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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쓰는 사람 (사도행전13:20-23)
어릴 때 시골교회에서 부흥강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시골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여 이삿짐을 내리는데 놋으로 만든 오강단지 하나가 나오더랍니다. 여러분 오강 단지 아십니까? 옛날 방마다 놓여있던 소위 이동용 화장실입니다. 그 교회사택은 요즘 아파트처럼 집안에 수세식 화장실을 시설한 터이라 무거운 놋으로 만든 오강단지가 필요할 일이 없지요. 마침 주물공장을 운영하시던 장로님이 교회에 계셨습니다. 그 장로님이 놋 오강단지를 들고가 풀무에 녹여 밥그릇, 국그릇을 만들어 가지고 왔습니다. 목사님 사모님은 그 교회에 계시는 동안 그 놋그릇에 밥 담고 국 담아 잡수셨더랍니다. 부흥강사의 얘기는 오강단지 같은 우리가 성령안에서, 예수의 보혈안에서 녹아 밥그릇되고 국그릇 되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바뀔 줄 알아야 합니다. 오강단지로 남아 있어 가지고는 아파트 문화에 쓰임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가 됩니다. 시대에 따라 바뀔 줄 알아야 하고, 비전에 따라 바뀔 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의 본질, 신앙인의 본질에 맞게끔 바뀔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주님의 심장속에 있던 바로 그 교회를 찾아가는 몸부림을 하고 있습니다. 소위 셀교회 운동입니다. 교회의 비전과 사명이 셀교회의 회복에 있다면 내 성향도, 사명도, 비전도, 꿈도 거기에 맞게끔 바뀌어야 하나님이 쓰십니다. 교회도 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쓰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몇 달동안 「은혜의 영성」 그리고 「복의 근원」을 주제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다윗이란 인물을 중심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란 주제로 몇 시간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다윗을 연구하려면 구약성경의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기 상하 등 무려 6권의 책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외에도 시편의 많은 부분이 다윗의 삶과 그 신앙을 조명해 줍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을 시작하며 마태복음 1:1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그러므로 지금까지 “아브라함”을 들여다 본 우리가 다윗을 살펴본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 생각됩니다.
이 시간 저는 하나님에게 솔직하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하나님, 다윗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다윗이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다윗에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만한 어떤 이유가 있어서 하나님이 선택했습니까?”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첫째, 이 두 질문을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를 버린 적이 없습니다.
셋째, 아무리 약자라도 하나님이 들어 쓰실 때 그는 위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쓰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할 일이 있다고 하는 것, 쓰임 받고 산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일찍이 루소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 사람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존재하기 위해 태어나고, 또 한 번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다. 때문에 사람은 자기 사명을 발견하기까지는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릇이라고 다 그릇이 아닙니다. 쓰임 받고 사는 그릇이 있고 쓰임 받지 못하는 그릇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도 보면 큰그릇이 쓰임받는 것이 아니고 아침 저녁으로 들랑날랑 거리며 국 담고, 밥 담고, 반찬 담는 - 쓰임받는 그릇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쓰임받는 그릇을 만들지 아니하고 너도 나도 큰 그릇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사회가 이렇게 어지러운 것이고, 교회가 신령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큰 함백이 같은 것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일년에 한번씩 김치나 담글 때 옆집에서 빌려다 써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아침 저녁으로 들랑거리는 간장 종기는 쓰임을 받는 거지요.
얼마 전 한국을 다녀간 인도네시아 오바쟈 목사는 ‘You can be a leader! 당신도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라는 구호를 외쳤고, 그 구호를 들은 교인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비전에 사로잡혀 아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셀교회가 되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유능한 사람인데도 버림당한 사람이 있고 무능한 사람인데도 크게 쓰임 받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버림받은 사람의 대표로 사울을 들고 있고 쓰임 받은 사람의 대표로 다윗을 들고 있습니다.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2)
「내가 그를 쓰겠다」- 다윗을 쓰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버리시고 어떤 사람을 들어 쓰십니까?
