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 두광주리나 되었을까요? 아마 뒤에서 배급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배려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생각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현실문제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까? 신앙은 영적인 문제에 국한 된 것이며 영혼에 대한 문제를 다룰 뿐 먹는 문제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이 드십니까?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나의 노력으로 열심히 사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먹는 문제를 모른 척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만큼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를 영적인 문제에 둘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계산을 하면 빌립과 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현실로 돌아가서 그 문제에 얽매이게 됩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작은 정성을 주께 드렸습니다. 그것은 보잘것없습니다.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한사람도 배불리 먹기엔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일에 참여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결국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일을 행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오병이어의 현장으로 초대받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곳은 우리의 영적인 필요와 육적인 필요가 동시에 채워진 장소입니다. 빌립과 같이 뒷짐지고 쳐다보지 않기를 원합니다. 안드레처럼 적극적인 동참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여러분의 삶이 풍성하게 채워지고도 열두 바구니 넉넉하게 남은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김해곤목사 설교 중에서
여러분!
저는 오늘 이 빌립에 대해 적용을 하면서 여러분들에게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저께 금요기도회때 연말이면 공동의회를 통해 장로님을 세우게 될 것이기 때문에 기도를 부탁드리고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교회가 장로님을 처음 세우는 일인만큼 정말 신중해야 하고 기도를 많이 하면서 준비해야할 줄 압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읽을 수 있는 판단을 달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교회의 장로님은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분이어야 합니다. 교회의 어려움이나 힘든 일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굳은 의지가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의 일에 거룩한 부담감을 가질 수 있는 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배에 잘 출석하고, 중직을 맡아 있다고 해서가 아니라 정말 남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느냐? 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고 책임있는 자세로 앞장서서 희생도 하고, 헌신도 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세워져야 합니다. 계산은 하고, 심부름은 하는데 책임은 지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목회자로서도 그렇고, 장로로서도 합당한 자세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빌립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시험이었습니다. 우리 안에 어떤 것이 들어있는지를 드러나게 하시는 주님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계산도 잘 하고, 합리적인 생각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일을 위해 자신이 조금이라도 희생하려거나 책임을 지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안드레가 한 소년이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내 놓았습니다. 사실 그것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그것을 주께 드렸습니다. 소년이 가져온 보리떡과 물고기를 주께 드릴 때 그것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드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마치 갈치 다섯 마리로 여러 명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모두 준 것처럼 그것을 가지고 그곳에 모인 큰 무리를 만족시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보고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9절에 보면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 많은 군중들을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그 자리에 앉게 하신 후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 앉은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저희가 실컷 먹고도 열 두광주리가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2절과 13절을 보면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주린 배를, 그들의 필요를 모두 채워주시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조금 전에 살펴보았던 빌립과 대조해서 안드레의 모습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그 많은 사람에 비해 자신이 내어 놓은 것은 너무도 형편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정도면 식사량이 많은 사람의 경우로 따지면 한 사람의 몫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안드레 자신도 그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아마 그것을 내놓을 때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 저런 것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한 소년이 가져온 것이기에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받아서 주께 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은 빌립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안드레의 보리떡과 물고기를 받아서 엄청난 일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아마 안드레가 보리떡과 물고기를 내 놓았을 때 가장 비웃었던 사람이 빌립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빌립의 계산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빌립의 합리적인 계산방식에 의하면 이것은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빌립의 제안을 거절하시고 안드레의 작은 것을 받아들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떡에 대한 문제를 물으실 때 주님은 나름대로 방안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물으시는 이유는 그 일에 제자들을 동참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어떠했습니까? 자기는 그 일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통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신이 희생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말도 되지 않는 일이지만 그 일에 동참하려는 생각이 분명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비웃어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그는 주님의 일에 어떻게 해서라도 동참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소년이 가져온 작은 것을 주님 앞에 들고 나갔고, 주님은 안드레의 작은 정성을 받아 놀라운 일을 펼쳐 보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오병이어의 사건 속에 나타난 사람들 중에 어디에 속하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책임질 일이나 감당해야 할 일에 대해 그저 팔짱만 끼고 구경하는 사람은 아닙니까? 미리 따져보고 계산해 보아서 나에게 유익이 될 것 같으면 뛰어들고 그렇지 않으면 한 발짝 물러나서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사람은 자신에게 분명한 유익이 있지 않는 한, 책임있게 어떤 일을 수행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신앙이 냉소적이지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드레는 작은 것이라도 주께 드리면서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문제 해결에 대해 매우 냉소적이었습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남의 문제인 것처럼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자신은 절대로 뛰어들지 않습니다.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에게 그런 모습이 없는지를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적어도 우리 온유한교회 모든 성도들은 빌립과 같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세워지게 될 장로님은 더더욱 그런 분이 아니길 소원합니다. 주님은 안드레의 작은 정성과 헌신을 기뻐하셨습니다. 아니 주의 일에 직접 동참해서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안드레의 모습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교회의 장로는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 아니라 발 벗고 나서는 사람입니다. 책임을 져야 할 일에 앞장서서 책임을 지고, 헌신해야 할 일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문제에 직접 동참을 해서 함께 고민하고 함께 해결해보려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 모든 성도들도 함께 나타내 보여야 할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때 작은 정성을 통해, 책임지고 참여하고자 하는 모습을 통해,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자리에 참여하고 있는 수 많은 군중들과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주님을 따라온 것은 병자가 고침을 받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동안 주님은 병자를 고치신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그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어떤 이들도 자리를 뜨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지금 그들은 말씀에 너무도 갈급해 있습니다. 왜 말씀에 갈급해 있습니까? 너무나 오랫동안 목자없는 양처럼 방황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도 오랫동안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들은 것이라곤 유대지도자들로부터 율법을 들었고 그 율법으로 인해 자신들의 목이 점점 조여져 가는 고통만 느끼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 주는 은혜의 말씀은 너무도 들어본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말씀으로 은혜 받고 기쁨이 충만해도 배가 고파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배 고픈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와서 은혜 받았다고 여러분들의 먹는 문제가 해결되어집니까? 예배시간에 '아멘'하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하면 먹을 것이 저절로 생깁니까? 아무리 눈감고 오래 기도해도 눈 뜨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가 쌀이라도 한 가마 갖다 줄 것 같은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비꼬아 하는 말이 '교회가면 밥을 줘, 아니면 떡을 줘'하며 비아냥거립니다.
