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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시편은 기도와 찬양의 책
9월 한 달 동안은 시편을 본문으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성서주기표에 따라 매주일 예배 중에 시편 한 편씩을 읽으면서도 저는 정작 시편을 본문으로 설교해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심각한 불균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달이라는 기간이 150편으로 이루어진 시편을 묵상하고 교훈을 얻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기간이지만 그나마 그간의 불균형을 바로 잡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시편은 노래와 기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50편의 시편들은 대부분 구체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던 시인이 그 상황 속에서 경험한 독특한 경험을 통해 느끼고 깨달은 바를 노래한 시들입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하나님께 간구하거나 불평하거나 감사의 마음으로 부른 노래들이 시편입니다. 이 중에는 시인의 이름이 붙어 있는 시편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편들을 누가 지었는지 모릅니다. 이 중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연을 담고 있는 노래도 있지만 대부분은 공동체의 기도와 환희와 고통, 그리고 염원을 담고 있는 노래들입니다.
현재 구약성경 시편에 수록되어 있는 150편의 시편들이 주제별로나 시대별로 배열되어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특별한 의도를 갖고 현재의 순서대로 편집해 놓은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첫 시편인 1편과 마지막 시편인 150편은 명백하게 특별한 의도를 갖고 현재의 자리에 갖다 놓은 것입니다. 두 시편은 모두 각각 독립적인 노래이기도 하지만 시편이라는 책 전체를 열고 닫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시편 1편을 읽겠지만 아무래도 이번 기회에는 마지막 시편을 읽지 못할 것 같으니 지금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할렐루야,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하늘에서 그 위력을 찬미하여라.
엄청난 일을 하셨다, 그를 찬미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시다, 찬미하여라.
나팔소리 우렁차게 그를 찬미하여라.
거문고와 수금 타며 찬미하여라.
북치고 춤추며 그를 찬미하여라.
자바라를 치며 그를 찬미하여라.
징을 치며 찬미하여라.
숨 쉬는 모든 것들아, 야훼를 찬미하여라.
할렐루야.
이 시편에는 모두 10번 ‘찬미하라’는 명령형 동사가 등장합니다. 그 중 두 번은 찬미할 ‘장소’와 관련이 있고 두 번은 찬미의 ‘이유’와 관련되어 있으며, 네 번은 어떤 악기를 갖고 찬미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마지막으로 ‘누가’ 찬미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감정적으로 매우 고조되어 있고 뜨겁습니다. 읽기만 해도 그 열기와 에너지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나팔과 거문도, 수금과 북과 자바라 등 여러 가지 악기들을 열정적으로 연주하면서 목소리를 높여서 노래 부르며 찬양하는 분위기입니다. 성경의 시편은 이렇게 고조된 감정 속에서 종결됩니다.
시편 1편은 사색의 노래
이에 반해서 전체 시편을 여는 시인 1편은 열정적인 찬양도 아니고 넘치는 감사의 기도도 아니며 고뇌 가득한 탄원의 기도도 아닙니다. 그것은 깊은 사색을 담고 있는 명상적인 노래입니다.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따라 열매 맺으리.
사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야훼께서 심판하실 때에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악한 자의 길을 멸망에 이르나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
흥겹고 요란하게 악기를 연주하며 목소리 높여 부를 노래가 아닙니다. 조용히 사색하며 읽어야 마땅한 시편입니다. 시편 1편은 시편 전체를 읽는 가이드의 역할을 하는 시입니다. 그런 시편 1편이 복된 삶의 길은 어떤 길인가에 대한 사색의 노래라는 점은 중요한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누가 썼는지 알지 못하지만 잘 읽어보면 시인은 인생을 오래, 그리고 깊게 살았던 나이 많은 현자(賢者)였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누가 복된 사람인가?
