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24
심판받은 무화과나무 (마21장 18-22절)
지금 우리나라의 낮은 출산율의 그 심각성 자뭇 대단한 정도에 와 있습니다. 가임기 여성 1명이 평생을 통해 출산하는 아이의 수가 2002년 1.4명에서 2004년에 1.19명 불과하다니 평균수명의 상승 요인을 제외하면 인구가 계속해서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출산율 저하로 인한 세대 불균형과 각종 사회 문제의 대두는 한국 뿐 아니라 유럽, 미국 등 여러 국가에서 이미 심각한 문제로 등장했습니다. 각종 연구 보고의 대안과 국가가 제시한 대책은 경제적 지원과 각종 지원책 확충이었으나 출산율이 크게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단순한 "돈"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더 낳기를 주저하는 사실상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결혼은 했지만 자녀는 갖지 않으려는, 아예 결혼도 않으려는 많은 사람들의 우려는 자식을 낳아 잘 키울 자신이 서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뭘 어떻게 가르치며 키워야 할지 모르겠다는 염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공부 잘하는 자녀를 가르치겠다는 욕심과 그에 따른 염려가 아닙니다. 나의 자녀가, 나의 후손이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가르쳐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탄식이다. 정직하게 살라고 가르치고 싶지만 정직하게 살 수 없는 세상, 정직하면 손해 본다는 인식이 이미 기성세대의 삶과 앎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가르치며 키울것인가에 대한 기대보다는 부담이 더 커져버린 것입니다.
뭘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은 곧 내가 뭘 배웠는지 모른다는 것이요, 내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지금도 헤메며 갈 바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자신이 확신 가운데 제대로 배운 게 없으니 제대로 가르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 모두는 나 자신이 옳게 분별하고 깨달아 앎으로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하고 오고 오는 세대로 하여금 우리가 깨달은 진리 가운데 살도록 가르쳐 일깨우는 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에 주어진 크고 중한 사명중 하나는 바로 교회의 교육적 사명입니다. 이것을 바로 감당하지 못하면 교회가 계속될 수 없습니다. 교회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백성들의 유기적 연합체입니다. 건물도 아니고 회칙이나 내규 또는 전통에 의존하는 인위적인 그룹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됨의 숭고한 의미를 계속하여 전하고 가르치지 않으면 모임은 이어가는 듯하나 역사와 전통은 쌓여가나 교회됨의 본성을 상실한 채 형식적 교회, 명목상의 교회가 되어갈지도 모를 일입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교회는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오늘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여름 테러로 희생된 한 젊은이의 참혹한 죽음의 소식을 듣고 전율하며 괴로워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 땅에서는 순교자의 피가 한강을 붉게 물들이고 이름마저 절두산이라고 불리게 될 만큼 끔찍한 희생을 겪고 오늘에 이른 것이 바로 우리의 역사이며 그렇게 세워진 교회에 오늘도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와 감격을 전하고 이어가지 못한 채, 가르치지 않고 배우지 못한 채 알맹이 없는 껍데기만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날 각급 학교에서는 더 이상 6.25를 기념하는 반공웅변대회나 글짓기, 사생대회, 국토순례가 시행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사 대부분이 6,25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이고 세대만 바뀐 것이 아니라 국가관과 전쟁관마저 변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대가 흘러가면서 전쟁의 참화와 공산잔당으로 인해 교회가 겪어야만 했던 비참한 역사는 마치 전설 속의 이야기정도로 여기고 설마 21세기인 지금에... 하면서 안일한 생각을 하는 중에 교회는 또 다른 시련과 위험 속에 살고 있는 오늘은 아닙니까?
지난 몇 년 동안 교회와 많은 신앙인들은 참을 수 없는 공격과 비난을 받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는 공영방송이 나서 기독교를 매도합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별 다른 반응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려려니 합니다. 그들이 이야기가 맞다면 우리는 모두 재를 뒤집어쓰고 통회 자복해야 할 것이며 틀렸다면 맞서 싸워 이 나라와 이 민족이 모두 주님 앞에 돌아올 수 있도록 애쓰는 선교적 사명에 방해하는 모든 세력에 대하여 준엄한 경고를 외쳐야 합니다. 왜 이런 일들이 계속되고 있습니까? 교회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뭔지도 모른 채, 알지도 못한 채 가르치지도 않은 채, 세월만 보내면 비판 앞에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교회를 흔들고 문 닫게 하려해도 그런가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가 그리스도 되시며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나갈 수 있는 유일무이하 중보자이심을 우리로 깨닫고 날마다 새롭게 고백하며 우리의 자녀들과 오고 오는 세대가 더욱 뜨거운 신앙고백으로 이 교회를 이어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또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 사회에 많은 문제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세대간의 단절이라 생각합니다. 역사 이래로 세대간의 단절이 이렇게 심각했던 적이 또 있었나 싶습니다. 여러분 중에 블로그, 폐인, 싸이질, 리니지... 이런 단어를 혹시 아십니까? 아니면 보릿고개, 참빗, 연탄가스 이런 단어를 아십니까? 사용하는 말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40대 이상의 대부분의 생각과 30대 이하의 대부분의 생각은 어찌도 그렇게 다릇습니까? 선거를 앞두고는 아버지와 아들이 말다툼을 벌입니다. 내말을 들으라고 하고, 아버지와는 대화가 되질 않는다고 마음 문을 닫아버립니다. 단순히 다르다, 변한다고 지나치기에는 이제 이 땅의 기성세대는 통한의 탄식을 하기에 이르렀고 어떤 이들은 거리의 시위대로 나서는 것도 불사합니다.
