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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최선을 다하자 (예레미야 29:4-7)
크리미아 전쟁 때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부상병을 치료해 준 영국의 간호사 나이팅게일(Nightingale, Florence. 1820-1910)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부상당한 환자들이 조금이라도 생명이 붙어 있으면, 생의 의지를 불어넣어 주어 살아나가도록 해 주었습니다. 모든 의사가 다 포기해도 그녀는 아직 살아있는 환자를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판단을 받은 환자들은 나이팅게일을 한 번이라도 만나는 것이 소원일 정도였습니다. 그중에는 나이팅게일의 지극한 간호 속에서 다시 회생하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결국 목숨을 잃는 병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최후까지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나이팅게일을 존경해마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지나갈 때 많은 병사가 그녀의 발자국과 그림자에 입을 맞출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나이팅게일에 대한 소식은 온 나라에 널리 퍼져 그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의 국왕은 나이팅게일을 맞이하기 위한 환영 예식과 함께 최고훈장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극구 사양했습니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한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거나 상을 받기 위해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전쟁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신앙 안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하여 최선을 다함으로써 오늘날 간호사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신앙 안에서 고난에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이들은 세상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신앙을 우리에게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초토화되어 버렸을 때, 그래서 유다 백성들이 희망도 없이 자포자기 하고 있을 때, 예레미야는 바베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을 들어 써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포로와 같은 고단한 삶을 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또한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유대 민족의 실망과 좌절은 걷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본 그들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결과를 초래한 자신들의 죄는 생각지 않고, 하나님이 무능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한숨만 나왔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포로가 되어 끌려간 바벨론의 도시를 보면서 확신으로 굳어졌습니다. 바벨론에 있는 웅장한 마르둑 신전에 비하면 예루살렘의 성전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위용이 대단한 바벨론 신전을 보면서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고, 예루살렘과 성전이 멸망당한 것은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고 체념해 버렸습니다. 이러한 절망에 빠져가면서 유대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미래를 그릴 힘도 잃어버렸습니다. 꿈과 희망은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진정으로 절망스러운 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도 아니요, 지도자들이 대거 포로로 끌려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더 이상 함께 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회복할 수 없는 절망임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백성들을 향해 예레미야는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들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렘 29:4)
유대 백성들이 멸망당한 것은 하나님이 무력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해결책은 그들이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 뿐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길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과 만나 주시고, 그들과 함께 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예루살렘에서만 계시고, 그곳에서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어디서나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에 계신 하나님은 바벨론에도 계십니다. 예루살렘에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서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 또한, 이스라엘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이방 땅 바벨론에도 미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는 다윗의 고백처럼 부름받은 우리가 있는 곳에는 그 어디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는 이들은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따름입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유명한 통계학자인 로저 맵슨은 "모든 경제적 침체의 전조를 알리는 것은 종교의 쇠퇴"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현재 필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 영적인 혼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하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재물을 잃거나, 직장을 잃거나, 또는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절망할 때는 아닙니다. 그보다 더욱 심각한 절망의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을 때입니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니라"(암 8:11)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말씀하시는 한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고 희망이 남아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디서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곳은 새 시대가 전개될 것입니다.
2. 우리는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들려지는 그곳에서 우리는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예레미야는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6절)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거의 모든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는 허황된 낙관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는 머지 않아 곧 끝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백성들을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다른 의미의 희망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의 포로 생활이 간단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오래 살 것이니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렘 29:5-6)
집을 짓고, 전원을 가꾸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라는 것은 포로생활이 금방 끝나지 않을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당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선지자, 하나냐는 2년 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국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이는 분명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달래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얼마든지 거짓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무한 것일 뿐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냐가 아닌, 예레미야의 말대로 이방 땅에서 영구히 거주할 사람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세상일이 우리의 소원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일이란 사람의 소원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뜻과 생각과는 다른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러한 분별이 없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처음으로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했을 때,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1)라고 말하며 강하게 예수님을 만류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가"(마 16:23)라며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과는 다릅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도 다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생각과 뜻대로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뜻대로 되는 것이 좋은 것이고, 잘되는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레미야는 유대민족이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살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열심히 살 것을 부탁했습니다. 비록 이방 땅이지만 최선을 다해 살면서 번성하기를 촉구했습니다. 우리들 또한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라고 하여, 자포자기해서는 안됩니다. 그곳에서도 번성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선지자 하나냐와 같이, 허황된 낙관주의에 빠져 오늘의 삶을 소홀히 해서도 안됩니다. 어떤 신자들 가운데는 이 세상 보다는 하늘 나라를 사모해야 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삶을 관심을 버리고 천국만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상급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많은 보화가 쌓이도록 살아야 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세상에서의 가정과 직장, 사업과 일터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데도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 나가야 합니다.
