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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하나 되고 하나가 둘 되는 가정 (엡5:22-33)
어떤 거지가 길을 가다가 몸이 가려운 나머지, 큰 부자이며 정신적 지도자인 랍비의 집 앞에 서서 대문 기둥에 등을 대고 긁고 있었습니다. 정원을 거닐다 이상한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 본 랍비는 거지를 불쌍하게 여겨,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힌 다음 먹을 것을 주어 내보냈습니다. 다음날,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거지 부부가 랍비의 집에 찾아와서는 어제의 거지처럼 대문기둥에 등을 비비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그 광경을 본 랍비는 그들에게 호통을 치며 쫓아내었다고 합니다. 쫓겨나는 거지 부부는 어제의 거지와 공평하게 대우해 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자 랍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제의 거지는 혼자였기에 기둥에다 등을 비벼 긁을 수밖에 없었지만, 너희들은 둘이니 서로 등을 긁어줄 수 있지 않느냐? 서로 돕고 이해하며 사랑하지 못하고 얕은꾀로 살아가려는 너희들에게는 이런 대접은 당연한 것이야!”
둘이 하나 되는 아름다움과 하나가 둘이 되는 건강함
새는 두 날개가 서로 같은 방향으로 균형을 이루며 날개 짓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날 수 있습니다. 한 쪽 날개가 다른 한쪽 날개를 이해하며 보조를 맞추어 나란히 날개 짓을 하는 새의 모습을 떠올리면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우리, 서로 비상할 수 있도록 보조를 맞추며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는 새가 되어야 합니다. 혼자서 마음대로 날개 짓하다 결국에는 추락하고야 마는 어리석음을 이제는 버려야 합니다.
21일은 둘이 하나 되는 부부의 날이었습니다. 부부는 그 날개 위에 자녀들을 태우고 창공을 나는 두 날개입니다. 튼튼한 두 날개로 맞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모습이 우리네 가정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둘이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고, 부모와 자식 관계는 하나가 둘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때로 둘이며 때로 하나로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들 아닌가요? 떨어져 있어도 가끔 하나였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들이 기억 속에 피어난다면 아름답고 건강하게 둘이 된 것 아닐까요? 아름답게 하나가 된 남편과 아내는 건강하게 둘이 되는 자녀를 세워갑니다. 5월의 중엽! 둘이 하나 되는 아름다움과 하나가 둘이 되는 건강함을 더불어 누리시길 바랍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신적인 기관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부자관계의 원형이며,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는 부부 관계의 원형이어서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연구하면 가족관계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사회를 지탱해 주고 있는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인 가정이 파괴된다면 우리 사회의 장래는 보장할 수 없게 됩니다. 가족학자들은 가정 공동체가 흔들리면 사회 국가 공동체가 흔들리고, 가정윤리가 붕괴되면 사회윤리도 붕괴되어 청소년 범죄, 성 범죄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가정들이 병들었습니다. 가정이 큰 상처를 입고 살아갑니다. 결손 가정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신 가정이 어떻게 병든 가정을 건강한 가정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사회도 아니고 대학도 아니고 바로 우리 교회입니다. 교회와 가정은 이웃 사촌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병든 가정을 우리 교회가 책임지고 치유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주신 하늘나라를 닮은 작은 천국은 세 곳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과 가정과 교회입니다. 특히 가정 천국은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형제간에 사랑하고 음식을 같이 나누고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대화하는 곳입니다. 모두가 다 없고 부족할 지라도 주님만 계시면 내 잔이 넘치는 교회, 내 잔이 넘치는 가정, 우리 마음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에덴에서 잃어버린 가정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가정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행복과 사랑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원료는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주셨습니다. 