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골로새서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 말씀을 상고하면서 은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2세기 로마인들이 당시 식민지에 속한 백성들을 형벌할 때 가장 흉하게 엄벌하는 사형 집행 방법 중에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가장 흉악하고 처절한 방법에 의하여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죽음입니다. 공자가 훌륭한 사람이기는 하나 선생일 뿐이고, 석가는 도를 깨달아 수도생들의 모범이 될 뿐이고, 마호멧이 유명하나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지는 십자가의 죽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부요한 자였으나 죄인들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고, 가난하게 되심으로 인류를 부요케 하려 하심입니다.(고린도후서 8:9) 예수님은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을 뿐 아니라 죄 값으로 영원히 죽어야 할 우리에게 새 생명을 허락하기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자신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주전 700년경에 예언하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 53:5)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쓰리고 아픈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을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아빠의 손을 잡고 교회 안에 들어간 유치원 어린아이가 강단의 십자가를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아빠, 아빠. 저기 더하기 표가 있어"하면서 기도하고 있는 아빠를 흔들었습니다. 아빠는 기도를 끝내고 어린아이의 귀에 말하기를 "그래, 그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너와 나에게 더하기 표란다"하고 조용히 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여러분들과 저에게 사죄와 새 생명과 소망을 더해주는 표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에게는 죄를 용서하고 의인을 만들어 주는 것이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 되게 하는 것이며, 잘못 살던 사람들을 회개하고 본 위치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수난 주간을 통하여 우리의 생애에 더하기 표가 되는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서 뜨거운 감격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의인 만들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천국 사다리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목수가 나무를 보면 집을 지을 대들보나 기둥을 생각하고, 과원지기는 나무를 보고 과일만 생갈 할 것이고, 여행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생각할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나무를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생각하면 뜨거운 구속의 체험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십자가를 바라보거나 생각할 때 구속의 진리를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연어는 2월중에 산란을 하는데, 새끼가 태어나게 되면 어미는 곧 죽어버립니다. 이유는 어린 새기가 어미의 살을 먹고 자라기 위해서입니다. 거미도 여러 마리의 자식을 위해 어미의 한 생명이 희생되는 것입니다.

2. 제목대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인류 구원을 위한 후속 사업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이 말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된 구절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바울이 채워야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완전한 구속의 대가가 못된다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카톨릭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에 조금 모자라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을 성도들의 고난을 통해서 채워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주장으로 중세기에 고행주의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성자들이 쌓아놓은 은공들은 평신도들을 돕는다는데 까지 발전하게 되고, 면죄부 판매의 근거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될 사실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한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가 미완성이나 미진한 부분이 있어서가 아니라 대속해 주신 그리스도께서 구원받는 성도들에게 주신 고난입니다. 누가복음 9:23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하신 말씀에 기인한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대속하기 위한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사업을 위한 구령 사업을 계속 이어 나가기 위한 것이고, 발전과 부흥을 일으키기 위한 고난이요, 바울 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고난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세상에 보냄을 받을 때 각자에게 부여된 사명이 있습니다.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 온 것입니다. 세상은 놀이터가 아니요, 이 세상은 일터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사명을 감당하는 길이요, 사명을 주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요, 너와 나 사이에 평화가 이룩되고 천국이 이루어지지만 개인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화평이 깨어지고 어지러워지고 지옥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려면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방법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우리에게 분담된 십자가를 지지 않고 피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미룰 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고 할 때 베드로는 주님을 붙잡고 그 길을 가시지 못하도록 만류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돌아보시면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태복음 16:23) 하시면서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십자가를 방해하는 것은 사단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피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육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지 못하도록 하는 원인들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1) 베드로가 인정에 치우쳐 사람의 생각을 했을 때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2) 담대하지 못한 빌라도는 손을 씻으며 비겁하게 십자가의 길을 피했습니다.
3) 부활의 확신이 없던 제자들과 군중들은 십자가를 피하여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실 대 제자들은 모두 다 흩어졌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니까 모두 다 갈릴리로 가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인정적인 것을 끊지 못해서 교회를 뛰쳐나갔습니다. 오늘 여기에 모여 있는 여러분들은 자기들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서 이 자리에 남아서 주님을 따라가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2000년 역사는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는 성도들에 의하여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가 지고 가는 생활이 곧 구원을 위한 후속 사업이 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각자 자기 육체에 채워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 속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마음으로 지는 것도 아니며, 말로 지는 것도 아니고, 오직 육적으로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안전하게 평안하게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까이 따라 갈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뜰에까지 예수를 따라갈 때 멀찍이 서서 쫓아가더니 결국 예수를 부인하며 저주까지 하고 십자가를 등지고 말았습니다.(마태복음 26:58) 십자가 등지고 가면 주님과 같은 방향으로 가지 못하고 멸망을 향하여 가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이 힘들다고 십자가를 벗어버리고 주님과 떨어져 사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스텐리 죤슨 목사님은 "십자가 없는 무덤은 불행한 무덤이요 십자가 있는 무덤은 영광스러운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으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17) 누구든지 주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아무런 부담 없이 그 사명을 감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담 자체가 무거운 짐이 되며,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면서 살이 찢겨지고 피를 흘리며 육신적으로 져야 합니다. 경제적인 부담, 시간적인 부담, 심리적인 부담, 피곤을 느끼는 육체적인 부담 이 모든 것을 느끼면서 주의 일을 하는 것이 곧 십자가 지고 가는 생활이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생활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교회를 건축하다가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로는 도저히 불가능해서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미완성된 교회를 볼 때마다 비웃는 말로 "하나님의 교회가 왜 저렇게 짓다말고 있담"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습니다. 한 번은 신문에 사람의 안구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자기의 안구를 팔아서라도 교회 건축을 완성해야 된다는 불타는 마음에 자기 아내와 의논을 했습니다. 아내는 절대 반대였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 몰래 전주 예수 병원에 가서 눈을 팔기로 하고 병원에 갔는데, 원장이 수술하기 전에 이유를 물었습니다. 사정 이야기를 듣더니 수술하지 않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기 눈이라도 바치겠다는 집사님의 신앙에 감동을 받고 병원 직원들이 헌금하고 미국까지 그 소식이 알려져서 헌금이 답지해서 교회를 잘 완성했다는 것이고, 어떤 독지가가 그의 자녀들까지 미국 유학을 시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우는 것이 구원받은 우리의 할 일입니다.
종려 주일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환영하는 편에서 내 소원대로 예수님을 영접하려는 무리 속에 끼이는 것보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나귀 주인같이 자기의 나귀를 주님을 위하여 내놓을 수 있는 숨어서 십자가 질 수 있는 헌신자, 헌납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벳바게 맞은 편 동리로 제자들을 보내면서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나귀가 있을 터이니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누가 묻거든 "주께서 쓰시겠다"하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는데,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와 같은 이유를 물을 수 없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지만, 주님의 명령이 나의 이해 안에서 해결되기를 기다리며 머물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해를 앞세우지 말고 명령을 앞세워야 합니다. 십자가 져야 할 사람은 이유가 없습니다. 십자가 지지 못함은 이유가 많기 때문입니다.
제2차 대전 말기에 영국이 위기에 처하였을 때 윈스턴 처칠은 "나의 백성들이여 조국을 위하여 땀과 피와 눈물을 주시오"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때 영국의 온 국민들이 일치 단결하여 조국을 위하여 몸을 바쳤으므로 기울었던 국운을 다시 회복하여 승리하였던 일이 있습니다.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교회는 십자가 지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부흥이 되며, 그리스도교의 부흥도 자기 육체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우는 성도들이 있는 만큼 부흥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