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으로 부르신다  (에스더 9:20-32)

I. 목장

어느날 부부 목장을 인도하는 목자 한분이 최근에 등록하신 한 가정을 셀 목장으로 초대했습니다. "주말마다 목장모임이 있는데 한번 참여하시지 않겠습니까? 너무나 유익하고 재미있습니다.” 그랬더니 기꺼이 참여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약속한 시간, 약속한 장소에 나타난 새가족 부부의 폼이 가관이었습니다. 완전 등산복 차림에 따끈한 음식까지 손에 들었습니다. 대관령 목장이라도 오를 태세였습니다.

또 저희 교회 처음 나온 어떤 분은 누가 어느 교회 다니냐고 묻길래 "두 날개로 비상하는 교회” 다닌 다고 대답을 했답니다. 교회 이름이 - 한소망이 아니라 두 날개로 비상하는 교회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주보에 교회 이름이 그렇게 되어 있더랍니다.

교회 이름은 아니라 할지라도 분명 한소망교회는 두 날개로 비상하는 교회입니다. 두 날개 가운데 첫 번째 날개는 큰 예배의 날개입니다. 그래서 한 소망가족들은 이 예배시간을 통하여 예배의 영광을 경험합니다. 예배시간마다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온몸으로 체험합니다.

두 번째 날개는 소그룹으로 모이는 셀의 날개, 목장의 날개입니다. 이 셀 목장을 통하여 초대교회 성도들이 누렸던 돌봄과 교제를 경험합니다. 친밀하고 구체적인 하나님을 만납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 아직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까? 셀 모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친밀하신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아직 진정한 한소망 가족이 되지 못하신 것입니다.

만약 두 날개 가운데 한쪽 날개를 가지지 못하셨다면 아직은 반쪽 교우입니다. 날개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것으로 가지시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 모두 두 날개로 비상하는 가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이 디자인하신 교회 성도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함께 직장 생활하는 우리교회 성도 가정이 있습니다. 퇴근하면 늘 피곤합니다. 주일예배만 겨우 드리는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언젠가부터 집에 들어오면 짜증스럽기 시작했고 부부간에 마찰도 잦아 졌습니다. 누가 목장에 들어와서 함께 은혜를 나누지 않겠느냐고 초대했습니다. 처음에는 피곤한 몸이 오히려 피곤해 지지나 않을까 걱정했지만 서로의 마음을 열고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들 가운데 한 가족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세워줍니다. 나의 기쁨이 너의 기쁨이 되고,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는 행복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사회생활에 든든했는지 모릅니다. 신앙생활도 재미가 있고 가정생활도 재미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집에 있는 자녀에게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누구하고도 의논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숨길 수 없어서 목자와 함께 의논했더니 목자는 자기 딸보다도 더 안타깝게 생각하며 금식하며 기도해 주었고 딸이 주님 앞으로 부모님 앞으로 돌아오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 이것이 교회구나! 이것이 주님께서 디자인 하신 참된 교회의 모습이구나! 이것이 주님이 그렇게도 원했던 공동체의 모습이구나! 이것이 셀 목장의 신비구나!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목장 사역을 처음 시작하면서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지었던 조그마한 시 한 편이 있습니다.

나의 눈물이 이곳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나는 어디서 울어야 할까?
내 영이 이곳에서 날개를 펼 수 없다면 나는 날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나의 가치를 인정해 줄 가족 같은 사랑이 필요하다.
나는 내가 넘어졌을 때 내 손을 붙들어 줄 따뜻한 손길이 필요하다.

그곳은 아무런 느낌을 나눌 수 없는 닫힌 감옥문이 아니다.
그곳은 웃음의 탈을 쓰고 춤추는 광대들의 광장도 아니다.
그곳은 의미 없고 지루한 얘기만 나누는 옛 노인들의 사랑방도 아니다.
그곳은 제 자랑만 늘어놓는 동창회 모임은 더더구나 아니다.

