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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내 기도가 하나님에게 거절당할 수도 있는데...
거지 철학자로 알려진 디오게네스가 한 동상 앞에 서서 손을 벌려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그렇게 서 있는 디오게네스를 보고 어떤 사람이 “왜 하필 동상에게 구걸을 하시오?”라고 묻자 디오게네스는 “나는 거절당하는 것을 연습하고 있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거절당하는 연습이라! 여러분은 기도하면서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에게 거절당할 수도 있음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내가 드리는 요구를 들으시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듣긴 듣지만 듣고서도 거절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셨느냐는 말씀입니다. 만일 해본 적이 있다면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봤는지 따져볼 일입니다.
기도가 하나님에게서 거절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일을 ‘의심’이라고 부르며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므로 ‘의심’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다만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내가 하나님께 하는 요구가 거절당할 수도 있음을 고려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 우리는 시편 7편을 읽었습니다. 이 시편은 널리 알려져 있는 시편은 아닙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이 시편을 처음 읽어보는 분도 있을 터이고 또 읽어봤다 하더라도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분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적어도 “시편 7편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편이다.”라고 말할 분은 없을 것입니다. 무엇이든 유명하게 됐다면 거기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나 소설이나 영화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개인의 취향일 따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명해지지 않은 것을 모두 별 볼일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명하지 않은 것들 중에도 좋은 작품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시편 7편이 그런 시편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은 그런 시편 7편을 읽어보겠습니다.
야훼, 나의 하나님! 당신께 이 몸 피하오니
나를 뒤쫓는 모든 자들에게서 구하시고 살려 주소서.
사자처럼 달려들어 이 목숨 발기발기 찢어도
살려줄 자 어디 있사옵니까?
시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이 시에 “베냐민 사람 구스의 일 때문에 야훼께 바친 다윗의 애가”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데 이 표제도 시인이 처해 있는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베냐민 사람 구스와 다윗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예 베냐민 족속에 속한 구스라는 사람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이 좌우간 매우 급박한 상황에 있음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를 뒤쫓고 있습니다. 그들은 집요할 뿐 아니라 무지막지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시인을 죽이려 합니다. 사자처럼 달려들어 그의 목숨을 발기발기 찢어버리려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 놓여 있는 시인을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사자처럼 달려들어 이 목숨 발기발기 찢어도 살려줄 자 어디 있사옵니까?” 시인을 도와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자기 한 몸 피할 데는 오로지 한 곳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야훼 하나님입니다. “야훼, 나의 하나님! 당신께 이 몸 피하오니...” 피할 데라고는 야훼 한 분뿐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듯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시인은 왜 쫓기고 있을까요? 그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토록 급박하게 쫓기고 있을까요? 그를 뒤쫓는 사람은 왜 그토록 집요하고 사정없이 그를 쫓고 있을까요?
야훼, 나의 하나님!
아무려면 제가 이런 짓을 했으리이까?
이 손으로 받지 못할 것을 받기라도 했다면
친구에게 선을 악으로 갚기라도 했다면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를 살려주기라도 했다면
원수들이 이 몸을 따라잡아 밟아 죽여도 좋사옵니다.
창자가 터져 흙 범벅이 되어도 좋사옵니다.
시인은 자신이 무죄하다고 항변합니다. “야훼, 나의 하나님! 아무려면 제가 이런 짓을 했겠습니까?” 그는 절대 무죄함을 주장합니다. 만일 자기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는 원수들에게 밟혀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창자가 터져 흙 범벅이 되어도 좋다고도 했습니다.
맹세하지 말라 하셨는데...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거짓맹세 하지 말라. 그리고 주께 맹세한 것은 다 지켜라.”라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아예 맹세하지 말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고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5:33-37).
