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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으면 그대로 됩니다. (막11:22-26)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매사가 믿음과 신뢰와 신용 없이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상거래도 믿음이 있어야 성립됩니다. 요즘 한참 뉴스에 보도되는 중국산 게와 복어에서 납덩이가 발견된다고 하며, 중국산 송이버섯에서 커다란 못이 발견된다고 하니 중국산 농수산물이 판매가 안 된다고 그럽니다. 왜 그렇습니까? 중국산 농수산물 그러면 머리에 납덩이와 못이 들어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나서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금융 사업도 신뢰가 깨지면 존속될 수 없습니다. 요즘 구조조정을 하면서 경영실적이 부실하고 재정 압박을 받는 금융기관들이 사라져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기관들을 믿을 수 없어 돈을 맡기지 않기 때문에 버틸 수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교육도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과 학부모 사이에 신뢰가 성립되지 않으면 바람직한 교육이 이뤄질 수 없습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에서 운영하는 성북 선교 원이 참 잘 된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원장을 맡고 있는 장로님을 비롯해서 네 분 선생님들과 아이들의 영양을 책임지고 있는 집사님 그리고 아이들을 운송하는 운전을 맡은 집사 님들까지 모두 사랑의 동산에 가서 영성 훈련을 받았으며, 받은 은혜를 그대로 실천하기 때문에 학보모들이 선생들을 믿을 수 있어서 많은 아이들을 보내주니까 잘 되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채소 한 단, 과일 한 쪽도 믿고 먹어야 맛이 있는 것이고, 물 한 모금도 믿고 마셔야 맛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 관계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부모 자식, 남편 아내, 형제, 친구, 이웃 등 모든 관계 역시 믿음과 신뢰가 성립되지 않으면 지속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명한 정신 병리학자였던 칼 메닝거 박사는 '어떠한 죄의식이 일어났더라도' 라는 저서에서 왜 인간은 고통을 받고 있는가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습니다. 인간이 고통받는 여러 가지 요인들 가운데 정신병, 잔인한 새디즘(Sadism), 히스테리에 가까운 편집증, 조울증 등이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에 의해 전염되고 인간이 그것들 때문에 고통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토머스 풀러라는 사람은 '인간은 울면서 태어나 불평하며 살다가 실망하며 죽는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부단히 조직을 만들고, 무기를 만들고, 작품을 만듭니다. 또한 그 조직이나 무기나 기구들 때문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린 여기서 믿는 사람들이 만드는 믿음직스런 조직이나 제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처음 교회를 나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동안 여러 곳을 출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부흥회 나가서 강사 대접하느라 정해 준 고급 호텔, 때로는 회사 사장실, 어떤 때는 대학 총장실, 일류 부자 집, 이름 난 음식점, 등 많은 집들에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번도 그곳을 들어가면서 '아! 마음이 편안하다', '안정된다', '여기 머물고 싶다'라는 기분을 느껴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드나들 때마다 편안하다고 느끼는 곳은 두 군데 있습니다. 하나는, 제 가정입니다. 제가 사는 곳이 4층 아파트이기 때문에 안정 된 층수입니다. 훌훌 벗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마음이 포근하고 편안해집니다. 쌓였던 피로가 순하게 풀립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증오와 갈등으로 뒤범벅된 지옥 같은 곳이라면 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입니다. 큰 교회, 작은 교회, 도시 교회, 시골 교회들을 수없이 드나들고 거기서 말씀을 전했습니다만 성북 교회에 들어서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건물이 크고 화려해서가 아닙니다. 10년 가까이 사랑과 젊음을 바쳤던 교회이기 때문이며, 내가 사랑하는 교인이 있고, 나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이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을 수 있고 믿어 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서로를 믿고 살아야 그곳이 낙원이 되고 행복한 보금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북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북 교회는 말씀이 좋고, 평안하고, 행복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이 단순히 소망으로만 그치지 않고 우리가 소망하는바가 내 것이 될 때 나는 행복한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믿고, 신뢰하고, 살면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그런데 그보다도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비교도,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믿음과 그 결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⑴,믿으라
본문 속에서 '믿으라'(22), '믿고'(23), '믿으라'(24)는 말씀이 세 번 강조되고 있습니다. 요14:1에서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의 원문의 뜻은 '하나님에 의해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2:8을 보면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내가 만들고 내가 생성시키는 생산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믿음으로 내가 살고, 내가 크고, 내가 번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고 사는 것을 마치 사설 학원 등록쯤으로 생각합니다. 시간 되면 나가서 수강하고 틈나지 않으면 그만둘 수 있는 것이 학원입니다.
