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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이 있는 자 (눅6:20-26)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5:20)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날이 밝으매 제자들을 부
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가르치고 훈련 하사 쓰실 것을 계획하시고 '사도'라 칭하셨
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택한 열 둘과 산에서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
도 듣고, 병고침을 얻으려고 나온 무리들에게 네가지 복과 네가지 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주신 말씀을 영접하여 진실로 복된 삶을 가질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
다.
Ⅰ. 네가지 복(20-23)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시고 이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
에 서셨습니다.(17)
그랬을 때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을 듣고, 병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 해안으로부터 많은 백성들이 동서남북 해외에서도 주의 말씀을
사모하여 모여들었습니다. 이렇게 모여든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라고 해서 산에서 말씀을 선포
하심으로서 산상보훈이라고 합니다.(마5:1) 그러나 누가복음6:17을 근거하여 예수께서 산에
서 내려오시다가 적당한 넓은 곳을 만나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평지보훈"이란 별명이 붙
게 되었습니다. 여기의 '평지'라는 것은 낱말로서 평평한 곳을 가리키고 저지대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봅니다. 아마 예수께서 힛티산정 어느 곳에서 철야 기도하시고 아침이 되어 날이
밝으매 제자들을 부르사 열 둘을 택하시고 같이 산에서 내려오시다가 적당한 넓은 여러 사
람이 앉기 좋은 곳을 택하여 보훈을 주신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5장 - 7장의 산상보훈이나 오늘 본문 20-26절의 평지보훈은 다같이 복으로 시작
을 합니다. 산상보훈은 8복인데 비하여 평지보훈의 4복(20-23) 4화(24-26)로 나타납니다.
복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며 또한 바라기도 합니다. 이 복은 고대 헬라 철학이 말
하는 인생 목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복의 비결은 각양각색으로 해석되고 설명되어
져 왔으나 주님의 교훈은 높은 견지에서 파격적이며 또한 영적이며 내세적이겠습니다만, 또
현세적이기도 합니다.
복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이 복이 눈에 보이거나 손에 만져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
는 것도 아닙니다. 또 복을 받으려고 복조리를 걸고, 부적을 붙이고 베개나 이불에나 심지
어 숟가락에 복(福)자를 새겨 둔다고 해서 복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복이란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말씀을 주십니다.
예컨데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복을 주실 때 먼저 말씀을 주십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 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
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1-2) 또 창세기 15:4에는 자식
을 주마 창15:7에는 이 땅을 네게 주마 하십니다. 먼저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영접하고
기다리며 순종하면 그것이 복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자유와 참다운 행복은 어떻게 얻습니까? 이것 역시 진리에 순종할 때 얻
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동산의 모든 나무 실과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
을 알게하는 나무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6) 하나님의 명령이
요, 약속입니다. 만약 아담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라면 낙원을 그대로 가졌으
며 파라다이스(Paradise)를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 자체는 말씀이고 그 말씀에 순종
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참 행복이요 자유이겠습니다.
