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야 할 것   (갈3:11~14)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라디아서 3:11~14)

1. 오늘은 종교개혁 488주년 기념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M.Luther)는 독일 비덴베르크 대학 정문에 당시 교회의 잘못된 점을 적어놓고
토의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발화점이 되어 1,000년 이상 유럽을 지배해 왔던 로마 카톨릭 교회는 새로운 교회 개혁운동이 전개되
어 오늘 개신교회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오늘 종교개혁 주일을 지키는가?
그것을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이 무엇이었던가?
오늘 개혁이란 말을 많이들 하고 있습니다 마는,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성경으로 되돌아가자는 주장이었습니다.
기성 교회를 부정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겠다는 그런 뜻이 아니었고, 교회가 성경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정신을 학자들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칭의>(稱)義)의 교리요,
둘째, 신앙의 근간은 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성경(말씀)이라는 것이요,
셋째, 신자는 다같이 제사장(祭司長)이라는 만인사제(萬人司祭)론 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이라고 학자들은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오늘 현대교회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을 잘 살펴서 그대로 행하자는 것이 종교개혁 주일을 기념하여 지키는 의의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 정신을 잘 이어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오직 믿음>, <오직 성경>, <만인 사제론>은 무엇을 강조한 것인가?
중세 교회가 가르쳐온 구원관은 어떤 것이었는가?
사람이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으려면 의롭게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길은 속세를 떠나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이 제일 빠른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죄를 짓지 않아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가르쳤습니다.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인이 어떻게 천국엘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에서 살면서 어떻게 죄를 짓지 않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고민하다가 루터도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에서도 죄의 유혹은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는 고해성사(告解聖事)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개신 교회와 다른 교리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고해성사 입니다.

죄를 지으면 신부(司祭)앞에 죄를 고백하고 거기에 대한 보상적 행위를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지금도 이것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고해성사’를 해도 또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루터는 성경을 가르치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로마서 1:17절에서 그는 지금껏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 받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
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제껏 자신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성경이 가르쳐주는 하나님과 다른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율법적 하나님이 아니고 사랑의 하나님이란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이란 내 행위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음을 깨닫게 되었
습니다.
그 복음을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교회가 얼마나 성경에서 멀어져 있는가를 하나씩 하나씩 적어 보았더니 95가지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토의해 보자고 내 걸었던 것입니다.
교회가 성경에서 멀어진 것을 발견하면서 모든 판단의 기준은 성경말씀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
다. 지금껏 교회가 만들어낸 규례와 전통적 관행들이 성경에 거리가 먼 것들이라고 생각하면서 교황이나 교회
가 성경위에 올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껏 교회의 권위는 성경위에 있음을 강조했었습니다.
모든 성경의 해석권이 교회에 있고, 사제들에게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부인하고 오직 성경만이 유일의 법칙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중세교회는 사제와 평신도간에는 제사장과 백성의 관계로 보았습니다.
일반 성도들에게는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권한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알아듣던지 말든지 라틴어 성경을 읽었고, 모든 미사를 라틴어로 집례 했었습니다.
심지어 성찬식 때는 떡만 받도록 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임을 강조하여 직접 하나님 앞에 나
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렇게 오직 믿음으로 구원,
오직 성경의 권위로만,
만인이 다 같은 사제라는 것,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정신이었습니다.

3. 그러면 오늘 한국교회에서 종교개혁의 정신은 무엇이어야 할까?
요즘 무척 많은 사람들이 <개혁>을 말합니다.
정치가들도 <개혁>을 말하면서 이렇게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개혁의 정신과 개혁의 대상이 자기를 포함시키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 자기들은 아니고, 기득권층, 구세대, 색깔론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 정신은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됩니다.

종교개혁 정신으로 돌아가려면 하나님의 은총을 알아야 합니다.
즉 죄인 된 인간들이 먼저 구원의 은총을 깨달아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의 은총을 회복해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 <회개>가 일어나고 <화해>와 <용서>가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교회들을 보면 교인들은 많아졌는데, 구원받은 죄인들은 적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죄인이 죄인임을 깨닫고 용서함을 받았다는 의식이 있어야, 감사도 있고, 감격도 터져 나오고, 찬송과 기쁨도
있게 됩니다.
그런 것이 없으니 화해할 줄도 모르고 용서할 줄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이러니, 사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타도의 대상이지 화해와 용서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한국 교회에서 개혁되어야 할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은혜가 사라지면 율법만 남고, 율법이 남용되면 정죄만 있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도 보십시오.
율법주의적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교회에서도 누구와 화해할 줄 모릅니다.
관용이 없습니다.
장점을 보지 않고 남의 단점만 부각시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표준을 새벽기도회, 십일조, 감사헌금, 교회 봉사활동, 이런 것으로 규정하
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런 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 비하면 훌륭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얼마든지 사람 앞에서 잘할 수 있습니다.
내면적으로 이중적인 생활자들도 그런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얼마든지 잘 보이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루터가 수도원에서 남들보다 더 열심히 수도생활을 하였던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기쁨과 감격이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속죄의 은총의 감격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도 이런 경우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열심히 나와 예배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헌금생활도 남들처럼 다 하지만, 속에 기쁨이 없다면, 자신
이 죽을 죄인임을 아직도 못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개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율법이 개혁을 낳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개혁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십자가의 은혜가 사라져 가기에 회개가 없어졌습니다.
회개하는 마음이 사라졌으니 감격이 없어졌고, 감격이 없어졌으니, 개혁이 없어졌습니다.
은총을 회복하면 거기서부터 말씀으로 되돌아가게 되고, 말씀으로 되돌아갈 때, 세상의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려달라고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 문제들이 생기면 어디로 갑니까?
모두 세상 법정으로 가서 판결해 달라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속화 되었는가 함을 스스로 증명하는 일들입니다.
타락한 양심, 화인 맞은 양심들이 되었기에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세상 판사의 판결에 자신의 의를 들
어내려고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리적 논쟁 중심에 있던 성경을 생활 중심에 다시 세워 놓아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성경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종교개혁을 맞는 한국교회의 정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결론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성경으로 되돌아가면 됩니다.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 제일 우선순위로 와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서 성경은 지금 생활 순위에서 몇 번째나 됩니까?
가정에서 성경은 자녀들에게 얼마나 권위를 인정하도록 교육했습니까?
그리고 내 자신이 매일의 생활에서 말씀에서 멀어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되찾아 말씀으로 돌아가려는 결단을 하는 것이 종교개혁 정신을 이어받는 신앙적 행위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종교개혁 정신을 이어받아 멀리 나갔던 말씀의 이탈에서 다시 말씀으로 되돌아서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이봉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