잠이나 공기나 햇빛이나 식물, 입맛, 사랑을 공평하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이 세상을 낙원같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의 목적은 가정을 주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도 잘못된 가정생활, 교회생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면의 상태를 치유하고 회복하고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가정과 교회의 형식적인 면에 치중하는 것으로 자신이 열심히 가정생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가정적인 사람, 영적인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정과 교회의 형식적인 면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세계의 치유가 가장 우선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비정상적인 것이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는데, 그것이 드러나지 않으면 우리는 가식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고 불행한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것이 드러나지 않으면 치유의 기회도 상실하게 되고 결국 회복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가장 나쁜 것은 나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자기비하, 자기 모독, 자기소멸인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진단이 제대로 되지 않고서는 치유될 수 없습니다. 왜곡된 인격을 가지고서는 주님을 사랑할 수도, 아내와 자녀를 사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는 자기부정의 선고를 내리고, 자신과 가정에 대한 올바른 진단을 해야만 치유와 회복의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내들아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구주"라는 말은 "보호자"라는 뜻이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아 주고 길러 주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보호자이며 특별히 믿는 사람의 보호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28-29절에서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한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몸에 대해서 구주로서 행동합니다. 남편에게는 그의 아내를 돌보고 보호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지식이나 능력이나 재정적인 면에서 아무리 크게 성공했다 할지라도 결혼 생활에 실패했다고 하면 그 인생의 행복의 90% 이상은 실패한 것이 될 것입니다. 월간지 `샘터'에 발표된 통계 중에 "무엇이 성공인가"라는 제목 하에 성공을 안겨 주는 기쁨의 요소에 대하여 설문 조사하여 통계로 낸 자료에서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 오는 성공의 기쁨이 9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권력의 소유에서 오는 성공의 기쁨은 16%, 돈을 버는 데서 오는 성공의 기쁨은 12%, 그리고 명예를 얻는 데서 오는 성공의 기쁨은 8%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상의 자료에서 보는 바와 같이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의 생활을 이루어 간다고 하는 것은 인생의 성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것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가정이란 꽃을 가꾸는 정원과 같아서 그냥 내버려 두거나 방치하면 거기에는 잡초가 무성해지고 벌레가 생기게 됨으로 꽃이 활짝 피지 못하거나, 부실하고 시들은 꽃들만 자라게 되어 결코 열매를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벌레를 잡아 주고 비료를 주며, 잡초를 제거하고 맑은 물과 햇빛이 공급되도록 할 때,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행복한 가정이란 모든 가족들이 함께 수고하고 노력하는 땀과 희생의 결실로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족들이 함께 노력해야 할 점이 무엇이고 특히 부부 사이에 행복을 가꾸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될 것이 무엇일까요?
부부관계는 게임이 아니다
결혼은 두개의 서로 다른 인격이 합쳐서 하나의 삶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들은 결혼을 통해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기쁨도 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포기하는 뼈아픔도 각오해야 합니다. 한 개인의 관심사가 부부라는 공동체의 관심사가 다 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의 것을 포기하기 싫어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 본성이 부부들의 성공적인 결혼을 향한 영롱한 꿈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인간에게 존재하는 본성을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하듯이 인간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결혼 생활에 있을 수 있는 불행의 가능성을 우리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불행의 가능성을 인지하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 결혼을 성공시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진정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요?
유대인의 교훈집 탈무드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습니다. "행복에서 불행으로는 한 순간이다. 그러나 불행에서 행복으로는 영원한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어떤 부부가 지금 이 순간, 행복에 젖어 있다고 하여, 그리고 서로의 장단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하여 서로에 대한 존경심과 관심을 가지는 일에 태만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 순간 안에 불행이 찾아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해서 인생의 차를 출발시켰거든 인생의 종국의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한시도 핸들을 놓아서도 안 되고, 바깥의 경치가 좋다고 해서 한눈을 팔아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주와 전 세계를 소홀히 할지언정 서로에 대해서는 소홀하지 말라."
