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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살전 5: 16-18)
오늘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 18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8절 하반절을 보면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라는 말을 '우리'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정하였습니다. '우리'라는 말 대신에 '나'라는 말로 바꾸어도 좋습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 안에서'를 강조합니다. 그러면 안에서 '나는 누구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 안'이라고 할 때는 예수를 만났고 예수 안에 들어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구원을 얻은 신비한 체험을 말합니다. 예수 안에서 "나"는 구원 얻은 성도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오늘의 명제입니다.
오늘은 맥추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 땅 한 평도 없이 살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족을 따라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즉 기업을 받았습니다. 농사를 지어서 맨 처음 거둔 곡식이 밀입니다. 밀을 거두어들인 다음에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모두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일주일 동안 축제를 열었습니다. 그 절기가 맥추절입니다. '앞으로 6개월 동안 먹고 살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덕분으로 살아갑니다'라는 뜻으로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오늘 그런 뜻을 살리면서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뜻이 무엇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기쁨의 생활 (16-)
여러분들도 어린아이들을 키워 보셔서 잘 아실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울고, 짜고 짜증을 부리고 투정을 합니다. 그럴 때면 속이 상하곤 합니다. 항상 기쁨으로 살아가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재미가 있고 기특한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본문을 보면 우리들에게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기뻐하라'고 해서 그 시간부터 당장 기뻐지고 하루 24시간 기쁘게 살아갑니까? 누가 '기뻐하라'고 해서 기뻐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 누가 '기뻐하지 말라'고 한다 해서 그 시간부터 기쁨을 헌신짝 버리듯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성경은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돌고 돌며 변하고 변하는 것 때문에 울고 웃으려면 끝이 없지 않습니까? 변치 않는 기본적인 은혜를 생각하면 아무리 세상이 돌고 변해도 늘 변함 없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은혜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이 지금까지 열심히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렇게 되면 제자들은 뭐가 됩니까? 자기의 스승 되시는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제자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즉 제자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 아닙니까? 흩어져 있으려니 더 무섭고 모여 있으려니 들통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유대 땅은 아주 덥디 더운 땅입니다. 문을 닫고는 살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인 곳의 문을 꼭 닫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불안과 공포와 근심 초조에 떨고 있었습니다. 기쁨이란 도저히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한들 기뻐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부활하신 예수님이 한 가운데 그것도 문을 닫은 상태에서 나타나셔서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손으로 만져 보고 눈으로 상처도 확인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몸으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문을 닫은 상태에서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신령한 몸입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제자들이 그 예수님을 보고는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그 기쁨을 요한복음 20장 20절에서는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를 보고 기뻐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보고 기뻐하고 또는 슬퍼하고 울고 웃다가는 사람이 미쳐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우리도 죽음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건너편에는 아름다운 영화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믿으면 언제나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 은혜입니다. 이 은혜 없이, 세상의 다른 것을 얻으면 기뻐하고 잃으면 슬퍼하곤 한다면 그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하는 것입니다. 이 것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에게 원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6절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냥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즉 체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이 것은 근본 문제로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은 내가 병들어도 기뻐하고 건강해도 기뻐합니다. 내가 출세해도 기뻐하고 출세를 하지 못해도 기뻐합니다. 내가 부자가 되어도 기뻐하고 가난해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우리도 부활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항상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것으로 울고 웃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원하시는 삶은 항상 기뻐하는 생활입니다.
