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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고백이다 (마 16:13 ~ 18)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예수님을 처음 대하는 사람들마다 갖는 마음속에 질문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에 오셨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대한 평가는 양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다양한 칭호를 이 땅위에서 받으신 분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미친 사람이다.” 예수님의 친척들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기를 즐겨하는 음주가이면서 탐식가이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의 비난입니다. “로마의 평화를 방해하는 선동자이며 난동자이다.” 당시에 정치적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신성 모독자이다.” 종교적인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비난입니다. 그 반대의 그런 칭호도 있습니다.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던 제자들로부터 나온 칭호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의 백부장이 그 현장을 보면서 찬탄하면서 고백한 말입니다. “세상의 구주이며, 세상의 소망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예수님을 핍박하려고 나섰던 바울이 회심한 후에 예수님을 고백한 그런 고백입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대한 수없는 이야기와 그분에 대한 칭호가 있습니다. 그분만큼 형형색색으로 이해되어지는 그런 인물도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정치적 혁명자, 때로는 고독한 명상자, 때로는 기득권을 뒤집어엎는 소동스러운 반동자, 때로는 삶의 현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철저한 현실주의자. 때로는 영적인 카리스마적 지도자. 때로는 자아도취적인 마법사. 때로는 엄청난 사랑을 표현한 도덕적 윤리적 성인으로 추앙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온 세상에 사는 여러분 1/3의 백성들이 그리고 우리 남녘에 사는 1/4의 백성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을 충성스럽게 따라 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분보다 강한 영향력을 지금까지 끼쳐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일까요? 예수님이 당시에 오셨을 때, 누구였다고 고백하고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얼굴 생김새, 그의 신장이 얼마나 큰지, 그의 피부색이 뭐였는지, 그의 눈에 색깔이 뭐였는지, 그의 체격이 어떠했는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대해서 그런 구체적으로 표현한 그런 언급이 없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제자들과 그 많은 백성들에게 한번 스스로 경험하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좀 알아봐라! 나를 조사해 보아라! 나를 시험해 보아라! 나를 부딪히면서 나와함께 경험하면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한번 깨달아보아라.”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이것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우리의 연륜이 오래 쌓여졌어도 또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도 이 물음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대답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질문을 하십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이 빌립보라고 하는 지역은 요단강에 수원지가 놓여진 곳입니다. 헤롯 대왕이 판신전이라고 하는 것을 지어놓았는데 그의 아들 빌립이 황제의 명칭을 따서 가이사라고 하는 말과 자기 빌립을 집어넣어서 가이사랴 빌립보, 가이사 빌립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도시에 들어오시면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서 질문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로마 황제의 신전이 있고 로마 황제를 숭배하고 있던 이곳에서 진짜 왕이 누구인지 진짜 우리가 따라가야 할 분이 누구인지 지상의 왕과 하늘에 왕을 대결시키는 비장한 태도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물음에 대해서 아주 긍정적으로 대답을 합니다. “세례요한이라고 합니다.” “정의의 사도, 악을 고발하는 사도라고 당신을 일컫습니다.” “엘리야라고 말합디다.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면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물리친 능력 많은 예언자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눈물의 예언자처럼 민족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눈물로 탄식하는 그런 사랑의 예레미야의 모습을 예수님에게 떠올린 사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전혀 응답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갖고 있는 그 모습을 오히려 슬프게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말한 그 이상이다. 그렇다면 나를 3년 동안 따라다니던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직접 제자들에게 질문합니다. 세상 민족을 향한 질문에서 제자들을 향한 질문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조금 다른 말로 표현하면 3인칭적 질문에서 2인칭의 질문으로 바꾸어놓고 있습니다. 들은 이야기 그만하고 너 자신이 마음속에 깨달은 너 자신은 뭐라고 얘기하느냐? 그렇게 2인칭으로 질문하는 것입니다.
