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44
행 4장13∼22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은 마틴 루터가 95개 항목으로 천주교에 대한 항의서를 비텐베르그 대학 성당 정문에 써 붙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시발점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날이 1517년 10월 31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날을 기념해서 시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 기념주일로 지킵니다. 우리 영암교회는 처음부터 개혁주의 교회를 목적으로 세워졌습니다. 개혁주의라는 말은 한 마디로 종교개혁 당시에 개혁자들의 신앙과 자세를 이어 받겠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바른 신앙, 그 성경중심의 신앙을 이어 받아 그 신앙을 계승하겠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는 흔히 나는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가 순수하게 교회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고 그래서 개혁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개혁은 결코 부정적이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 있는 것을 무작정 고치자는 데 개혁 의 목적이 있는 것 아닙니다. 개혁은 오히려 옛 것을 간직하자는 것이요, 옛 것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본래에서 떠났기 때문에 본래로 돌아가는 거기에 개혁의 참된 원리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에 붙잡혀가서 공회의 심문을 받은 장면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고 그 능력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그 이적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공회가 소집되고 마침내 공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심문을 합니다.
생각해보면 이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는 결의를 했었고 베드로로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일생 일대의 큰 실수를 범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현장에 베드로가 선 것입니 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지난날과 너무도 달랐습니다. 공회의 위협과 협박에 대해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담대히 진리를 선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보다 더 옳은가 판단하라' 고 실로 용감하게 외칩니다.
"지식은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이래 인류는 지식을 얻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자식의 교육을 위해 집을 파는 사람은 있어도, 집을 사기 위해 자식의 교육을 중단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지식은 재물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잠언 1:22에는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무지는 사람에게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까지 멸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무지하면 인정받지 못합니다. 영향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비참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도 베드로와 요한 사도를 학문 없는 범인(凡人)으로 알았는데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유대인들이 이상히 여기게 되었습니다(13절). 왜 그렇습니까? 유대인들은 복음에 대해 알지 못했는데, 이들 사도들은 복음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교회도 성도도 복음에 대해 무지하면 영향력을 잃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능력 있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 사도들에게 어떤 마음이 있었습니까? 세상 어떤 것에도 추호의 두려움이 없는 태도가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사도들은 어디서부터 이런 담대함을 얻었을까요? 흔히 '담대함'에 대해 오해를 하나, 용기와 담대함은 다음의 몇 가지로부터 올 수가 있다고 합니다.
무지에서 오는 담대함
우리나라 속담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잡아먹을 때쯤 된 개는 호랑이를 보면 꼬리를 감추고 도망갑니다. 그런데 하룻강아지, 즉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강아지는 호랑이를 봐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호랑이에게 달려듭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합니다. 모르니까! 그러나 이 사도들의 담대함은 이런 유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천성적인 담대함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간이 크다고 합니다. 간과 담력이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의사 선생님들 말을 빌리면, 쓸개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사람이 깜짝 놀랄 때, 쓸개에서 분비물이 나오는데, 간이 큰 사람은 분비물이 많이 나와서 두려움을 덜 탄다고 합니다만, 잘 모르겠습니다. 베드로가 과연 간이 컸을까요? 아닙니다.
훈련으로 말미암은 담대함
요즘 세상에서도 신입사원들에게 훈련을 시키면서 담력훈련을 하게 되는데 어렵고 힘든 코스를 몇 번 거치고 나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지금 이런 담력을 얘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사도들의 담력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거기에 대해 본문은 몇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올바른 지식을 가질 때 담대하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13절)
이들의 담대함은 올바른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지식에서부터 나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왜 담대했습니까?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우주를 알고, 나를 알고 하나님의 진리를 알면, 우리는 담대해질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사실, 성경을 통해 이 세상이 무엇이고,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두려울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말씀하십니다."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우리의 담대함이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담대함이 올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달을 때, 우리 안에 담대함이 찾아올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과 동행할 때 담대하다
이런 담대함은 또 어디서부터 올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과 동행할 때 담대함이 찾아온다고 얘기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하니까, 어떤 분은 십자가를 몸에 품고 다니거나 목걸이를 걸고 다니는 분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동행은 그런 육체적인 동행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3년 간 예수님과 동행했고 같이 먹고 잤습니다. 그런데 그는 두려워서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로마 군인이 칼을 들이대고 "너 예수 알지?" 하고 물은 것도 아니고, 계집종이 와서 "너 예수와 함께 있었지?" 라고 했는데,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요.