사실 세대간의 단절이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닙니다. 열왕기상 12장에 보면, 솔로몬 사후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을 온 이스라엘이 왕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에게 온 회중이 몇 사람을 대표로 세워 말하기를 선왕은 너무 혹독하게 우리를 다스렸으니 우리에게 너그러운 선정을 베풀어 달라며 그리하면 왕으로 잘 섬기겠다고 하였습니다. 르호보암은 그의 아버지 솔로몬을 모셨던 원로 몇 사람을 청하여 고견을 듣습니다. 그들은 대표들의 탄원이 이유있음을 밝히며 선정을 베풀면 영원히 왕의 종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르호보암이 이번에는 자신과 함께 자라난 소년들에게 의견을 묻습니다. 이번엔 전혀 다른 의견이 나옵니다. 더욱 강력한 통치를 권합니다. 마침내 왕은 포학한 말로 원로들의 말을 물리치고 이같이 말합니다. "내 아버지는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마침내 북쪽 열 지파는 배반을 하여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갈라지는 뼈아픈 사건의 단초가 됩니다. 세대의 차이를 아우를 수 있는 지도자가 되지 못한 결과는 끊임없는 두 나라의 싸움과 악의 악을 거듭하는 왕들의 계속되는 실정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악화일로를 치닫게 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세대간의 단절된 모습은 교회에서도 여전한 우려로 남습니다. 일부교회에서는 이미 예배시간대에 따라 주된 참석연령대가 다릅니다. 그뿐 아니라 다른 형식의 예배가 드려집니다. 자신들끼리 모여 경배와 찬양하는 것은 좋아하면서 온 교우가 모이는 자리에서 신앙의 선배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이미 그들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이제라도 내가 가진 신앙을 나눠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과 후대가 지킬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뭘 가르쳐야 합니까? 여기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가르침의 방법으로 여러 비유를 드셨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비유와는 달리 오늘 사건은 실례를 드십니다. 무화과나무에 심판을 내리십니다. 사랑과 자비의 예수님께서 저주의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것도 자연을 향한 저주입니다. 사실 나무가 열매가 없으면 주인이나 농부를 탓해야 할텐데 지금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의 무화과 나무는 엄격히 따지면 일년에 열매를 두 번 맺습니다. 먼저는 4월이 되면 갓 겨울을 난 낡은 가지에서 작고 시원치않은 열매가 맺히고 두 번째는 6월에 싹이 나서 9월게 완숙해지는 무화과입니다. 그런데 볼 품 없는 작은 열매마저도 맺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가 책망받은 이유이자 본문의 통해 생각해 봐야한 첫 번째 사실은 예수님께서 열매를 찾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무화과나무는 과목입니다. 목재로서 효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크고 탐스런 꽃이 보기좋게 맺히는 나무도 아닙니다. 오직 좋은 열매로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잎만 무성한 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무화과나무가 포도나무와 함께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이들 나무에게서 얻는 열매는 많은 사람들의 허기를 면하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길가에 무성한 잎만 드러내고 있는 무화과나무는 마치 아무런 영적 능력을 갖지 못한 채 형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예루살렘의 종교성을 질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길가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있었을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맺는 나무입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열매 없음으로 기대를 저버린 나무에 심판이 내려진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내실을 기하여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기대를 얻게 하고, 눈에 띄는 곳에 서서 열매없는 자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두 번째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예수님께서 지금 심판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께서 지금 왕권을 행사하십니다. 심판 후에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습니다. 하지만 심판을 앞두고 있다는 것은 은총입니다. 회개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용서받을 기회입니다. 그런데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계수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한 잎을 가질때까지 길이 참으시고 인내하시지만 동시에 계수하십니다. 그리고는 단호하게 심판하십니다. 언젠가 우리도 주님앞에서 심판 받을 날이 올것입니다. 언제일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무화과나무를 통해 임박한 종말을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오늘도 수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사고로 예기치 않게 숨을 거둡니다. 