마틴 부버가 ‘나와 너’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쓰면서 인간관계,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나와 그것에 관계 ‘Ich und Es’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당신 ‘Ich und Du’ 라고 하는 나와 당신과의 인격적인 관계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사물의 관계가 아니라, 물질의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이고 대화적인 관계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더냐! 하는 그 질문은 들은 이야기입니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내 실존이 그 안에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내 존재 전체를 갖고 씨름한 대답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대답입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 실존 전체를 집어넣어라! 네 생각을 전부 투여해라! 네가 갖고 있는 삶 전체를 그 속에 그 질문 속에 집어넣어 가지고 대답을 좀 해봐라!' 이렇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요청합니다. 3인칭적인 대답은 우리의 지성만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너의 지성, 너의 의지, 너의 감정, 너의 존재 전체를 집어넣고 고백하라고 요청합니다. 여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고백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 고백을 하려고 하면 우리의 삶은 전체가 거기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신앙에도 이런 하나의 도약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에게 복음을 전해준 친구의 신앙으로부터 나의 신앙으로 바뀌어질 때에 때로는 신음합니다. 때로는 고뇌합니다. 때로는 전율까지 하게 됩니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듣던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에 대한 얘기가 내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나의 언어로 바뀌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로 바뀌어질 때에 우리는 놀랍게 감격과 감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어거스틴이 그렇게 방탕하다가 모니카의 기도를,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를 들으면서 회심하게 된 것은 30살이 넘어서였습니다. 그렇게 남의 신앙에서 내 신앙으로 바뀌어 지는 것, 어머니의 신앙에서 내 살아 있는 나의 신앙으로 바뀌어지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혹시 아내의 신앙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와 계신 분 없습니까? 친구의 신앙 때문에 그냥 앉아 계신 분들이 없으십니까? 내 신앙으로 바뀌어지기까지 고통스러운 용기와 결단이 들어가지 않으면 결코 내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종종 청년들을 만나면 “언제 어느 때에 예수를 믿을래?” 이 어거스틴을 아는 청년들이 이렇게 얘길 합니다. “어거스틴처럼 예수를 믿을래요.” 이게 무슨 얘기냐면 젊을 때 좀 방탕하다가 젊을 때 즐길 거 다 즐기다가 어느 날 어머니의 기도소리를 들으면서 성경을 보면서 회심하면 그 신앙이 드라마틱한 신앙이 되겠습니까? 제가 이 청년들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얘야! 아서라! 그렇게 예수 믿어서는 안 된다. 아무나 어거스틴처럼 되는지 아느냐? 어거스튼처럼 예수를 믿을려다가 감옥에 들어가서 인생을 끝마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지금 복음이 내게 들어올 때,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네가 누구냐고 질문 하실 때에 그때 마음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질문 앞에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주님이라고 하는 말은 당신이란 뜻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웅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윤리적 이상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권을 갖고 이 땅에 온 메시아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성령의 역사를 보고 예수님 안에서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의 은총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고백을 그렇게 듣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기뻐서 베드로를 칭찬하십니다. 이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위해서입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길을 가도 이제 제자들이 넉넉하게 자기 인생들을 하나님을 위해서 살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 기쁨입니다. “바요나 시몬아!” 베드로의 옛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야, 너는 반석이다.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예수님께서 송파한 하나님의 나라가 베드로와 제자들을 통하여 계속 연결될 것이라고 그렇게 칭찬하시면서 베드로를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교회가 세워지느냐, 교회가 무너지느냐 결정되겠습니다. 여기 반석이라고 하는 것은 카톨릭 교회와 우리 계신 교회와 이해하는 내용이 다릅니다. 로만 카톨릭 교회는 이 반석을 베드로라고 하는 인물로 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초대 교황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베드로라고 하는 교황 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철저한 교회 계급 질서가 나타납니다. 하알하킬 구조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는 이 반성이란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하는 그 고백 뒤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그 자리가 교회가 세워지는 자리입니다. 아니, 여러분들이 고백하고 있으면 여러분들이 교회입니다. 여러분들이 거룩한 성전이고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역사가 이 땅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렇게 칭찬하면서 우리 예수님은 “네게 이것을 알게 한 이는, 이 신앙고백을 깨닫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이시다. 여기에는 성령에 계시와 성령의 도우심, 여기에는 네가 연구하고 네가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네 입을 통해서 고백하게 해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이런 신앙 고백을 드리고 있습니까? 이 신앙고백이 없이는 우리의 신앙을 시작할 수가 없습니다. 이 신앙 고백이 내 것이 되지 않고는 신앙의 여정이 출발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서 주의 몸 된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지는 역사가 나타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마음속에 이 신앙을 고백하면서 믿기로 결심하는 필요합니다. 쉘던 메네컨이라고 하는 사람이 ‘엄격한 자비’라는 책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믿기로 결심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 결정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전부다.” 믿기로 결정하다는 말에는 의심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의심을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는 의심을 품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을 할 수가 없다. 단 의심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구할 따름이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내게 믿음 없음을 도와 주시옵소서.” 토마스 머튼이라고 하는 사람은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너무 쉽게 발견했다면 아마도 당신이 찾던 하나님은 아닐는지 모른다.” 이렇게 얘기하면서 또 이렇게 다른 면을 얘기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겸손한 복종과 사랑으로 하나님께 완전하게 자신을 드리는가에 비례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그 분을 본 다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행동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누구인지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도 전에 그 분을 분명하게 보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믿음에 여정을 시작조차 할 수가 없다.”