II. 하나님은 약자를 쓰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쓰신 첫 번째 이유는 대단히 역설적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다윗이 약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자를 들어 쓰십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새라는 사람의 집으로 갑니다. 이새는 일곱 아들과 함께 몸을 성결하게 하고 사무엘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 일곱 아들이 다 지나가도록 하나님의 응답은 “내가 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아들 8형제 중 막내로서 아버지도 그에게 별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왕이 될 면접시험에 다윗은 빠져 있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묻기를 ‘네 아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의 대답이 사무엘상 16:11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여기 말째라는 말은, 단순히 형제 서열상 말째라는 말만은 아닙니다. 사람들 앞에 약자였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택했습니다. 약자를 택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사람의 기준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은 달랐습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를 원하십니까? 자기 자신이 말째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약한 자, 겸손한 자를 쓰십니다.
사울 임금이 버림 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울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몰랐습니다. 왕이라고 제사장이 하는 제사까지 다 집례할 수 있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갈멜산에는 자신을 위하여 승전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울 임금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약에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의 뜻은 “큰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 “큰 자”라는 이름을 바꾸어 “작은 자” 즉 바울 이라고 고쳤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했고, 성도 중에서도 작은 자라고 말했으며, 죄인 중에서도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큰 자로 남아 있을 때 친히 나타나 대적하셨고 작아 질 때 크게 들어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쓰십니다. 작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스스로 말째라고 여기는 사람을 첫째로 들어 쓰십니다.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말째가 하나 있기는 한데 만나 보나마나입니다. 신통한 구석이 없습니다. 그 아이는 아닙니다.” 이런 뜻입니다.
아버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형님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말째야, 우리 형제들 가운데 임금이 나올 모양이다. 우리는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러 갈테니 넌 여기서 양을 치고 있거라.”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와 형님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다윗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분명 난 아니야. 난 심부름이나 해야지.’
보십시오. 그의 부모는 그를 부정했습니다. 그의 형제들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자신을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다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바로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No 하고 당신 자신마저도 No 할찌라도 하나님께서 Yes 하시면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역자, 쓰임 받는 사람이 됩니다. 믿습니까?
III. 하나님은 자기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을 쓰십니다.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두 번째, 우리를 주목시키는 단어는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새의 아들 가운데 왕이 나온다면 다윗도 관심을 가지고 쫓아 왔을 법도 한데 다윗은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묵묵히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것도 없습니다. 귀한 것도 없고 천한 것도 없습니다. 자신이 맡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옥중에서 모범적인 죄수로 일을 하고 있을 때 부름을 받고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은 깊은 밤 성전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불렀습니다.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을 때, 베드로는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불러 쓰셨습니다.
특별히 “양을 치고 있었다”고 하는 말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베들레헴 목자들은 밖에서 자기 양떼를 치다가 천사의 음성을 듣고 아기 예수께 경배했습니다. 다윗이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은 장차 하나님의 양떼인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식한 사람도 쓰십니다. 무능한 사람도 쓰십니다. 죄가 많은 사람도 쓰십니다. 그러나 책임감이 없는 사람, 열정이 없는 세상, 성실하지 못한 사람을 쓰는 법이 없습니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어린 양입니다. 때문에 자기라는 양을 잘 지켜야 합니다.
- 날마다 하나님과 교통하므로
-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경험하므로
-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성실한 자녀가 되어 자신이라는 어린 양을 잘 지켜야 합니다.
- 자신의 믿음을 잘 키켜야 합니다.
- 그리고 내게 맡겨진 사람들을 잘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동생을 지키기는 커녕 동생을 해친 가인에게 물었습니다.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때 가인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 가인은 중요한 사실을 몰랐습니다. 아벨은 아버지 어머니나 지키는 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해쳐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가인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 우리의 셀목장 가족을, 믿음의 가족들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역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맡겨진 사역 앞에 진실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게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했느냐”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형님들이 다 떠나간 그 자리에서 혼자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IV.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이유가 사무엘상 16:7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새의 일곱 아들을 다 거절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다윗의 중심이 어쨌다는 이야기입니까? 다윗의 중심에 무엇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동서고금 남녀노소 모든 사람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멋진 다큐멘타리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블레셋 장군 골리앗 앞에 모두 주눅이 들어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던 차에 소년 다윗이 나타나 사울 임금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나 정도의 용맹이면 해 볼만 합니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입니다. 일꾼들의 눈에는 일이 보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가 보이게끔 되어 있습니다.