저는 한국 뉴스를 볼 때 자주 이 말씀을 떠올립니다. 비리를 저질러 검찰청사로 조사 받으러 들어가는 고위공직자들은 하나같이 ‘하늘을 두고’ 자기는 떳떳하다고 말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윤동주 시인의 시 구절을 인용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땅속에서 얼마나 기가 막힐까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며칠 후에는 자기들이 저지른 비리가 다 드러나 결국은 수갑을 차고 구치소로 향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시편 7편의 시인은 만일 자기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맹세’합니다. 훗날 예수님이 절대로 하지 말라 하셨던 행동을 한 셈입니다. 여기서 ‘맹세’는 법정에서 행하는 엄숙한 행위로서의 맹세입니다. 이는 법정에서 법관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는 행위로서 비리 공직자들이 검찰청에 들어가면서 기자들 앞에서 하는 맹세와는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맹세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죄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완벽한 사람임을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기를 뒤쫓는 자들이 자기에게 뒤집어씌운 죄에 대해서 무죄하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만일 그들이 고소하는 내용에 대해서 자신의 죄가 밝혀진다면 모든 저주를 뒤집어쓰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자신에 대해서 떳떳한 사람이 하나님께 ‘항변’할 자격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할 자격이 있습니다.
정의의 판결을 내려 주소서!
그 다음 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야훼여! 의분을 일으켜 일어나소서.
미쳐 날뛰는 원수들의 기를 꺾어 주소서.
나의 하나님! 일어나시어 판결을 내려주소서.
만민을 한 자리에 모으시고 그 가운데 높다랗게 자리를 잡으소서.
민족들의 재판관이신 야훼여, 이 몸은 아무 허물이 없사오니
야훼여, 바른 판결을 내려주소서.
사람의 마음 속, 뱃속을 헤쳐 보시는 공정하신 하나님,
악한 자들이 다시는 설치지 못하게 하시고
무죄한 사람들을 뒷받침해 주소서.
“나의 하나님! 일어나시어 판결을 내려주소서.” 시인은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 편을 들어달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옳은 편을 들어 달라는 요구입니다. 만일 자기가 옳지 않다면 적대자의 손을 들어달라는 요구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하는 일은 매우 용감한 행위이고 자신의 이익에 사로잡혀 그것만을 집착하는 사람은 이런 요구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정의를 펼치시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이 요구가 가능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믿음, 때가 이르면 반드시 당신의 정의를 펼치시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요즘 이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저도 이 믿음이 흔들릴 때가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을 어떻게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워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시대가 우리의 믿음을 흔듭니다. 악이 기승을 부리고 정의는 땅에 떨어진 것 같이 보입니다. 논리적으로 보나 인륜으로 보나 도저히 말도 되지 않는 일들이 세계 방방곡곡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악이 인륜을 저버린 지는 이미 오래됐지만 이제는 최소한의 논리조차 내팽개쳐 버렸습니다. 보복이 보복을 부릅니다. 때로는 보복을 하기 위해서 함정을 파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좌절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계시는 것인가? 계시다면 지금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이런 불의를 하나님은 어떻게 묵과하시는가? 이런 항변 섞인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악이 기승을 부리는 것은 악의 힘이 강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악이 적나라한 폭력 말고는 스스로의 악한 뜻을 펼칠 수 없기 때문에 기승을 부리는 것입니다. 악이 강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기승을 부린다는 역설이 가능합니다. 어둠이 가장 짙어질 때 새벽이 다가온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악이 적나라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지배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질 때가 그리 멀지 않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정의를 ‘감히’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내 양심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 양심이 살아 있을 때만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는 여러 면이 있는데 그 중에서 양심을 벼리는 일이 중요한 면을 차지합니다. 양심의 날을 세우는 일, 그것이 신앙입니다. 시편 7편의 시인이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옳고 그름을 판결해 달라고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양심이 시퍼렇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교회를 다니고 신앙을 갖게 되면 적어도 그 전보다 더 좋은 인간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여기서 더 ‘좋은 사람’이란 단순히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양심적인 사람’을 가리킵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양심적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양심이 더러운 사람이 기도를 많이 한들 하나님이 들으시겠습니까? 양심을 갈고 닦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의 기도(이걸 기도라고 할 수 있겠냐마는)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성경을 읽은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그가 헌금을 많이 한들 그것이 하늘 곳간에 쌓이겠습니까?