만약 이곳이 나의 눈물이 이해될 수 없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만약 이곳이 나의 기쁨이 너의 기쁨이 될 수 없다면 나는 어디서 웃어야 할까?
만약 이곳이 나의 슬픔을 인해 함께 울어 줄 수 없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서 내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을까?
만약 이곳에서 내 영이 날 수 없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형제여 자매여 이리로 오시오. 당신의 모습 그대로 오시오. 가면을 쓰지 말고 오시오.

이곳은 좋은 옷을 자랑하는 곳도 나의 잘남을 뽐내는 곳도 아니라오.
이곳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삶을 나누는 사랑의 가족.
이곳은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랑의 관계.
이곳은 마주보는 자리가 아니라 함께 한 곳을 바라보는 눈들의 모임.
그 눈들 끝에 주님이 웃고 계시다.
이곳은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이 당신 안에 계신 주님을 환영하는 천국 공동체!



II. 깨어진 목장(셀)을 회복하시기 위해

오늘 본문 시작하는 21장 1절 말씀에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짤막한 구절 속에 몇 가지 소중한 초점이 들어 있습니다.

①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적극적으로, 주도적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셨다고 말합니다. 다른 종교는 사람이 신을 찾아 몸부림을 합니다. 그러나 만나지 못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지런히 자신을 나타내 보여 주십니다.

② "그 후에 또" - 즉 그저 부활을 증명하시기 위해 한번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자주 나타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그 다음은 다락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또"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숨어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는 분이시요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 당황하고 있을 그때에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안방 가운데에도, 저기 세상 한복판에서 실패의 그물을 던질 때에도 언제든지 나를 만나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인생의 벼랑끝에서 당황할 때에도, 낙망의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을 때에도, 무능력을 자책하며 생을 포기하고 싶을 그 때에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③ 분문 1절이 보여주는 세 번째 초점은 "디베랴 바다" 즉 갈릴리 바다에 나타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에도 수 차례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마태26:32) 말씀하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시고(마가16:7) 지금 갈릴리로 돌아오신 것일까요?

그것은 깨어진 제자 공동체, 교회 공동체를 회복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이 두려움에 흩어질 것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흩어져 끝나버릴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그들이 다시 모여야 할 사람들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최고의 관심은 흩어진 제자 공동체, 갈릴리 공동체를 회복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이 공동체가 전세계로 번식되어 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최고의 관심은 당신의 몸 된 교회를 천국 가족 공동체를 회복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요.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고 가정이 살고 나라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슴을 헤치고 거기 무엇이 있나 들여다보았다면 틀림없이 교회 공동체, 12제자 셀 공동체를 보았을 것입니다. 셀 공동체, 셀 목장은 부활하신 주님의 최고의 관심사였습니다.



III. 목장을 맡아라

이 소중한 목장 공동체를 누구에게 맡기셨습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주님이 제자 베드로를 부르는 호칭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입니다. "갈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을 만나자 "게바"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게바는 아람어였고 헬라어로는 베드로라 불렀으며 그 뜻은 "반석"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는 늘 변덕스럽고 즉흥적이었던 그를 "반석"처럼 굳건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반석 즉 게바 혹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주시고는 정작 그를 부르실 때는 시몬이라고 부르시길 즐겨하셨습니다. 특별히 친밀감을 가지고 부르실 때는 거의 예외없이 유대식 이름인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잠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막14:37)

그러시다가도 그를 꾸짖으시거나 경고를 하실 때는 또 베드로라고 부르셨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눅22:34).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시몬도, 게바도, 베드로도 아닌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외없이 세 번 다 말입니다.

오늘 본문 외에 이 호칭은 꼭 한번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멋진 신앙고백을 드렸을 때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 말씀하시며 "바요나 시몬아" 즉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① 여기 공통점이 있습니다. 교회를 맡기겠다고 말씀하실 때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리라. 양을 먹이라. 양을 치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② 두 경우 다 베드로의 위임식과 같은 장면에서 사용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의 아들 누구야"를 2인칭으로 사용하시는 것은 유대 통념상 대단히 격식을 갖춘 경우입니다.