적장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계속해서 그는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다윗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철저한 하나님 중심주의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만 두려워했고 그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능력만 믿었습니다. 그가 무서워한 것은 블레셋의 거인이 아닙니다. 적군의 힘이 아닙니다. 사울 임금의 권력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형님들을 전술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높이는 다윗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을 보셨습니다.
옳습니다. 역대하 16:9에서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어 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로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임금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나도 저를 버렸다” (삼상15:23)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을 높이실 때 그를 높여 주셨습니다.
이제 결론은 분명합니다. 인본주의 - 자기 중심, 자기 고집대로 살 것이냐? 아니면 신본주의 - 하나님 중심,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 것이냐 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버리는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크게 쓰는 사람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갈림길이 됩니다.
골리앗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골리앗이 되고, 다윗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면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골리앗 가치관
다윗 가치관
칼, 창, 단창
큰 키, 외모
자신의 힘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을 의지함, 자신의 약함
하나님의 능력
J. L. 코미스키라는 사람이 전 세계에서 쓰임 받는 셀교회 리더를 연구해 보니까, 그가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느냐,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 은사가 있느냐 하는 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얼마만큼 영광스러운 교제를 가지는가? 내게 맡겨준 사람들을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그 사람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신 사명과 소명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하며 살아가는가? 이것만이 쓰임 받는 지도자와 버림 받는 지도자의 준거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사모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는 일마다 성령님을 요청하십시오. 환영하십시오. 무한대로 여러분의 삶을 열어놓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충만한 만큼 하나님 앞에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몇 주전 한국을 다녀간 피터 와그너 박사는 “21세기는 신사도적 교회와 그 사람들에 의해 시대적인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그 중에 세상 학교에서는 많은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성령학교에서 성령을 배운 사람들이 나타나 세계교회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사실 19세기 많이 배우지 못한 D.L. 무디에 의해 부흥운동이 주도되었듯이, 지금 우리시대 성령운동도 많이 배우지 않은 남미의 카를로스 아나콘디아 같은 사람들에 의해 강력한 성령의 바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꿈을 가지십시오.
V. 하나님은 성령의 사람을 쓰십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성령에 감동된 사람을 쓰십니다.
사무엘상 16:13에 보면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난 후 “이 날부터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성령이 다윗과 함께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영적인 사람을 쓰십니다. 사무엘상 18:10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야료란 이유 없이 생트집을 잡고 사람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귀신에게 붙들리면 귀신의 종이 되고 성령에 감동되면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다윗은 하나님께 눈물로 간구하는 기도 가운데 이런 말을 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 내지 마시고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1)
다윗은 궁궐에서 쫓겨 나는 것보다 주 앞에서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다윗은 왕관을 거두어 가는 것 보다 성령을 거두어 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재물과 권세를 빼앗기는 것보다 주의 은혜를 빼앗기는 것이 더 두려운 줄 알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했던 다윗은 하나님을 몹시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시편에 실린 다윗의 시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는 시로써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에 들여올 때에는 너무 좋아서 그 행렬을 따르며 부끄러움도 잊은 채 춤을 추었습니다. 이렇듯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신앙적 감동과 시적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극히 예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나아가 다윗은 철저하게 교회 중심의 사람이요 성전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그 성전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치는 사람이었습니다.
VI. 다섯째,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사람은 치루어야 할 댓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지도자로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까지 당당히 댓가를 지불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일로 인해 사울 임금의 시기를 받아 쫓겨다녀야만 했던 고통스런 훈련의 시간들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임금의 미움을 받은 다윗은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정식 왕이 되기까지 자그마치 15년간을 쫓겨다니는데 때로는 엔게디 굴속으로, 때론 이웃나라 블레셋과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팔레스타인 산지, 평야, 사막 구석구석 사울의 군사를 피하여 도망 다녔지만 그것이 도망 다닌 생활이 아니라 전국의 곳곳, 이웃나라까지 군사적 지리를 몸소 답사하고 익히는 훈련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생활 가운데서 성경에 분명하고도 똑똑히 기록되어 우리의 주목을 끄는 단어는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라” (삼상 16:18, 18:28)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이유였고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훈련의 기회, 자신이 치루어야 할 고통스런 댓가를 흔쾌히 치루어 갑니다.