그것이 우리가 만나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교회가서 은혜받는 것은 은혜 받는 것이고 먹는 문제만큼은 나의 노력과 힘을 통해서 얻는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는 영적인 일에만 관심을 갖고 생각해야지 먹는 문제는 신앙이나 믿음과는 상관이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 앞에서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들의 육체적 필요에 관심을 갖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은혜만 받고 끝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육체의 필요에 대해서도 해결해 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이 두 가지를 함께 해결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현실문제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문제에만 관심이 있지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현실문제에 대해서는 안하무인격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오해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만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 삶을 인도하시고 필요에 따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생활이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먹는 것은 먹는 것이고, 말씀은 별개의 것으로 취급되어져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먼저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필요를 채우시기에 앞서 영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육적인 일에 필요한 것을 먼저 채우는 사람들은 영적인 일에 등한히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주님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가 다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참 이상한 것은 육적인 필요를 먼저 채운 사람들은 반드시 또 다른 육적인 필요를 위해 나아가지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영적인 일을 돌보는 일에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육적인 필요를 먼저 채우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영적인 필요를 먼저 채우는 분이십니까? 주님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를 가볍게 취급하거나 무시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선순위입니다. 영적인 필요를 채우지 않고, 육적인 필요를 채우는 사람들은 신앙의 깊은 체험과 의미들을 깨닫기도 전에 지리멸렬(支離滅裂)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안드레의 작은 정성과 헌신을 통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먹고 나면 그것으로 될터인데 왜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나 되었을까요? 어떤 분들은 '12' 이라는 단어에 굉장한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건데 여기서 '12'라는 숫자에 의미를 둘 것이 아니라 먹고도 남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합당할 줄로 압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도 고백하기를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먹고도 남을 만큼 주셨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엔 순전히 우리의 입장을 고려한 주님의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5천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유대인들은 숫자를 헤아릴 때 여자나 아이들은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보리떡과 생선을 나누었을텐데 그렇다면 뒤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아무리 축사하고 떡을 떼시지만 언제 없어질는지 어떻게 압니까?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강냉이빵을 무료로 배급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닌 학교는 하루에 한 개씩 주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몇 개가 모자라서 그 다음날 받지 못한 학생부터 다시 나눠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빵의 숫자가 일정한 것이 아니라 꼭 한두개 차이가 났습니다. 어떤 날은 한 개가 더 많고, 어떤 날은 한 개가 적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빵을 나눠주실 때 반대쪽부터 나눠주면 제일 끝자리에 앉은 몇 몇 학생들은 불안합니다. 왜 불안합니까?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봐서 그렇습니다. 원래 계산대로라면 자기도 받을 수 있는데 한 두개가 모자라기 때문에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빵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많으면 안심이 되어도 적으면 불안합니다. 왜 그 많은 사람이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 두광주리나 되었을까요? 아마 뒤에서 배급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배려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생각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현실문제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까? 신앙은 영적인 문제에 국한 된 것이며 영혼에 대한 문제를 다룰 뿐 먹는 문제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이 드십니까?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나의 노력으로 열심히 사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먹는 문제를 모른 척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만큼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를 영적인 문제에 둘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계산을 하면 빌립과 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현실로 돌아가서 그 문제에 얽매이게 됩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작은 정성을 주께 드렸습니다. 그것은 보잘것없습니다.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한사람도 배불리 먹기엔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일에 참여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결국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일을 행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오병이어의 현장으로 초대받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곳은 우리의 영적인 필요와 육적인 필요가 동시에 채워진 장소입니다. 빌립과 같이 뒷짐지고 쳐다보지 않기를 원합니다. 안드레처럼 적극적인 동참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여러분의 삶이 풍성하게 채워지고도 열두 바구니 넉넉하게 남은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김해곤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