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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예배 시간을 정한 후에는 제 시계가 잘못 되었으면 몰라도 정한 시간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배는 예배 지만 제가 시간을 지킬 수 없는 예 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결혼식 예배입니다. 물론 대개의 경우는 미 리 준비시켜서 신랑과 신부가 예배 시작 전에 나와 있다가 정각에 시작 합니다만, 간혹 신랑이나 신부 중 어느 한쪽이 늦게 도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예배는 한 사람으로 도 예배를 시작할 수가 있지만 결혼 식만은 어느 한쪽이 없으면 진행이 안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본 의 아니게 늦어지고, 사실 목사의 책임은 꼭 아니지만, 하객에게 얼마 나 미안한지 모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성품이 아주 칼칼하신 분이신데 결혼식 주 례를 맡았다가 신랑이나 신부가 늦 어지면 아예 주례를 그만두고 밖으 로 나간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그 목사님 나름대로의 뜻이 있습니다. 새 가정을 출발하는 첫 발자국부터 연착이 되면 그런 가정은 기대할 것 이 없다는 해석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아직 그럴 만한 권위가 없어서 신랑 신부가 다 도착할 때까지 기다 립니다. 그러나 주례를 맡은 목사로 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본 인들도 물론 그렇겠지만 사실 주례 자는 더 애가 탑니다.
고대 팔레스틴의 혼인잔치는 하 루뿐 아니고 일주일씩이나 계속되는 것이 상례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 혼예식은 낮에 하는 것이 아니라 저 녁이나 밤에 거행하는 것이 보통이 었다고 합니다. 신랑 되는 사람은 자기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여러 시 간을 즐기다가 한밤중에 신부의 집 을 향해 행진합니다. 한편 신부는 신부의 친구들과 언제 도착할지 모 르는 신랑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 다가 신랑이 도착하면 신부는 자기 의 친구들인 들러리들과 함께 나아 가 신랑을 영접하여 등불을 켜고 신 랑의 집을 향해 떠나는 연등 행렬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오늘 주신 말씀의 경우처 럼 신랑의 행차가 의외로 늦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하늘의 별빛은 하나둘 더 빛나기 시작합니다. 입 빠른 신부의 들러리 가운데 한 사람이
"혹시 이 거 우리 바람 맞은 거 아냐?"
"중간 에 샛는지도 모르지"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들러리 처녀는 한 술 더 떠 서 신부에게
"야, 오늘밤은 아무래 도 신랑이 안 올 것 같으니까 그냥 자자구"
이렇게 부추깁니다. 이렇든 저렇든 밤이 점점 깊어가니까 신부 의 들러리 처녀들은 긴장이 풀리고 졸리기도 해서 하나 둘 잠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보니까 열 명 의 들러리 처녀가 졸음을 이기지 못 하고 그만 다 잠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밤이 깊었는데 밤의 고요를 깨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습니 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 라."
그때 미리 기름을 준비했던 슬기 로운 다섯 처녀는 잔칫집에 등불을 켜들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미리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던 미련한 다 섯 처녀는 뒤늦게 시장에 가서 기름 을 등에 채워 가지고 잔칫집에 도착 했지만 이미 잔칫집의 문은 닫힌 후 였습니다. 늦게 도착한 미련한 다섯 처녀는 안타깝게 문을 두드리며 문 을 열어 달라고 애걸했지만 이미 닫 혀진 문에서 들려오는 신랑의 목소 리는
"나는 당신들을 전혀 알지 못 합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 유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 비유를 말씀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이 마태 복음 24장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24 장을 소위 '종말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때에 될 일에 대하 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24장 3절 이 하를 보시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 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며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사실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이 말씀을 더 실감할 수 있는 천년 마지막 때에 살고 있습니다. 계속해 서 예수님은 말세의 징조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중에 가장 중요한 결론 의 말씀을 24장 44절에 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이 말씀을 통해서 신랑 되신 주님이 더디 오시지만 반드시 오신다는 결 론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열 처녀 비유의 배경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처음 받은 이 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보다 예수님의 초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 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구약시대 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커다 란 기대를 가지고 메시야가 오실 것 을 기다렸습니까? 오랜 세월이 지났 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기다 리던 메시야는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잠들었을 때 메시야 가 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 민 누구도 모르게시리, 아니 베들레 헴에 사람들이 호적하러 와서 그렇 게 우글거렸어도 그 누구도 모르게 어느 여관 말구유 위에 오셨습니다.