신앙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행복하게 되느냐 불행하게 되느냐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기분 내키면 하고 싫으면 그만두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은 절대 절명의 과제이며 명제인 것입니다. 저희 집안 얘기를 하나 해야겠습니다. 저의 딸이 출가한 후 서울에서 살림을 차리고 사는데, 사위는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생산 회사의 중요 간부로 근무하면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진급도 빨리 되고 또 사장의 신임을 받아 미국 등지로 자주 출장을 나갈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전화로 배우는 영어 회화 프로그램에 가입을 했습니다. 직접 학원에 갈 시간과 여건이 안 되기 때문에 집에서 전화로 회화를 공부하는 프로그램에 신청한 것입니다. 매일 아침 정각 6시가 되면 전화벨이 울립니다. 매일 아침 한번도 거르는 법 없이 1분도 어기지 않고 전화가 걸려 옵니다.
전화를 받으면 낭랑한 여자 목소리가 들립니다. "공부하실 시간입니다.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1분쯤 후에 다시 전화가 걸려 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졸립다든지, 일이 바쁘다든지, 손님이 와 있으면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으면 전화가 걸려 오질 않습니다. 지금껏 단 한번도 그쪽에서 "왜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았느냐, 왜 전화를 받지 않았느냐, 왜 돈만 내고 공부를 안 하느냐, 왜 성적이 그 정도냐"라고 타이르거나 야단치는 전화가 온 일이 없습니다. 혹자는 그런 식의 신앙생활이 현대적이고 편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편한 것도 좋은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가지면 행복하고, 버리면 불행입니다. 믿음은 가지면 영생, 버리면 지옥입니다.
초대 교회 신학자였던 어거스틴은 "당신이 믿으려는 바를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당신이 이해하고 싶은 바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먼저 믿어야 이해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믿어야 합니다. 천지 창조를 이해하려 하지 말고 먼저 믿어야 합니다. 우린 과학과 신앙의 공식이나 접근법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과학은 이해하고 나서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믿고 나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순서가 다르고 접근법이 다릅니다. 신앙은 필요에 의해 선택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안 믿으면 죽고 믿으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큰 다음에,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 취직한 다음에, 결혼한 다음에, 아이 큰 다음에, 그 아이 대학 들어간 다음에, 그 아이 결혼한 다음에, 사업이 성공한 다음에, 기반이 잡힌 다음에......라며 미루다가 결국 죽어 지옥에 들어가고 맙니다. 믿음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무덤에서 영원까지 필요합니다. 믿음 없인 살지 못합니다. 사람끼리도 믿어야 삽니다만 하나님을 믿음은 절대로 필요합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⑵,의심치 말라
23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의심'이라는 말의 원문의 뜻은 '판단이 엇갈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것 같기도 하고 저런 것 같기도 한 것이 의심입니다. 이것이 옳은 것 같기도 하고 저것이 옳은 것 같기도 한 것이 의심입니다. 그래서 판단이 바로 서지 못한 채 엇갈리는 것이 의심입니다. 의심은 금물입니다. 의심해서 좋은 것보다는 해로운 것이 더 많습니다. 의심하면 약도 약이 되지 않고 음식도 칼로리가 되지 못합니다. 의심하면 한강 다리도 차로 건너갈 수가 없고 부부 생활도 어렵습니다. 의처증이나 의부증의 시발이 바로 의심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흥미롭게 읽은 하루아마 시게오라는 일본인 의사가 쓴 '뇌내혁명'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1940년 교토에서 태어난 한의사였는데 도쿄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66년에 졸업한 한의와 양의를 겸한 의학박사입니다. 그 책에 의하면, 사람이 싫다, 좋다는 생각을 하는 데도 기본적인 양의 에너지가 필요한데 긍정적으로 사고할 때와 부정적으로 사고할 때의 단백질 분해 방법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이것은 하나의 시련이다, 좋은 경험이다'라고 받아들이면 단백질이 부신피질 호르몬과 엔돌핀으로 분해된다는 것입니다. 부신피질 호르몬은 육체적 스트레스를 완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해 주고 엔돌핀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엔돌핀과 육체적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부신피질이 분비되지만,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일 경우에는 신기하게도 엔돌핀이나 부신피질이 전혀 다른 물질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노르아드레날린과 아드레날린으로 변하는데 그 물질 자체도 독성이 강한 것이지만 이 물질로 인해 더욱 강한 독성 물질인 활성 산소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행복하다, 기쁘다 혹은 운이 좋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엔돌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지만, 동일한 상황에서지만 싫다, 밉다, 복수하겠다고 생각하면 불쾌감, 질병, 돌발 사고, 실패, 실의, 좌절감 같은 자기 파멸의 골짜기로 빠지게 된다는 것이 하루아마 시게오 박사의 지론입니다. 의심도 예외가 아닙니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되는 게 없습니다. 믿읍시다. 의심을 버립시다. 하나님을 믿고 의심하지 맙시다.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의심하지 맙시다.