우리교회는 지금 영광스런 교회를 향한 걸음을 서둘지도 않고 미루지도 않고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랬듯이 걸음마다 하나님께서는 꼭 필요한 일꾼들을 통해 그 짐을 감당토록 하셨습니다. 꿈땅비전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 댓가 지불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 이 일은 멋지게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만사엔 때가 있고 기회가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철학자 칸트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남자가 청혼을 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칸트가 청혼을 하지 않자 기다림에 지친 그녀가 먼저 청혼한 것이었습니다.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정중하게 대답한 칸트는 그 뒤부터 그녀와의 결혼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우선 머리로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사랑과 결혼에 관한 책을 모조리 찾아 읽었고, 자신의 노트에 결혼에 대해서 찬성하는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을 하나하나 적어서 분석했습니다. 그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신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래, 이젠 그녀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이 보다 더 신중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자신이 내린 신중하고 합리적인 결정에 그는 대단히 만족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생각하고 결정한 만큼 그 누구보다도 근사하게 그녀에게 청혼하리라.’ 마음먹은 그는 다음 날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그녀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녀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망설이고 있는 사이 내 딸은 이미 결혼해서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소. 당신은 너무 늦게 왔군요.?
VII.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생을 살아가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1. 나는 연약하기 때문에 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말째를 부르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 모든 사람이다 부정하고 No! 라고 말해도 하나님이 긍정하시고 Yes! 하시면 당신의 생은 긍정이 될 수 있습니다.
2. 당신 자신을 잘 지키십시오. 당신에게 주어진 양떼들, 하나님과의 관계, 당신의 영성, 당신의 믿음, 당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소중히 지키십시오.
3. 하나님은 당신의 중심을 보십니다. 이 땅의 가치관, 골리앗의 가치관으로 살아가지 말고, 하늘의 가치관, 다윗 가치관으로 사십시오. 예수님 이름의 권세를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분을 의지하십시오.
4. 성령의 임재와 권능, 그분의 감동하심과 함께 하심을 잃지 마십시오. 역사는 그분의 뜻대로 움직입니다. 그 분의 자원과 능력을 구하십시오.
5. 이 일을 이루기까지, 당신이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쓰임 받기까지 치루어야 할 댓가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을 쓰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을 쓰시겠다 말씀하십니다.
출처/류영모 목사 설교 중에서
어릴 때 시골교회에서 부흥강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시골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여 이삿짐을 내리는데 놋으로 만든 오강단지 하나가 나오더랍니다. 여러분 오강 단지 아십니까? 옛날 방마다 놓여있던 소위 이동용 화장실입니다. 그 교회사택은 요즘 아파트처럼 집안에 수세식 화장실을 시설한 터이라 무거운 놋으로 만든 오강단지가 필요할 일이 없지요. 마침 주물공장을 운영하시던 장로님이 교회에 계셨습니다. 그 장로님이 놋 오강단지를 들고가 풀무에 녹여 밥그릇, 국그릇을 만들어 가지고 왔습니다. 목사님 사모님은 그 교회에 계시는 동안 그 놋그릇에 밥 담고 국 담아 잡수셨더랍니다. 부흥강사의 얘기는 오강단지 같은 우리가 성령안에서, 예수의 보혈안에서 녹아 밥그릇되고 국그릇 되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바뀔 줄 알아야 합니다. 오강단지로 남아 있어 가지고는 아파트 문화에 쓰임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가 됩니다. 시대에 따라 바뀔 줄 알아야 하고, 비전에 따라 바뀔 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의 본질, 신앙인의 본질에 맞게끔 바뀔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주님의 심장속에 있던 바로 그 교회를 찾아가는 몸부림을 하고 있습니다. 소위 셀교회 운동입니다. 교회의 비전과 사명이 셀교회의 회복에 있다면 내 성향도, 사명도, 비전도, 꿈도 거기에 맞게끔 바뀌어야 하나님이 쓰십니다. 교회도 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쓰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몇 달동안 「은혜의 영성」 그리고 「복의 근원」을 주제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다윗이란 인물을 중심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란 주제로 몇 시간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다윗을 연구하려면 구약성경의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기 상하 등 무려 6권의 책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외에도 시편의 많은 부분이 다윗의 삶과 그 신앙을 조명해 줍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을 시작하며 마태복음 1:1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그러므로 지금까지 “아브라함”을 들여다 본 우리가 다윗을 살펴본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 생각됩니다.