그러면서도 나도 곧 그길로 갈 거라는 사실을 마음깊이 새기지 못한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자가 어디있겠습니까? 무화과나무의 심판으로 깨달았다면 외식하는 예루살렘이 돌이킴을 얻었을터이나 그렇지 못했던 예루살렘은 그로부터 40년 후에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보는 제자들의 관심은 어디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읽으려는 태도는 없고 즉시 마르는 무화과나무만 신기하게 바라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펼쳐지는 암울한 현실을 보면서 우리를 과연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려합니까? 우리의 생각대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몇 줌 안되는 지식으로 갈 바를 논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볼 수 있는 이적이란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적이라 하면 죽은자가 살아나고 병든자가 놓임을 얻고 가난했던 자가 부요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주님 분명히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병든자가 고쳐지는 것도 이적이듯, 멀쩡한 자가 갑자가 병을 얻는 것도 이적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비유를 들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의 생각을 깨우치기 위해 실례를 보이면서 행하는 비유다. 사실 예수님의 비유 중 대부분은 이야기입니다. 일부러 이렇게 사건을 통해 그 뜻을 제자들과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이는 예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전해지기 위하여 주님은 세상에 수 많은 사건을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깨달음의 기회를 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의 일화로 전해지는 일입니다. 어느 초초여름에 모내기하는 어떤 마을을 지나가노라니까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점심을 먹고 있더랍니다. 가까이 가서 "주 예수를 믿으라" 했더니 젊은이 하나가 나와 "이 마을에서는 전도 안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왜요?" "몇 일 전에 비가 오고 바람이 치고 벼락을 때렸는데, 이 동네 한가운데 있는 서낭당 나무를 때려서 저 가지가 부러졌어요, 불타고. 또 바위를 때려서 바위가 무너지고요, 논바닥을 때려서 논바닥이 푹 패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 아니, 나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아, 바위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왜 저건 때렸습니까? 하나님이 안 계시던지 계시다면 장님일테죠 하더랍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길래 돌아서서 지혜를 달라고 기도를 했답니다. 그리고 말하길 "자네 학교 다닐 때 서당에 다녔나? 학교 다녔나?" "학교 다녔습니다." "선생님의 손에 무엇이 있던가?" "아, 막대기가 있지요." "그 막대기는 무엇에 쓰는 것인가?" "아니, 흑판도 땅!땅! 때리고, 책상도 땅!땅! 때리고 뭐, 그런 거죠." "흑판이 무슨 죄가 있나?, 책상이 무슨 죄가 있기에 책상을 치나?" "아 그거야 졸지 말라고……." "이 사람아! 지금은 바위를 때렸지만 다음에는 자네 머리를 칠걸세" 했더니 예수를 믿고 교회에 훌륭한 일꾼이 되었답니다.
여러분, 때로는 대신 친다는 걸 잊지 마세요. 하나님의 사람, 당신을 칠 것인데 열매 없는 당신을 쳐야 할 것이지만은 지금 간접적으로 누군가를 쳤어요. 내 대신 누군가가 매를 맞고 있어요. 점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열매 없는 세계를 향해서 말입니다. 길가에서 잎만 무성해서 많은 사람에게 실망을 주고 있는 무화과처럼, 예루살렘 성전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었어요. 위선이 심판을 받는 시간입니다. 이제는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이 무서운 경고를 듣고 우리는 새롭게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충성과 진실, 감사에서 감사로, 사랑에서 사랑으로, 은혜에서 은혜로, 아름다운 열매를 이제는 맺어야만 할 것입니다.
믿음은 열매 맺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땅에 떨어진 씨앗의 희생은 큰 열매를 맺듯이 그 옛날 순교자의 피의 댓가로 오늘 교회는 이만큼 자랐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과 후손들 그리고 다음 세대의 열매를 위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분열과 다툼에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이들에게 관용과 사랑을 가르쳐야합니다. 많은 것을 보고 소중한 것을 가려 지켜낼 줄 모르는 세대에게 겸손과 함께 판단력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품지 못해 이 땅에서의 삶을 방종과 타락으로 더럽히는 세대에게 거룩한 소망을 일깨워줘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엉겅퀴나 잡초가 아닙니다. 열매 맺도록 세워진 과목(果木)입니다.
우리의 후대에게 세상에서 이겨내는 것을 세상적 가치에 얽매이는 성공과 승리로 가르치지 말고 믿음 안에 자유함으로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참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순종 가운데 기뻐하며 살 수 있는 인생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출처/윤광서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