그런데 교회에 다니면서 오히려 더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욕심과 탐욕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동기’나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착각하게 하고 이기적인 욕심과 탐욕을 제어하기는커녕 오히려 조장하고 북돋는 경향이 교회에 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이기심과 탐욕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인간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간의 양심은 그것을 견제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심어놓은 당신의 ‘목소리’입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무한정 커지지 않는 것은 양심이 그것을 견제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이 양심을 더욱 날카롭게 벼려줘야 합니다. 늦가을 아침에 내린 서릿발처럼 양심을 차갑고 날카롭게 닦아주어야 올바른 신앙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면서 그것을 ‘벼리기’는커녕 무디게 하고 ‘버리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정이나 수단은 어찌 됐든지 남보다 잘 되고 남보다 많이 갖고 남을 딛고 서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정해줌으로써 양심에 의해 견제되던 이기심과 탐욕에 날개를 달아줍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면 양심 때문에 조금은 마음에 걸려 하고 불편해 했을 일이 교회에 다니면서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하고 궁극적으로는 삶의 태도와 방식을 바꾸어야 할 텐데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냥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 번 목소리 크게 외쳐보는 일이 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매우 진지하고 엄숙한 행위이고 그 요구에 맞는 삶을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를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 하는 일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피한다고 노래했는데 이 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게서 피난처를 찾는다는 기도는, 물론 물에 빠졌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마음으로 그런 기도를 드릴 때도 있지만, 온갖 죄를 다 짓고 정의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쫓기면서 드리는 기도는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앙과 더불어 자기 양심이 살아 있을 때만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말씀했듯이 시편 7편은 결코 유명한 시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유명하지 않는 시편 7편이 이렇게 강하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인간은 모두 죄인이므로 하나님에게 정의를요구할 수 없다고 믿지 않습니다. ‘죄인 주제에 뭘...’하는 생각을 옳지 않습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시편 7편의 시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에 대해서, 인간 전체에 대해서 ‘인간은 어쩔 수 없어!’라고 하며 비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 안에 심어놓으신 ‘양심’을 날카롭게 벼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정의를 요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정의를 요구하고,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요구를 들으시고 거기 응답하심으로써 당신의 정의를 이 땅 위에서 이루는 일, 저는 하나님께서 이것을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
내 기도가 하나님에게 거절당할 수도 있는데...
거지 철학자로 알려진 디오게네스가 한 동상 앞에 서서 손을 벌려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그렇게 서 있는 디오게네스를 보고 어떤 사람이 “왜 하필 동상에게 구걸을 하시오?”라고 묻자 디오게네스는 “나는 거절당하는 것을 연습하고 있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거절당하는 연습이라! 여러분은 기도하면서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에게 거절당할 수도 있음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내가 드리는 요구를 들으시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듣긴 듣지만 듣고서도 거절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셨느냐는 말씀입니다. 만일 해본 적이 있다면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봤는지 따져볼 일입니다.
기도가 하나님에게서 거절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일을 ‘의심’이라고 부르며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므로 ‘의심’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다만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내가 하나님께 하는 요구가 거절당할 수도 있음을 고려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 우리는 시편 7편을 읽었습니다. 이 시편은 널리 알려져 있는 시편은 아닙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이 시편을 처음 읽어보는 분도 있을 터이고 또 읽어봤다 하더라도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분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적어도 “시편 7편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편이다.”라고 말할 분은 없을 것입니다. 무엇이든 유명하게 됐다면 거기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나 소설이나 영화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개인의 취향일 따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명해지지 않은 것을 모두 별 볼일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명하지 않은 것들 중에도 좋은 작품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시편 7편이 그런 시편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은 그런 시편 7편을 읽어보겠습니다.
야훼, 나의 하나님! 당신께 이 몸 피하오니
나를 뒤쫓는 모든 자들에게서 구하시고 살려 주소서.
사자처럼 달려들어 이 목숨 발기발기 찢어도
살려줄 자 어디 있사옵니까?
