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효자와 불효자   (신명기 5장 16절)


중앙청 뒤쪽에 효자동이라고 있습니다. 왜 그 동네를 효자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말씀드린 적이 있는 줄 압니다. 옛날 그 동네에 효자, 효부 한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젊은 부부가 일하러 나가면서 어린 아들을 할아버지 옆에 누이고 나갔습니다. 얼마 후 그 부인이 돌아와 보니까 시아버지가 잠결에 이불로 손자를 덮어 질식해 죽었더랍니다. 그러나 시부를 원망하지 않고 빨리 들춰 업고 밭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에게 보여주었더니 남편은 자기 어린 아들을 보고 부모를 걱정시켜드린 놈이라고 질식해 죽은 아들의 뺨을 세차게 때렸습니다. 그러자 어린애가 숨을 크게 내쉬더니 살아나더랍니다. 이 소문이 널리 퍼져서 그 동네를 “효자동”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표적인 효자가 있고 대표적인 불효자가 있습니다. 그 효자는 요셉이고, 그 불효자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입니다.

1. 대표적인 효자, 요셉

①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렸습니다
야곱은 열두 아들 중에서 요셉을 제일로 사랑해서 특별한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그 이유는 그 만큼 어려서부터 부모를 기쁘게 해드렸다는 증거입니다.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고 편안케 해드리는 것이 첫째 되는 효도라고 봅니다. 부모의 속을 썩이고 불안하게 하는 자식은 불효막심한 자식입니다. 목사가 목회할 때도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시원하게 하는 교인이 있는가 하면 항상 불편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잠언 15장 20절에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② 부모에게 순종했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을 보고 형들이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형들에게 점심을 갖다 주라고 하며 잘들 있는지 보고 오라고 했을 때 요셉이 위협을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형들이 세겜에 있다는 말을 듣고 도시락을 가지고 먼 길을 갔더니 도단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핑계를 대고 안 갈 법도 한데 다시 도단으로 먼 길을 찾아갔습니다. 또 가는 길에 맹수들이 출몰했습니다. 장정 열 명이 먹을 음식이니 무겁긴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잔꾀부리거나 핑계 대지 않고 부모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③ 물질로 봉양했습니다
  창세기 47장 12절에 “또 그 아비와 형들과 아비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식물을 주어 공궤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국무총리가 되었으므로 재물도 넉넉했겠지만 재물이 많다고 부모형제들에게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은 흉년으로 굶어 돌아가시게 된 부모님을 모셔다가 최고로 잘 봉양했을 뿐 아니라 부모님이낳으신 형제들과 그 자식들을 잘 돌봐드리고 양육했습니다. 그 형들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다가 애굽에 종으로 팔아먹은 사람들입니다. 물질 가는 곳에 마음이 가는 법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섬기는 것을 보아도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보면 그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최선을 다해 대접하면 됩니다. 사실 부모 입장에서는 아무리 용돈이 필요해도 돈 달라는 말이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서슴없이 부모에게 돈 달라고 졸라댑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부모를 봉양하기 싫어서 제주도나 동남아에 여행가서 부모를 버리고 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 부모님이 먹여서 키우고 오줌똥 기저귀 갈아주며 키웠으면 부모님이 늙어 거동 못하실 때 밥 먹여드리고, 치매에 걸려 대소변 못 가린다면 당연히 돌봐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주도나 외국에, 혹은 기도원에 갖다버리고 오는 것이 옛날에 고려장 지내는 것과 무엇이 다를 바 있습니까? 인생은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효를 심으면 효를 거두고 불효를 심으면 불효를 거두는 법니다.

  ④ 부모님을 존경하고 영예를 돌렸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말씀에서 “공경”이란 말은 “키베드”라고 하는 말인데 “무겁다”라는 뜻입니다. 부모님을 가볍게 보거나 우습게보지 말고 무겁게 대하라는 뜻입니다. 부모에게 욕 돌리는 자식이 되지 말고 영예를 돌리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요셉은 종살이도 하고 죄수복을 입고 감옥살이도 하며 별별 고생을 다 했지만 마침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부모님을 황금 수레에 태우고 큰 영예를 돌렸습니다. 야곱이 죽기 전에 가나안 땅에 장사해 달라는 명령을 받고 1,000리가 넘는 가나안 땅으로 모시고 가서 장례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장례를 70일 장을 지냈으니 얼마나 큰 장례였습니까? 굉장한 효도입니다.
  
  ⑤ 형제를 돌봄으로 효도했습니다
  요셉은 부모님이 낳은 자식들, 자기를 죽이려 애굽의 종으로 팔아먹은 형들이지만 잘 살도록 보살펴 드릴 뿐 아니라 형들의 자식들까지 보살펴 주었습니다. 부모는, 못 살고 고생하는 자식들을 돌봐주는 자식을 보면 당신들이 대접받는 것보다 더 기뻐하십니다.
  전에 저의 모친은 목사 아들들한테 돈을 얻어다 못 살고 과부가 된 막내딸한테 다 갖다주곤 하였습니다. 맏아들이나 둘째 아들네 집에 계시면 될 터인데 굳이 작은 아파트라도 하나 사달래가지고는 막내딸과 손자들하고 같이 살았습니다. 그 막내딸이 평생 부모의 골칫거리였는데  어머님 몰래 그 집을 날려버렸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또 집을 자꾸 사달라고 하셔서  아들들이 돈을 모아서 구리시에 작은 연립주택을 사드렸더니 결국 그 막내딸 이름으로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동생이 밉고 꽤씸했지만 어머님이 간절히 원하시니까 원대로 해드렸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가 되니까 조의금도 다 그 딸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 형들이 와서 무릎 꿇고 빌기를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창50:16-17)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뭐 그런 부탁을 했겠습니까? 이제라도 요셉이 복수할까봐 꾸며낸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이때 요셉이 기가 막혀서 대답하기를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5019-21) 하고 간곡한 말로 위로했습니다.
  요셉은 참으로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며 구약 성경의 대표적인 효자입니다. 반대로 구약 성경에 불효자가 있습니다.