그런데 그가 여기서는 왜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까?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깨닫고, 그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한 줄 믿습니다. 정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그 예수님과 날마다 동행하게 될 때, 일어날 때나 잠들기 전 항상 예수님과 대화하며 동행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을 이기는 담대함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걱정, 근심이 찾아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주님이 내 곁에 계시면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없이 체험했습니다. 이런 주님과의 동행을 체험하며 살아가십니까?
믿음의 체험이 있을 때 담대하다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14절)
믿음의 체험!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간증하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면, 관념적인 믿음입니다. 체험적인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담대하지 못하고 믿음대로 살지 못하는 겁니다. 왜? 남의 얘기는 많이 들었고, 성경 얘기도 많이 압니다. 그러나 나의 체험이 없는 겁니다.
사도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주님과 함께 다닐 때, 눈먼 소경이 눈뜨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도 보았어요. 그런데 그는 그저 관념적으로 믿었을 뿐입니다. 막상 그 앞에 시험이 닥쳐오자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베드로가 담대해질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관념적인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내 얘기였어요. 내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켰더니, 그가 일어났어요.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은 이런 체험을 가지고 계십니까?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체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는데, 남의 다리를 긁고 있는 겁니다. 자기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얘기 들으면서 좋아합니다. 성경 읽으면서 그저 좋아합니다. 그러나 나와는 상관이 없는 얘기입니다. 남이 열심히 간증하는 것을 들으면 감동을 받고 은혜를 경험하기는 하는데 내가 간증하는 것을 들으면 누군가가 듣고 감동을 받고 은혜를 경험하는 그런 간증을 가지고 있나요? 우리의 약함은 그런 감동스런 간증이 내게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신앙생활 속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켜 본 적이 있습니까? 문자적인 앉은뱅이를 일으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삶에 기적은 가까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믿기만 하면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 역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은 내 남편이 믿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그가 돌아옵니다. 도저히 끊을 수 없던 나쁜 습관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믿고 기도할 때, 끊어지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복음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소유해야 영향력 이는 사람이 된다(행 4:13-16).
당시 유대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일컬어 예수와 함께 있던 줄을 알았고(13절), 병 나은 사람들을 통해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15-16절). 공회원들이 볼 때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유대사회와 문화에 관한 지식은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하고 예수님에 대한 전문가들인 제자들을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친 사실은 참된 선지자의 증표로 간주되었습니다. 객관적인 사실 앞에서 공회 의원들도 어떻게 할 도리를 찾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의 문화나 지식을 갖지 못해 무시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복음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소유한 자는 세상의 권세자들이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소년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소유했기 때문에 용감하였습니다. "창과 칼은 내게 없으나, 나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노라."고 외쳤습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교회나 성도들이, 세상의 지식이나 문화에는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의 복음에는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향력이 없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두 사도들의 외침에 귀기울이며 신앙적으로 재무장을 해야 하겠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고 기탄 없이 외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어야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된다(17-18절).
교회는 세상에 드러나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켜 가야 합니다. 교회는 질적으로 세상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말씀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40여 세나 되는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은 유명한 표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대단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만성적인 질병이 인력으로 치료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기적적으로 치유를 받은 것입니다. 전혀 불가능한 일을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게 한 이적이었습니다. 이 능력을 교회와 우리 성도들에게 주셨습니다. 공회의 회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한 제자들을 처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교회가 갖추어야 하는 이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37∼39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직적인 예배의 실천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수평적인 예배의 실천을 통해 이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이 외면하는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에게 예수님을 공궤하듯 섬기는 일"입니다. 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향기 나게 했던 여인과 같은 신앙고백의 실천이 바로 이적입니다. 이런 일은 세상에는 없는 일이기에 영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어 무시당하지 않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담대해야 영향력이 이는 사람이 된다(19-22절).
본문말씀에 보니 "예수의 이름으로 도무지 말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하면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백성들이 마음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관원들이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풀어 주었습니다. 이 일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유 24)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의 확신을 가지고 선한 삶으로 이적을 드러내는 성도들과 교회에게 이렇게 부탁하십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베드로와 요한 사도의 마음속에는 불타는 것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담대함은 복음의 능력입니다. 담대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힘이십니다. 이제 우리의 영적 자세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분명한 신전의식(神前意識)으로, 두렵고 염려하는 겉치레의 신앙생활을 과감히 떨쳐 버려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영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영향력을 미쳐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된 지식을 소유해야 합니다. 학문 없는 범인으로 보였던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참된 지식, 즉 복음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힘있게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이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 편에 서서 담대히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영향력 없는 사람이 능력 있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주님은 우리가 영향력이 있게 이 일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담대하게 세상을 향하여 외쳐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하는 신앙고백의 용사들이 되십시다.