저는 목사님 두 분을 존경합니다. 한 분은 제가 부산 대성교회에 있을 때 모시고 있던 김린서 목사님이십니다. 제가 부임하여 얼마 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또 한 분은 제가 신학교 학생이었을 때 주경 신학을 가르쳐 주신 대구 제일교회 이상근 목사님이십니다. 그 분도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상근 목사님이 자기의 지나온 발자취를 써 놓은 끝에 사모님이 몇 장을 덧붙여 쓰셨습니다. 자기 남편 되는 이상근 목사님이 죽기 얼마 전에 있었던 일들을 썼습니다. 이상근 목사님은 뇌 암에 걸려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머리 속에 뇌가 꽉 차 있기 까닭에 암이 걸려서 그 암이 자라면 머리가 깨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낍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 늙어지면 뇌가 줄어듭니다. 두개골속에 많은 부분이 비어 있습니다. 그 때에는 뇌에 암세포가 자랄지도 그렇게 아프지 않습니다. 이상근 목사님은 세상 떠나기 전에 일년 동안 누워서 묵상을 하면서 지내셨습니다. 한번은 자고 일어나더니 너무 기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가 그렇게 기뻐요? 좋은 꿈이라도 꾸셨어요?"라고 물었더니 "아니요, 내가 지금 하늘 나라에 갔다 왔소"라고 하더랍니다. 이상근 목사님은 신비주의에 반대를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신비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 갔다 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라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묻지 마시오"라고 하더랍니다. 하늘 나라가 설명이 되면 그것은 하늘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몇 일이 지난 후에 또 그렇게 좋아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좋아하세요"라고 물었더니 하늘 나라에 또 갔다 왔다고 하더랍니다. 여섯 번을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그 분은 헛소리하는 분이 아닙니다.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병석에서 기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천사들이 호위한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죽으시기 하루 전에는 "저기에 가브리엘 천사가 나를 데리러 왔다"고 하더랍니다. "나는 곧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라는 말도 하였습니다. 이상근 목사님이 원망 불평하면서 공포에 질려서 죽음을 맞이했겠습니까? 아니면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했겠습니까? 기쁨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면 죽음의 순간에만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평소에 그렇게 살아 왔고 믿어 왔기 때문에 그리 된 것입니다. 이상근 목사님은 하늘 나라를 바라보고 그렇게 기뻐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갔다 오지는 못해도 바로 그 하늘 나라가 우리에게 약속된 나라가 아닙니까? 우리도 그 하나님, 그 하늘 나라,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기도의 생활 (17-)
기도는 많이 할수록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은 다음과 같은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믿음 생활을 하는데 "두 번째 가라"고 하면 서럽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온갖 멸시천대를 다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성전에 올라가서 바리새인은 세리와 따로 섰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람 차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러 와서 하나님 앞에서 사람 차별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 같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되는 것입니까? 기도하는 사람이 그래도 되는 것이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세리를 가리키면서 "하나님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이기 때문에 점잖게 표현을 해서 세리라고 하였지만 사실상 저 놈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세리가 왜 어째서 그러느냐?
"불의하거나 간음하거나 토색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왜 자꾸 세리, 세리라고 하는 것입니까? 왜 자꾸 손가락질을 합니까? 기도하는 사람이 왜 자꾸 남의 속을 후벼파는 것입니까?
기도는 누구한테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남을 욕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기도로 남을 교훈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기도를 가만히 들어보시면 알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또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합니다. 그리고 소득의 십일조도 드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쓰는 격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가 누구를 자랑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상대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이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세리도 기도를 합니다. 얼굴도 들지 못하고 제 가슴을 칩니다. 전부 다 제 탓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세리를 들먹이면서 남의 탓만 했는데 세리는 "전부 내 탓이요,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하여 긍휼을 간구하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다 가져도 하나님께서 괘씸하다고 하시면 그 인생이 끝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불쌍하다고 하시면 죽을 죄인에게도 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세리가 의롭다 함을 얻고 돌아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도가 아닙니까? 이런 기도는 하면 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기도할수록 자기가 겸손해 지고, 자기 자신을 반성해 보고 돌이키고 새로워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7절을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도둑놈을 자꾸 만나면 무엇을 봅니까? 도둑질하는 것을 봅니다. 무엇을 배웁니까? 도둑질하는 것을 배웁니다. 보고 배우는 것이 도둑질입니다. 또 무엇을 듣습니까? 도둑질하는 이야기만 듣는 것입니다. 결국은 도둑놈이 모인 곳에 가서 놀면 나도 모르게 도둑놈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느 판에서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깡패들 세계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을 만나 보십시오.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깡패가 어머니 태중에서 깡패가 되어 나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예수님을 자꾸 만나 보십시오. 만나보는 시간이 길고 많을수록 우리가 듣고 보고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이 아닙니까? 그래서 본문에서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이지 우리 자신의 인격 그 자체가 의인이 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부족합니다. 의인으로 인정을 받을지라도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예수님을 만나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도움의 통로가 바로 기도가 아닙니까?
사무엘은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역시 항상 기도하겠다는 뜻입니다.