여러분, 그런 것입니다. 보고 다 알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속에 의심이 있으면서도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의 뜻을 확인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진리를 찾기 위해서 잠시 무신론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게으른 무신론자, 그것은 인생에게 파멸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저 자신도 제 어머니의 신앙에서부터 저 자신의 신앙으로 바뀌어질 때에 하나의 큰 진통이 있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본 회퍼의 이런 말이 떠올랐습니다. “믿으면 행동하라! 믿으면 행동하라! 그런데도 자꾸만 믿어지지 않으면 거꾸로 행동해 보아라! 그러면 믿게 될 것이다.” 그때부터 저는 하나님이 말씀이 진리인 것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먼저 기도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에 공동체들과 함께 나누면서 뒤에 말씀을 증거 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네게 어떤 분인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놀라운 역사를 마음속에 배워나가게 되었고 보게 되었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산 제자들도 3년이 되어서야 이 대답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곧 다음다음 구절을 보면 예수님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꾸중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비록 베드로가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은 했지만 그 속에 이기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한 세상 것만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베드로가 꾸중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해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렇게 질문을 하신다면 여러분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걸려진 질문입니다. 이것을 대답해야 신앙이 시작이 됩니다. 이것을 바르게 주님 앞에 고백해야 우리 삶의 역사가 교회를 세우는 일,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하나님의 사명의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머뭇거리지 마시고 특별히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아직도 고백하지 않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다 알지 못하지만 “주님, 이제 고백하면서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겠나이다.” 그렇게 주님 앞에 나오면 우리 하나님께서 넉넉하게 우리를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질문하실 때, 주님 우리가 다 알지 못하지만 깨닫지 못하지만 감히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면서 신앙의 여정을 출발하길 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한사람 마음에 임재해 주셔서 올바른 신앙고백과 순종하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김지철 목사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예수님을 처음 대하는 사람들마다 갖는 마음속에 질문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에 오셨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대한 평가는 양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다양한 칭호를 이 땅위에서 받으신 분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미친 사람이다.” 예수님의 친척들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기를 즐겨하는 음주가이면서 탐식가이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의 비난입니다. “로마의 평화를 방해하는 선동자이며 난동자이다.” 당시에 정치적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신성 모독자이다.” 종교적인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비난입니다. 그 반대의 그런 칭호도 있습니다.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던 제자들로부터 나온 칭호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의 백부장이 그 현장을 보면서 찬탄하면서 고백한 말입니다. “세상의 구주이며, 세상의 소망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예수님을 핍박하려고 나섰던 바울이 회심한 후에 예수님을 고백한 그런 고백입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대한 수없는 이야기와 그분에 대한 칭호가 있습니다. 그분만큼 형형색색으로 이해되어지는 그런 인물도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정치적 혁명자, 때로는 고독한 명상자, 때로는 기득권을 뒤집어엎는 소동스러운 반동자, 때로는 삶의 현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철저한 현실주의자. 때로는 영적인 카리스마적 지도자. 때로는 자아도취적인 마법사. 때로는 엄청난 사랑을 표현한 도덕적 윤리적 성인으로 추앙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온 세상에 사는 여러분 1/3의 백성들이 그리고 우리 남녘에 사는 1/4의 백성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을 충성스럽게 따라 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분보다 강한 영향력을 지금까지 끼쳐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일까요? 예수님이 당시에 오셨을 때, 누구였다고 고백하고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얼굴 생김새, 그의 신장이 얼마나 큰지, 그의 피부색이 뭐였는지, 그의 눈에 색깔이 뭐였는지, 그의 체격이 어떠했는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대해서 그런 구체적으로 표현한 그런 언급이 없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제자들과 그 많은 백성들에게 한번 스스로 경험하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좀 알아봐라! 나를 조사해 보아라! 나를 시험해 보아라! 나를 부딪히면서 나와함께 경험하면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한번 깨달아보아라.”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이것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우리의 연륜이 오래 쌓여졌어도 또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도 이 물음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대답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질문을 하십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이 빌립보라고 하는 지역은 요단강에 수원지가 놓여진 곳입니다. 