③ 주님께서는 지금 당신의 교회를 베드로에게 맡기시면서 그를 당신의 종, 당신의 제자 이상으로 대우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양무리를 쳐야할 당당한 동역자로 인정하고 계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주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바로 당신의 양을 돌봐야 할 목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위임을 주십니다. 그들에게 권세를 주십니다. 그들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이는 목사들에게만 주는 축복이 아닙니다. 셀 목장을 맡은 모든 목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요 축복입니다.

사장이 되었으나 목자가 되지 못하고 인생을 마치려 하지 마십시오. 총장이 되었으나 목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를 돌보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가장 큰 것을 놓친 셈입니다. 우리의 비전은 천국의 백성, 주님의 양떼를 돌보는 목자가 되고 또 다른 목자들을 양육해 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읽을 때마다 감동적이고 참으로 감격스러운 말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 부활하신 예수를 뵙고서도 고기잡이에 나섰던 베드로! 그는 정말 다시 어부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던 내가 어떻게 교회의 책임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나 같은 것이 주님의 백성인 양떼를 돌봐! 사람들이 비웃을거야. 너 자신이나 돌보아"라고.

그러나 보십시오. 지금 예수님은 베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며 다시 그를 교회의 책임자로 세우십니다. 이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아닙니까? ① 주님을 섬기겠다 다짐했던 내가 사소한 일에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② 회개하고 울었던 내가 가장 혐오스런 죄에 빠져듭니다. ③ 걸핏하면 십자가를 부인하고 구원의 확신마저 상실하고 절망하고 낙담합니다. ④ 내 신앙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의 영혼을 책임진단 말입니까?

그러나, 주님은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그래도 다시 나를 부르십니다. 너를 내가 교회의 일꾼으로 세운다. 셀 목장의 목자가 되어라. 예비 목자가 되어라. 내 양을 먹이라. 내 양떼를 돌보라.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를 목자로 세우노라.
김 아무개 씨를 목자로 세우노라!
박 아무개 씨를 셀 목장으로 파송하노라!

주님의 선언입니다. 주님의 위임식입니다. 할렐루야! 가겠습니다 가고 말고요. 주님이 다시 기회를 주셨는데 누가 거절한단 말입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아멘 주여 가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교회, 셀 목장을 맡은 천국의 사역자들, 목자들입니다. 주님이 세우신 일이니 힘들다고 안가겠습니까? 상처된다 포기하겠습니까?



IV. 목장 사역

본문이 베드로의 목장사역 위임식 내지는 파송식이라고 한다면 베드로가 감당해야 할 양떼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순간부터 서로 돌보고 섬겨야 할 천국 가족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까?

본문에서 그들을 "양"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목장사역을 맡기시며 명령하십니다. 첫 번째 명령 - 내 어린양을 먹이라. 두 번째 - 내 양을 치라. 세 번째 - 내 양을 먹이라.

우리말 성경에는 내 어린양, 내 양, 내 양, 똑같이 양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원문에서는 서로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우리말 어린양으로 번역된 이 말은 원문에서 어린양(areen) 가운데서도 이제 갓 태어난 양(arion)을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문법에서는 이런 단어를 지소어라고 합니다. 아주 작은 것을 표현할 때 이런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첫 번째 명령은 교회에 갓 들어온 어린 신자를 일컫고 있습니다. 주님의 첫 번째 관심은 바로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교회의 가장 우선된 관심은 바로 이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셀 목장의 우연한 방문자,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 태신자, 이방세계 가치관 속에 살다가 교회 안으로 처음 발을 들여다 놓은 사람들 - 이들을 말씀으로, 사랑으로, 정성으로, 눈물로, 땀으로 잘 먹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어린양을 잘 돌보고 먹이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내 양을 치라고 했을 때, 여기 내 양은 꽤 성장은 했지만 새끼를 낳기 전 상태의 양을 말하고 있습니다(probation). 사람으로 말하면 청소년, 청년기에 있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인 교회 안에는 청년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예배에 잘 나오고 기도도 할 줄 알고 사단의 공격을 대처할 줄도 압니다. 그러나 아직 실수가 많고 다듬어지지 않아 부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자기도 목자가 되고 아비, 어미가 되어 분가할 준비도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이들을 잘 양육할 책임이 있습니다.