시편 1편은 ‘복되어라’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시편은 복된 사람은 누구인가, 과연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에 대해 사색하는 노래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보통 ‘복되다’라고 표현할 때는 ‘바루크’라는 말을 쓰는데 여기서는 ‘아쉬레’라는 말을 썼습니다. 뜻이 비슷한 말이기는 하지만 둘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도 있습니다. ‘바루크’는 대체로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서 누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귀중한 것을 받아서 누리기 때문에 복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무조건적입니다. 은총은 그것을 주시는 분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자격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그것을 받아 누립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말처럼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넘친다고 해서 일부러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한편 ‘아쉬레’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만한 행위나 성격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아쉬레’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를 지칭하는 데 사용됩니다.
누가 복된 사람입니까? 1절은 이런 사람은 복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는 사람과 죄인들의 길을 거니는 사람, 그리고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그들입니다. 공동번역은 ‘those who take the path that sinners tread’를 ‘죄인들의 길을 거니는 사람’이라고 번역했는데 ‘거닐다’라는 동사는 아무래도 잘못 선택한 것 같습니다. 원문은 의지를 갖고 의도적으로 죄인들이 가는 길을 선택한 사람을 가리키는데 ‘거닐다’라는 동사는 목적 없이 어슬렁거린다는 뜻으로 들리니 말입니다. 한편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는 사람’이 특별히 언급됐습니다. 조소하는 사람은 악을 꾸미는 자들과 죄인에 비해서 훨씬 덜 나쁜 사람처럼 생각되는데 시편 1편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복되지 않은 사람의 대표 격으로 들고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조소’(scorn)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대하고 심각한 악입니다. ‘조소’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습니다. 조소하는 사람의 영혼은 밝지 않고 늘 어둡고 부정적입니다. 이런 어둡고 부정적인 토양에서 좋은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2절은 이런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복된 사람은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야훼의 법’은 민법이나 형법 같이 법조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야훼 하느님의 ‘가르침’(teaching, instruction. 히브리어 ‘토라’가 본래 이런 뜻입니다.)을 뜻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희랍어로 번역할 때 ‘토라’라는 말을 번역할 마땅한 희랍어 단어를 찾지 못해서 ‘법’(노모스)으로 번역했는데 이로 인해서 ‘토라’를 ‘법조문’으로 오해하는 혼란이 생겼습니다.
복된 사람은 토라를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곧 토라 안에서 기쁨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토라 안에서 기쁨을 얻기 때문에 밤낮으로 토라를 되새기는 사람, 곧 토라를 묵상하고 사색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복된 사람은 어떤 삶을 사는지, 그런 사람의 삶을 어떻게 비유할 수 있는지를 말합니다. 그 사람은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 제 철따라 열매 맺”는다고 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대체로 땅이 척박합니다. 그래서 식물이 어디 뿌리내리고 있는가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됩니다. 메마른 땅에 씨앗이 떨어지면 죽습니다. 물가에 떨어졌다고 해도 우기(雨期)에만 잠깐 물이 흐르다가 건기(乾期)에는 물이 말라버리는 와디(wadi)에 씨앗이 떨어지면 결국은 죽습니다. 우기뿐 아니라 건기에도 물이 마르지 않은 냇가에 심어진 나무, 이런 나무만이 늘 푸른 잎사귀를 가진 나무요 제 철따라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시인은 복된 사람이 누릴 삶을 이렇듯 비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된 사람의 반대는 ‘악인’입니다. “사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 야훼께서 심판하실 때에 /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 끼지도 못하리라.” 시인은 악인의 운명을 한 마디로 ‘바람에 까불리는 겨’로 표현했습니다. 악인의 극적인 운명을 멸망이나 심판과 같은 말로 섬뜩하게 표현하지 않고 ‘바람에 까불리는 겨’라는 말로 표현하여 악인의 운명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악인의 삶은 실체와 내용이 없는 환영(幻影)이나 환각(幻覺), 또는 한바탕 헛된 꿈과 같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가?