50-60년 전에 텍사스에서 석유 재벌로 유명한 존-뉴턴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석유로 거창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뉴욕에 와서 앰버서더 호텔 29층에 들었습니다. 그 날도 뉴욕 시내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왔더니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걸어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부자가 되면 대개의 경우 살이 많아서 출렁 출렁합니다. 그래서 몇 계단 올라가서 쉬고 또 몇 계단 올라가다 쉬면서 올라갔습니다. 땀이 비 오듯하고 다리가 천근 만근 되는 것 같았습니다. 죽어도 더 이상 못 올라가겠다 할 정도가 되니까 29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머니를 보니 열쇠가 없었습니다. 다시 내려갔다 열쇠를 가지고 올라오는 일은 죽어도 못 할 일이었습니다. 난감하지 않습니까? 해결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 때 저 쪽에서 청소하던 흑인 아주머니가 오더니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내가 방문 열쇠를 못 가지고 올라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좀 내려가서 가져다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그 때 흑인 아주머니가 하는 말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라고 하더니 자기 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꺼냈습니다. 쉽게 잠긴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 열쇠 하나만 가지면 호텔 방 전부를 다 열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안방, 건넌방도 다 열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소위 만능 열쇠라고 합니다.
기도를 만능이라고 하시면 안됩니다. 기도는 해서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흑인 아주머니가 "예수님은 만능 열쇠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도가 만능 열쇠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만능 열쇠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제를 풀면 다 풀립니다. 주 앞에서 안 풀리는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안 열리는 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예수와 함께 하는 생활은 가장 복된 생활입니다. 예수와 함께 하는 사람은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하면, 보고 배우고 듣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와 함께 모든 것을 얻고 누리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 생활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감사의 생활 (18-)
우리가 좋아하는 것과 감사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겨울철에 고구마를 구워 먹는 것밖에 다른 군것질 할 것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고구마를 구워주면 들고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면 강아지가 달려옵니다. 껍질은 벗겨서 강아지에게 주고 알맹이는 제가 다 먹었습니다. 그래도 강아지는 꼬리를 있는 대로 흔들어댑니다. 그것이 좋다는 뜻입니까? 감사하다는 뜻입니까? 좋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좋아하는 것과 감사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열 사람의 문둥병자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열 사람 중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나와서 사례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례를 받아 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신 후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갔습니까? 이방인 한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병 고침을 받은 은혜를 감사했더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하시어 구원 얻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즉 구원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작은 은혜에 감사했더니 더 큰 것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주었던 것도 빼앗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아홉 사람은 동네방네 다니면서 좋아하기만 하였습니다. 절대로 하나님께 감사는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좋아하라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좋아는 합니다. 그러나 감사는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감사의 생활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8절을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다. 또는 천국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 자체 즉 기본적인 은혜를 감사하면 돈을 몇 푼 더 벌고 못 벌고 하는 것은 원망하고 감사할 조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벌면 버는가 보다 하고 못 벌면 못 버는가 보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감사거리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알면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저는 제 아내에게 늘 감사합니다. 제가 장가를 갈 당시만 해도 목사가 장가를 가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아십니까? 처녀들이 늙어 죽으면 죽었지 목사에게는 시집을 가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시집와 주었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또 제가 그 때 병이 들어 얼마나 연약했는지 모릅니다. 병든 것을 알고도 저에게 와 주었으니 감사합니다. 그런가하면 그 당시 저에게 돈은 한 푼도 없었습니다. 결혼식 때 가락지를 끼워줄 돈이 없어서 제 아내가 남 모르게 만들어 주는 것을 끼워 주었습니다. 한 푼도 가진 것 없는 나, 전혀 볼 것 없는 나에게 시집와 주었으니 감사할 일이 아닙니까? 다른 것들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런가 하면 저에게 시집을 왔지만 죽어도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첫째 딸을 낳아 주고, 둘째 딸을 낳아 주고, 셋째는 아들을 낳아 주었습니다. 아이를 낳아 자기 성을 따라서 이름을 붙입니까? 나의 성을 따라서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러니 한 가족을 이루어 얼마나 좋습니까? 세상 것을 다 준다고 한들 제 가정을 내 놓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만약 그러자고 한다면 네가 다 가지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정이 가장 복된 일이고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은 믿지 않는 사람도 가졌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얼마든지 좋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즉 믿는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문제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돈 몇 푼을 더 벌고 덜 벌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건강해서 몇 일을 더 살고 병들어서 몇 일 더 일찍 죽었다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감사하게 되면 항상 감사하게 되고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은 첫째 기쁨의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항상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나라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늘 기쁨으로 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기도의 생활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만남의 시간입니다. 많이 만나시고 오래 만나시고 예수님에게서 보고 듣고 배우고 본 받아서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방법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감사의 생활입니다. 우리에게 가정을 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보다 더 감사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형제가 됩니다. 이런 하나님의 가정을 생각하면 다른 것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감사할 일입니다. 이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뜻입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오늘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 18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8절 하반절을 보면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라는 말을 '우리'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정하였습니다. '우리'라는 말 대신에 '나'라는 말로 바꾸어도 좋습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 안에서'를 강조합니다. 그러면 안에서 '나는 누구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 안'이라고 할 때는 예수를 만났고 예수 안에 들어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구원을 얻은 신비한 체험을 말합니다. 예수 안에서 "나"는 구원 얻은 성도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오늘의 명제입니다.