헤롯 대왕이 판신전이라고 하는 것을 지어놓았는데 그의 아들 빌립이 황제의 명칭을 따서 가이사라고 하는 말과 자기 빌립을 집어넣어서 가이사랴 빌립보, 가이사 빌립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도시에 들어오시면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서 질문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로마 황제의 신전이 있고 로마 황제를 숭배하고 있던 이곳에서 진짜 왕이 누구인지 진짜 우리가 따라가야 할 분이 누구인지 지상의 왕과 하늘에 왕을 대결시키는 비장한 태도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물음에 대해서 아주 긍정적으로 대답을 합니다. “세례요한이라고 합니다.” “정의의 사도, 악을 고발하는 사도라고 당신을 일컫습니다.” “엘리야라고 말합디다.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면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물리친 능력 많은 예언자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눈물의 예언자처럼 민족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눈물로 탄식하는 그런 사랑의 예레미야의 모습을 예수님에게 떠올린 사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전혀 응답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갖고 있는 그 모습을 오히려 슬프게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말한 그 이상이다. 그렇다면 나를 3년 동안 따라다니던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직접 제자들에게 질문합니다. 세상 민족을 향한 질문에서 제자들을 향한 질문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조금 다른 말로 표현하면 3인칭적 질문에서 2인칭의 질문으로 바꾸어놓고 있습니다. 들은 이야기 그만하고 너 자신이 마음속에 깨달은 너 자신은 뭐라고 얘기하느냐? 그렇게 2인칭으로 질문하는 것입니다.
마틴 부버가 ‘나와 너’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쓰면서 인간관계,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나와 그것에 관계 ‘Ich und Es’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당신 ‘Ich und Du’ 라고 하는 나와 당신과의 인격적인 관계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사물의 관계가 아니라, 물질의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이고 대화적인 관계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더냐! 하는 그 질문은 들은 이야기입니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내 실존이 그 안에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내 존재 전체를 갖고 씨름한 대답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대답입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 실존 전체를 집어넣어라! 네 생각을 전부 투여해라! 네가 갖고 있는 삶 전체를 그 속에 그 질문 속에 집어넣어 가지고 대답을 좀 해봐라!' 이렇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요청합니다. 3인칭적인 대답은 우리의 지성만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너의 지성, 너의 의지, 너의 감정, 너의 존재 전체를 집어넣고 고백하라고 요청합니다. 여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고백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 고백을 하려고 하면 우리의 삶은 전체가 거기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신앙에도 이런 하나의 도약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에게 복음을 전해준 친구의 신앙으로부터 나의 신앙으로 바뀌어질 때에 때로는 신음합니다. 때로는 고뇌합니다. 때로는 전율까지 하게 됩니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듣던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에 대한 얘기가 내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나의 언어로 바뀌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로 바뀌어질 때에 우리는 놀랍게 감격과 감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어거스틴이 그렇게 방탕하다가 모니카의 기도를,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를 들으면서 회심하게 된 것은 30살이 넘어서였습니다. 그렇게 남의 신앙에서 내 신앙으로 바뀌어 지는 것, 어머니의 신앙에서 내 살아 있는 나의 신앙으로 바뀌어지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혹시 아내의 신앙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와 계신 분 없습니까? 친구의 신앙 때문에 그냥 앉아 계신 분들이 없으십니까? 내 신앙으로 바뀌어지기까지 고통스러운 용기와 결단이 들어가지 않으면 결코 내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종종 청년들을 만나면 “언제 어느 때에 예수를 믿을래?” 이 어거스틴을 아는 청년들이 이렇게 얘길 합니다. “어거스틴처럼 예수를 믿을래요.” 이게 무슨 얘기냐면 젊을 때 좀 방탕하다가 젊을 때 즐길 거 다 즐기다가 어느 날 어머니의 기도소리를 들으면서 성경을 보면서 회심하면 그 신앙이 드라마틱한 신앙이 되겠습니까? 제가 이 청년들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얘야! 아서라! 그렇게 예수 믿어서는 안 된다. 아무나 어거스틴처럼 되는지 아느냐? 어거스튼처럼 예수를 믿을려다가 감옥에 들어가서 인생을 끝마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지금 복음이 내게 들어올 때,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네가 누구냐고 질문 하실 때에 그때 마음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질문 앞에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주님이라고 하는 말은 당신이란 뜻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웅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윤리적 이상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권을 갖고 이 땅에 온 메시아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성령의 역사를 보고 예수님 안에서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의 은총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고백을 그렇게 듣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기뻐서 베드로를 칭찬하십니다. 이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위해서입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길을 가도 이제 제자들이 넉넉하게 자기 인생들을 하나님을 위해서 살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 기쁨입니다. “바요나 시몬아!” 베드로의 옛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야, 너는 반석이다.