시편 1편은 의인과 악인을 선명하게 구분합니다. 복잡한 현대인의 생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둘 사이의 구분이 분명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의인과 악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중간, 또는 회색의 존재를 시편 1편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 의롭고 부분적으로 악한 사람은 없습니다. 80%는 의인이고 20%는 악인인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사람은 의인이 아니면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현대인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말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선한 구석이 어딘가에는 있게 마련입니다. 이는 현대인만의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시편 1편이 쓰이고 노래 불리던 시절에도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1편은 ‘중간은 없다’는 전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 전제는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감이 없어 보입니다.
시편 1편은 ‘무엇이 그의 삶을 이끌어 가는가?’라는 기준을 갖고 의인과 악인을 구분합니다. 구체적인 행위, 단편적인 삶의 모습을 갖고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이끌어가는 궁극적인 원칙과 원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의인과 악인을 구분합니다.
시편 1편은 삶을 시간을 통한 긴 여행이라고 보고 있는 듯합니다. 인생은 두 개의 길 중에서 하나의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길은 오직 두 개밖에 없습니다. 의인의 길은 하나님의 가르침(토라)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고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여 하나님의 길을 나의 삶의 길로 삼는 것이고, 악인의 길은 자신의 삶의 길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 결정이 삶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의인은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이 철따라 무성한 잎사귀를 내고 열매를 맺습니다. 악인은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 같이 허무한 삶을 살고 결국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고 맙니다.
시편 1편이 인생을 너무 단순하게 본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복잡한 가지들을 쳐내고 핵심으로 파고 들어가면 결국 문제는 둘 중 하나가 아닙니까? 부수적인 것들과 비본질적인 것들을 추려내고 나면 결국 우리가 부딪치는 문제는 하나가 아닙니까? 결국은 인생을 내 의지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욕심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나보다 더 큰 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 것인가, 둘 중 하나가 아닙니까? 시편 1편은 궁극적으로 이 점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길은 각자의 종착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삶은 각각 도달할 종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를 향해 어떤 삶을 살다가 어떤 종착점에 도달하시렵니까? ♣
시편은 기도와 찬양의 책
9월 한 달 동안은 시편을 본문으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성서주기표에 따라 매주일 예배 중에 시편 한 편씩을 읽으면서도 저는 정작 시편을 본문으로 설교해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심각한 불균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달이라는 기간이 150편으로 이루어진 시편을 묵상하고 교훈을 얻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기간이지만 그나마 그간의 불균형을 바로 잡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시편은 노래와 기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50편의 시편들은 대부분 구체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던 시인이 그 상황 속에서 경험한 독특한 경험을 통해 느끼고 깨달은 바를 노래한 시들입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하나님께 간구하거나 불평하거나 감사의 마음으로 부른 노래들이 시편입니다. 이 중에는 시인의 이름이 붙어 있는 시편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편들을 누가 지었는지 모릅니다. 이 중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연을 담고 있는 노래도 있지만 대부분은 공동체의 기도와 환희와 고통, 그리고 염원을 담고 있는 노래들입니다.
현재 구약성경 시편에 수록되어 있는 150편의 시편들이 주제별로나 시대별로 배열되어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특별한 의도를 갖고 현재의 순서대로 편집해 놓은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첫 시편인 1편과 마지막 시편인 150편은 명백하게 특별한 의도를 갖고 현재의 자리에 갖다 놓은 것입니다. 두 시편은 모두 각각 독립적인 노래이기도 하지만 시편이라는 책 전체를 열고 닫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시편 1편을 읽겠지만 아무래도 이번 기회에는 마지막 시편을 읽지 못할 것 같으니 지금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할렐루야,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하늘에서 그 위력을 찬미하여라.
엄청난 일을 하셨다, 그를 찬미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시다, 찬미하여라.
나팔소리 우렁차게 그를 찬미하여라.
거문고와 수금 타며 찬미하여라.
북치고 춤추며 그를 찬미하여라.
자바라를 치며 그를 찬미하여라.
징을 치며 찬미하여라.