신명기 11:26-28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
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쫓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 자체가 하나님
의 말씀이고 그 주신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므로 축복을 받게 되고 화를 면하게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4가지의 복과 4가지의 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
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여기서 가난한 자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
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가난하게 된 자들을 가리킵니다. 곧 경건한 삶을 위하여 살다 보니
가난하게 된 자를 의미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이겠습니다만, 당시에도 진리의 말씀대로 살려면 부자 되기가 어려웠습
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라 하셨으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삶의 모델이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베
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부친을 버리고 주님을 쫓았습니다. 세
리 마태는 세무장 자리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려두
고 주님을 쫓았습니다. 산상보훈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했는데 주님이 더 소중하고
갈급해서 육신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쫓는 삶, 갈급한 심령으로 주님의 말씀대로 살
고자 하는 경건한 삶, 이것이 가난한 것이겠습니다. 실제 제자들은 주님의 것이 더 소중하
고 갈급했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하기는 했으나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평안과 기쁨, 하
나님의 나라를 소유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대학생 선교 단체에 김 바울이라는 성도가 있습니다. 이분의 아버지는 우리
남노회 목단 교회를 시무하신 적이 있고, 일제시대 때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문을 너무 많이
받아서 목회에 꽃을 피워 보지 못하고 작고하신 목사님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영남 대
학병원 정형외과 의사로 있다가 지금은 영주 순천향 병원에 과장으로 계시는데, 의사 중에
정형외과 의사가 가장 인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번 돈을 회관을 짓는데 바
치고 남의 집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학생들과 선교 사역에 혼신을 다 바쳐 일을 합니
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었어도 그 마음 속에는 기쁨이 충만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지금 동산 병원에 척추암 4기로 입원 중에 계시는 김병환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100
명이 넘는 교회를 한 번도 시무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경건하게 살았고 개척
교회를 하며 한 영혼, 한 영혼을 위해 아낌없이 당신의 생애를 드렸습니다. 이분은 목사를
하지 않아도 넉넉히 잘 살 수 있고 세상 재미를 맛보며 살 수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위
하여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난하게 된 것을 지금도 하나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제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면서도 조금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병원에
심방을 가면서 가끔 들립니다. 들리면 제가 웃으면서 '왜 아직 안가고 있소'하면 '아버지가
오라고 해야 가지 내 마음대로 가나'하며 웃곤 합니다. 그리고 병문안 갔다가 나오면서 '다
음에 왔을 때 만나지 못하면 하나님의 집에서 만납시다' 하면 '그래요 그래' 합니다. 그 마
음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어서 그렇게 기쁘고 평화롭습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가난하
게 살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주린 자는 복이 있습니다.
21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마태복음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라고 했습니다.(마6:5) 그러므로 주린 자란 영적으
로 주린 자, 심령이 주린 자를 의미합니다. 시편 기자는 영혼의 주림과 목마름에 대하여 시
편에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 하나니 내가 어느 때
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앞에 뵈올꼬"(시42:1,2)
인간은 짐승과 달라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많이 벌고, 권력
을 손에 쥐고 육적으로 배가 불렀다 해서 참만족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인간
의 참만족과 기쁨은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거기에 영혼의 배부름과
참만족이 있습니다. 누가복음18:13절을 보면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
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
인이로소이다" 세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죄용서, 정신과 마음의 평화, 순결과 거룩함을 사모
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혼의 곤핍함을 알고 하나님께 영혼의
배부름을 구한 것입니다. 결국 세리는 의롭다 함을 받고 그 영혼의 만족을 얻고 돌아갔습
니다. 참다운 자유는 자유를 줄 자로부터 받을 때만이 자유요, 참다운 만족은 만족을 줄 자
로부터 받을 때 참다운 만족이 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M. Luther)는 카톨릭의 형식과 종교의식 그리고 조직 로마 교황청
의 권위와 전통 속에 구원이 없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어 보
려고 교황청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계단 계단에 입을 맞추며 피가 나도록 오르내렸습
니다. 그러나 그런 고행 속에도 구원이 없었습니다. 그는 참된 구원을 간절히 갈망하다 로
마서1:17,18절을 영접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
나님께서는 목마른 사슴과 같이 구원을 갈망하던 루터를 만나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영적 만족을 위해 투쟁할 때 그를 만나고 참만족함을 얻을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배부름을 얻을 것이요.
셋째,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예수님은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때에 웁니까? 슬플 때도 울고, 외로울 때도 웁니다. 또 너무 기뻐도 웁
니다. 몇 년 전에 이산 가족 찾기를 KBS에서 할 때 한 30년만에 만난 가족을 껴안고 우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 동안 헤어져서 갖은 고생을 하며 생사조차 모르던 이들을 만
나니 반가워서 울고,서러워서 울고, 고생한 것을 생각해서 울고, 통곡을 합니다. 그러나 이
렇게 우는 울음은 복 있는 자의 울음이 아닙니다. 슬플 때 실컷 울고나면 잠시 마음이 후
련해집니다. 그러나 더욱 허무함과 외로움을 또 느낍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는 자"란
그런 감상적인 눈물이 아닙니다. 자기의 죄악을 애통하며 우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치 않으신다고 시편
51:17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 모든 죄를 사해 주십니다.