교회사 이천 년에 수많은 교회갱신운동을 꼽을 수 있지만, 16세기 전반에 일어난 종교개혁이 돋보이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짧은 기간동안 크게 확산되었다는 양적인 평가와 나란히, 중세 말기의 천주교회와는 현저하게 다른 교회를 형성하였다는 질적인 평가를 그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개신교회의 입장에서 교회사 전체를 하나의 강으로 본다면, 종교개혁의 사건은 커다란 폭포와도 같습니다. 근원지가 분명히 따로 있으며, 상류와 중류도 중요하지만, 하류 직전에 만나게 되는 이 폭포는 하류의 성격을 전혀 다른 것으로 느끼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회의 현실을 역사적으로 살피려 할 때, 종교 개혁을 바로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종교개혁의 성격과 내용을 생각해볼 때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 살피기보다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찾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먼저, 종교개혁은 개신교회를 논리의 종교로 만들었습니다. 종교개혁은 무엇보다도 신학의 개혁이었습니다. 은총과 구원의 이론에 대한 연구와 논쟁이 서방교회 신학의 특징인데, 종교개혁에서 그 절정을 이루며 또한 이 이신칭의 교리가 모든 교리와 사고구조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종교개혁은 예배의 개혁이었습니다. 중세교회의 예배는 집례하는 사제의 일인극으로 보일 정도로 회중을 무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잘못을 직시한 개혁자들은 희생제사의 성격을 강조하는 미사를 성서에 따른 성만찬으로 환원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이제는, 사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식탁의 주인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잔치로 초대하는 형식을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의 중심적인 위치에는 설교가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말씀을 통해서 전달된다는 인식은, 중세교회가 성례전을 통해서 은총을 매개한다고 하는 이론을 배격하고, 성례전의 위치를 크게 제한하였습니다. 설교 위주의 예배는 자연스럽게 개신교회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설교중심 예배의 위기
오늘날의 문화적 상황에서 이러한 예배는 커다란 위기를 만나고 있습니다. 과거 설교를 통해서만 온갖 정보를 듣고 수용하던 청중들과 현재의 예배 참여자들은 엄연히 다릅니다. 이제 회중들은 교회 밖에서도 많은 정보를 보고 들으며 온갖 문화를 접하며 살아갑니다. 설교보다 더 감동적이며 자극적인 이야기들이 매스컴을 통하여 넘치도록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설교 위주의 예배는 이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또한, 개혁자들이 주장하던 말씀 선포의 역할은 예전의 설교와는 다른 형태로 제공되고 있는 현상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형편에서 본다면, 설교가 아니라 성경공부가 이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예배 내용과 형식의 적절한 갱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근래 한국교회에서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예배 갱신운동은 이러한 맥락에서 타당한 움직임이라 봅니다.
또한 종교개혁은 교회 구조의 개혁이었습니다. 스위스 개혁에서는 또한 평신도들의 참여가 훨씬 큰 폭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이는 직접 민주제를 오랜 전부터 실시한 정치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정치보다 오히려 귀족정치에 가까운 장로제를 채택하고, 더군다나 종신직의 장로제도를 받아들인 한국교회는 교회 내의 대의정치라는 명분마저도 상실한 채 미래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만능 아니다
종교개혁은 만능이 아닙니다. 또한 그 내용이 우리들의 목표가 아니며 기준이 될 수도 없습니다. 한때 자랑이었던 것들이 현실에서는 오히려 장애물이 되거나 족쇄가 되어 우리들의 신앙과 사역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의 내용에 충실할수록 현실과는 더욱 유리될 수밖에 없는 역설적 상황에 우리는 직면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현황을 살펴볼 때, 전통적인 교리와 교회 구조에 집착하는 교회일수록 사회 및 문화로부터 고립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종교개혁의 형태와 내용을 이어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개혁의 정신, 역사적 거시적으로 자신을 비판할 수 있는 안목과 용기를 되찾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신학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획일적인 문답으로 틀에 박힌 지침을 강요하여 교회의 사역을 제한하는 역할을 벗어나야 합니다. 운신의 폭을 스스로 좁히는 자승자박의 논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 지상주의를 표방하는 것을 빌미로, 결국 사회와 문화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는, 교류하는 모든 창구를 폐쇄하는 정책이 신학의 알파와 오메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종교개혁을 다시 한 번 새겨본다는 것은 예전의 그 내용을 답습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의무는 오백여 년 전의 교회가 맞닥뜨렸던 과제와는 매우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새로운 과제에 성실히 답하는 것이야말로 종교개혁의 뜻을 바로 계승하는 일이 됩니다.