숨 쉬는 모든 것들아, 야훼를 찬미하여라.
할렐루야.
이 시편에는 모두 10번 ‘찬미하라’는 명령형 동사가 등장합니다. 그 중 두 번은 찬미할 ‘장소’와 관련이 있고 두 번은 찬미의 ‘이유’와 관련되어 있으며, 네 번은 어떤 악기를 갖고 찬미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마지막으로 ‘누가’ 찬미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감정적으로 매우 고조되어 있고 뜨겁습니다. 읽기만 해도 그 열기와 에너지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나팔과 거문도, 수금과 북과 자바라 등 여러 가지 악기들을 열정적으로 연주하면서 목소리를 높여서 노래 부르며 찬양하는 분위기입니다. 성경의 시편은 이렇게 고조된 감정 속에서 종결됩니다.
시편 1편은 사색의 노래
이에 반해서 전체 시편을 여는 시인 1편은 열정적인 찬양도 아니고 넘치는 감사의 기도도 아니며 고뇌 가득한 탄원의 기도도 아닙니다. 그것은 깊은 사색을 담고 있는 명상적인 노래입니다.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따라 열매 맺으리.
사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야훼께서 심판하실 때에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악한 자의 길을 멸망에 이르나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
흥겹고 요란하게 악기를 연주하며 목소리 높여 부를 노래가 아닙니다. 조용히 사색하며 읽어야 마땅한 시편입니다. 시편 1편은 시편 전체를 읽는 가이드의 역할을 하는 시입니다. 그런 시편 1편이 복된 삶의 길은 어떤 길인가에 대한 사색의 노래라는 점은 중요한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누가 썼는지 알지 못하지만 잘 읽어보면 시인은 인생을 오래, 그리고 깊게 살았던 나이 많은 현자(賢者)였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누가 복된 사람인가?
시편 1편은 ‘복되어라’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시편은 복된 사람은 누구인가, 과연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에 대해 사색하는 노래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보통 ‘복되다’라고 표현할 때는 ‘바루크’라는 말을 쓰는데 여기서는 ‘아쉬레’라는 말을 썼습니다. 뜻이 비슷한 말이기는 하지만 둘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도 있습니다. ‘바루크’는 대체로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서 누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귀중한 것을 받아서 누리기 때문에 복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무조건적입니다. 은총은 그것을 주시는 분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자격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그것을 받아 누립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말처럼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넘친다고 해서 일부러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한편 ‘아쉬레’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만한 행위나 성격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아쉬레’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를 지칭하는 데 사용됩니다.
누가 복된 사람입니까? 1절은 이런 사람은 복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는 사람과 죄인들의 길을 거니는 사람, 그리고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그들입니다. 공동번역은 ‘those who take the path that sinners tread’를 ‘죄인들의 길을 거니는 사람’이라고 번역했는데 ‘거닐다’라는 동사는 아무래도 잘못 선택한 것 같습니다. 원문은 의지를 갖고 의도적으로 죄인들이 가는 길을 선택한 사람을 가리키는데 ‘거닐다’라는 동사는 목적 없이 어슬렁거린다는 뜻으로 들리니 말입니다. 한편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는 사람’이 특별히 언급됐습니다. 조소하는 사람은 악을 꾸미는 자들과 죄인에 비해서 훨씬 덜 나쁜 사람처럼 생각되는데 시편 1편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복되지 않은 사람의 대표 격으로 들고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조소’(scorn)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대하고 심각한 악입니다. ‘조소’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습니다. 조소하는 사람의 영혼은 밝지 않고 늘 어둡고 부정적입니다. 이런 어둡고 부정적인 토양에서 좋은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2절은 이런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복된 사람은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야훼의 법’은 민법이나 형법 같이 법조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야훼 하느님의 ‘가르침’(teaching, instruction. 히브리어 ‘토라’가 본래 이런 뜻입니다.)을 뜻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희랍어로 번역할 때 ‘토라’라는 말을 번역할 마땅한 희랍어 단어를 찾지 못해서 ‘법’(노모스)으로 번역했는데 이로 인해서 ‘토라’를 ‘법조문’으로 오해하는 혼란이 생겼습니다.