1800년대 후반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가였던 스펄전은 그가 16세이던 1850년 콜체스터의 한 교회의 작은 집회에서 복음을 접하고 큰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회에는 겨우 17명 밖에는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강사로 온 목사님은 그 열 일곱 명을 위해 열정을 다해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결국 그 자리에 참석했던 스펄전이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그의 이름은 오늘날까지 교회사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결실'은 '최선의 성실'에서 비롯됩니다.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신다'(시 31:23)는 말씀처럼, 비록 작은 일이라 할 지라도 우리는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3.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유대민족이 고국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 수 있는 길이란 바벨론이 멸망하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러한 원수 바벨론의 평화를 빌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렘 29:3)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의 번영과 평안을 위하여 기도할 것을 당부하는 예레미야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예레미야를 매국노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들을 억류하고 있는 바벨론이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서 멸망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바벨론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는 이유는,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유대민족의 평안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살고 있는 유대민족의 안정과 평화 때문에 그들을 위로하며 기도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은 강대국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마치 유대나라의 주변에 있는 강대국들이 있었던 것과 비슷한 형편입니다.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일본은 다시 군국주의가 부활하고 있고, 중국은 동북 공정을 내세우면서 우리의 역사인 발해와 고구려의 역사를 자기들의 역사에 편입시키고 있습니다. 미국역시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우리나라에 압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모두 얄밉기 짝이 없는 나라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레미야는, 비록 그럴지라도,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쁜 야욕을 버리도록. 그리고 그들의 강력한 힘을 세계 평화를 위해 쓸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들이 그릇된 길로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감싸시지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열방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북한 문제 또한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북한은 매우 위협적인 존재이며 적대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일부 기독교인들은 북한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붕괴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그 일이 미국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 믿고 미국을 하나님처럼 받듭니다. 그러나 북한이 미국과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면 우리들의 안전 또한 보장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김정일이 지배하는 북한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고, 평화적인 통일을 이루어 세계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세계의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야말로 진정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기도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삶은 만족스럽기보다는 부족하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이 곳에서는 아무 희망도 가질 수 없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이 땅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의 무릎을 꿇으면서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크리미아 전쟁 때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부상병을 치료해 준 영국의 간호사 나이팅게일(Nightingale, Florence. 1820-1910)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부상당한 환자들이 조금이라도 생명이 붙어 있으면, 생의 의지를 불어넣어 주어 살아나가도록 해 주었습니다. 모든 의사가 다 포기해도 그녀는 아직 살아있는 환자를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판단을 받은 환자들은 나이팅게일을 한 번이라도 만나는 것이 소원일 정도였습니다. 그중에는 나이팅게일의 지극한 간호 속에서 다시 회생하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결국 목숨을 잃는 병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최후까지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나이팅게일을 존경해마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지나갈 때 많은 병사가 그녀의 발자국과 그림자에 입을 맞출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나이팅게일에 대한 소식은 온 나라에 널리 퍼져 그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의 국왕은 나이팅게일을 맞이하기 위한 환영 예식과 함께 최고훈장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극구 사양했습니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한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거나 상을 받기 위해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전쟁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신앙 안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하여 최선을 다함으로써 오늘날 간호사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신앙 안에서 고난에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이들은 세상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신앙을 우리에게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초토화되어 버렸을 때, 그래서 유다 백성들이 희망도 없이 자포자기 하고 있을 때, 예레미야는 바베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을 들어 써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포로와 같은 고단한 삶을 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또한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유대 민족의 실망과 좌절은 걷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본 그들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결과를 초래한 자신들의 죄는 생각지 않고, 하나님이 무능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한숨만 나왔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포로가 되어 끌려간 바벨론의 도시를 보면서 확신으로 굳어졌습니다. 바벨론에 있는 웅장한 마르둑 신전에 비하면 예루살렘의 성전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위용이 대단한 바벨론 신전을 보면서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고, 예루살렘과 성전이 멸망당한 것은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고 체념해 버렸습니다. 이러한 절망에 빠져가면서 유대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미래를 그릴 힘도 잃어버렸습니다. 꿈과 희망은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진정으로 절망스러운 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도 아니요, 지도자들이 대거 포로로 끌려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더 이상 함께 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회복할 수 없는 절망임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백성들을 향해 예레미야는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들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렘 29:4)
유대 백성들이 멸망당한 것은 하나님이 무력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해결책은 그들이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 뿐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길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과 만나 주시고, 그들과 함께 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예루살렘에서만 계시고, 그곳에서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어디서나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에 계신 하나님은 바벨론에도 계십니다. 예루살렘에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서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 또한, 이스라엘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이방 땅 바벨론에도 미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는 다윗의 고백처럼 부름받은 우리가 있는 곳에는 그 어디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는 이들은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따름입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유명한 통계학자인 로저 맵슨은 "모든 경제적 침체의 전조를 알리는 것은 종교의 쇠퇴"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현재 필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 영적인 혼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하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재물을 잃거나, 직장을 잃거나, 또는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절망할 때는 아닙니다. 그보다 더욱 심각한 절망의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을 때입니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니라"(암 8:11)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말씀하시는 한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고 희망이 남아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디서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곳은 새 시대가 전개될 것입니다.