오늘은 맥추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 땅 한 평도 없이 살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족을 따라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즉 기업을 받았습니다. 농사를 지어서 맨 처음 거둔 곡식이 밀입니다. 밀을 거두어들인 다음에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모두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일주일 동안 축제를 열었습니다. 그 절기가 맥추절입니다. '앞으로 6개월 동안 먹고 살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덕분으로 살아갑니다'라는 뜻으로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오늘 그런 뜻을 살리면서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뜻이 무엇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기쁨의 생활 (16-)
여러분들도 어린아이들을 키워 보셔서 잘 아실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울고, 짜고 짜증을 부리고 투정을 합니다. 그럴 때면 속이 상하곤 합니다. 항상 기쁨으로 살아가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재미가 있고 기특한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본문을 보면 우리들에게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기뻐하라'고 해서 그 시간부터 당장 기뻐지고 하루 24시간 기쁘게 살아갑니까? 누가 '기뻐하라'고 해서 기뻐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 누가 '기뻐하지 말라'고 한다 해서 그 시간부터 기쁨을 헌신짝 버리듯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성경은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돌고 돌며 변하고 변하는 것 때문에 울고 웃으려면 끝이 없지 않습니까? 변치 않는 기본적인 은혜를 생각하면 아무리 세상이 돌고 변해도 늘 변함 없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은혜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이 지금까지 열심히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렇게 되면 제자들은 뭐가 됩니까? 자기의 스승 되시는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제자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즉 제자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 아닙니까? 흩어져 있으려니 더 무섭고 모여 있으려니 들통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유대 땅은 아주 덥디 더운 땅입니다. 문을 닫고는 살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인 곳의 문을 꼭 닫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불안과 공포와 근심 초조에 떨고 있었습니다. 기쁨이란 도저히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한들 기뻐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부활하신 예수님이 한 가운데 그것도 문을 닫은 상태에서 나타나셔서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손으로 만져 보고 눈으로 상처도 확인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몸으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문을 닫은 상태에서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신령한 몸입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제자들이 그 예수님을 보고는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그 기쁨을 요한복음 20장 20절에서는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를 보고 기뻐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보고 기뻐하고 또는 슬퍼하고 울고 웃다가는 사람이 미쳐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우리도 죽음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건너편에는 아름다운 영화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믿으면 언제나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 은혜입니다. 이 은혜 없이, 세상의 다른 것을 얻으면 기뻐하고 잃으면 슬퍼하곤 한다면 그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하는 것입니다. 이 것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에게 원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6절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냥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즉 체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이 것은 근본 문제로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은 내가 병들어도 기뻐하고 건강해도 기뻐합니다. 내가 출세해도 기뻐하고 출세를 하지 못해도 기뻐합니다. 내가 부자가 되어도 기뻐하고 가난해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우리도 부활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항상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것으로 울고 웃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원하시는 삶은 항상 기뻐하는 생활입니다.