사도행전 3:19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와 같이 하면 유쾌하
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했습니다. 언제 참으로 기뻐서 웃을 수 있습니까?
눈물로 죄를 애통하며 자백하고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을 때가 아닙니까? 죄 용서함을 받
은 자가 진실로 웃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 웃음입니다. 다시 슬픔이 없는 웃음입니다.
넷째,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
이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로
부터 미움을 받고 소외를 당하고 욕을 얻어먹고 많은 핍박을 당하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
다. 이번에 교회를 지으면서 교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핍박받는 분들, 돈 때문에 욕을
얻어먹고, 괜히 미움을 받고 때론 소외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고난받는 이유는 죄가 있고
나쁜 짓을 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본문에는 "인자를 인하여" 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이요,
교회 때문입니다.
베드로 전서 2:20-21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
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리라 이를 인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
었나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
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딤후:3:12) 예수를 잘 믿으면 형통해야 하는데 잘 믿
고 경건하면 할수록 어려움이 더 많고 소외당하고 핍박이 꼭 있으리라 필수적입니다.
그러면 핍박을 받을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갖어야 합니까? 23절을 보십시오. "그날에
는 기뻐하며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하였
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고 뛰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
무나 적극적입니다. 참고 견디어라가 아니고 기뻐하고 춤을 추라고 하십니다. 소외당하고
욕을 얻어먹을 때 우리는 분을 품기 쉽습니다. 이 때 주님은 춤을 추라고 하십니다. 하나
님 앞에 가면 있을 상급을 생각하며 기뻐하라 하십니다. 핍박을 받을 때는 말씀으로 위로
를 받아야 합니다. 옛날 조상들도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했으므로 당연히 있을 것이 있으
려니 하고 외롭고, 소외될 때 슬퍼할 것이 아니고 기뻐 뛰놀 수 있어야 합니다. 영원한, 시
들지 않는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Ⅱ. 네가지 화(24-26)
첫째, 부유한 자입니다.
부유한 자에게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
유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느니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6:19-31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거지는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잣집
대문간에 누워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았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다 죽어 부자는 음부에 가고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음부
에 간 부자는 너무 고통스러워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불러 아버지 아브라함
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
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했을 때 대답이 "얘!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
을 받았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부유함으로 위로를 다 받았다는 말입니다.
또 누가복음 12:13-21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많은 재물을 쌓
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리라" 하셨습니다. 배 부른 자는 영
적으로 주려 죽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영적인 소원은 없이 땅에만 쌓고 묻느라 하나님에 대
하여 부유함이 없기 대문에 화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산산보훈에 예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
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
라"(마태6:19,20) 말씀을 하셨는데도 보물을 하늘에 쌓지 못했으므로 화이고 땅에만 쌓아서
위로를 다 받았으므로 앞으로 하나님께 받을 위로가 없으므로 화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배 부른 자입니다
배 부른 자에게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여기서 '배 부른 자"란 "주린 자"(6:21) 의 반대 개념으로 자기의
재물만을 신뢰하며 자기들의 가진 것에 만족해 하며 하나님의 필요를 느끼지 않고 사는 자
들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사는데 그것을 모르고 자기들의 가진 것에
만 만족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으므로 받아질 형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웃는 자입니다.
웃는 자 화가 있다고 하십니다. 25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뭘 해 놓고 웃습니까? 그것이 참으로 웃을 일입니까? 진정으로 기뻐서 웃을 일을 해
놓고 웃어야 할 것입니다. 썩어 없어질 일을 해 놓고 웃는다면 정말 울 일입니다. 우리가
보면 우스운 일이고 남이 보면 부끄러운 일인데 그것으로 웃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
며 회개함이 없이 의로운 심정으로 사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으므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넷째, 칭찬을 듣는 것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고 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귀만 즐겁게 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합니다. 이들은
사람들의 영광과 칭찬을 구합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참다운 선지자는 백성
들의 인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며 내 얼굴을 내지 않고 하나님
의 칭찬을 구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미움을 받기 쉽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의 생애가
그러했습니다. 우리도 성도들의 인정이나 받고 사람들의 칭찬이나 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
면 화를 당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분만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질 때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입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2)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5:20)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날이 밝으매 제자들을 부
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가르치고 훈련 하사 쓰실 것을 계획하시고 '사도'라 칭하셨
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택한 열 둘과 산에서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
도 듣고, 병고침을 얻으려고 나온 무리들에게 네가지 복과 네가지 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주신 말씀을 영접하여 진실로 복된 삶을 가질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
다.