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예수님께서 송파한 하나님의 나라가 베드로와 제자들을 통하여 계속 연결될 것이라고 그렇게 칭찬하시면서 베드로를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교회가 세워지느냐, 교회가 무너지느냐 결정되겠습니다. 여기 반석이라고 하는 것은 카톨릭 교회와 우리 계신 교회와 이해하는 내용이 다릅니다. 로만 카톨릭 교회는 이 반석을 베드로라고 하는 인물로 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초대 교황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베드로라고 하는 교황 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철저한 교회 계급 질서가 나타납니다. 하알하킬 구조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는 이 반성이란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하는 그 고백 뒤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그 자리가 교회가 세워지는 자리입니다. 아니, 여러분들이 고백하고 있으면 여러분들이 교회입니다. 여러분들이 거룩한 성전이고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역사가 이 땅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렇게 칭찬하면서 우리 예수님은 “네게 이것을 알게 한 이는, 이 신앙고백을 깨닫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이시다. 여기에는 성령에 계시와 성령의 도우심, 여기에는 네가 연구하고 네가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네 입을 통해서 고백하게 해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이런 신앙 고백을 드리고 있습니까? 이 신앙고백이 없이는 우리의 신앙을 시작할 수가 없습니다. 이 신앙 고백이 내 것이 되지 않고는 신앙의 여정이 출발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서 주의 몸 된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지는 역사가 나타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마음속에 이 신앙을 고백하면서 믿기로 결심하는 필요합니다. 쉘던 메네컨이라고 하는 사람이 ‘엄격한 자비’라는 책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믿기로 결심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 결정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전부다.” 믿기로 결정하다는 말에는 의심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의심을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는 의심을 품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을 할 수가 없다. 단 의심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구할 따름이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내게 믿음 없음을 도와 주시옵소서.” 토마스 머튼이라고 하는 사람은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너무 쉽게 발견했다면 아마도 당신이 찾던 하나님은 아닐는지 모른다.” 이렇게 얘기하면서 또 이렇게 다른 면을 얘기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겸손한 복종과 사랑으로 하나님께 완전하게 자신을 드리는가에 비례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그 분을 본 다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행동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누구인지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도 전에 그 분을 분명하게 보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믿음에 여정을 시작조차 할 수가 없다.”
여러분, 그런 것입니다. 보고 다 알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속에 의심이 있으면서도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의 뜻을 확인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진리를 찾기 위해서 잠시 무신론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게으른 무신론자, 그것은 인생에게 파멸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저 자신도 제 어머니의 신앙에서부터 저 자신의 신앙으로 바뀌어질 때에 하나의 큰 진통이 있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본 회퍼의 이런 말이 떠올랐습니다. “믿으면 행동하라! 믿으면 행동하라! 그런데도 자꾸만 믿어지지 않으면 거꾸로 행동해 보아라! 그러면 믿게 될 것이다.” 그때부터 저는 하나님이 말씀이 진리인 것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먼저 기도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에 공동체들과 함께 나누면서 뒤에 말씀을 증거 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네게 어떤 분인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놀라운 역사를 마음속에 배워나가게 되었고 보게 되었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산 제자들도 3년이 되어서야 이 대답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곧 다음다음 구절을 보면 예수님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꾸중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비록 베드로가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은 했지만 그 속에 이기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한 세상 것만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베드로가 꾸중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해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렇게 질문을 하신다면 여러분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걸려진 질문입니다. 이것을 대답해야 신앙이 시작이 됩니다. 이것을 바르게 주님 앞에 고백해야 우리 삶의 역사가 교회를 세우는 일,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하나님의 사명의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머뭇거리지 마시고 특별히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아직도 고백하지 않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다 알지 못하지만 “주님, 이제 고백하면서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겠나이다.” 그렇게 주님 앞에 나오면 우리 하나님께서 넉넉하게 우리를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질문하실 때, 주님 우리가 다 알지 못하지만 깨닫지 못하지만 감히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면서 신앙의 여정을 출발하길 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한사람 마음에 임재해 주셔서 올바른 신앙고백과 순종하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김지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