복된 사람은 토라를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곧 토라 안에서 기쁨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토라 안에서 기쁨을 얻기 때문에 밤낮으로 토라를 되새기는 사람, 곧 토라를 묵상하고 사색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복된 사람은 어떤 삶을 사는지, 그런 사람의 삶을 어떻게 비유할 수 있는지를 말합니다. 그 사람은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 제 철따라 열매 맺”는다고 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대체로 땅이 척박합니다. 그래서 식물이 어디 뿌리내리고 있는가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됩니다. 메마른 땅에 씨앗이 떨어지면 죽습니다. 물가에 떨어졌다고 해도 우기(雨期)에만 잠깐 물이 흐르다가 건기(乾期)에는 물이 말라버리는 와디(wadi)에 씨앗이 떨어지면 결국은 죽습니다. 우기뿐 아니라 건기에도 물이 마르지 않은 냇가에 심어진 나무, 이런 나무만이 늘 푸른 잎사귀를 가진 나무요 제 철따라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시인은 복된 사람이 누릴 삶을 이렇듯 비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된 사람의 반대는 ‘악인’입니다. “사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 야훼께서 심판하실 때에 /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 끼지도 못하리라.” 시인은 악인의 운명을 한 마디로 ‘바람에 까불리는 겨’로 표현했습니다. 악인의 극적인 운명을 멸망이나 심판과 같은 말로 섬뜩하게 표현하지 않고 ‘바람에 까불리는 겨’라는 말로 표현하여 악인의 운명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악인의 삶은 실체와 내용이 없는 환영(幻影)이나 환각(幻覺), 또는 한바탕 헛된 꿈과 같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가?
시편 1편은 의인과 악인을 선명하게 구분합니다. 복잡한 현대인의 생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둘 사이의 구분이 분명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의인과 악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중간, 또는 회색의 존재를 시편 1편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 의롭고 부분적으로 악한 사람은 없습니다. 80%는 의인이고 20%는 악인인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사람은 의인이 아니면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현대인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말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선한 구석이 어딘가에는 있게 마련입니다. 이는 현대인만의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시편 1편이 쓰이고 노래 불리던 시절에도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1편은 ‘중간은 없다’는 전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 전제는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감이 없어 보입니다.
시편 1편은 ‘무엇이 그의 삶을 이끌어 가는가?’라는 기준을 갖고 의인과 악인을 구분합니다. 구체적인 행위, 단편적인 삶의 모습을 갖고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이끌어가는 궁극적인 원칙과 원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의인과 악인을 구분합니다.
시편 1편은 삶을 시간을 통한 긴 여행이라고 보고 있는 듯합니다. 인생은 두 개의 길 중에서 하나의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길은 오직 두 개밖에 없습니다. 의인의 길은 하나님의 가르침(토라)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고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여 하나님의 길을 나의 삶의 길로 삼는 것이고, 악인의 길은 자신의 삶의 길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 결정이 삶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의인은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이 철따라 무성한 잎사귀를 내고 열매를 맺습니다. 악인은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 같이 허무한 삶을 살고 결국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고 맙니다.
시편 1편이 인생을 너무 단순하게 본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복잡한 가지들을 쳐내고 핵심으로 파고 들어가면 결국 문제는 둘 중 하나가 아닙니까? 부수적인 것들과 비본질적인 것들을 추려내고 나면 결국 우리가 부딪치는 문제는 하나가 아닙니까? 결국은 인생을 내 의지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욕심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나보다 더 큰 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 것인가, 둘 중 하나가 아닙니까? 시편 1편은 궁극적으로 이 점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길은 각자의 종착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삶은 각각 도달할 종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를 향해 어떤 삶을 살다가 어떤 종착점에 도달하시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