메시야가 오신다고 한 약속은 성 도의 소박한 바램에 불과했지 우리 들을 위한 약속은 아니라고 성급히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 다. 그러나 사람들이 점점 불신앙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역사는 절망 과 파국을 향해 계속 치닫게 되는 어느 날 '때가 찬 시각'이 있다는 사 실을 기억하세요. 신랑은 마침내 오 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그래서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 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앞둔 오늘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열 처녀의 비유를 이 해하는데 보다 중요하지 않은 부분 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경우가 있 습니다. 가령 이 말씀을 이해하려는 사람들 가운데
"'열 명'이라는 숫자 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처녀는 무엇 을 뜻하는가? 기름은 무엇을 의미하 는가? 다섯 명씩 반으로 나눈 것은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런 것에 대 해서 그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그런 식으 로 접근하다보면 주신 말씀의 중요 한 정신을 놓치기가 쉽습니다.
여기 열 명의 처녀를 등장시킨 이유는 소박하다고 생각합니다. 유 대인들은 흔히 사람을 셀 때 열 명 단위로 세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는 사람이 열 명이 모인 곳에는 어 느 곳에든지 유대인 회당을 세우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리고 다섯 명 의 슬기로운 처녀와 다섯 명의 미련 한 처녀로 다섯 명씩 나눈 것은 메 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 가운데는 서로 다른 태도를 갖고 있는 두 부 류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대조적 으로 보이기 위한 그 이상의 다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의 교훈은 오늘 우리가 기억해 야 할 가장 중요한 말씀의 핵심입니 다. 신랑을 영접하는 혼인잔치를 기 다렸다면서도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 였기 때문에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의 비극은 오 늘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 니까?
형식이 내용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미련한 다섯 처녀와 지혜로 운 다섯 처녀의 삶이 전혀 다른 것 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똑같이 혼 인잔치에 들러리로 초대를 받았습니 다. 그들은 똑같이 기쁨으로 신부의 들러리로 초대한 것에 응했습니다. 그들은 똑같이 신랑을 기다렸습니 다. 그리고 보세요. 그들은 똑같이 잠자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지 혜 있는 다섯 처녀는 신랑이 올 때 까지 깨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 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 지 않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 오늘 주신 말씀 5절에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하고 했습니 다. 미련한 다섯 처녀만 졸며 잔 것 이 아니라 지혜로운 다섯 처녀도 다 같이 졸며 잤습니다. 그들은 피곤하 니까 졸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같이 등을 가지 고 있었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가 처해 있던 상황이나 삶의 방법은 지 혜로운 다섯 처녀나 별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지혜 있는 처녀들과 미련 한 처녀들의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름의 준비였습니다. 지혜 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 녀는 준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성경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의견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기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데 대해서입니다. 전통적인 해석에 의하면 우리는 이 기름을 성령님으 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 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기름이 성 령님이라면, 등불에 불을 켜면 기름 이 점점 줄어드는데, 그러면 성령님 이 우리 안에서 점점 없어진다는 말 입니까? 기름이 있다가 시간이 지나 면 없어지는 것처럼 성령이 우리에 게 있다가 없어질 수 있습니까? 이 것은 성령을 하나의 상품처럼 생각 하는 데서 오는 오해입니다. 인격이 신 성령님은 한번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와 함께 영원히 같이 계십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많은 경우에 성 령이 기름으로 상징된 것이 사실입 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서 기름만 나오면 그것을 다 성령으 로 생각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어떤 사람은 불만 보면 다 성령이라고 생 각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다가 불이 번쩍이면 성령이 오셨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노이로제에 걸린 성도들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름이 나타났다고 해서 그것을 다 성령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 각합니다. 