시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이 시에 “베냐민 사람 구스의 일 때문에 야훼께 바친 다윗의 애가”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데 이 표제도 시인이 처해 있는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베냐민 사람 구스와 다윗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예 베냐민 족속에 속한 구스라는 사람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이 좌우간 매우 급박한 상황에 있음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를 뒤쫓고 있습니다. 그들은 집요할 뿐 아니라 무지막지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시인을 죽이려 합니다. 사자처럼 달려들어 그의 목숨을 발기발기 찢어버리려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 놓여 있는 시인을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사자처럼 달려들어 이 목숨 발기발기 찢어도 살려줄 자 어디 있사옵니까?” 시인을 도와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자기 한 몸 피할 데는 오로지 한 곳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야훼 하나님입니다. “야훼, 나의 하나님! 당신께 이 몸 피하오니...” 피할 데라고는 야훼 한 분뿐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듯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시인은 왜 쫓기고 있을까요? 그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토록 급박하게 쫓기고 있을까요? 그를 뒤쫓는 사람은 왜 그토록 집요하고 사정없이 그를 쫓고 있을까요?
야훼, 나의 하나님!
아무려면 제가 이런 짓을 했으리이까?
이 손으로 받지 못할 것을 받기라도 했다면
친구에게 선을 악으로 갚기라도 했다면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를 살려주기라도 했다면
원수들이 이 몸을 따라잡아 밟아 죽여도 좋사옵니다.
창자가 터져 흙 범벅이 되어도 좋사옵니다.
시인은 자신이 무죄하다고 항변합니다. “야훼, 나의 하나님! 아무려면 제가 이런 짓을 했겠습니까?” 그는 절대 무죄함을 주장합니다. 만일 자기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는 원수들에게 밟혀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창자가 터져 흙 범벅이 되어도 좋다고도 했습니다.
맹세하지 말라 하셨는데...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거짓맹세 하지 말라. 그리고 주께 맹세한 것은 다 지켜라.”라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아예 맹세하지 말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고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5:33-37).
저는 한국 뉴스를 볼 때 자주 이 말씀을 떠올립니다. 비리를 저질러 검찰청사로 조사 받으러 들어가는 고위공직자들은 하나같이 ‘하늘을 두고’ 자기는 떳떳하다고 말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윤동주 시인의 시 구절을 인용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땅속에서 얼마나 기가 막힐까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며칠 후에는 자기들이 저지른 비리가 다 드러나 결국은 수갑을 차고 구치소로 향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시편 7편의 시인은 만일 자기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맹세’합니다. 훗날 예수님이 절대로 하지 말라 하셨던 행동을 한 셈입니다. 여기서 ‘맹세’는 법정에서 행하는 엄숙한 행위로서의 맹세입니다. 이는 법정에서 법관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는 행위로서 비리 공직자들이 검찰청에 들어가면서 기자들 앞에서 하는 맹세와는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맹세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죄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완벽한 사람임을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기를 뒤쫓는 자들이 자기에게 뒤집어씌운 죄에 대해서 무죄하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만일 그들이 고소하는 내용에 대해서 자신의 죄가 밝혀진다면 모든 저주를 뒤집어쓰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자신에 대해서 떳떳한 사람이 하나님께 ‘항변’할 자격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할 자격이 있습니다.
정의의 판결을 내려 주소서!
그 다음 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야훼여! 의분을 일으켜 일어나소서.
미쳐 날뛰는 원수들의 기를 꺾어 주소서.
나의 하나님! 일어나시어 판결을 내려주소서.
만민을 한 자리에 모으시고 그 가운데 높다랗게 자리를 잡으소서.
민족들의 재판관이신 야훼여, 이 몸은 아무 허물이 없사오니
야훼여, 바른 판결을 내려주소서.
사람의 마음 속, 뱃속을 헤쳐 보시는 공정하신 하나님,
악한 자들이 다시는 설치지 못하게 하시고
무죄한 사람들을 뒷받침해 주소서.