셀 목장의 가장 큰 사역 중 하나가 청년 신앙인 즉 예비 목자들을 발굴하고 양육하여 분가시키는 일입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내 양을 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또 다른 준엄한 명령입니다.

세 번째, 내 양을 먹이라고 했을 때 여기 내 양은 드디어 발육이 끝나 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성숙한 양(probaton), 새끼를 낳고 돌봐준 경험이 있는 양을 일컫고 있습니다.

셀 목장의 목자 그룹 이상을 말합니다. 교회에 안수집사님들, 권사님들, 장로님들을 일컫고 있습니다. 아비, 어미도 격려와 위로가 필요합니다. 목사가 되고 보니 목사에게도 교육이 필요하고 격려와 위로가 필요합니다. 베드로에게 이러한 성숙한 양떼들도 내버려두지 말고 잘 먹이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이들이 청년 양떼나 어린 양떼들을 잘 돌보게 될 것입니다.

가령 내일부터 실시되는 셀 리더십 세미나 같은 것은 바로 이 성숙된 양을 먹이는 잔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 또한 주님의 간곡한 명령입니다. "내 성숙한 양들도 잘 먹이라" 이것이 주님이 디자인 하신 교회, 셀 목장 사역을 통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어 가려는 교회 사역의 신비입니다.

누구나 새끼 양으로 교회 안에 들어와 청년 양을 지나 아비와 어미 양이 되고 또 다른 새끼 양과 청년 양을 세우고 돌보고 번식하는 이 생명공동체의 주기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도록 주님이 디자인하신 것입니다. 이 일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님 - 지금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을 만나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할찌라도 바로 당신이 디자인하신 교회의 비밀을 알려 주셨을 것입니다.

집안에 어린이가 있는 것은 기쁨입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는 가끔 문제를 일으키는 어린이가 있어야 합니다. 청소년들은 거칠어 보이지만 그들은 가정의 꿈입니다. 교회에는 마찬가지입니다. 실수하는 청년교인들 때문에 불편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요. 그것이 교회입니다.



V.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 베드로의 실수나 배신을 책망하시는 일로 만나시지 않았습니다. 아니 책망은 아니라 할지라도 '내가 이렇게 너희를 아끼고 믿었는데 왜 나를 부인했느냐'고 서운한 마음은 표현 하실만한데 그러시지도 않았습니다. 아니면 '다시는 그러지 말자' 다짐이라도 받으실 것 같은데 다짐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을 반복적으로 물으시고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의 사랑의 고백을 받고 기뻐하십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처음 두 번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물으셨고, 세 번째 물으실 때는 필레오의 사랑으로 물으신데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가페의 사랑과 필레오의 사랑의 차이점을 예리하게 분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봅니다.

우선 ①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눌 때 언어는 아람어였기 때문에 아람어로는 이런 구별이 없습니다. 아람어를 헬라어로 집필하는 과정에서 생긴 차이점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②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여러 곳에서 아가페와 필레오가 분명한 구별없이 호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신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왕 베드로를 이해하시기로 작정하셨으면 주님 편에서 "베드로야 내가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 그러시면 될텐데 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일까요? 이는 주님을 섬기는 사역, 교회를 세우고 셀 목장을 섬기는 사역의 참된 힘, 원동력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① 베드로는 지금 자신이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했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② 주님이 나를 믿어 주실까? 하는 문제 이전에 자신이 자신을 믿을 수도 없습니다.
③ 나는 주님의 제자로서 자격을 상실한 것은 아닐까? 나는 아직도 주님의 제자인가?
④ 주님이 나를 따라 오라고 말씀하셨던 그 명령, 부족한 자신을 통해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던 그 약속이 지금도 유효한 것인가? 지금 근본적인 문제, 정체의식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누가 하나님의 사람인가? 누가 하나님의 사역자인가? 하나님 나라 사역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확인 시켜 주는 일 일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 배신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님을 그 무엇보다 사랑한다"는 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너무나 자주 사탄은 우리를 공격합니다.
① 그런 실수를 범하고도 네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구?
② 그런 끔찍한 죄를 짓고도 네가 사역자라구?
③ 너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자가 하나님의 교회, 셀 목장을 섬겨? 그래 놓고도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해? 성령님이 너를 지키실 것 같니?