2. 우리는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들려지는 그곳에서 우리는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예레미야는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6절)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거의 모든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는 허황된 낙관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는 머지 않아 곧 끝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백성들을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다른 의미의 희망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의 포로 생활이 간단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오래 살 것이니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렘 29:5-6)
집을 짓고, 전원을 가꾸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라는 것은 포로생활이 금방 끝나지 않을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당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선지자, 하나냐는 2년 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국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이는 분명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달래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얼마든지 거짓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무한 것일 뿐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냐가 아닌, 예레미야의 말대로 이방 땅에서 영구히 거주할 사람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세상일이 우리의 소원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일이란 사람의 소원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뜻과 생각과는 다른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러한 분별이 없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처음으로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했을 때,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1)라고 말하며 강하게 예수님을 만류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가"(마 16:23)라며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과는 다릅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도 다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생각과 뜻대로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뜻대로 되는 것이 좋은 것이고, 잘되는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레미야는 유대민족이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살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열심히 살 것을 부탁했습니다. 비록 이방 땅이지만 최선을 다해 살면서 번성하기를 촉구했습니다. 우리들 또한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라고 하여, 자포자기해서는 안됩니다. 그곳에서도 번성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선지자 하나냐와 같이, 허황된 낙관주의에 빠져 오늘의 삶을 소홀히 해서도 안됩니다. 어떤 신자들 가운데는 이 세상 보다는 하늘 나라를 사모해야 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삶을 관심을 버리고 천국만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상급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많은 보화가 쌓이도록 살아야 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세상에서의 가정과 직장, 사업과 일터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데도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 나가야 합니다.
1800년대 후반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가였던 스펄전은 그가 16세이던 1850년 콜체스터의 한 교회의 작은 집회에서 복음을 접하고 큰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회에는 겨우 17명 밖에는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강사로 온 목사님은 그 열 일곱 명을 위해 열정을 다해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결국 그 자리에 참석했던 스펄전이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그의 이름은 오늘날까지 교회사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결실'은 '최선의 성실'에서 비롯됩니다.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신다'(시 31:23)는 말씀처럼, 비록 작은 일이라 할 지라도 우리는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3.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유대민족이 고국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 수 있는 길이란 바벨론이 멸망하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러한 원수 바벨론의 평화를 빌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렘 29:3)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의 번영과 평안을 위하여 기도할 것을 당부하는 예레미야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예레미야를 매국노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들을 억류하고 있는 바벨론이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서 멸망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바벨론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는 이유는,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유대민족의 평안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살고 있는 유대민족의 안정과 평화 때문에 그들을 위로하며 기도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은 강대국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마치 유대나라의 주변에 있는 강대국들이 있었던 것과 비슷한 형편입니다.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일본은 다시 군국주의가 부활하고 있고, 중국은 동북 공정을 내세우면서 우리의 역사인 발해와 고구려의 역사를 자기들의 역사에 편입시키고 있습니다. 미국역시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우리나라에 압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모두 얄밉기 짝이 없는 나라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레미야는, 비록 그럴지라도,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쁜 야욕을 버리도록. 그리고 그들의 강력한 힘을 세계 평화를 위해 쓸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들이 그릇된 길로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감싸시지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열방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북한 문제 또한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북한은 매우 위협적인 존재이며 적대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일부 기독교인들은 북한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붕괴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그 일이 미국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 믿고 미국을 하나님처럼 받듭니다. 그러나 북한이 미국과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면 우리들의 안전 또한 보장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김정일이 지배하는 북한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고, 평화적인 통일을 이루어 세계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세계의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야말로 진정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기도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삶은 만족스럽기보다는 부족하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이 곳에서는 아무 희망도 가질 수 없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이 땅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의 무릎을 꿇으면서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