가장 소중한 것
우리는 종종 가장 소중한 것들을 잊은 채 살아갑니다. 후회하고 깨달았을 땐 이미 늦습니다. 가족의 소중함은 그 그늘이 항상 드리워져 있어 깨닫지를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이는 정성, 친절, 이해의 십분의 일만 쏟아도 충분한 것인데 왜 그러지를 못하는지 아쉽습니다.“나중에 잘하면 되지”라고 다짐하지만 중요한 순간은 지금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인간은 왜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는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가족의 이해라는 그늘로 그 안에서 무엇이든 내가 편안한 대로 행동하지만 그 잘못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가족의 부재나 우환 등으로 절실할 때 나를 깨닫습니다. “아, 내가 좀 더 잘해 줬어야 했는데”그땐 가족과 나는 이미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타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족의 울타리 밖에서 행해지는 선행의 절반이라도 소중한 가족을 위해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지 돌아보고 중요한 순간은 항상 내 곁에 머물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의 가족에겐 소홀하고 타인에겐 잘한다고 하는 말, 가족은 너무 가까이서 모든 허물을 용서하려 들지만 타인은 실수 하나로 모든 것을 인정하려는 경향으로 서로 잘하려고 노력하게 되는데, 그래서 가족에게는 다소 서운함이 따릅니다. 가족보다는 밖의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인심을 쓰고 행동할 때가 많은데 그것 선심인지 아니면 배려인지 분간이 안 갈 때가 참으로 많을 때가 있습니다. 누구나 가족이라는 편안함 때문에 무관심해도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데 그런 점은 하나의 커다란 오류로 나타내지기도 합니다. 한 가족이니까 당연히 이해해 줄 것으로 믿고 그래서 결국 소홀함과 나태함으로 이어지고 남에게 잘 보이려는 우월감이 작용하고, 일종의 기대심리 같은 것, 나도 이런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욕망, 욕심에서 빚어지는 배려의 남용이 아닐까요?
가족의 소중함. 나의 위치, 행복 그리고 건강. 절박한 상황에서 마주 칠게 아니라 행복하고 건강할 때 그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 현명한 일인데, 항상 돌아서면 눈시울 뜨거워지고 후회되고, 그래서 인간은 고독하다고 하나 봅니다. 최선을 다하면서도 항상 부족한 것이, 가족의 건강과 내실이 아닐까?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해야 합니다.
무승부의 원리
“부부관계에 철학이란 없고 또한 철학을 요구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부부관계의 성패는 노력에 있습니다. 그 노력으로 부부의 강한 연대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대개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어떤 특별한 철학도 없고, 이유를 따지지도 않고 그저 상대방을 사랑했습니다. 이유와 원인을 중시하는 현대 인생들의 사고 체계로 말미암아 현대 부부들의 틈이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러한 현대 사고방식 속에서도 아름다운 부부관계를 지속시켜 흐린 날 한 뼘의 푸른 하늘을 발견하는 기쁨을 우리들에게 선사하는 아름다운 부부들이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요? 아름다운 부부에게 있는 첫 번째 원리는 바로 ‘무승부의 원리’ 입니다.
무승부의 원리란 나도 살고 너도 사는 생명의 원리입니다. 부부란 타이틀 매치를 벌이기 위해 링에 올라가서 상대방을 어떻게 해서든지 이겨야 하는 권투선수는 아닙니다. 사랑으로 이루어진 관계에서는 승자와 패자의 우열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그대의 결혼이라는 사랑의 컵에서 사랑이 넘치게 하려면 그대가 잘못했을 때 시인하고 그대가 잘했을 때 침묵하라”
우리 인생들은 사회생활에서 항상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주장을 하며 삶의 승리자가 되려는 본능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한 것은 합리화시키고 잘한 것은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들에게는 잘못한 것을 시인하는 용기와 잘한 것에 침묵하는 겸손만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높고 낮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의 높은 산이 깎이고 나의 낮은 골짜기가 메워져 평탄한 대로를 함께 걸어가는 것이 부부입니다. 부부가 서로를 예속화시키려고 시도하는 순간, 가정의 행복에 이상 신호가 발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내의 아픔 위에 가정의 행복이 이루어질 수 없고 남편의 아픔 위에 가정의 행복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마리 붕어가 한 조그마한 장소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장소를 모두 혼자 독점하고 싶어 기운 센 붕어가 약한 것을 죽였습니다. 얼마 후 죽은 고기가 썩어 물이 독기로 가득 차 결국 기운 센 붕어도 죽고 말았습니다. 아내를 죽이면 남편도 죽고, 남편을 죽이면 아내도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부부들이 ‘상대방 비난하는 게임’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부부는 상대방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기려고 맘먹고 상대방에게 비난의 화살을 쏜다면 그 화살은 백발백중 상대방의 가슴을 아프게 만듭니다. 상대방을 아프게 할 때 순간적인 승리감은 있을지라도 결국 그것이 가정을 멍들게 하고 최후에는 자신을 멍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부부관계를 게임으로 만들지 말고 항상 무승부의 원리의 실천자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의 암호는 '함께'라는 말이라고 맥밀런이란 사람이 말했던 것처럼 무승부의 원리를 기반으로 하여 함께 동고동락하며 어려운 문제들을 헤쳐 나가는 부부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부부입니다. 그러한 아름다운 부부관계를 이루어가는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화해의 원리
