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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절을 지키라 (출애굽기 23장 14-17절)
요즘은 이미 '보리밥'이란 것이 무슨 웰빙 식단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렸지만, 저만 해도 역시 어릴 때부터 쌀밥만 먹고 자랐었습니다.
당시 아직은 쌀 생산이 국내 수요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는 때여서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보리쌀을 먹고 있었고, 정부에서도 '보리밥 먹는 사람 신체 건강해'라는 노래까지 동원해서 보리쌀 수요를 장려했지만, 우리 집은 그저 중산층 수준이었는데도 밥만은 늘 쌀밥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아마도 제 아버지께서 어렸을 적에 그 보리밥에 너무나도 질려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우리에게는 밥그릇에 담아 놓으면 시커멓게 보기 싫고 숟가락에 떠서 먹으면 목에 까칠까칠하게 걸리는 보리밥이었지만, 바로 그 보리쌀이 있어야 봄과 여름을 지나는 동안에 굶어죽지 않고 살 수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에는 같은 경지에 일 년에 두 번 농사를 짓는 소위 '이모작'이라는 것을 해야 했으며, 가을의 쌀농사 추수 못지않게 봄의 보리농사 수확 역시 소중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시절에 사셨던 우리 부모님들께서는 이 '맥추감사절'이라는 것을 정말 실감 있는 감사와 함께 지키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겨우 한 세대가 지난 지금에 와서 이 '맥추절'을 맞이하는 현대 교회의 분위기는 그때와 너무나도 다릅니다.
벼를 가리켜 '쌀나무'라고 말할 정도로 농사에 대하여 무지하고 무관심하게 자라다 보니, '감사절은 일 년에 한번 정도만 지키면 되지 왜 또 무슨 맥추감사절이라는 것을 구태여 첨가해서 지켜야 하나?'라고, 이 절기를 시큰둥하게 맞이하고 있는 교인들이 꽤 많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정말 그런 것이겠습니까?
이 맥추감사절이라는 것은 '농자천하지대본'이라던 옛날에나 지키던 것이지 오늘날처럼 첨단과학문명에 익숙한 현대사회에서는 어울리지 아니하는 절기이겠습니까?
적어도 이 절기를 제일 처음에 명령하신 하나님과 또한 이 절기를 제일 처음에 지키기 시작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고 명하시면서, 무교절과 수장절과 더불어 맥추절을 나란히 그 3대 절기로 지정하셨습니다.
그 절기들은 각각 다른 절기이면서도 또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맥추절이 다른 두 절기와 어떤 의미로 연관되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왜 우리는 추수감사절뿐 아니라 이 맥추감사절까지, 이렇게 더 많은 감사절들을 지켜야 하는지 그 이유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구원 은총을 체험한 성도는 바로 감사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절과 15절에 기록하기를 "14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15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매년 필수의무적으로 지켜야했던 3대 절기 중에 첫째는 "무교병의 절기" 곧 무교절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했던 날, 곧 유월절과 이어진 절기였습니다.
"아빕월의 정한 때"라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종교력 1월인 아빕월 14일의 유월절부터 시작하여 계속 7일 동안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무교병"이라는 것은 발효시키지 않은 반죽으로 만든 떡으로서,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던 날 밤에 급히 식량을 준비해야만 했기 때문에 구웠던 떡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 이후로도 무교절 기간 중 내내 그 떡을 먹음으로써 그 유월절에 베푸셨던 큰 구원, 바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음"을 기억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이 유월절과 그에 이어지는 무교절은 적어도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뜨겁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명실 공히 최대의 절기였습니다.
이 날은 이스라엘이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몸에서 해방을 받은 날일 뿐 아니라, 이제 더 이상 한 족장의 가족이나 다른 나라에 얹혀서 사는 이방인이나 얽매여 사는 종된 민족이 아니라 정식 국가로 출범하게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정 그런 감격에 공감하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이 절기를 지킬 때 "빈 손으로" 나올 수 없는 것도 지극히 당연했습니다.
무교절은 비록 무슨 감사절이라는 이름은 없었지만, 그 내용 자체를 볼 때에는 사실상 최고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절기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맥추절 앞에는 무교절이 있었습니다.
즉 맥추절을 두고 진정 감사드릴 줄 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무교절 때부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자기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최고 최대의 구원을 감사드릴 줄 알아야 마땅했다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무교절을 통하여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과 진실하고도 뜨거운 관계를 맺게 된 이스라엘 사람은 맥추절 역시 아주 자연스럽게, 당연히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에서 감사절을 두 차례나 제정해 주셨던 이유도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일단 당신의 구원을 받은 택자요 선민이라면 그 남은 생은 일 년 내내 매일 감사로 충만해야 마땅하며, 그래서 한 해에 적어도 두 번씩은 특별감사절로 지킴으로써 그 감사를 생활화시키게 하셨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감사는 구원의 확신이 있는 성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시키고 발전시킴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감사는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꼭 같은 기능을 발휘합니다.
