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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평화 (로마서5:1-5)
한 부인이 목사를 찾아와 “우리 부부는 매일 싸우고 불화하여 가정이 늘 불안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목사는 “싸움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부인은 “남편이 술을 마시지 않으면 괜찮은데 술만 마시면 주정을 하여 자기가 남편 잘 되라고 몇 마디 하는데 남편은 그것을 말대답이라고 생각하여 늘 싸우게 됩니다” 하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습니다.
부인의 대답을 들은 후, 목사는 “다음부터 남편이 술을 마시고 돌아오거든 부엌으로 들어가 물을 입 안에 가득 물고 있으십시오. 그러면 가정에 평화가 올 것입니다” 하고 충고하였습니다.
그 부인은 집으로 돌아가 목사님의 충고대로 남편이 술마시고 돌아오기만 하면 부엌에 들어가 입에 물을 가득히 물고 있었습니다. 입 안에 물이 있으니, 남편이 아무리 욕을 해도 말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싸움이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싸움의 원인이 부인의 말대답에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부인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니까 남편도 제풀에 지쳐 주정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가정은 평안을 찾게 되었습니다.
가정이 평화로운 것은 얼마나 삶에 활력을 주는지 모릅니다. 어린 자녀가 가출하는 것도 가정의 불화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심리학자의 말에 의하면, 가정의 불화가 있는 자녀는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정신적인 압박감이나 불안감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심리적 억압감과 박탈감이 그 자녀를 가출로 내 몰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제가 어려서 자라날 때 저의 부모님이 가끔 다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님이 소천하신 때가 중학교 2학년 때이니, 아직은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어린 저는 부모님의 다툼에 참견할 수가 없었지만 그때마다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부모님들에게 큰 믿음을 주셔서 화목한 가정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부모들의 불화는 자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줍니다. 그런데 화목해야 할 가정마저 이렇게 불화가 찾아오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는 말처럼,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후 하나님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된 인간은 인간끼리도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과 선지자들을 보내서 인간을 회복하려고 하셨으나, 인간은 그러한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까지 보내셨지만 인간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이런 인간들의 삶이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자아 분열이 일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하는 것도, 이웃 간에 생기는 미움과 시기, 질투, 다툼, 전쟁 등도 다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달라지지가 않습니다. 아직도 우리를 위협하는 나와 이 세상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결하는 이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여기서 “의”라는 말은 루터에 따르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눈 감아 주셨다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시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실 정도로 놀랍고 적극적인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두 아들이 있는데, 둘째가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챙겨달라고 요청합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앞으로 줄 유산을 미리 주었는데, 그 아들은 그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다 써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남의 집에서 돼지를 치며 가축들이 먹는 사료로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비참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둘째 아들은 문득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종살이를 할망정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어깨를 늘어뜨린 채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먼 발치에서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본 아버지는 맨발로 뛰어나와 다시 돌아온 아들에게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고,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가장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2-24).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종이 아니라 아들로 맞이해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돌아온 탕자를 이렇게 맞이해 준 아버지처럼,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인으로 대접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감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를 용납하셨다는 것을 믿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먼저, 죄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그리고 일단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면, 그 밖에 모든 관계가 새로워집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새로워져서 화목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인 삼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궁극적인 열쇠가 됩니다.
2.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그동안 북미간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했습니까? 미국은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규정하고 정치, 외교, 경제 등 모든 국제 관계를 봉쇄해 버렸습니다. 악의 축으로 몰려 모든 국제 관계로부터 봉쇄된 북한은 국제 사회에 자신들의 정치적 생존권을 주장하기 위해 핵카드를 들고 나왔습니다. 북미 관계는 한 치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관계에 들어가 우리를 불안하게 했습니다. 국제 사회의 경찰 노릇을 하고 있는 미국과 북한 간의 불화는 한반도 뿐 아니라 동북아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북미 관계의 악화는 동북아를 넘어서 세계 전체의 국제 관계의 악화를 불러옵니다.