때로 부부싸움이 생길 때 "우리 사이에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고 충격을 받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그러한 일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종관계가 아니라면 자신이 상대방에게 반대할 수 있는 것처럼 상대방도 자신에게 반대할 수 있는 특권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 부부간의 다툼은 인생의 안목을 넓히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항상 대낮처럼 밝고 아름다운 인생으로만 살았다면 밤의 신비로운 세계를 알지 못하는 미숙한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부간의 다툼을 충격 받을 사건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고동소리라고 인식할 수 있다면 곧 화해의 순간은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화해를 하고 난 후에도 다투었던 일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잘못했던 일은 다리 아래 물처럼 우리들의 기억에서 떠내려 보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는 과거의 불행에 무관심할 줄 아는 슬기가 필요합니다. 화해의 원리를 실천한다는 것은 다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하고, 그 다툼을 지혜롭게 극복하여 화해를 꽃피우고, 다툼으로 생긴 마음의 상처를 영원히 잊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화해의 원리를 따라 자존심을 낮추어, 가장 불쾌지수가 높은 여름날에서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부부의 모습은 진정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가정은 행복을 저축하는 곳
부부란 어떤 것을 나누어 각자 취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의 것을 상대방에게 나누어주어 행복이라는 성을 쌓아 가는 일꾼이어야 합니다. 가정은 행복을 저축하는 곳이지 행복을 채굴하는 곳은 아닙니다. 얻기 위해 이루어진 가정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고, 주기 위해 이루어진 그 가정만이 행복의 성을 쌓게 될 것입니다.
집안 문제로 이혼하려는 어떤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상담소장을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저는 남편을 잘못 만났습니다. 저의 인생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남편에게 복수하고 싶습니다. 위자료보다는 남편의 가슴에 못을 박고 이혼하고 싶은데 그 방법은 없겠습니까?" 그러자 상담소장이 처방을 내렸습니다. "약 6개월 내지 일 년 동안 남편에게 잘해주다가 그 다음에 이혼하게 되면 남편의 가슴에 못을 박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부인은 그대로 행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그 부부는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젖은 손과 남편의 마른손이 만나 둘 다 사랑이 흘러내리는 촉촉한 손이 되어야 합니다.
눈먼 최선은 최악을 낳는다
소와 사자가 있었습니다. 둘은 죽도록 사랑합니다. 둘은 혼인해 살게 됩니다. 둘은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합니다. 소가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을 날마다 사자에게 대접했습니다. 사자는 싫었지만 참습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살코기를 날마다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습니다. 참을성은 한계가 있습니다. 둘은 마주 앉아 얘기 합니다. 문제를 잘못 풀어 놓으면 큰 사건이 되고 맙니다. 소와 사자는 다툽니다. 끝내 헤어지고 맙니다. 헤어지며 서로에게 한 말은 “난 최선을 다 했어” 라는 말입니다. 소가 소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사자가 사자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면 그들의 세상은 혼자 사는 무인도입니다. 소의 세상, 사자의 세상일 뿐입니다. 나 위주로 생각하는 최선, 상대를 못 보는 최선, 그 최선은 최선일수록 최악을 낳고 맙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사랑의 특징은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위해서 죽기까지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희생이 사랑의 특징입니다. 이 사랑은 주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언제나 가지려는 것은 생각지 않고,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서 삽니다. "남편들아 너희 아내 사랑하기를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모든 것을 주는 사랑을 하라." 이처럼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으로 복종하고, 남편이 아내에게 사랑으로 모든 것을 줄 때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5월 가정의 달에 우리의 가정을 천국으로 세워져가는 은혜를 누리시고 자칫 둘이 될 수 있기에 서로 조심하고 또 용납하고 더불어 아껴주게 하시고, 아름다운 추억이 만들어지는 은혜를 계속해서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서정호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