교인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무슨 선물이나 음식 따위를 부교역자들을 통해서 제게 보내 주시는 분들이 자주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런 선물 보내 주시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 저는 잘 모르고, 일일이 찾아가서 답례를 할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바로 큰 교회의 목사와 교인 사이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누구에게 어떤 선물을 받든지 간에 'thank you 카드'를 써서 부교역자를 통해 전달해 드립니다.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나 마찬가지이며 또한 최소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누구나 다 '그저 마음만 전달되면 되지.'라고 말들은 하지만, 아무래도 선물을 보낸 쪽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잘 전달되었는지, 그리고 받는 쪽에서는 어떤 마음으로 받았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만약 제가 그런 식으로라도 감사의 뜻을 전하지 아니하면 그 교인과의 관계는 바로 그처럼 한쪽에서만 사랑하고 정성을 쏟으면서 그것이 제대로 이어졌는지는 확신할 수 없는, 불완전한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thank you 카드'라도 받게 되면, 그것은 그저 '일방적인 관계'로 끝나지 아니하고 그래도 무언가가 오가는, 무엇인가 하나가 구체적으로 연결이 되는 관계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게 선물 더 많이 보내달라고 해서 하는 말은 절대로 아니지만, 그런 선물을 더 자주 받게 되고 제가 더 많은 감사카드를 보내게 되면 될수록, 그 교인의 이름이 제게도 기억되고 다른 사람들보다는 좀 더 가까운 사이로 발전될 수밖에 없는 것도 아주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들은 일단 구원의 은혜에서부터 시작하여 각종 선물들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한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할 줄 모르면 그 관계는 바로 거기서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며, 오직 진정한 감사로 반응할 때 비로소 '서로 오가는 관계'로 더욱 친밀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 사이에서의 경우와 꼭 마찬가지로, 그런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자주 드리게 되면 될 수록 그 관계는 남들보다 하나님과 훨씬 더 가까워지는, 아주 특별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주일에 교회에 나오면서도 "어이구, 맥추감사주일이 또 왔나? 추수감사절만 있으면 됐지 왜 이런 감사절까지 지켜야 하나?"라는 마음으로 나온 사람이 혹 있습니까?
제가 그런 교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부모님께 대한 감사를 일 년에 딱 한 번, 어버이날에만 합니까?
명색이 자식이라면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히 생신 때에도 축하드리고 명절 때마다 또 인사드리고 선물 사 드리고 할 것입니다.
'어이구, 생신 차려드리는 것만 해도 힘들어 죽겠는데, 설이나 추석은 왜 이리 자주 돌아와서 부모님께 또 뭘 해 드려야 할 부담이 생기게 만들까?' - 이렇게 생각하는 자식이 있습니까?
만약에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자식이 있다면, 그리고 그 부모가 그런 자식의 마음을 알아차린다면, 그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선물을 못 받아서가 아니라 자식이 부모를 그렇게 밖에 생각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 부모에게는 그 얼마나 섭섭한, 아니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겠습니까?
정말 부모께 감사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있는 제대로 된 자식이라면 아무도 그런 불효막심한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는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가운데 이런 감사절을 맞이해도 기쁜 마음과 정성된 손으로 특별감사헌금을 준비하지 않고 나오는 교인이 있으면, 이 목사의 진심은 교회의 맥추감사헌금 예산을 혹 채우지 못하게 될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교인의 심령이 아직 하나님과 진정한 교통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정말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고 자기 삶에 무슨 특별감사를 드려야 할 아무 특별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진짜 문제요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구원의 확신이 있는 마음, 천당소망을 확실히 붙들게 된 마음은 절대로 그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여전히 부담스러운 사람은 아직도 구원의 하나님을 진심으로 영접하지 못한 것임에 변명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함을 받은 것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고, 사함을 받은 것이 많은 자는 많이 사랑'하게 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아무도 부인 못할 철칙이 아니겠습니까?
일단 구원 받은 신자라면 자동적으로, 그러면서도 뜨겁고도 풍성하게 따라오지 않을 수 없는 이 감사생활을 더 자주 하고 더 많이 함으로써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더욱 진실하고도 진하게 영위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들을 제때에 감사하는 성도만이 미래에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6절과 17절에 기록하기를 "16a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17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맥추절"은 성경에서 '칠칠절,' '오순절' 혹은 '초실절'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절기는 무교절의 안식일부터 세어서 50일째 되는 날 단 하루만 지키는 것이었는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이즈음에 보리와 밀을 수확했으며 유대인들은 함께 먹고 마시는 즐거운 분위기 가운데 이 날을 보내었습니다.