그러나 다행히 미, 일, 중, 러와 당사국인 우리나라와 북한이 6자 회담에서 북한이 경수로를 폐기하는 조건으로 미국이 BDA에 동결된 북한의 자금을 돌려주기로 약속함으로써 북미 관계가 극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여기에 힘입어, 분단 50년 만에 군사분계선을 뚫고 경의선 열차가 시험 운행될 정도로 지금 남한과 북한은 화해의 물살을 타고 있습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고조된 북핵 위기를 생각하면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불화는 엄청난 재앙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얻은 값진 구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구원의 의미를 깊게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더 나아가 우리는 이웃과도 평화를 이룩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족간의 화평도 이루지 못한다면 이웃과의 화평은 더욱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가정이 복잡하여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와 말다툼하고, 형제는 서로 싸우고, 친척들은 서로 욕하는 상태였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집 안엔 불평만이 가득찼습니다. 그런데 이웃집은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인데도 언제나 화목해 보였습니다. 매일 그 집을 부러워하다가 하루는 물어봤습니다. “댁은 어떻게 그리 평화스럽습니까?” 그런데 이웃 사람의 대답이 이상했습니다. “댁에는 선한 사람만 모여 살지만, 우리 집에는 악한 사람들 뿐이라서 그럽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다시 묻자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댁에서 가령 실수하여 항아리를 깼다고 합시다. 그럼 저마다 이렇게 말할 겁니다. '누구야. 이런 곳에 분재를 놓아둔 놈은?', '당신은 눈뜬 소경이요?' 이렇게 모두 저마다 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는 모두 자기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됩니다. '아, 내가 그런 곳에 놓아둔 것이 잘못이었어요', '아뇨, 제가 부주의한 탓이지요'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집안이 평화롭고 안정이 되지요.”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평화를 만들어내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평화를 위해 예수님은 스스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웃과의 화평을 위해 예수님처럼 낮아져서 이웃을 사랑하며 섬겨야 할 것입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평화는 단순히 사이좋게 지내는 차원이 아닙니다. 평화를 이룬다는 것은 반(反)평화적인 환경 속에서 평화를 위해 수고하고 애쓴다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바울 사도는 교회가 로마로부터 환난과 핍박을 당하나, 우리에게 있을 미래의 영광을 생각하며 신앙을 지켜나가라고 간곡히 당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롬 8:17)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볼 때 지금의 어떤 핍박도 이겨낼 수 있다고 사도는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스데반 집사도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영광스런 광경을 보았기에 담대하게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유대인들이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반(反)평화적인 상황이었지만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원한 평화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았던 바울은 사도가 되어 자신이 갖은 경험을 하고 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바울의 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로 인하여 기쁨으로 고난을 이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흑인 성악가 로렌드 헤이스가 1924년, 독일 음악계의 초대로 베토벤 홀의 무대에 섰습니다. 그러나 게르만 민족 우월주의를 주창하던 많은 독일인들은 야유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흑인이 베토벤 홀에 입장한다는 것만으로도 독일의 수치라고 하며, 개막 전부터 독창회 개최를 반대했습니다. 급기야 공연 당일에 객석 한쪽을 차지하고 거센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헤이스의 주변 사람들은 차라리 무대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유했습니다.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헤이스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어이 무대에 섰습니다. 헤이스는 청중의 야유를 받으며 피아노 옆에서 묵도를 했습니다. 5분, 10분 헤이스의 묵도가 계속되자 청중은 야유를 그치고 침묵했습니다. 그때 피아노 반주와 함께 헤이스의 영감있는 노래가 장내에 한 줄기 빛처럼 퍼져나갔습니다. '당신의 평화'라는 노래였습니다. 그 날 독창회는 독일인에게 잊지 못할 음악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크신 사랑으로 포로가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가 보장된 사람들입니다. 그 영광의 하나님 나라가 있기에 순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스데반처럼, 우리는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 나 자신의 평화와 이웃과의 평화를 위해서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기독교인은 하나님 ‘앞에서’(before), 사람들과 ‘함께’(with)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도 화평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를 이 세상에 마련코자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스데반을 비롯한 수없이 많은 신앙의 위인들도 자신의 귀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면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증언하였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통해 깨달은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각자의 삶 속에서 날마다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여러분의 가족 안에 주님의 평화를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평화를 만드는 첫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출처/전병금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