오늘 우리교회는 30여명의 교인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세례(Baptism)는 물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씻는 예식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씻음을 받고 깨끗하게 된 것이 증명이며, 주님의 사람이 되기를 결단한 우리의 서약을 표시하고 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했을 때 하나님께서 내 속에 이루어 놓으신 신분의 변화를 의적으로 또한 공적으로 인치는 예식입니다.
이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세례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결정적 사건이다.
갈3;27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라고 말씀을 합니다. 세례는 세상에 속했던 내가 세상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타락한 생활에서 벗어나게 하며 적극적인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는 인침입니다.
세례는 회개와, 용서의 예식이다.
세례는 하나님의 은총의 확증입니다. 회개하는 자녀의 죄를 완전하게 도말하여 씻겨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곧 세례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세례 받기 전에 반드시 금식을 하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허물과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때에 머리에 부어지는 물은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주님의 흘리신 보혈이며, 이 보혈의 뿌림을 받는 자는 그 보혈로 인하여 모든 죄가 씻김 받는 것입니다.
한 재판정에서 젊은 죄수가 극형을 언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백발의 한 노인이 죄수석으로 뛰어들더니 아들을 끌어안고 판사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재판장님 우리에게 내리신 당신의 판결은 정당하십니다. 우리는 오직 당신의 자비를 바랄 뿐입니다."이 연로한 아버지는 자기가 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자기의 못된 아들과 자기를 동일하게 취급하여 '우리'라는 말을 썼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께서는 죽을 죄인들의 수치와 치욕을 자신의 것으로 짊어지시고 고통을 다 감내하였습니다. 그리고 용서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 회개와 용서에 참여하는 예식이 성례전입니다.
세례는 새로운 피조물로의 탄생을 의미한다.
세례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주실 때 역사하신 성령님 안에서 내가 변화된 생의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세례는 새 생명으로 인간을 재형성시키는 성령님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죄의 세계로부터 의의 세계로, 속박에서 자유로, 율법 아래의 죽음으로부터 성령 안에의 생명으로 옮겨지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일본 어느 마을에 만 두 살 된 아이가 소아 암에 걸렸습니다. 병원에 입원시키고 정성을 다해 기도했지만 결과는 절망적이었습니다. 죽음의 시간이 언제냐 문제였습니다. 목사가 아이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가 끝나자 목사는 아이가 두 살 밖에 안됐지만 예수님에 대하여 알아야한다고 하였습니다. 부모들은 그림으로 된 성경책을 몇 권 구했는데, 아이는 유독 그 중에서도 "예수님은 내 친구"라는 책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그 책 그림 중에도 예수님께서 한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그림을 제일 좋아했고, 이 아이는 그 그림 속의 아이가 바로 자기라고 말했습니다. 3개월 후에 그 아이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예수님의 품으로 간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때까지 세례를 받지 못한 아이의 어머니도 '하나님의 것'이 되기 위하여 세례를 받고 온 가족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피조물로의 탄생입니다.
세례는 주님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의식이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입장허가'입니다. 초대교회는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은 성도의 수에 넣지 않았고, 그들을 말씀의 예전에는 참여시켰으나, 다락방 예전 곧 성찬의 자리에는 그들을 모두다 퇴장시키고 나서 세례 받은 이들끼리 행했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그만큼 공동체 의식을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일단 세례를 받고 나면 조건을 따지지 않고 누구든지 한 형제, 한 재매로 여겼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러므로 세례는 교회의 성도가 되는 예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오늘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 삶을 시작하신 여러분! 성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부름 받은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을 유유하게 살아갑니다. 그는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을 분별합니다. 먼저 해야 될 일과 나중에 해야 될 일을 분별하는 자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지표가 되어, 우리 모두 세상을 이기며,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앞에 살아가며, 부름 받은 삶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서정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