이 시간 저는 하나님에게 솔직하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하나님, 다윗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다윗이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다윗에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만한 어떤 이유가 있어서 하나님이 선택했습니까?”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첫째, 이 두 질문을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를 버린 적이 없습니다.
셋째, 아무리 약자라도 하나님이 들어 쓰실 때 그는 위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쓰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할 일이 있다고 하는 것, 쓰임 받고 산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일찍이 루소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 사람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존재하기 위해 태어나고, 또 한 번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다. 때문에 사람은 자기 사명을 발견하기까지는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릇이라고 다 그릇이 아닙니다. 쓰임 받고 사는 그릇이 있고 쓰임 받지 못하는 그릇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도 보면 큰그릇이 쓰임받는 것이 아니고 아침 저녁으로 들랑날랑 거리며 국 담고, 밥 담고, 반찬 담는 - 쓰임받는 그릇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쓰임받는 그릇을 만들지 아니하고 너도 나도 큰 그릇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사회가 이렇게 어지러운 것이고, 교회가 신령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큰 함백이 같은 것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일년에 한번씩 김치나 담글 때 옆집에서 빌려다 써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아침 저녁으로 들랑거리는 간장 종기는 쓰임을 받는 거지요.
얼마 전 한국을 다녀간 인도네시아 오바쟈 목사는 ‘You can be a leader! 당신도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라는 구호를 외쳤고, 그 구호를 들은 교인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비전에 사로잡혀 아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셀교회가 되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유능한 사람인데도 버림당한 사람이 있고 무능한 사람인데도 크게 쓰임 받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버림받은 사람의 대표로 사울을 들고 있고 쓰임 받은 사람의 대표로 다윗을 들고 있습니다.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2)
「내가 그를 쓰겠다」- 다윗을 쓰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버리시고 어떤 사람을 들어 쓰십니까?
II. 하나님은 약자를 쓰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쓰신 첫 번째 이유는 대단히 역설적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다윗이 약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자를 들어 쓰십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새라는 사람의 집으로 갑니다. 이새는 일곱 아들과 함께 몸을 성결하게 하고 사무엘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 일곱 아들이 다 지나가도록 하나님의 응답은 “내가 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아들 8형제 중 막내로서 아버지도 그에게 별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왕이 될 면접시험에 다윗은 빠져 있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묻기를 ‘네 아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의 대답이 사무엘상 16:11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여기 말째라는 말은, 단순히 형제 서열상 말째라는 말만은 아닙니다. 사람들 앞에 약자였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택했습니다. 약자를 택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사람의 기준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은 달랐습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를 원하십니까? 자기 자신이 말째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약한 자, 겸손한 자를 쓰십니다.
사울 임금이 버림 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울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몰랐습니다. 왕이라고 제사장이 하는 제사까지 다 집례할 수 있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갈멜산에는 자신을 위하여 승전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울 임금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약에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의 뜻은 “큰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 “큰 자”라는 이름을 바꾸어 “작은 자” 즉 바울 이라고 고쳤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했고, 성도 중에서도 작은 자라고 말했으며, 죄인 중에서도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큰 자로 남아 있을 때 친히 나타나 대적하셨고 작아 질 때 크게 들어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쓰십니다. 작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스스로 말째라고 여기는 사람을 첫째로 들어 쓰십니다.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말째가 하나 있기는 한데 만나 보나마나입니다. 신통한 구석이 없습니다. 그 아이는 아닙니다.” 이런 뜻입니다.
아버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형님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말째야, 우리 형제들 가운데 임금이 나올 모양이다. 우리는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러 갈테니 넌 여기서 양을 치고 있거라.”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와 형님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다윗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분명 난 아니야. 난 심부름이나 해야지.’
보십시오. 그의 부모는 그를 부정했습니다. 그의 형제들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자신을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다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바로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No 하고 당신 자신마저도 No 할찌라도 하나님께서 Yes 하시면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역자, 쓰임 받는 사람이 됩니다. 믿습니까?
III. 하나님은 자기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을 쓰십니다.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두 번째, 우리를 주목시키는 단어는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새의 아들 가운데 왕이 나온다면 다윗도 관심을 가지고 쫓아 왔을 법도 한데 다윗은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묵묵히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것도 없습니다. 귀한 것도 없고 천한 것도 없습니다. 자신이 맡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옥중에서 모범적인 죄수로 일을 하고 있을 때 부름을 받고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은 깊은 밤 성전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불렀습니다.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을 때, 베드로는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불러 쓰셨습니다.