끝으로 "수장절"이라고 한 것은 '초막절' 혹은 '장막절'로도 불리는 절기로서, 유대인 종교력 7월 15일부터 시작되어 일주일 동안 계속 지킨 것이었습니다.
이때는 익은 곡식과 더불어 과일들, 특히 포도와 올리브 등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농산물들의 수확이 끝나게 되는 시기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수확물에 대한 감사와 또한 출애굽 이후의 광야생활을 기념하면서 이 수장절을 지켰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봄의 수확에 대한 감사절과 가을 추수에 대한 감사절을 각각 따로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어차피 같은 농산물 수확을 두고 감사하는 것이니까, 봄가을 한데 묶어서 한꺼번에 지키면 더 간단하고 분명하지 않을까.'라는 따위의 생각은 사람의 머리에서나 나오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에는 애당초 아예 없었던 것입니다.
봄에 수확물을 거두었으면 바로 그것을 두고 때를 놓치지 말고 즉시 감사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더 크고 중요한 추수 때에 가서도 더 큰 감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계속 축복해 주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같은 농산물을 두고 감사하는 것이나 한 번에 모아서 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봄의 농산물을 두고 감사드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가을 추수를 하게 된다고 해서 그 마음이 바뀔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또 매일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감사, 이 가장 기본적 감사조차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일 두고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어젯밤에도 지켜 주신 호흡과 맥박, 오늘도 먹여 주시는 일용할 양식에 대하여 전혀 감사드릴 생각이 나지 않는 사람이 생일이나 결혼을 맞이하게 되고 승진이나 기업 축복을 누리게 된다 해서 갑자기 감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겠습니까?
'맥추절'의 '하루' 동안 짧지만 진정한 감사를 드릴 줄 아는 자만이 '수장절'의 '일 주일'에 걸친 큰 감사도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감사는 일단 반드시 '해야' 마땅한 것인 동시에 '제때'에 '그때그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용돈을 주면 곁에 있던 아버지나 어머니는 그 애들에게 "'고맙습니다.'하고 인사해야지."라고 늘 주의를 주지 않습니까?
"할아버지께서는 자주 용돈을 주시니까 일일이 고맙다고 할 필요는 없고, 감사하는 마음을 잘 모아 두었다가 연말에 가서 한 번씩만 하거라."라고 가르치는 부모가 세상에 있습니까?
또 만약에 자기 자식이 지금 부모가 건네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는 하지 않고 다음에 더 받을 것만 기대하고 있다면, 부모가 그런 자식에게 더 많은 유산 남겨 주고 싶은 생각이 들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심정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일용할 양식 내려주는데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아니 감사하기는커녕 '하나님이 계신다면 나에게 이것은 해 주셔야 할 텐데, 저것은 더 많이 주셔야 할 텐데.'라는 불만만 품고 있는 교인, 매주일 감사헌금을 드리기는커녕 일 년에 겨우 두 번 있는 감사절조차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교인에게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베풀어 주시고 싶은 생각이 과연 드시겠습니까?
정말 어림 한 푼도 없는 소리입니다.
"요즘 세상에 누가 보리 추수한다고, 현대교회가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맥추절을 지켜야 하는가?"라는 따위의 소리를 평신도도 아닌 목사 중에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 그 말대로라면, 추수감사절 역시 교회가 지킬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직접 추수도 하지 않는데 '어울리지 않게' 왜 추수감사절을 지켜야 하겠습니까?
우리 선조들은 '보리고개'라는 것이 있던 시절, 즉 보리를 수확하고 보리밥을 먹어야만 살 수 있을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에도 맥추절을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보리 수확 하지 않아도, 이모작이 뭔지를 몰라도 굶어 죽을 염려는 조금도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면 옛날에 맥추절을 지켰던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많이, 더 자주 감사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 조상들은 등이 휘어지도록 농사를 지어야만 했지만 오히려 쌀밥 한 번 실컷 먹어보는 것을 평생소원으로 삼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봄에 허리가 아프도록 모내기 하지 않고 여름에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김매기 하지 않고 가을에 낫에 손을 베어보지 않아도, 아니 벼를 가리켜 '쌀나무'라고 알고 있다 해도, 우리 밥상에 그 귀한 '이밥'에 '고깃국'까지 매끼마다 올릴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정 '맥추감사절'이나 '추수감사절'이라는 것이 오늘 같은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된다면 그 대신에 매주일을 '쌀밥 감사절'이라는 이름으로라도 지켜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맥추감사절은 목사가 억지로 만들어낸 절기가 아닙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키라고 명하신 날입니다.
