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다니엘3:13-18)


아프리카에 가면 비서새가 있다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하늘을 곧잘 날으고 친구들과 놀기도 하고 벌레를 잡기도 하고 또 노래를 합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위기를 만나게 되면 날개가 꽁꽁 얼어붙고 온몸이 마비가 되어 다른 짐승들의 밥이 된다고 합니다.

믿음 생활하는데 꼭 비서새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감사도 하고 찬양도 하고 곧잘 예배도 합니다. 그러나 생의 위기를 만나게 되면 신앙생활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내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운 때를 만나곤 합니다. 우선 삶이 너무 평안할 때, 우리는 영적인 무관심과 영성 마비의 때를 만날 수 있습니다. 반면 삶이 너무 고통스러울 때도 믿음을 지키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련한 등반가의 진가는 야산을 오를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험산 계곡을 지날때에 비로소 발휘될 수 있는 것입니다. 뱃사공이 능숙한 사공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고요한 바다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바다에 풍랑이 일어나 흉흉할 때 비로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탄할 때는 그 신앙의 진위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극심한 환란과 시련 그리고 도전에 부딪혀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주 5일 근무제가 보편화되면 많은 교회와 신앙인들이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지금 셀교회 시스템을 갖추고 그런날을 오히려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대처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제가 개척교회를 시작할 때 저를 격려한다고 찾아온 어떤 목사님이 능곡은 개척이 안된다는 겁니다. 개척이 안되는데 이유 10가지를 말하더라구요.

① 100년된 교회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새로운 교회들이 안된다는 겁니다. 제 마음속에 아니다. 오히려 신선한 교회도 필요하겠구나. ② 이 도시 사람들은 곧 신도시로 들어갈 사람들이기 때문에 마음을 안 준다는 것입니다. 좋다. 너희들이 마음 안주면 내가 마음 준다. ③ 이 도시 사람들은 이 교회, 저 교회,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교회가 안정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얼씨구나 좋다. 그러면 우리교회도 와 보겠구나. 한번만 오면 나는 놓치지 않는다. 오히려 도전의 제목으로 삼고 기쁨으로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때 보다도 도전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은 도전입니다. 신앙생활은 고통을 잊게 하는 마약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군병이 된다는 것은 어린아이의 병정 놀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 영원한 신혼의 밀월 일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신앙생활은 곧 전투요, 목숨을 건 전쟁이란 말입니다. 지금은 영적전쟁의 때입니다. 한 번의 실패에 포기해서도 안되고 한 번의 승리에 도취되어 방심해서도 안되는 끊임없는 싸움의 연속입니다.

본문은 오늘 우리에게 한 가지 커다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어떤 도전이 와도 그대는 그대의 신앙을 지킬 수 있는가? 어떤 유혹이 와도 그대는 그대의 신앙에 오점을 남기지 않을 수 있는가? 오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우리 모두 이 주님의 커다란 질문 앞에 분명한 응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II. 말씀 속으로

본문을 살펴 보십시다. 유대나라 여호야 김 왕때에 유대나라는 국운이 분리하여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유대나라 왕족과 귀족, 학문있고 재주 좋은 사람들을 많이 사로잡아다가 바벨론 문화를 가르치고 동화정책을 썼습니다. 이러한 신앙적 혼합주의에 절대로 말려들지 아니하고 끝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킨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다니엘서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 네 사람에게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지혜와 총명이 탁월했던 이들은 지배국에 들어가서도 상당히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는 출세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들에게 모진 시련의 바람이 휘몰아쳐 옵니다. 종종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축복과 시련을 함께 주실 때가 있습니다. 가끔 축복은 시련이라는 보자기에 쌓여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시련이 올 때 당황하지 마십시오.

사울 임금은 골리앗 앞에 섰을 때에 골리앗은 덩치가 너무 커 무찌를 수 없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년 다윗은 물맷돌을 돌리며 골리앗은 덩치가 너무 커 내가 적당히 던져도 맞겠구나. 그래서 쉽게 도전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실패자는 문제가 너무 크다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성공자는 문제가 클수록 성공도 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느브갓네살은 바벨론 제국의 권위와 왕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하여 거대한 금 신상을 세웠습니다. 바벨론 성 남쪽 약 10km 지점에 있는 두라 평지에다가 약 7층 높이에 달하는 금 신상을 만들어 놓고 제막식날부터 모든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그 금 신상 앞에 절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만약, 왕명을 어기면 활활 타오르는 풀무불에 넣어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드디어 제막식날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온갖 악기소리에 맞추어 왕명에 따라 금 신상 앞에 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하늘을 찌르며 위용있게 서 있는 바벨론 우상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우상에게 절하는 타협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임금의 명령을 거부하고 죽음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기로에 서게 된 것입니다.