저는 목사님 두 분을 존경합니다. 한 분은 제가 부산 대성교회에 있을 때 모시고 있던 김린서 목사님이십니다. 제가 부임하여 얼마 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또 한 분은 제가 신학교 학생이었을 때 주경 신학을 가르쳐 주신 대구 제일교회 이상근 목사님이십니다. 그 분도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상근 목사님이 자기의 지나온 발자취를 써 놓은 끝에 사모님이 몇 장을 덧붙여 쓰셨습니다. 자기 남편 되는 이상근 목사님이 죽기 얼마 전에 있었던 일들을 썼습니다. 이상근 목사님은 뇌 암에 걸려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머리 속에 뇌가 꽉 차 있기 까닭에 암이 걸려서 그 암이 자라면 머리가 깨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낍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 늙어지면 뇌가 줄어듭니다. 두개골속에 많은 부분이 비어 있습니다. 그 때에는 뇌에 암세포가 자랄지도 그렇게 아프지 않습니다. 이상근 목사님은 세상 떠나기 전에 일년 동안 누워서 묵상을 하면서 지내셨습니다. 한번은 자고 일어나더니 너무 기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가 그렇게 기뻐요? 좋은 꿈이라도 꾸셨어요?"라고 물었더니 "아니요, 내가 지금 하늘 나라에 갔다 왔소"라고 하더랍니다. 이상근 목사님은 신비주의에 반대를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신비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 갔다 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라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묻지 마시오"라고 하더랍니다. 하늘 나라가 설명이 되면 그것은 하늘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몇 일이 지난 후에 또 그렇게 좋아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좋아하세요"라고 물었더니 하늘 나라에 또 갔다 왔다고 하더랍니다. 여섯 번을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그 분은 헛소리하는 분이 아닙니다.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병석에서 기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천사들이 호위한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죽으시기 하루 전에는 "저기에 가브리엘 천사가 나를 데리러 왔다"고 하더랍니다. "나는 곧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라는 말도 하였습니다. 이상근 목사님이 원망 불평하면서 공포에 질려서 죽음을 맞이했겠습니까? 아니면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했겠습니까? 기쁨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면 죽음의 순간에만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평소에 그렇게 살아 왔고 믿어 왔기 때문에 그리 된 것입니다. 이상근 목사님은 하늘 나라를 바라보고 그렇게 기뻐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갔다 오지는 못해도 바로 그 하늘 나라가 우리에게 약속된 나라가 아닙니까? 우리도 그 하나님, 그 하늘 나라,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기도의 생활 (17-)
기도는 많이 할수록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은 다음과 같은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믿음 생활을 하는데 "두 번째 가라"고 하면 서럽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온갖 멸시천대를 다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성전에 올라가서 바리새인은 세리와 따로 섰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람 차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러 와서 하나님 앞에서 사람 차별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 같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되는 것입니까? 기도하는 사람이 그래도 되는 것이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세리를 가리키면서 "하나님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이기 때문에 점잖게 표현을 해서 세리라고 하였지만 사실상 저 놈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세리가 왜 어째서 그러느냐?
"불의하거나 간음하거나 토색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왜 자꾸 세리, 세리라고 하는 것입니까? 왜 자꾸 손가락질을 합니까? 기도하는 사람이 왜 자꾸 남의 속을 후벼파는 것입니까?
기도는 누구한테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남을 욕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기도로 남을 교훈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기도를 가만히 들어보시면 알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또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합니다. 그리고 소득의 십일조도 드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쓰는 격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가 누구를 자랑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상대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이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세리도 기도를 합니다. 얼굴도 들지 못하고 제 가슴을 칩니다. 전부 다 제 탓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세리를 들먹이면서 남의 탓만 했는데 세리는 "전부 내 탓이요,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하여 긍휼을 간구하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다 가져도 하나님께서 괘씸하다고 하시면 그 인생이 끝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불쌍하다고 하시면 죽을 죄인에게도 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세리가 의롭다 함을 얻고 돌아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도가 아닙니까? 이런 기도는 하면 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기도할수록 자기가 겸손해 지고, 자기 자신을 반성해 보고 돌이키고 새로워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7절을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도둑놈을 자꾸 만나면 무엇을 봅니까? 도둑질하는 것을 봅니다. 무엇을 배웁니까? 도둑질하는 것을 배웁니다. 보고 배우는 것이 도둑질입니다. 또 무엇을 듣습니까? 도둑질하는 이야기만 듣는 것입니다. 결국은 도둑놈이 모인 곳에 가서 놀면 나도 모르게 도둑놈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느 판에서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깡패들 세계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을 만나 보십시오.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깡패가 어머니 태중에서 깡패가 되어 나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예수님을 자꾸 만나 보십시오. 만나보는 시간이 길고 많을수록 우리가 듣고 보고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이 아닙니까? 그래서 본문에서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이지 우리 자신의 인격 그 자체가 의인이 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부족합니다. 의인으로 인정을 받을지라도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예수님을 만나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도움의 통로가 바로 기도가 아닙니까?
사무엘은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역시 항상 기도하겠다는 뜻입니다.