⑶,그대로 되리라
24절을 보면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믿음의 위대성과 그 결과를 주목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게 해야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세와 마음이 어떠하냐에 따라 기도의 결과가 결정됩니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믿는다는 말을 되풀이하지만 실상은 믿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믿노라 말하지만 못 믿을 때가 더 많습니다. 어떤 마음을 지니느냐, 마음이 어떤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믿음의 경중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타임(Time)지가 미혼 여성 1천 명을 상대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1천 명 중 984명이 평균 45%가 넘는 시간을 팝 음악을 들으며 임신을 하거나 태아를 키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즐겨 듣는 음악이란 대체로 팝, 랩, 락, 거기다 댄스뮤직이어서 소리지르고 떠들고 흔드는 것 일색입니다. 그런 음악을 듣고 보고 부르다 임신을 하게 되면, 보나마나 태아는 뱃속에서부터 흔들고 떠들고 소리지르는 영향을 받으면서 10개월을 복중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태어나면 보나마나 흔들고 떠드는 아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젊은이들을 보면 가만히 앉아 있는 법이 없습니다. 흔들고 흥얼거립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도, 강의실에서도 흔들어 댑니다. 그것은 태모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입니다.
신앙도 누구의 영향을 받느냐가 중요합니다.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의 영향을 받으면 신앙이 순수하고 맑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나 교회 생활을 까다롭게, 힘들게, 비판적으로, 부정적으로 하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면 신앙이 자라지 못하고 엉겅퀴가 되고 맙니다. 믿으라! 그대로 되리라. 이것은 그대로 믿으라, 그대로 되리라는 뜻입니다. 순수하게 믿읍시다. 그대로 될 것입니다. 따지지 말고 믿읍시다. 하나님도 그 기도를 따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로 믿읍시다! 순수하게 믿읍시다! 편안하게 믿읍시다! 그리하면 기도가 응답될 것이며 믿음이 자라게 될 것입니다. '믿으십시오 그대로 될 것입니다' 아멘
출처/이석권목사 설교 중에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매사가 믿음과 신뢰와 신용 없이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상거래도 믿음이 있어야 성립됩니다. 요즘 한참 뉴스에 보도되는 중국산 게와 복어에서 납덩이가 발견된다고 하며, 중국산 송이버섯에서 커다란 못이 발견된다고 하니 중국산 농수산물이 판매가 안 된다고 그럽니다. 왜 그렇습니까? 중국산 농수산물 그러면 머리에 납덩이와 못이 들어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나서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금융 사업도 신뢰가 깨지면 존속될 수 없습니다. 요즘 구조조정을 하면서 경영실적이 부실하고 재정 압박을 받는 금융기관들이 사라져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기관들을 믿을 수 없어 돈을 맡기지 않기 때문에 버틸 수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교육도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과 학부모 사이에 신뢰가 성립되지 않으면 바람직한 교육이 이뤄질 수 없습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에서 운영하는 성북 선교 원이 참 잘 된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원장을 맡고 있는 장로님을 비롯해서 네 분 선생님들과 아이들의 영양을 책임지고 있는 집사님 그리고 아이들을 운송하는 운전을 맡은 집사 님들까지 모두 사랑의 동산에 가서 영성 훈련을 받았으며, 받은 은혜를 그대로 실천하기 때문에 학보모들이 선생들을 믿을 수 있어서 많은 아이들을 보내주니까 잘 되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채소 한 단, 과일 한 쪽도 믿고 먹어야 맛이 있는 것이고, 물 한 모금도 믿고 마셔야 맛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 관계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부모 자식, 남편 아내, 형제, 친구, 이웃 등 모든 관계 역시 믿음과 신뢰가 성립되지 않으면 지속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명한 정신 병리학자였던 칼 메닝거 박사는 '어떠한 죄의식이 일어났더라도' 라는 저서에서 왜 인간은 고통을 받고 있는가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습니다. 인간이 고통받는 여러 가지 요인들 가운데 정신병, 잔인한 새디즘(Sadism), 히스테리에 가까운 편집증, 조울증 등이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에 의해 전염되고 인간이 그것들 때문에 고통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토머스 풀러라는 사람은 '인간은 울면서 태어나 불평하며 살다가 실망하며 죽는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부단히 조직을 만들고, 무기를 만들고, 작품을 만듭니다. 