특별히 “양을 치고 있었다”고 하는 말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베들레헴 목자들은 밖에서 자기 양떼를 치다가 천사의 음성을 듣고 아기 예수께 경배했습니다. 다윗이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은 장차 하나님의 양떼인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식한 사람도 쓰십니다. 무능한 사람도 쓰십니다. 죄가 많은 사람도 쓰십니다. 그러나 책임감이 없는 사람, 열정이 없는 세상, 성실하지 못한 사람을 쓰는 법이 없습니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어린 양입니다. 때문에 자기라는 양을 잘 지켜야 합니다.
- 날마다 하나님과 교통하므로
-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경험하므로
-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성실한 자녀가 되어 자신이라는 어린 양을 잘 지켜야 합니다.
- 자신의 믿음을 잘 키켜야 합니다.
- 그리고 내게 맡겨진 사람들을 잘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동생을 지키기는 커녕 동생을 해친 가인에게 물었습니다.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때 가인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 가인은 중요한 사실을 몰랐습니다. 아벨은 아버지 어머니나 지키는 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해쳐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가인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 우리의 셀목장 가족을, 믿음의 가족들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역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맡겨진 사역 앞에 진실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게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했느냐”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형님들이 다 떠나간 그 자리에서 혼자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IV.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이유가 사무엘상 16:7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새의 일곱 아들을 다 거절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다윗의 중심이 어쨌다는 이야기입니까? 다윗의 중심에 무엇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동서고금 남녀노소 모든 사람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멋진 다큐멘타리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블레셋 장군 골리앗 앞에 모두 주눅이 들어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던 차에 소년 다윗이 나타나 사울 임금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나 정도의 용맹이면 해 볼만 합니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입니다. 일꾼들의 눈에는 일이 보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가 보이게끔 되어 있습니다.
적장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계속해서 그는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다윗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철저한 하나님 중심주의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만 두려워했고 그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능력만 믿었습니다. 그가 무서워한 것은 블레셋의 거인이 아닙니다. 적군의 힘이 아닙니다. 사울 임금의 권력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형님들을 전술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높이는 다윗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을 보셨습니다.
옳습니다. 역대하 16:9에서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어 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로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임금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나도 저를 버렸다” (삼상15:23)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을 높이실 때 그를 높여 주셨습니다.
이제 결론은 분명합니다. 인본주의 - 자기 중심, 자기 고집대로 살 것이냐? 아니면 신본주의 - 하나님 중심,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 것이냐 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버리는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크게 쓰는 사람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갈림길이 됩니다.
골리앗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골리앗이 되고, 다윗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면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골리앗 가치관
다윗 가치관
칼, 창, 단창
큰 키, 외모
자신의 힘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을 의지함, 자신의 약함
하나님의 능력
J. L. 코미스키라는 사람이 전 세계에서 쓰임 받는 셀교회 리더를 연구해 보니까, 그가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느냐,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 은사가 있느냐 하는 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얼마만큼 영광스러운 교제를 가지는가? 내게 맡겨준 사람들을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그 사람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신 사명과 소명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하며 살아가는가? 이것만이 쓰임 받는 지도자와 버림 받는 지도자의 준거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사모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는 일마다 성령님을 요청하십시오. 환영하십시오. 무한대로 여러분의 삶을 열어놓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충만한 만큼 하나님 앞에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몇 주전 한국을 다녀간 피터 와그너 박사는 “21세기는 신사도적 교회와 그 사람들에 의해 시대적인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그 중에 세상 학교에서는 많은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성령학교에서 성령을 배운 사람들이 나타나 세계교회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사실 19세기 많이 배우지 못한 D.L. 무디에 의해 부흥운동이 주도되었듯이, 지금 우리시대 성령운동도 많이 배우지 않은 남미의 카를로스 아나콘디아 같은 사람들에 의해 강력한 성령의 바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꿈을 가지십시오.