우리는 좀 더 넓은 의미 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오늘 주신 말 씀에서 등불의 기름은 우리 그리스 도인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신 앙의 내용, 또는 삶의 내용을 주님 께서 우리에게 기름으로 가르치셨다 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 안에 갖추고 있어야 할 삶의 내용, 다시 말하면 신앙의 내용이 결핍되 어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교회에 다니는 많은 분들이 형식이 있기 때문에 내용은 당연히 있을 것으로 착각합니다. 형식이 무 엇입니까? 등이라든지, 결혼잔치에 초대를 받는 것이라든지, 그 잔치 자리에 참석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만 가지고도, 그 형식 이 있기 때문에 내용도 있을 것이라 고 착각하면서, 내용에 대해서는 고 민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해 나갑니 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렇게 예배 시간에 참석했습니다. 그것은 형식 입니다. 찬송을 부릅니다. 엄격히 말 하면 그것도 형식입니다. 우리는 많 은 경우 이런 형식에 참여했기 때문 에 자연스럽게 '나도 신앙이 있는 사람이겠거니' 하고 생각하게 되기 가 쉽습니다. 그러나 형식이 있으면 자연히 내용이 따르는 것으로 생각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이 말은 절대로 형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 없는 내용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릇이 없이 기름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콩껍질 없이 알맹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릇이 기름은 아닙니다. 껍 질이 알맹이는 아닙니다. 내용이 있 을 때 형식은 내용을 표현하는 아름 다운 사건일 수가 있습니다. 형식 그 자체에 잘못이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내용이 없는 형식 은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 셔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언제나 위기 앞에서 그 진면목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밤 늦게 신랑이 오니까 그때에서야 드 디어 내용이 있는 사람과 내용이 없 는 사람의 차이가 드러나게 된 것입 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진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까? 이것 을 객관적으로 시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 삶 속에 위기가 찾아 왔을 때 그 위기에 어떻게 반 응하는지를 보면 압니다.
어떤 사람은 평탄하게 별 어려움 없이 지낼 때는 그것을 모르고 살겠 는데 어려움이 찾아오니까 불평하 고, 의심하고, 원망하고, 낙심하고, 짜증내고, 신앙이란 다 그렇고 그런 거라고 합니다. 신앙의 형식만 있었 지 그 내용이 없어서 그럽니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알맹이가 확실하다면 많은 위기 앞 에서도 내 삶을 주장하시고, 인도하 시고 함께 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을 신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 려운 일을 당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인 생의 가장 커다란 위기, 다시 말하 면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서게 되 는 그날, 주님 앞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알맹이를 내보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고 형식적으로만 참여하고 있던 어리석 은 다섯 처녀처럼 형식에만 집착하 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주일마 다 예배에 참석한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고 부르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 하셔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의 내용입니다. 내용 없는 형식 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세요. 밤늦 게 신랑이 도착했습니다. 신랑이 도 착했다는 전갈을 받자마자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을 보았습니다. 기름 이 있기는 조금 있는데 넉넉지 않았 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혜로운 다 섯 처녀에게 기름을 좀 나눠달라고 했습니다. 기름을 빌려달라고 했습 니다. 이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기 름을 빌릴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어리석은 처녀들의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얼른 볼 때 지혜로운 처녀들이 너무 인색하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비유에서 주님께서 교훈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내용이란 빌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 람에게 전도해 보면 자기 아이들이 신앙생활 하고 아내가 신앙생활 하 는 것을 자기가 하는 것으로 착각하 시는 분이 많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시카고의 무디신학교 총장이었던 조지 스위팅(George Sweeting) 박 사가 남긴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자녀만 있지 손자가 없다."