그때마다 우리의 대답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 그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교회를 사랑한다. 이것이 사역의 근거입니다. 이것이 사역의 원동력입니다. 이것이 사역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축복입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베드로 깊숙이 숨어 있는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 그것을 끄집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은 100개의 실수와 약점을 보시지 않고 1개의 작은 믿음,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보십니다.

묻습니다. 다른 것은 잘 몰라도 내가 주님 사랑하는 그 마음은 분명하십니까? Yes. 그러면 O.K.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일터로 가십시요.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와 일은 주님을 사랑하는 그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 힘도 내 공로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므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누군가 이 부족한 종의 가슴을 파헤치고 들여다보았다고 한다면, 주님이 기뻐하는 참된 교회의 모습이 도대체 무엇일까? 영광스런 교회의 그림이 늘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10년전 이 개척교회를 시작했을 때에 눈물겨운 시간들이 많이 있었지만 주님 사랑한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힘든 줄 모르고 달려왔습니다.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 인줄 알고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교회를 섬겨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고가 아니었고 종의 기쁨이었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 교회 건물을 건축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것은 힘든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늘 기쁨이 되어져 왔습니다. 이만한 교회를 주님께서 이루어 주셨습니다.

또 우리교회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셀 교회로 가기 위하여 선포하고 1년여 세월을 달려 왔습니다.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나 많이 있었습니다. 셀 교회 가치를 이해하고 교인들을 설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셀 교회 시스템을 구축하고 교인들을 훈련시켜 가는 길은 참으로 선구자의 길이었고 고독했고 힘이 들었습니다. 셀 교회의 능력을 체험하고 교인들과 나누는 일은 한번 죽었다가 깨어나야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나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내 능력의 한계를 인정해야 할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이것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부흥될 수 있고 편안하게 목회 할 수 있는데 혼자 기도할 때는 "주님 힘들어요! 내가 너무나도 약해요 그만 둘까봐요. 포기할까봐요." 몇 번이고 주님 앞에 되 뇌여 봅니다.

그때마다 주님은 종을 만나 주셨습니다. "종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종이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정말로 네가 하는 이 일이 나를 사랑해서 하는 일이기를 원하느냐." "그러믄요. 주님." "정말 네가 하는 모든 일들이 나를 사랑해서 하는 일이냐?" "네. 종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종아, 그렇다면 네가 힘들고 평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너희 교회가 성장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네게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원하노니 함께 가자.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함께 가자.

그래요 주님! 이 교회의 모습이 주님이 그렇게도 세우기를 원하셨던 교회의 모습이라면 가겠습니다. 신약교회가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그 영광스러운 교회, 1세기를 걸어갔던 영광스러운 교회의 모습이라면 가겠습니다. 마지막 때 주님께서 보시기를 원하는 영광스러운 신부된 모습이 바로 이 셀 교회의 모습이라면 가겠습니다.

교회가 지금보다 훨씬 더 작아져도 가겠습니다. 지금보다 목회가 10배나 더 힘들어도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라고 한다면 가겠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종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때마다 주님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만나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때마다 종에게 확인을 시키시고 다시 갈 수 있는 힘을 제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 여러분 함께 가십시다. 주님이 원하는 곳으로 가십시다. 힘들어도 가십시다. 넘어진 자리에서도 주님은 여러분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등지고 도망가는 자리에서도 주님은 여러분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힘들어 지쳐 있는 자리에서도 주님은 여러분을 찾아가 만나 주실 것입니다

출처/류영모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