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춘교수  

1. 예수님은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신 구원의 주님이시다. 그러나 이 세상은 갖가지 이유로 눌린 자들의 공화국이다. 죄의 짐에 눌린 자들, 상처 입은 마음으로 눌린 자들, 질병에 눌린 자들, 미움과 저주에 눌린 자들, 불안과 열등감에 눌린 자들, 귀신에 눌린 자들, 멸시와 소외와 차별에 눌린 자들, 심지어 자기의 꿈과 계획에 눌린 자들, 가족에 눌린 자들, 직장에 눌린 자들, 이루지 못한 욕망에 눌린 자들... 이 세상은 눌린 자들의 공화국이요, 이 공화국의 통치자는 사탄이다. 사탄은 갖가지 조건과 이유와 문제와 위기들을 조성하여 사람들을 눌려 살게 하고 있다. 당신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당신의 기쁨과 감격을 눌러버리는 것들은 무엇인가?

삭개오는 눌린 자였다. 그는 키가 작아서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놀림을 당하면서 자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놀림이나 받으며 살아야 하는 열등한 인생임을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모자람을 채우기 위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권력과 돈으로 지배할 수 있는 세리장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사람들에게 차별당하고 무시당하고 불신당하는 삶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아직도 눌린 자의 삶을 살면서 가슴 아파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와 만나는 것을 싫어하고 있다. 유대의 법은 그가 사람들과의 교제를 금지시키고 있다. 그는 부자이며 세리장으로 금력과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지만 차별과 무시와 불신의 벽은 높아만 갔다. 예수님은 그런 삭개오를 찾으시고 그를 부르시고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고 수군거려도 예수님은 그것을 개의치 않으시고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삭개오와 함께 먹으며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교제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존중하시며 믿어주시고 감싸주시고 자기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시고 자기를 인정하여 주심을 마음 깊이 경험하였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신비한 하늘의 은혜를 받았다. 예수님은 그를 지금까지 눌러왔던 과거의 옹벽을 깨뜨렸다. 그는 과거의 눌림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이제 더 이상 돈으로 세상을 지배하려고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더 이상 죄를 지을 필요가 없어졌다. 예수님이 그의 눌림을 풀어 자유케 하시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셨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존중받는 사람이 되었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래서 그는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들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2. 40대 중반의 우울증

40대 중반의 대학교수가 우울증에 빠져 좌절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그녀를 아는 사람이면 그녀가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의아해 할 것이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 두 자녀의 엄마로서 부유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겉으로 보면 우울증에 걸려야할 아무런 문제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녀는 모든 면에서 사람들이 부러워할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심각한 우울증 증세로 시달리고 있다. 상담자는 그녀와 상담하는 중에 그녀의 아동기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아동기의 결정된 자기 인생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두 살 위의 언니와 함께 작은 이모의 베이비 씨팅을 받으며 자랐다. 그 때 그녀는 4-5세 때였다. 그녀의 이모는 그녀 자매를 돌보면서 자주 자매를 비교했다. 그녀는 언니보다 못생겨서 얼굴 가지고는 행세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녀는 이모의 말을 들으면서 자주 거울 앞에 앉아서 자기 얼굴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결심을 하였다. 얼굴이 못생겼으면 다른 것으로라도 언니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그것은 아주 어린 나이의 결심이었지만 그녀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새겨졌다. 그녀는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부터 못생긴 얼굴을 보상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 학교에서 줄 곳 일등을 하였다. 그녀는 박사과정까지 끝마치고 대학교수가 되었다. 지금은 남이 부러워할 정도의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되었지만 거울 앞에만 앉으면 그때부터 과거의 열등감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는 지금도 항상 거울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쉬고 어째서 언니처럼 잘 생기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어렸을 때와 같이 사람들이 자기를 보며 못생겼다고 조롱하는 것 같아 불안해지고 두려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우울증 증세가 찾아온 것이다. 어렸을 때의 이모의 장난삼아 했던 말들이 그녀를 평생 사로잡아 놓아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이모는 조카에게 장난삼아 이야기했지만 어린 조카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자기상을 만들어 갔다. ''나는 못생겼다. 사람들은 나를 못생겼다고 비웃을 것이다. 나는 못생겼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창피하다.'' 이런 생각들이 그녀의 자화상을 결정하면서 그녀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I am not OK)의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그녀의 나이 40이 넘었지만 그녀는 아동기의 인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에 빠져 있는 것이다. 우리의 판단과 비교와 정죄와 무시는 독이 되어서 사람들을 저주의 인생 속으로 몰아 넣는다. 반면에 우리의 존중과 신뢰와 용서와 돌봄은 하나님의 치료의 통로가 되어서 저주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한다.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존중과 용서와 감싸주심과 덮어주심을 깨달으면서 차츰 차츰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치료를 위해서는 그를 신뢰하고 존중하는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뢰와 존중을 받아야 했다. 삭개오의 응어리진 가슴을 녹이신 예수님은 그녀의 응어리진 마음 속에도 따사로운 햇살을 비추어 주셨다.

3. 흠 있는 진주

존 스타인백의 소설 흠 있는 진주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진주를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소원 가운데 하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진주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그는 멋진 진주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만 들으면 그곳에 찾아가 그 진주를 감정하였다. 드디어 그는 가장 크고 멋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고 상당한 비용을 들여서 그 진주를 구입하였다. 그는 그 진주를 들고 요리 조리 관찰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 진주에 아주 조그만 흠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는 그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 흠을 깎아내기로 작정하였다. 진주는 한 꺼풀씩 덮이면서 자란 것이기 때문에 그 흠을 없애려고 한다면 아깝지만 진주를 한 꺼풀 벗겨내야 한다. 그러나 흠 없는 진주를 만들기 위하여 그는 진주를 벗겨내기로 하였다. 그는 정성을 다해 한 꺼풀을 벗겨내었다. 그리고 그 진주를 자세해 보니 아직도 흠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벗겨내었다. 그러나 흠을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는 그 흠이 없어질 때까지 벗겨내고 벗겨내기를 계속하였다. 그러다보니 그 흠이 다 없어졌는데 그 진주도 다 닳아 없어지고 말았다. 인간은 흠 있는 진주이다. 인간이 완벽하기를 바란다면 결국 세상을 떠나는 것밖에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흠을 없애기보다는 그 흠을 감싸주고 그 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존중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흠을 제거하시는 기술자가 아니다. 예수님은 흠을 아름답게 가리우고 빛나는 곳을 더 빛나게 만드는 분이시다. 비록 흠이 있을지라도 감싸고 덮어주며 빛나는 곳을 더 빛나게 만들어주며 존중하는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이다. 우리가 그 예수님을 모실 때에 예수님은 우리의 지체들을 사용하여 그 사랑을 이루어 나갈 것이다.

4. 기도

흠 있는 자를 정죄하러 오시지 않고 그 흠을 가리워주시기 위해 오신 주 예수님, 흠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오시옵소서. 정의는 구부러지고, 사랑은 미움으로 변하고 온전함은 얼룩으로 가득한 이 세상은 흠을 가리우는 주님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나는 흠으로 갈라진 쓸모 없는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오셔서 이 흠을 가리워 주지 않으면 나는 아무 쓸모 없는 존재로서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주님 제게 오시옵소서. 그래서 나를 아름다운 진주로 만들어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들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