Ⅰ. 네가지 복(20-23)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시고 이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
에 서셨습니다.(17)
그랬을 때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을 듣고, 병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 해안으로부터 많은 백성들이 동서남북 해외에서도 주의 말씀을
사모하여 모여들었습니다. 이렇게 모여든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라고 해서 산에서 말씀을 선포
하심으로서 산상보훈이라고 합니다.(마5:1) 그러나 누가복음6:17을 근거하여 예수께서 산에
서 내려오시다가 적당한 넓은 곳을 만나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평지보훈"이란 별명이 붙
게 되었습니다. 여기의 '평지'라는 것은 낱말로서 평평한 곳을 가리키고 저지대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봅니다. 아마 예수께서 힛티산정 어느 곳에서 철야 기도하시고 아침이 되어 날이
밝으매 제자들을 부르사 열 둘을 택하시고 같이 산에서 내려오시다가 적당한 넓은 여러 사
람이 앉기 좋은 곳을 택하여 보훈을 주신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5장 - 7장의 산상보훈이나 오늘 본문 20-26절의 평지보훈은 다같이 복으로 시작
을 합니다. 산상보훈은 8복인데 비하여 평지보훈의 4복(20-23) 4화(24-26)로 나타납니다.
복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며 또한 바라기도 합니다. 이 복은 고대 헬라 철학이 말
하는 인생 목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복의 비결은 각양각색으로 해석되고 설명되어
져 왔으나 주님의 교훈은 높은 견지에서 파격적이며 또한 영적이며 내세적이겠습니다만, 또
현세적이기도 합니다.
복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이 복이 눈에 보이거나 손에 만져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
는 것도 아닙니다. 또 복을 받으려고 복조리를 걸고, 부적을 붙이고 베개나 이불에나 심지
어 숟가락에 복(福)자를 새겨 둔다고 해서 복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복이란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말씀을 주십니다.
예컨데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복을 주실 때 먼저 말씀을 주십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 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
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1-2) 또 창세기 15:4에는 자식
을 주마 창15:7에는 이 땅을 네게 주마 하십니다. 먼저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영접하고
기다리며 순종하면 그것이 복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자유와 참다운 행복은 어떻게 얻습니까? 이것 역시 진리에 순종할 때 얻
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동산의 모든 나무 실과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
을 알게하는 나무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6) 하나님의 명령이
요, 약속입니다. 만약 아담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라면 낙원을 그대로 가졌으
며 파라다이스(Paradise)를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 자체는 말씀이고 그 말씀에 순종
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참 행복이요 자유이겠습니다.