또한 그 조직이나 무기나 기구들 때문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린 여기서 믿는 사람들이 만드는 믿음직스런 조직이나 제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처음 교회를 나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동안 여러 곳을 출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부흥회 나가서 강사 대접하느라 정해 준 고급 호텔, 때로는 회사 사장실, 어떤 때는 대학 총장실, 일류 부자 집, 이름 난 음식점, 등 많은 집들에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번도 그곳을 들어가면서 '아! 마음이 편안하다', '안정된다', '여기 머물고 싶다'라는 기분을 느껴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드나들 때마다 편안하다고 느끼는 곳은 두 군데 있습니다. 하나는, 제 가정입니다. 제가 사는 곳이 4층 아파트이기 때문에 안정 된 층수입니다. 훌훌 벗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마음이 포근하고 편안해집니다. 쌓였던 피로가 순하게 풀립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증오와 갈등으로 뒤범벅된 지옥 같은 곳이라면 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입니다. 큰 교회, 작은 교회, 도시 교회, 시골 교회들을 수없이 드나들고 거기서 말씀을 전했습니다만 성북 교회에 들어서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건물이 크고 화려해서가 아닙니다. 10년 가까이 사랑과 젊음을 바쳤던 교회이기 때문이며, 내가 사랑하는 교인이 있고, 나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이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을 수 있고 믿어 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서로를 믿고 살아야 그곳이 낙원이 되고 행복한 보금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북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북 교회는 말씀이 좋고, 평안하고, 행복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이 단순히 소망으로만 그치지 않고 우리가 소망하는바가 내 것이 될 때 나는 행복한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믿고, 신뢰하고, 살면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그런데 그보다도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비교도,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믿음과 그 결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⑴,믿으라
본문 속에서 '믿으라'(22), '믿고'(23), '믿으라'(24)는 말씀이 세 번 강조되고 있습니다. 요14:1에서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의 원문의 뜻은 '하나님에 의해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2:8을 보면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내가 만들고 내가 생성시키는 생산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믿음으로 내가 살고, 내가 크고, 내가 번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고 사는 것을 마치 사설 학원 등록쯤으로 생각합니다. 시간 되면 나가서 수강하고 틈나지 않으면 그만둘 수 있는 것이 학원입니다.
신앙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행복하게 되느냐 불행하게 되느냐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기분 내키면 하고 싫으면 그만두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은 절대 절명의 과제이며 명제인 것입니다. 저희 집안 얘기를 하나 해야겠습니다. 저의 딸이 출가한 후 서울에서 살림을 차리고 사는데, 사위는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생산 회사의 중요 간부로 근무하면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진급도 빨리 되고 또 사장의 신임을 받아 미국 등지로 자주 출장을 나갈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전화로 배우는 영어 회화 프로그램에 가입을 했습니다. 직접 학원에 갈 시간과 여건이 안 되기 때문에 집에서 전화로 회화를 공부하는 프로그램에 신청한 것입니다. 매일 아침 정각 6시가 되면 전화벨이 울립니다. 매일 아침 한번도 거르는 법 없이 1분도 어기지 않고 전화가 걸려 옵니다.
전화를 받으면 낭랑한 여자 목소리가 들립니다. "공부하실 시간입니다.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1분쯤 후에 다시 전화가 걸려 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졸립다든지, 일이 바쁘다든지, 손님이 와 있으면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으면 전화가 걸려 오질 않습니다. 지금껏 단 한번도 그쪽에서 "왜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았느냐, 왜 전화를 받지 않았느냐, 왜 돈만 내고 공부를 안 하느냐, 왜 성적이 그 정도냐"라고 타이르거나 야단치는 전화가 온 일이 없습니다. 혹자는 그런 식의 신앙생활이 현대적이고 편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편한 것도 좋은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가지면 행복하고, 버리면 불행입니다. 믿음은 가지면 영생, 버리면 지옥입니다.