50-60년 전에 텍사스에서 석유 재벌로 유명한 존-뉴턴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석유로 거창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뉴욕에 와서 앰버서더 호텔 29층에 들었습니다. 그 날도 뉴욕 시내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왔더니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걸어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부자가 되면 대개의 경우 살이 많아서 출렁 출렁합니다. 그래서 몇 계단 올라가서 쉬고 또 몇 계단 올라가다 쉬면서 올라갔습니다. 땀이 비 오듯하고 다리가 천근 만근 되는 것 같았습니다. 죽어도 더 이상 못 올라가겠다 할 정도가 되니까 29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머니를 보니 열쇠가 없었습니다. 다시 내려갔다 열쇠를 가지고 올라오는 일은 죽어도 못 할 일이었습니다. 난감하지 않습니까? 해결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 때 저 쪽에서 청소하던 흑인 아주머니가 오더니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내가 방문 열쇠를 못 가지고 올라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좀 내려가서 가져다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그 때 흑인 아주머니가 하는 말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라고 하더니 자기 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꺼냈습니다. 쉽게 잠긴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 열쇠 하나만 가지면 호텔 방 전부를 다 열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안방, 건넌방도 다 열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소위 만능 열쇠라고 합니다.
기도를 만능이라고 하시면 안됩니다. 기도는 해서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흑인 아주머니가 "예수님은 만능 열쇠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도가 만능 열쇠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만능 열쇠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제를 풀면 다 풀립니다. 주 앞에서 안 풀리는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안 열리는 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예수와 함께 하는 생활은 가장 복된 생활입니다. 예수와 함께 하는 사람은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하면, 보고 배우고 듣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와 함께 모든 것을 얻고 누리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 생활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감사의 생활 (18-)
우리가 좋아하는 것과 감사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겨울철에 고구마를 구워 먹는 것밖에 다른 군것질 할 것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고구마를 구워주면 들고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면 강아지가 달려옵니다. 껍질은 벗겨서 강아지에게 주고 알맹이는 제가 다 먹었습니다. 그래도 강아지는 꼬리를 있는 대로 흔들어댑니다. 그것이 좋다는 뜻입니까? 감사하다는 뜻입니까? 좋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좋아하는 것과 감사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열 사람의 문둥병자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열 사람 중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나와서 사례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례를 받아 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신 후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갔습니까? 이방인 한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병 고침을 받은 은혜를 감사했더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하시어 구원 얻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즉 구원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작은 은혜에 감사했더니 더 큰 것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주었던 것도 빼앗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아홉 사람은 동네방네 다니면서 좋아하기만 하였습니다. 절대로 하나님께 감사는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좋아하라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좋아는 합니다. 그러나 감사는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감사의 생활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8절을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다. 또는 천국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 자체 즉 기본적인 은혜를 감사하면 돈을 몇 푼 더 벌고 못 벌고 하는 것은 원망하고 감사할 조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벌면 버는가 보다 하고 못 벌면 못 버는가 보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감사거리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알면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저는 제 아내에게 늘 감사합니다. 제가 장가를 갈 당시만 해도 목사가 장가를 가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아십니까? 처녀들이 늙어 죽으면 죽었지 목사에게는 시집을 가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시집와 주었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또 제가 그 때 병이 들어 얼마나 연약했는지 모릅니다. 병든 것을 알고도 저에게 와 주었으니 감사합니다. 그런가하면 그 당시 저에게 돈은 한 푼도 없었습니다. 결혼식 때 가락지를 끼워줄 돈이 없어서 제 아내가 남 모르게 만들어 주는 것을 끼워 주었습니다. 한 푼도 가진 것 없는 나, 전혀 볼 것 없는 나에게 시집와 주었으니 감사할 일이 아닙니까? 다른 것들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런가 하면 저에게 시집을 왔지만 죽어도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첫째 딸을 낳아 주고, 둘째 딸을 낳아 주고, 셋째는 아들을 낳아 주었습니다. 아이를 낳아 자기 성을 따라서 이름을 붙입니까? 나의 성을 따라서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러니 한 가족을 이루어 얼마나 좋습니까? 세상 것을 다 준다고 한들 제 가정을 내 놓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만약 그러자고 한다면 네가 다 가지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정이 가장 복된 일이고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은 믿지 않는 사람도 가졌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얼마든지 좋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즉 믿는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문제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돈 몇 푼을 더 벌고 덜 벌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건강해서 몇 일을 더 살고 병들어서 몇 일 더 일찍 죽었다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감사하게 되면 항상 감사하게 되고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은 첫째 기쁨의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항상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나라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늘 기쁨으로 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기도의 생활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만남의 시간입니다. 많이 만나시고 오래 만나시고 예수님에게서 보고 듣고 배우고 본 받아서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방법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감사의 생활입니다. 우리에게 가정을 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보다 더 감사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형제가 됩니다. 이런 하나님의 가정을 생각하면 다른 것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감사할 일입니다. 이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뜻입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