신명기 11:26-28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
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쫓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 자체가 하나님
의 말씀이고 그 주신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므로 축복을 받게 되고 화를 면하게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4가지의 복과 4가지의 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
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여기서 가난한 자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
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가난하게 된 자들을 가리킵니다. 곧 경건한 삶을 위하여 살다 보니
가난하게 된 자를 의미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이겠습니다만, 당시에도 진리의 말씀대로 살려면 부자 되기가 어려웠습
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라 하셨으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삶의 모델이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베
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부친을 버리고 주님을 쫓았습니다. 세
리 마태는 세무장 자리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려두
고 주님을 쫓았습니다. 산상보훈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했는데 주님이 더 소중하고
갈급해서 육신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쫓는 삶, 갈급한 심령으로 주님의 말씀대로 살
고자 하는 경건한 삶, 이것이 가난한 것이겠습니다. 실제 제자들은 주님의 것이 더 소중하
고 갈급했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하기는 했으나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평안과 기쁨, 하
나님의 나라를 소유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대학생 선교 단체에 김 바울이라는 성도가 있습니다. 이분의 아버지는 우리
남노회 목단 교회를 시무하신 적이 있고, 일제시대 때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문을 너무 많이
받아서 목회에 꽃을 피워 보지 못하고 작고하신 목사님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영남 대
학병원 정형외과 의사로 있다가 지금은 영주 순천향 병원에 과장으로 계시는데, 의사 중에
정형외과 의사가 가장 인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번 돈을 회관을 짓는데 바
치고 남의 집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학생들과 선교 사역에 혼신을 다 바쳐 일을 합니
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었어도 그 마음 속에는 기쁨이 충만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지금 동산 병원에 척추암 4기로 입원 중에 계시는 김병환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100
명이 넘는 교회를 한 번도 시무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경건하게 살았고 개척
교회를 하며 한 영혼, 한 영혼을 위해 아낌없이 당신의 생애를 드렸습니다. 이분은 목사를
하지 않아도 넉넉히 잘 살 수 있고 세상 재미를 맛보며 살 수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위
하여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난하게 된 것을 지금도 하나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제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면서도 조금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병원에
심방을 가면서 가끔 들립니다. 들리면 제가 웃으면서 '왜 아직 안가고 있소'하면 '아버지가
오라고 해야 가지 내 마음대로 가나'하며 웃곤 합니다. 그리고 병문안 갔다가 나오면서 '다
음에 왔을 때 만나지 못하면 하나님의 집에서 만납시다' 하면 '그래요 그래' 합니다. 그 마
음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어서 그렇게 기쁘고 평화롭습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가난하
게 살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주린 자는 복이 있습니다.
21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마태복음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라고 했습니다.(마6:5) 그러므로 주린 자란 영적으
로 주린 자, 심령이 주린 자를 의미합니다. 시편 기자는 영혼의 주림과 목마름에 대하여 시
편에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 하나니 내가 어느 때
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앞에 뵈올꼬"(시42:1,2)
인간은 짐승과 달라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많이 벌고, 권력
을 손에 쥐고 육적으로 배가 불렀다 해서 참만족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인간
의 참만족과 기쁨은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거기에 영혼의 배부름과
참만족이 있습니다. 누가복음18:13절을 보면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
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
인이로소이다" 세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죄용서, 정신과 마음의 평화, 순결과 거룩함을 사모
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혼의 곤핍함을 알고 하나님께 영혼의
배부름을 구한 것입니다. 결국 세리는 의롭다 함을 받고 그 영혼의 만족을 얻고 돌아갔습
니다. 참다운 자유는 자유를 줄 자로부터 받을 때만이 자유요, 참다운 만족은 만족을 줄 자
로부터 받을 때 참다운 만족이 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M. Luther)는 카톨릭의 형식과 종교의식 그리고 조직 로마 교황청
의 권위와 전통 속에 구원이 없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어 보
려고 교황청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계단 계단에 입을 맞추며 피가 나도록 오르내렸습
니다. 그러나 그런 고행 속에도 구원이 없었습니다. 그는 참된 구원을 간절히 갈망하다 로
마서1:17,18절을 영접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
나님께서는 목마른 사슴과 같이 구원을 갈망하던 루터를 만나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영적 만족을 위해 투쟁할 때 그를 만나고 참만족함을 얻을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배부름을 얻을 것이요.
셋째,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예수님은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때에 웁니까? 슬플 때도 울고, 외로울 때도 웁니다. 또 너무 기뻐도 웁
니다. 몇 년 전에 이산 가족 찾기를 KBS에서 할 때 한 30년만에 만난 가족을 껴안고 우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 동안 헤어져서 갖은 고생을 하며 생사조차 모르던 이들을 만
나니 반가워서 울고,서러워서 울고, 고생한 것을 생각해서 울고, 통곡을 합니다. 그러나 이
렇게 우는 울음은 복 있는 자의 울음이 아닙니다. 슬플 때 실컷 울고나면 잠시 마음이 후
련해집니다. 그러나 더욱 허무함과 외로움을 또 느낍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는 자"란
그런 감상적인 눈물이 아닙니다. 자기의 죄악을 애통하며 우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치 않으신다고 시편
51:17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 모든 죄를 사해 주십니다.