전승국 대군주의 무서운 권위 앞에 서 있는 패전국의 젖비린내 나는 청년 포로들이 감히 무엇을 어떻게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 청년은 눈에 보이는 바벨론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를 더 두려워 할 줄 알았고, 느브갓네살의 왕좌보다 하나님의 보좌를 더 존귀히 여길줄 알았습니다.

① 큰 재목은 큰 연장으로 다듬는 법입니다. ② 열매없는 나무엔 아이들이 돌을 던지지 않습니다. ③ 열매가 많은 나무일수록 많은 돌을 맞게 되어 있습니다. ④ 큰 신앙인 일수록 큰 시련을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큰 시련, 큰 도전이 찾아올 때 - 야, 하나님이 나를 크게 쓰시려나 보다. 기뻐하며 시련을 맞이해 보십시오. 야, 사탄도 나를 알아보는 구나! 오히려 기뻐해 보십시오. 문제를 두려워하지도 말고 회피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이 세 청년의 선택의 기로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시시때때로 부딪히는 갈등과 시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때마다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보좌도 잃지 않고 바벨론의 왕좌도 버리지 않는 회색지대가 없을까? 눈치를 살피곤 합니다. 이에 대해 「라블레」라는 신앙인은 “두 의자 사이에 함께 앉으려 하다가 땅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고 경고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세 주인공은 우상 앞에 경배하는 길이 아닌 죽음의 길을 선택하고 이글거리는 풀무불 앞에 서게 됩니다. 오늘 잘못된 물질주의 문화의 유혹 앞에 쉽사리 굴복해 버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그 절개가 다른 이 얼마나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입니까?



III. 자유하는 신앙

현대 인간들을 굴복시킨 세 가지 힘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돈의 힘이요. 둘째는 권력의 힘이요. 셋째는 죽음의 힘입니다. 현대인들은 돈의 힘 앞에, 권력의 힘 앞에 절하고 고개를 숙여야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구나 죽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리기에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못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주인공들은 우선 황금우상 앞에 자유했습니다. 두라 평지 위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황금우상! 그 앞에 임금과 모든 대신들이 절하고 있을 때 그 앞에 황금을 비웃듯 당당히 서 있는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족도, 대권력자도, 외국 대사도, 계급 높은 군인도 아니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포로병에 불과했던 이들 세 사람 - 그들은 돈의 힘 앞에 굽실거리며 비굴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비웃고 있습니다.

산업사회는 누가 물질을 많이 생산할 수 있느냐? 누가 물질을 많이 소유할 수 있느냐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물질에 굴하지 아니하고 초연히 물질 앞에 자유할 수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 세 사람은 권력 앞에 자유했습니다. 전승국의 대군주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신앙입니다. 하나님만이 경배를 받을 수 있는 내 인생의 진정한 주권자라는 고백이었습니다. 비록 임금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진리가 아니면, 정의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주인공 - 세 사람은 죽음 앞에서 자유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살기위해 몸을 더럽히고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자신의 신앙을 꺾고 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나는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도대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가졌던 신앙이 어떠한 신앙이었길래 이토록 당당히 자유할 수 있었으며 오늘 우리를 이토록 부끄럽게 만들고 이처럼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단 말입니까?



IV. 첫째, 그들의 신앙은 타협하지 않는 신앙, 굴곡되지 않은 신앙이었습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회유하며 말하기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에 대한 청년들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16절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이 말의 뜻은 양보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양보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말로 대화해서 문제를 풀어갈 때가 있고 행동으로 말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임금이여, 이것은 탁상공론을 하거나 타협해야할 문제가 아닙니다. 말로 대답할 필요가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양심과 신앙이 허락하지를 않습니다. 그들의 결의는 단호하고 분명했습니다.