이 말이 맞습니까? 그렇습니 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말하면 내가 '하나님 아버지' 하고 말하면 내 아 들은 '하나님 할아버지' 하고 불러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내 아들도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왜 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적 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으니까 내 아들은 자연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 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저녁 세례식을 가집 니다. 각자가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 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고백이 있어야 세례를 받게 됩니다. 어릴 때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은 세례를 다시 받지는 않지만, 이제 장성해서 자기 자신이 신앙을 고백해야만 입 교하여 세례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은 누구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자신이 거듭난 경험 이 있으십니까? 자신이 예수 그리스 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신앙의 삶은 누구도 대 신할 수 없습니다.
또한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 니다. 혼인 잔칫집의 문이 닫혔습니 다. 한번 닫히면 다시 열 수 없다는 것을 오늘 주신 말씀에서 말씀해주 고 있습니다. 범사에는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신랑이 오기 전에 어리석은 다섯 처녀에게도 기름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습 니다. 그런데 그 기회를 놓쳐 버렸 습니다. 언제나 기름을 살 수 있다 는 사실이 미련한 다섯 처녀로 하여 금 오히려 기회를 놓치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기회가 언제나 있다고 생 각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교회에 나 갈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성경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삶의 기회가 언제나 그렇게 주어지는 것 이 아닙니다. 어느 한 순간 내 인생 의 기회의 문이 아주 닫혀 버릴 수 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 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에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새 성 전 성구 마련을 위해 헌금하려고 합 니다. 오늘이 바로 그 기회입니다. 이 헌금을 늘 하는 것 아닙니다. 내 평생에 한 번일 수 있습니다. 내일 은 우리의 시간이 아닐 수도 있습니 다. 기회의 문이 닫힐 수도 있습니 다. 닫힌 다음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 주의 은혜를 사모할 수 있는 기회, 주님을 섬기며 주님께 드리는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 닙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하 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아 무도 모릅니다.
끝으로, 주님과의 만남은 갑자기 이루어집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시간에, 어 느 한 순간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자가 다시 올 때 도적같이 오겠다"고 말씀하셨 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 이루어질 는지는 모릅니다. 이것을 우리는 '우 주적 종말'이라고 합니다. 우주적 종 말뿐 아니라 개인적인 종말도 있습 니다. 오늘밤에 우리 개인의 종말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습니 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그것은 다른 사람의 사건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 니다. 그러나 우리와 상관없는 사건 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준비해야 합 니다.
주님을 사랑했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던 무디(D. L. Moody)는 언제나 죽음을 준비하 는 자세로 하루하루를 살았던 하나 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한 순간 찾아온 죽음 앞에서
"땅은 물 러가고 하늘은 열린다. 내 주께서 나를 위해 오신다"
하고 고백하였습 니다. 그는 평소에
"여러분, 어느 날 신문에서 무디(D. L. Moody)가 죽 었다는 보도를 보실 것입니다. 그 보도를 믿지 마세요. 저는 죽은 것 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갔기 때문 에 여기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었습니다.
아마 여러분께서도 언젠가는 이 박 목사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으실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 소문을 믿지 마세요. 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 믿음의 선배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에 있을 것입 니다.
교회학교에서 성경을 배우고 돌 아온 어린 소녀가 자기 엄마에게
"엄마, 교회학교 선생님이 그러시는 데, 이 세상의 삶은 천국의 삶을 준 비하는 거래요. 그게 맞아요?"
이 엄마는 딸이 너무 귀여워서
"암, 맞 구말구"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이 어린 소녀는 엄마에게 다시 물었습 니다.
"엄마, 엄마는 작년에 미국 갔 다오시고 금년에 구라파 가시는데, 다른 나라 가실 때마다 여행 준비 열심히 하시던데 왜 천국 갈 준비는 안 하세요?"
"·····?"
인생의 가장 진지한 여행, 육체 를 버리고 떠나가는 이 마지막 여행 에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 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