“나의 하나님! 일어나시어 판결을 내려주소서.” 시인은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 편을 들어달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옳은 편을 들어 달라는 요구입니다. 만일 자기가 옳지 않다면 적대자의 손을 들어달라는 요구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하는 일은 매우 용감한 행위이고 자신의 이익에 사로잡혀 그것만을 집착하는 사람은 이런 요구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정의를 펼치시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이 요구가 가능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믿음, 때가 이르면 반드시 당신의 정의를 펼치시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요즘 이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저도 이 믿음이 흔들릴 때가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을 어떻게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워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시대가 우리의 믿음을 흔듭니다. 악이 기승을 부리고 정의는 땅에 떨어진 것 같이 보입니다. 논리적으로 보나 인륜으로 보나 도저히 말도 되지 않는 일들이 세계 방방곡곡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악이 인륜을 저버린 지는 이미 오래됐지만 이제는 최소한의 논리조차 내팽개쳐 버렸습니다. 보복이 보복을 부릅니다. 때로는 보복을 하기 위해서 함정을 파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좌절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계시는 것인가? 계시다면 지금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이런 불의를 하나님은 어떻게 묵과하시는가? 이런 항변 섞인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악이 기승을 부리는 것은 악의 힘이 강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악이 적나라한 폭력 말고는 스스로의 악한 뜻을 펼칠 수 없기 때문에 기승을 부리는 것입니다. 악이 강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기승을 부린다는 역설이 가능합니다. 어둠이 가장 짙어질 때 새벽이 다가온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악이 적나라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지배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질 때가 그리 멀지 않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정의를 ‘감히’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내 양심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 양심이 살아 있을 때만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는 여러 면이 있는데 그 중에서 양심을 벼리는 일이 중요한 면을 차지합니다. 양심의 날을 세우는 일, 그것이 신앙입니다. 시편 7편의 시인이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옳고 그름을 판결해 달라고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양심이 시퍼렇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교회를 다니고 신앙을 갖게 되면 적어도 그 전보다 더 좋은 인간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여기서 더 ‘좋은 사람’이란 단순히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양심적인 사람’을 가리킵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양심적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양심이 더러운 사람이 기도를 많이 한들 하나님이 들으시겠습니까? 양심을 갈고 닦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의 기도(이걸 기도라고 할 수 있겠냐마는)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성경을 읽은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그가 헌금을 많이 한들 그것이 하늘 곳간에 쌓이겠습니까?
그런데 교회에 다니면서 오히려 더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욕심과 탐욕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동기’나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착각하게 하고 이기적인 욕심과 탐욕을 제어하기는커녕 오히려 조장하고 북돋는 경향이 교회에 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이기심과 탐욕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인간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간의 양심은 그것을 견제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심어놓은 당신의 ‘목소리’입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무한정 커지지 않는 것은 양심이 그것을 견제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이 양심을 더욱 날카롭게 벼려줘야 합니다. 늦가을 아침에 내린 서릿발처럼 양심을 차갑고 날카롭게 닦아주어야 올바른 신앙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면서 그것을 ‘벼리기’는커녕 무디게 하고 ‘버리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정이나 수단은 어찌 됐든지 남보다 잘 되고 남보다 많이 갖고 남을 딛고 서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정해줌으로써 양심에 의해 견제되던 이기심과 탐욕에 날개를 달아줍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면 양심 때문에 조금은 마음에 걸려 하고 불편해 했을 일이 교회에 다니면서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하고 궁극적으로는 삶의 태도와 방식을 바꾸어야 할 텐데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냥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 번 목소리 크게 외쳐보는 일이 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매우 진지하고 엄숙한 행위이고 그 요구에 맞는 삶을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를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 하는 일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피한다고 노래했는데 이 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게서 피난처를 찾는다는 기도는, 물론 물에 빠졌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마음으로 그런 기도를 드릴 때도 있지만, 온갖 죄를 다 짓고 정의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쫓기면서 드리는 기도는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앙과 더불어 자기 양심이 살아 있을 때만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말씀했듯이 시편 7편은 결코 유명한 시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유명하지 않는 시편 7편이 이렇게 강하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인간은 모두 죄인이므로 하나님에게 정의를요구할 수 없다고 믿지 않습니다. ‘죄인 주제에 뭘...’하는 생각을 옳지 않습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시편 7편의 시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에 대해서, 인간 전체에 대해서 ‘인간은 어쩔 수 없어!’라고 하며 비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 안에 심어놓으신 ‘양심’을 날카롭게 벼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정의를 요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정의를 요구하고,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요구를 들으시고 거기 응답하심으로써 당신의 정의를 이 땅 위에서 이루는 일, 저는 하나님께서 이것을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