한국교회가 큰 교회 목사님들의 정신을 먹고 산 것이 아닙니다. 부자 장로님들의 양식을 먹고 산 것이 아닙니다. 공산주의 총칼에 굴복하지 않았던 손양원 목사와 그 아들 동인이 동신이의 피를 먹고 산 것입니다. 일제 신사 앞에 절하지 아니하고 대못이 박힌 송판길을 당당히 걸어갔던 주기철 목사님의 피를 먹고 자라온 것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넓은 길을 가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라오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좁은 길 가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걸어가신 자국마다 뜨거운 눈물 붉은피 가득하게 고였구나.
눈물없이 못가는 길 피없이 못가는 길 영문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오늘 우리는 양보해야 할 것은 양보하지 않고 당연히 양보하지 않아야 할 것은 너무나 쉽게 양보해 버리는 우리의 모습을 자주 보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성질과 자존심을 죽이지 못하여 우리자신을 쏟아내는가 하면, 반대로 도무지 양보할 수 없는 신앙의 순결, 하나님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둔감해질 데로 둔감해진 오늘 그리스도인의 삶을 봅니다.

우리를 유혹으로 이끌 때에, 우리를 타협의 광장으로 몰아갈 때에, 우리는 여기 세 청년의 단호한 결의를 보여줄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일만은 양보할 수가 없소. 그 문제에 대해선 대답할 필요조차 없소. 나는 행동으로 말하겠소. 내 양심이 말을 하고 있소.” 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예수 잘 믿었더니 눈먼 아파트 한채 굴러 들어와서 복을 받았다. 이것은 축복이고, 예수 잘 믿었더니 아파트가 그냥 굴러 들어오는데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저주더란 말입니까?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축복관을 새롭게 해야 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2. 의롭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가난하게 살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를 따라 살고싶은 사람은 고난 받는 것 손해보는 일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V. 둘째, 세 청년의 신앙은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앙입니다.

17절에서 이들은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라는 구원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을 건지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며 또한 당신의 백성과 맺은 언약을 성실히 지키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능히 건져 내시리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왕십리에 있는 어떤 교회에서 집회를 하고 목사님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시내 어느 음식점에 민어찜을 잘한다고 점심을 먹고 돌아가는데 신세계 백화점 사거리 신호등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의 특징이 신호등에 걸렸을 때에 1번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양반입니다. 파란신호등이 켜지기 직전에 자동차 유리에 새가 날아가다 새 똥을 쐈습니다. 이놈의 자식이 새 똥을 싸네. 잠깐 쳐다보는 사이에 불이 켜졌고 옆에 차가 가니까 이 목사님도 앞도 보지 않고 붕~ 엑셀을 밟았는데 남산 터널에서 120km로 자동차가 전속력으로 파란불인데도 달려내려오는 것입니다. 저희 차 앞에서 10cm 남겨놓고 찬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갔습니다. 호텔에 돌아와서 계산을 해 보았습니다. 이 자동차가 얼마만큼만 늦게 달려나왔으면, 우리 자동차가 몇 초만 빨리 출발했으면, 어떤 사고가 났을까? 생각해 보았더니 0.01초만 우리가 먼저 출발하거나 0.001초만 자동차가 늦게 내려왔더라면 정확히 내 앞을 치고 지나갈 뻔 했습니다.

저는 그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새똥을 통해서도 나를 건져주시는 분이시구나.‘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기도의 응답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의 생활을 주장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의 질병을 치료하고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십니까? 하나님을 믿으세요. 그의 능력을 신뢰하십시오.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도 능히 건지시고 악마의 손에서도 능히 건져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은 우리가 당하는 시련보다 더 크십니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사랑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문제보다 더 크십니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손길은 우리를 해치려는 악마의 손길보다 빠릅니다.



VI. 셋째,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입니다.

세 청년이 가진 신앙의 클라이 막스는 그 다음절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8절을 함께 보십시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나는 분명히 성경의 모든 풍성한 약속들을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나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자를 구원한다는 신유의 능력을 믿습니다. 나는 분명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나는 분명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들에게 넉넉한 재물을 허락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것은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그분은 영원히 우리 신앙의 대상이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저기 이글거리는 풀무불 속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왕이여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우리가 풀무불 속에서 우리가 그대로 죽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상앞에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감사하며 죽어갈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신앙고백입니까?