V. 하나님은 성령의 사람을 쓰십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성령에 감동된 사람을 쓰십니다.
사무엘상 16:13에 보면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난 후 “이 날부터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성령이 다윗과 함께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영적인 사람을 쓰십니다. 사무엘상 18:10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야료란 이유 없이 생트집을 잡고 사람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귀신에게 붙들리면 귀신의 종이 되고 성령에 감동되면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다윗은 하나님께 눈물로 간구하는 기도 가운데 이런 말을 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 내지 마시고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1)
다윗은 궁궐에서 쫓겨 나는 것보다 주 앞에서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다윗은 왕관을 거두어 가는 것 보다 성령을 거두어 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재물과 권세를 빼앗기는 것보다 주의 은혜를 빼앗기는 것이 더 두려운 줄 알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했던 다윗은 하나님을 몹시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시편에 실린 다윗의 시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는 시로써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에 들여올 때에는 너무 좋아서 그 행렬을 따르며 부끄러움도 잊은 채 춤을 추었습니다. 이렇듯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신앙적 감동과 시적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극히 예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나아가 다윗은 철저하게 교회 중심의 사람이요 성전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그 성전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치는 사람이었습니다.
VI. 다섯째,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사람은 치루어야 할 댓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지도자로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까지 당당히 댓가를 지불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일로 인해 사울 임금의 시기를 받아 쫓겨다녀야만 했던 고통스런 훈련의 시간들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임금의 미움을 받은 다윗은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정식 왕이 되기까지 자그마치 15년간을 쫓겨다니는데 때로는 엔게디 굴속으로, 때론 이웃나라 블레셋과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팔레스타인 산지, 평야, 사막 구석구석 사울의 군사를 피하여 도망 다녔지만 그것이 도망 다닌 생활이 아니라 전국의 곳곳, 이웃나라까지 군사적 지리를 몸소 답사하고 익히는 훈련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생활 가운데서 성경에 분명하고도 똑똑히 기록되어 우리의 주목을 끄는 단어는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라” (삼상 16:18, 18:28)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이유였고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훈련의 기회, 자신이 치루어야 할 고통스런 댓가를 흔쾌히 치루어 갑니다.
우리교회는 지금 영광스런 교회를 향한 걸음을 서둘지도 않고 미루지도 않고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랬듯이 걸음마다 하나님께서는 꼭 필요한 일꾼들을 통해 그 짐을 감당토록 하셨습니다. 꿈땅비전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 댓가 지불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 이 일은 멋지게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만사엔 때가 있고 기회가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철학자 칸트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남자가 청혼을 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칸트가 청혼을 하지 않자 기다림에 지친 그녀가 먼저 청혼한 것이었습니다.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정중하게 대답한 칸트는 그 뒤부터 그녀와의 결혼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우선 머리로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사랑과 결혼에 관한 책을 모조리 찾아 읽었고, 자신의 노트에 결혼에 대해서 찬성하는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을 하나하나 적어서 분석했습니다. 그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신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래, 이젠 그녀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이 보다 더 신중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자신이 내린 신중하고 합리적인 결정에 그는 대단히 만족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생각하고 결정한 만큼 그 누구보다도 근사하게 그녀에게 청혼하리라.’ 마음먹은 그는 다음 날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그녀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녀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망설이고 있는 사이 내 딸은 이미 결혼해서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소. 당신은 너무 늦게 왔군요.?
VII.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생을 살아가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1. 나는 연약하기 때문에 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말째를 부르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 모든 사람이다 부정하고 No! 라고 말해도 하나님이 긍정하시고 Yes! 하시면 당신의 생은 긍정이 될 수 있습니다.
2. 당신 자신을 잘 지키십시오. 당신에게 주어진 양떼들, 하나님과의 관계, 당신의 영성, 당신의 믿음, 당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소중히 지키십시오.
3. 하나님은 당신의 중심을 보십니다. 이 땅의 가치관, 골리앗의 가치관으로 살아가지 말고, 하늘의 가치관, 다윗 가치관으로 사십시오. 예수님 이름의 권세를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분을 의지하십시오.
4. 성령의 임재와 권능, 그분의 감동하심과 함께 하심을 잃지 마십시오. 역사는 그분의 뜻대로 움직입니다. 그 분의 자원과 능력을 구하십시오.
5. 이 일을 이루기까지, 당신이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쓰임 받기까지 치루어야 할 댓가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을 쓰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을 쓰시겠다 말씀하십니다.
출처/류영모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