맥추감사절은 교회의 헌금 수입을 늘이려는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 날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날은 일 년에 한 주일 가지고서는 턱도 없고, 일 년에 두 번 한다 해도 물론 모자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지만, 그래도 진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것이 있을 때마다 그때그때 잊지 않고 일 년 내내 매 주일 아니 매일 감사드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명령하신 절기입니다.
맥추감사절은 여러분이 특별감사헌금을 일 년에 한 번만 내어도 될 것을 두 번 내게 하는 바람에 여러분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절기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이 2007년의 전반기에 베풀어 주신 셀 수 없는 은혜에 진정 감사드리면서 후반기를 준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가 연말의 추수감사절에는 더 크게 감사예물 드릴 수 있도록 우리 각자가 영육 간에 수고하는 각종 '이모작'들을 더 좋은 것으로 축복해 주시는 것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미국에서 개척교회를 섬기던 시절에 그 교회에 제가 참 사귀기 어려운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Richard라는 이름의 서너 살 된 아이였습니다.
사내아이면서도 참 귀엽게 생긴 녀석이었는데, 정말 '예쁘게 생긴 남자들은 얼굴값 한다던데'라는 우리나라의 무슨 광고 카피처럼, 이 애가 얼마나 새침하고 도도한지 아무리 사귀려 해도 도무지 씨가 먹히지 않았습니다.
궁리 끝에, 어느 날 이 애를 사탕으로 유혹해 보았더니, 처음에는 약간 망설이는 듯하다가 결국 제 사무실까지 따라와서 막대사탕 하나 받아들더니 냉큼 돌아서 나가버렸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는 제가 "너 캔디 먹을래?"하니까, 주저하지 않고 당장 따라 들어왔습니다.
사탕 하나로, 그 아이와 제 사이에 '막혔던 담이 헐리고' 새로운 교제의 물꼬가 트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도 그 애는 사탕만 받아들면, 금세 등을 돌리고 사무실을 재빨리 빠져나가곤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몇 주일 지난 후에, 저는 새로운 시도를 했습니다.
그 애가 사탕을 받아들고 나가려 할 때, "Richard, 너 뭐라고 말해야 하지?"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 애는 의외의 기습(?)을 받고 약간 당황해 하다가, "Thank you."라고 들릴 듯 말 듯 말하고는 재빨리 사라졌습니다.
그 애는 'thank you'라는 발음을 'tank you'라고 했는데, 이 'th' 발음은 미국 본토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 시절에는 정확하게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Looney Tunes라는 만화 시리즈에서 고양이한테 항상 쫓겨 다니는 Tweety Bird라는 이름의 노란색 귀여운 새가 있는데, 그 새는 's' 발음을 못해서 't' 발음으로 대신합니다.
그래서 원래 'pussycat'이라고 해야 할 것은 그 새는 'puttycat'이라고 발음하는데, 그게 애들 발음처럼 아주 귀엽게 들리는 것입니다.
어린애에게 's' 발음도 어려워서 't' 발음으로 대신하게 되는 것이라면, 'th' 발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 Richard가 아직도 그 서투른 발음으로 한 'tank you'라는 한 마디가 그 애와 제 사이의 관계에 얼마나 결정적인 도약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캔디만 받고 횡 하니 나가버릴 때에는 그저 일방적인 사랑에 끝나버렸지만, 그 애 입으로부터 돌아온 '감사'의 말 한 마디가 Richard와 제 사이에 있어서는 이제부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어떤 인격적인 교제의 첫 걸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관계가 트이니까 저는 그 애를 더 귀여워하게 되고 사탕뿐 아니라 기회가 있으면 다른 선물도 더 주게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드릴 줄 아는 것이, 이처럼 하나님과의 우리 사이에 인격적인 교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가 비단 감사절뿐 아니라 매 주일, 아니 매일의 매순간으로 확장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더 사랑 받게 되고 더 좋은 선물을 절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맥추감사절은 원래는 추수감사절 한 번만 하면 충분한 것을 억지로 두 번으로 늘여놓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실은 매 주일이 감사주일이 되어도 모자랄 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겨우 두 번만 특별감사주일로 정해 놓으시고 우리에게 이것만은 꼭 지키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출애굽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처럼 적어도 예수 십자가 구원 받은 성도라면,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던 이스라엘처럼 적어도 정사기념일과 부활절을 지킬 줄 아는 성도라면 일 년에 두 차례 정도는 감사절로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아니 '너희들이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그 정도의 기본 감사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맥추절의 감사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진정 내 인격 속 깊이 모시고 있음을 고백하고 금년 후반기와 앞으로 남은 전 생애를 통하여 더 큰 축복을 받고 더 많이 감사드리는 신앙생활로 계속 자라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