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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구명운동을 하지 않았는가?" (마가복음 1:14~15)
계속하여 마가복음 강해 중에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포함한 4복음서의 강조점이 다릅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중심입니다. 산상수훈으로 불리는 5,6,7장, 작은 계시록이라 불리는 24,25 장이 모두 예수님의 설교말씀이라 하겠습니다.
한편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행동중심입니다. 그래서 행동의 전제라 할 "곧" 이라는 단어가 빈번히 등장합니다.1장에서도,12,18,20절에서 곧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14절에서도 요한이 잡힌후 "곧" 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요한이 잡힌 것은 정말 무고한 잡힘입니다. 우리도 명백히 내가 아닌 잘못된 외부의 행동에 의해 억울함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여론을 조성하고 탄원서 만들지 않았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14~15절 말씀과 같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행동의 배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바라보라
요한의 구금은 부분에 속합니다. 요한의 사명은 길 닦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그의 사역을 잘 마무리하였습니다.전체를 보지 못하면 작은 부분에 매몰됩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이슈도 부분의 문제를 놓고 보는 경향 때문에 생깁니다.
지도자란 전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전체를 바라볼 줄 아는 것입니다. 부분과 전체는 단기와 장기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물고기가 눈앞의 미끼에 속아 그것 물 때 횟감이 되고 맙니다. 전체를 볼 줄 안다면 미끼가 아무리 먹음직하더라도 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회적 이슈들도 단기적 시각으로 볼 때는 모두가 문제 투성이입니다. 그래서 서로 상대방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그러나 장기적이고 전체적인 시각에서 볼 때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여야 함을 알 수 있으며 네탔이 아닌 "내탓이오!"라는 고백이 가능하게 됩니다.
장자권을 판 에서는 약삭빠른 야곱을 비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하는 상황논리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2장 16절은 그런 에서를 나무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명운동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분 안에 매몰되면 선동자에게 속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체를 보는 눈을 기르십시오.
사명을 이루는 것이 성공한 인생이다
우리는 종종 성공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돈과 명예 그리고 출세와 편한 것을 성공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과 출세로 말한다면 이완용과 같은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일텐데 과연 그가 성공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요한은 자기의 사명 감당하고 죽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성공한 사람입니다. 스테반은 평생 자신의 사명 완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음까지도 영광으로 맞았습니다.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생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70년대 어려운 상황하에서도 예배당을 지었으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합심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죠지 휘필트는 "나는 녹쓸어 없어지기 보다는 닳아 없어지기 원하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사명에 자기 인생을 바치는 모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스데반, 세례요한, 바울과 같은 모습이 진정한 성공이라 할 것입니다.
인생의 정답이 십자가의 복음이다
인간의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동이 변화합니다. 제도와 구조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무엘 헌팅턴은 그가 쓴 “문화가 중요하다(culture matters)”라는 책에서 남미의 빈곤은 해방신학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빈곤과 가난을 모두 제국주의와 매판자본의 탓으로만 돌리고 그 어디에도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모습으로는 결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성, 죄성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나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로마서 7장 19절과 같이 바울 같은 사람까지도 그 안에 죄와 싸움할 수 밖에 없는 죄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결국 인간성, 죄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밖에 의지할 것 없습니다. 로마서 7장의 고민은 제도와 구조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인간성 안의 모든 문제의 해결방법이 십자가 의지함에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듣고 믿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잡혔다는 말 듣고 복음 전하러 나갔습니다. 에수님의 십자가 피흘림을 의지함을 통해 죄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죄의 문제 뿐만 아니라 질병의 문제, 우리를 분열시키는 마귀의 영도 십자가 의지함을 통해 이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모든 구조를 깨뜨리고 변화시킵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안되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도 세상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와 어려움에 봉착할 것입니다.그러나 근원적인 문제 붙잡고 십자가를 통해 해결 받는다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십자가만이 우리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끝.
출처/전병욱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계속하여 마가복음 강해 중에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포함한 4복음서의 강조점이 다릅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중심입니다. 산상수훈으로 불리는 5,6,7장, 작은 계시록이라 불리는 24,25 장이 모두 예수님의 설교말씀이라 하겠습니다.
한편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행동중심입니다. 그래서 행동의 전제라 할 "곧" 이라는 단어가 빈번히 등장합니다.1장에서도,12,18,20절에서 곧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14절에서도 요한이 잡힌후 "곧" 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요한이 잡힌 것은 정말 무고한 잡힘입니다. 우리도 명백히 내가 아닌 잘못된 외부의 행동에 의해 억울함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여론을 조성하고 탄원서 만들지 않았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14~15절 말씀과 같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행동의 배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바라보라
요한의 구금은 부분에 속합니다. 요한의 사명은 길 닦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그의 사역을 잘 마무리하였습니다.전체를 보지 못하면 작은 부분에 매몰됩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이슈도 부분의 문제를 놓고 보는 경향 때문에 생깁니다.
지도자란 전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전체를 바라볼 줄 아는 것입니다. 부분과 전체는 단기와 장기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물고기가 눈앞의 미끼에 속아 그것 물 때 횟감이 되고 맙니다. 전체를 볼 줄 안다면 미끼가 아무리 먹음직하더라도 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회적 이슈들도 단기적 시각으로 볼 때는 모두가 문제 투성이입니다. 그래서 서로 상대방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그러나 장기적이고 전체적인 시각에서 볼 때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여야 함을 알 수 있으며 네탔이 아닌 "내탓이오!"라는 고백이 가능하게 됩니다.
장자권을 판 에서는 약삭빠른 야곱을 비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하는 상황논리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2장 16절은 그런 에서를 나무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명운동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분 안에 매몰되면 선동자에게 속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체를 보는 눈을 기르십시오.
사명을 이루는 것이 성공한 인생이다
우리는 종종 성공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돈과 명예 그리고 출세와 편한 것을 성공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과 출세로 말한다면 이완용과 같은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일텐데 과연 그가 성공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요한은 자기의 사명 감당하고 죽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성공한 사람입니다. 스테반은 평생 자신의 사명 완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음까지도 영광으로 맞았습니다.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생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70년대 어려운 상황하에서도 예배당을 지었으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합심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죠지 휘필트는 "나는 녹쓸어 없어지기 보다는 닳아 없어지기 원하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사명에 자기 인생을 바치는 모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스데반, 세례요한, 바울과 같은 모습이 진정한 성공이라 할 것입니다.
인생의 정답이 십자가의 복음이다
인간의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동이 변화합니다. 제도와 구조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무엘 헌팅턴은 그가 쓴 “문화가 중요하다(culture matters)”라는 책에서 남미의 빈곤은 해방신학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빈곤과 가난을 모두 제국주의와 매판자본의 탓으로만 돌리고 그 어디에도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모습으로는 결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성, 죄성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나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로마서 7장 19절과 같이 바울 같은 사람까지도 그 안에 죄와 싸움할 수 밖에 없는 죄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결국 인간성, 죄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밖에 의지할 것 없습니다. 로마서 7장의 고민은 제도와 구조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인간성 안의 모든 문제의 해결방법이 십자가 의지함에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듣고 믿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잡혔다는 말 듣고 복음 전하러 나갔습니다. 에수님의 십자가 피흘림을 의지함을 통해 죄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죄의 문제 뿐만 아니라 질병의 문제, 우리를 분열시키는 마귀의 영도 십자가 의지함을 통해 이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모든 구조를 깨뜨리고 변화시킵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안되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도 세상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와 어려움에 봉착할 것입니다.그러나 근원적인 문제 붙잡고 십자가를 통해 해결 받는다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십자가만이 우리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끝.
출처/전병욱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