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부르짖었던 주님의 절규가 바로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의 고백이 아니었습니까? “내 아버지여 할 수 있거든 내게서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나님이여, 이 풀무불 속에서 내 몸이 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일찍이 칼빈처럼 “내가 지옥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지옥을 내려가는 길목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지옥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넉넉한 재물로 늘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내가 이 가난 중에 살면서도 낙심치 않고 감사하며 고결한 신앙을 사는 여유있는 삶의 태도를 나타내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면 부자되기를 탐하지 아니하고 이 가난한 중에 주를 섬기겠나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여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 침상에서 병으로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병상생활의 투병중에서 내가 신앙을 드러낼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 SBS 방송초기 코미디 전망대 진행자 김경태 장로님은 말년에 간암으로 투병생활을 하셨습니다. 죽기전날 가족예배를 드렸던 기도는 제 머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터인데 죽음을 두려워 하리이까? 하오나 이 고통이 너무나 극심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입술로 범죄할까 두렵습니다. 못나도 장로인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까 두렵습니다. 지난 몇 개월동안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시간마다 찾아오는 고통 때문에 몸부림을 하고 살아왔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가릴까 두렵사오니 이 고통을 제거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이 고통 가운데도 당당히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사랑스런 내 자녀들에게 우리 아버지는 그토록 처절한 고통 가운데서도 당당히 아버지의 영광을 찬송하며 갈수 있었다는 기억을 남기게 해 주옵소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고통이 제거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주님앞에 감사하며 눈을 감고 싶습니다.?



VII.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신앙에 대한 보상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전적인 신뢰를 보냈던 이 세 청년을 하나님은 외면하셨나요? 세 청년이 풀무불에 던져지자마자 불속에 뛰어들어 그들을 껴안고 구원하신 분이 계십니다. 나를 살리려 그분이 십자가 불속에 뛰어들어 우리의 채찍을, 무거운 죄의 짐을 가슴에 끌어 안고 활활 타 가셨던 성자 예수님!

세 청년은 머리털 하나 상처입지 않고 보호를 받았습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다.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이 약속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이 세 청년의 신앙이 가져온 축복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왕마저 회개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굴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28절 말씀 이하에 보면 이방 왕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드디어 왕은 중대한 정치적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우선 금 신상에 절하라고 한 첫 번째 조서를 폐지하고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공포합니다.

29절과 30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더욱 높이니라” 할렐루야!



VIII. 결 론

마지막으로 저는 이런 질문을 해 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세 청년을 풀무불 속에서 끄집어 내지 아니하셨더라면 그들이 어떻게 했을까? 그러나 그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풀무불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며 기쁘게 순종했을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물어 보십시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당신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당신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당신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당신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까?

이지선이라는 젊은 자매(78년생, 이화여대 유아교육학과 졸업)가 2000년 7월 30일 주일 오빠가 모는 마티즈 승용차를 타고 가다 용산 어느 지점에서 음주운전을 하던 갤로퍼 승용차에 치어 6중 추돌사고후 차가 불이 붙는 바람에 화상을 입고 새까만 몸으로 중환자실에서 생명을 넘다들다 겨우 살아 개설한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실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보는 순간 속을 뱉어 내는 한 마디가 ‘저러고도 살 수 있을까? 저러고도 정말 살 수 있을까?’ 이지만 정작 본인은 당당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써내려 가는 감사의 글 중 극히 적은 일부입니다.

짧아진 여덟 개의 손가락으로 사람에게 손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되었고, 1인 10역을 해내는 온전히 남은 엄지손가락으로 생활하며, 글을 쓰며, 엄지손가락을 남겨주신 하나님께 감사했고, 눈썹이 없어 무엇이든 여과 없이 눈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험하며 사람에게 이 작은 눈썹마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막대기 같아져버린 오른팔을 쓰며 왜 하나님이 관절이 모두 구부러지도록 만드셨는지, 손이 귀까지 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온전치 못한 오른쪽 귀바퀴 덕분에 귀바퀴란 것이 귀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나님이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 주신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잠시였지만 다리에서 피부를 많이 떼어내 절뚝 절뚝 걸으면서 다리가 불편한 이들이 걷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건강한 피부가 얼마나 많은 기능을 하였는지 껍데기일 뿐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피부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남겨주신 피부들이 건강하게 움직이는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얼마나 정교하고, 놀랍게 만드신 것인지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감히 내 작은 고통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100만분의 1만큼 공감할수 있었고, 너무나 비천한 사람으로 때로는 죄인으로, 초라한 사람으로 대해지는 그 기분 또한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지난 고통마저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이 고통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남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가슴이 없었을테니깐요.

“저러고도 살수 있을까?? “네. 이러고도 삽니다.?

몸은 이렇지만 누구보다 건강한 마음임을 자부하며, 이 몸이라도 전혀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지 않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런 몸이라도 사랑해주시고 써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감사드립니다.

“네. 저는 이러고도 삽니다.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나는 건강한 몸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께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출처/류영모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