  2. 대표적인 불효자, 압살롬

  압살롬보다 먼저 불효하다 저주 받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노아의 아들, 함입니다. 포도주에 취해 하체를 드러내놓고 잠든 아버지를 보고 형, 셈과 아우, 야벳을 불러놓고 입을 비죽거리고 손가락질하고 비웃으며 흉을 본 함은 저주를 받아 종의 종이 되었고 셈과 야벳은 홑이불을 들고 뒷걸음쳐 가서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드렸다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부모가 비록 실수를 했을지라도 비웃고 흉을 본 함은 저주를 받았고 그 허물을 애써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쳐 가서 덮어드린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본문에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 한 사람, 대표적인 불효자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입니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 잡을 데 없는 미남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아들을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의 왕좌를 찬탈하려는 악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이런 흑심을 품고 자기의 잘생긴 얼굴과 풍채로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하고 아버지에 대해서 원망과 불평을 품게 했습니다.
  보통 신하로서 국왕의 보좌를 찬탈하고 왕을 모반하는 죄도 멸문지화를 받아 마땅한데 아버지의 왕좌를 찬탈하려고 백성의 마음을 도둑질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부왕을 죽이고 왕좌를 찬탈하려는 그 죄가 얼마나 큰 저주를 받을 죄입니까? 또 백주에 사람들 보는 옥상에서 아버지의 애첩을 겁간했으니 그 죄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지 않고 견디겠습니까?
  결국 그는 전쟁에 승리하는 듯했으나 종당에는 패전했고 말을 타고 도망가다가 그 잘생긴 머리칼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다윗의 부하들이 덤벼들어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는 자식도 하나 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압살롬보다 불효막심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잠언 20장 20절에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 등불이 유암중에 꺼짐을 당하리라”고 했고, 잠언 30장 17절에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했습니다. 이 다음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심판을 받겠습니까?
  저의 가정이 장로교인이었다가 감리교인이 되고 감리교 목사들이 된 것은 윤성범 박사님의 부친, 고 윤태현 목사님 때문이었습니다. 서울이 수복되어 들어온 후 신설동 높은 언덕 위에 자그마한 교회가 있길래 주일날 예배드리러 가보니까 경동교회였고 나중에 알고보니 감리교였습니다. 전에 감리교는 이단 교파인 줄 알았는데 윤태현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니까 이단이 아니었고 얼마나 은혜롭게 설교를 잘하셨던지 그만 완전히 붙잡혀 감리교 목사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의 아들 윤성범 박사님(전 감신대 학장)은 신앙과 신학은 아버지 같지 않았지만 효자였습니다. 그는 “孝(효)”라는 책을 영문으로 썼는데 불효의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의 참회록(confessions)으로, 또 신앙고백(credo)으로 썼다고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효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로 하나님과 아들 예수와의 관계,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에서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윤리(倫理)는 어원적으로 볼 때 “인간관계의 이치”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윤리는 단순히 한 인간이 어떻게 도덕적으로 살아가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한 다른 인간을 위해서의 자유를 문제 삼는다고 볼 수 있다”(칼발트)라고 했습니다. 마르틴 부버의 말을 빌린다면 “나와 너”(Ich und du)와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아내를 만드셨습니다. 즉 부자관계가 먼저이고 그 후에 부부관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가 먼저이고 성령은 이 관계를 연결시켜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은 “아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의 뜻은 버리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겸손하신 분이고 세상에서 가장 큰 효(filial piety)를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세계에서도 부부관계가 먼저가 아니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먼저입니다. 즉 부부의 사랑이 먼저가 아니고 부모에 대한 효도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효가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대인관계 계명에서 제일 첫 계명으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 계명은 땅에서 장수하고 잘 되리라는 축복의 약속이 붙은 계명이기도 합니다.
   효는 모든 덕의 근본이 됩니다. 효가 무너지면 다른 모든 도덕도 따라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효를 행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양은 기독교  국가이면서도 부부관계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부모에 대한 관심입니다. 효사상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효에 관해서만은 서양보다 동양의 유교사상이 기독교와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효를 행하기 위해서 아내에 대한 사랑도, 자식에 대한 사랑도 희생하는 당연한 의무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돈 많은 사장이 많은 돈을 들여서 자식들을 미국 유학시켰는데 자기들은 잘 살면서도 크리스마스 때 카드 한 장 안 보내고, 부모님이 생신을 맞이했는데도 선물이나 편지 한 장 안 보내더랍니다. 그래서 “이 자식놈들이 그럴 수 있느냐”라고 호통을 치는 편지를 보냈더니 회답이 오기를 “아버지, 효도를 받으려는 봉건적 사상을 버리십시오. 지금이 효도 받는 세상입니까?” 하더랍니다. 그 편지를 받고는 땅을 치면서 많은 돈을 들여 미국 유학시킨 것을 후회하더랍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의 명령이요, 시대에 따라 변질될 수 없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할렐루야!

출처/김홍도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