사도행전 3:19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와 같이 하면 유쾌하
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했습니다. 언제 참으로 기뻐서 웃을 수 있습니까?
눈물로 죄를 애통하며 자백하고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을 때가 아닙니까? 죄 용서함을 받
은 자가 진실로 웃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 웃음입니다. 다시 슬픔이 없는 웃음입니다.
넷째,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
이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로
부터 미움을 받고 소외를 당하고 욕을 얻어먹고 많은 핍박을 당하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
다. 이번에 교회를 지으면서 교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핍박받는 분들, 돈 때문에 욕을
얻어먹고, 괜히 미움을 받고 때론 소외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고난받는 이유는 죄가 있고
나쁜 짓을 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본문에는 "인자를 인하여" 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이요,
교회 때문입니다.
베드로 전서 2:20-21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
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리라 이를 인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
었나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
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딤후:3:12) 예수를 잘 믿으면 형통해야 하는데 잘 믿
고 경건하면 할수록 어려움이 더 많고 소외당하고 핍박이 꼭 있으리라 필수적입니다.
그러면 핍박을 받을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갖어야 합니까? 23절을 보십시오. "그날에
는 기뻐하며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하였
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고 뛰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
무나 적극적입니다. 참고 견디어라가 아니고 기뻐하고 춤을 추라고 하십니다. 소외당하고
욕을 얻어먹을 때 우리는 분을 품기 쉽습니다. 이 때 주님은 춤을 추라고 하십니다. 하나
님 앞에 가면 있을 상급을 생각하며 기뻐하라 하십니다. 핍박을 받을 때는 말씀으로 위로
를 받아야 합니다. 옛날 조상들도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했으므로 당연히 있을 것이 있으
려니 하고 외롭고, 소외될 때 슬퍼할 것이 아니고 기뻐 뛰놀 수 있어야 합니다. 영원한, 시
들지 않는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Ⅱ. 네가지 화(24-26)
첫째, 부유한 자입니다.
부유한 자에게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
유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느니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6:19-31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거지는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잣집
대문간에 누워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았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다 죽어 부자는 음부에 가고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음부
에 간 부자는 너무 고통스러워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불러 아버지 아브라함
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
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했을 때 대답이 "얘!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
을 받았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부유함으로 위로를 다 받았다는 말입니다.
또 누가복음 12:13-21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많은 재물을 쌓
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리라" 하셨습니다. 배 부른 자는 영
적으로 주려 죽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영적인 소원은 없이 땅에만 쌓고 묻느라 하나님에 대
하여 부유함이 없기 대문에 화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산산보훈에 예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
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
라"(마태6:19,20) 말씀을 하셨는데도 보물을 하늘에 쌓지 못했으므로 화이고 땅에만 쌓아서
위로를 다 받았으므로 앞으로 하나님께 받을 위로가 없으므로 화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배 부른 자입니다
배 부른 자에게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여기서 '배 부른 자"란 "주린 자"(6:21) 의 반대 개념으로 자기의
재물만을 신뢰하며 자기들의 가진 것에 만족해 하며 하나님의 필요를 느끼지 않고 사는 자
들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사는데 그것을 모르고 자기들의 가진 것에
만 만족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으므로 받아질 형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웃는 자입니다.
웃는 자 화가 있다고 하십니다. 25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뭘 해 놓고 웃습니까? 그것이 참으로 웃을 일입니까? 진정으로 기뻐서 웃을 일을 해
놓고 웃어야 할 것입니다. 썩어 없어질 일을 해 놓고 웃는다면 정말 울 일입니다. 우리가
보면 우스운 일이고 남이 보면 부끄러운 일인데 그것으로 웃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
며 회개함이 없이 의로운 심정으로 사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으므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넷째, 칭찬을 듣는 것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고 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귀만 즐겁게 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합니다. 이들은
사람들의 영광과 칭찬을 구합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참다운 선지자는 백성
들의 인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며 내 얼굴을 내지 않고 하나님
의 칭찬을 구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미움을 받기 쉽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의 생애가
그러했습니다. 우리도 성도들의 인정이나 받고 사람들의 칭찬이나 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
면 화를 당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분만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질 때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입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