초대 교회 신학자였던 어거스틴은 "당신이 믿으려는 바를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당신이 이해하고 싶은 바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먼저 믿어야 이해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믿어야 합니다. 천지 창조를 이해하려 하지 말고 먼저 믿어야 합니다. 우린 과학과 신앙의 공식이나 접근법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과학은 이해하고 나서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믿고 나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순서가 다르고 접근법이 다릅니다. 신앙은 필요에 의해 선택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안 믿으면 죽고 믿으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큰 다음에,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 취직한 다음에, 결혼한 다음에, 아이 큰 다음에, 그 아이 대학 들어간 다음에, 그 아이 결혼한 다음에, 사업이 성공한 다음에, 기반이 잡힌 다음에......라며 미루다가 결국 죽어 지옥에 들어가고 맙니다. 믿음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무덤에서 영원까지 필요합니다. 믿음 없인 살지 못합니다. 사람끼리도 믿어야 삽니다만 하나님을 믿음은 절대로 필요합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⑵,의심치 말라
23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의심'이라는 말의 원문의 뜻은 '판단이 엇갈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것 같기도 하고 저런 것 같기도 한 것이 의심입니다. 이것이 옳은 것 같기도 하고 저것이 옳은 것 같기도 한 것이 의심입니다. 그래서 판단이 바로 서지 못한 채 엇갈리는 것이 의심입니다. 의심은 금물입니다. 의심해서 좋은 것보다는 해로운 것이 더 많습니다. 의심하면 약도 약이 되지 않고 음식도 칼로리가 되지 못합니다. 의심하면 한강 다리도 차로 건너갈 수가 없고 부부 생활도 어렵습니다. 의처증이나 의부증의 시발이 바로 의심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흥미롭게 읽은 하루아마 시게오라는 일본인 의사가 쓴 '뇌내혁명'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1940년 교토에서 태어난 한의사였는데 도쿄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66년에 졸업한 한의와 양의를 겸한 의학박사입니다. 그 책에 의하면, 사람이 싫다, 좋다는 생각을 하는 데도 기본적인 양의 에너지가 필요한데 긍정적으로 사고할 때와 부정적으로 사고할 때의 단백질 분해 방법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이것은 하나의 시련이다, 좋은 경험이다'라고 받아들이면 단백질이 부신피질 호르몬과 엔돌핀으로 분해된다는 것입니다. 부신피질 호르몬은 육체적 스트레스를 완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해 주고 엔돌핀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엔돌핀과 육체적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부신피질이 분비되지만,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일 경우에는 신기하게도 엔돌핀이나 부신피질이 전혀 다른 물질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노르아드레날린과 아드레날린으로 변하는데 그 물질 자체도 독성이 강한 것이지만 이 물질로 인해 더욱 강한 독성 물질인 활성 산소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행복하다, 기쁘다 혹은 운이 좋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엔돌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지만, 동일한 상황에서지만 싫다, 밉다, 복수하겠다고 생각하면 불쾌감, 질병, 돌발 사고, 실패, 실의, 좌절감 같은 자기 파멸의 골짜기로 빠지게 된다는 것이 하루아마 시게오 박사의 지론입니다. 의심도 예외가 아닙니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되는 게 없습니다. 믿읍시다. 의심을 버립시다. 하나님을 믿고 의심하지 맙시다.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의심하지 맙시다.
⑶,그대로 되리라
24절을 보면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믿음의 위대성과 그 결과를 주목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게 해야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세와 마음이 어떠하냐에 따라 기도의 결과가 결정됩니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믿는다는 말을 되풀이하지만 실상은 믿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믿노라 말하지만 못 믿을 때가 더 많습니다. 어떤 마음을 지니느냐, 마음이 어떤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믿음의 경중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타임(Time)지가 미혼 여성 1천 명을 상대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1천 명 중 984명이 평균 45%가 넘는 시간을 팝 음악을 들으며 임신을 하거나 태아를 키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즐겨 듣는 음악이란 대체로 팝, 랩, 락, 거기다 댄스뮤직이어서 소리지르고 떠들고 흔드는 것 일색입니다. 그런 음악을 듣고 보고 부르다 임신을 하게 되면, 보나마나 태아는 뱃속에서부터 흔들고 떠들고 소리지르는 영향을 받으면서 10개월을 복중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태어나면 보나마나 흔들고 떠드는 아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젊은이들을 보면 가만히 앉아 있는 법이 없습니다. 흔들고 흥얼거립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도, 강의실에서도 흔들어 댑니다. 그것은 태모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입니다.
신앙도 누구의 영향을 받느냐가 중요합니다.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의 영향을 받으면 신앙이 순수하고 맑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나 교회 생활을 까다롭게, 힘들게, 비판적으로, 부정적으로 하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면 신앙이 자라지 못하고 엉겅퀴가 되고 맙니다. 믿으라! 그대로 되리라. 이것은 그대로 믿으라, 그대로 되리라는 뜻입니다. 순수하게 믿읍시다. 그대로 될 것입니다. 따지지 말고 믿읍시다. 하나님도 그 기도를 따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로 믿읍시다! 순수하게 믿읍시다! 편안하게 믿읍시다! 그리하면 기도가 응답될 것이며 믿음이 자라게 될 것입니다. '믿으십시오 그대로 될 것입니다' 아멘
출처/이석권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