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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통해서 역사 (고전 3장 13절)
하나님의 창고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은혜와 축복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인색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무엇이든지 주시기를 원하시는 참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생명만 주신 분이 아닙니다. 생명과 함께 온 세상과 안식 그리고 가정을 주신 분입니다. 요3;16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롬8:32에 보면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성도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실제로 받아 누리는 사람이 있고 기본적인 것 외에는 전혀 받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답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것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믿음을 가지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1)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벧전1:9에 보면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영혼의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반대로 믿음이 없으면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무거나 믿어도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아무거나 믿어도 되면 자기 주먹을 믿는 것도 믿는 것이고, 지갑의 돈을 믿어도 믿는 것이니 그 믿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는 결론이 나옵니다. 아닙니다. 아무거나 믿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역사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범죄 하여 저주 가운데 놓인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악의 짐을 대신 짊어지시고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의 고난과 죽음이 나를 대신한 고난이요 나를 대신한 죽음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16:31에서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데, 여기서 구원이라는 것은 영적인 죽음에서의 해방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죽음에서 구원을 받는 것은 가장 중요한 구원입니다. 이 구원이 없다면 다른 부분에 아무리 엄청난 구원의 역사가 있어도 그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요1:12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적 구원의 단 한 가지 조건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영적 죽음에서의 구원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단의 권세로부터의 구원, 환경적 저주로부터의 구원도 포함됩니다. 질병으로부터의 구원과 극복할 수없는 환경으로부터의 구원도 포함됩니다. 심지어 가난으로부터의 구원까지도 믿음으로 인한 구원에 포함됩니다.
2) 믿음으로 바라는 것이 실제가 됩니다.
히11:1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대하고 바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있어도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히11:1에서는 그 차이를 믿음의 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도 자식이 없었습니다. 사라를 통해서 자식을 얻기를 원했지만 사라가 임신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통해서 자식을 주신다고 해도 확실한 믿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으니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셨습니다. 그런데 전에는 믿어지지 않아서 콧방귀나 끼던 그 일이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믿음대로 역사하셔서 이삭이라는 자식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꿈과 비전을 갖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가진 꿈과 비전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꿈과 비전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고 그것을 기대하도 그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신앙의 사람들은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있어도 실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아람군대가 사마리아 성을 포위했을 때 성 중에 형편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비참했습니다. 나귀머리도 삶아먹고 비둘기 똥도 거래가 될 만큼 비참했습니다. 이 때 모든 사람들은 양식이 풍족해 질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그런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엘리사가 성중에 양식이 풍족해 질 것에 대해서 예언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엘리사의 말을 다 믿는데 한 군대장관은 엘리사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기대는 해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엘리사의 말대로 양식이 풍족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군대장관은 양식이 풍족해지기 시작하는 그 순간에 성문을 몰려 나가는 사람들에게 갈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가 기대하던 일이 일어났지만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실제가 될 수 없었던 사건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모두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바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렇게도 기대하고 바랐던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 단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기대는 했지만 가나안의 실제를 경험할 수는 없었습니다.
3)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히11:6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역으로 해석하면 믿음으로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말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가인은 농사꾼이었기에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치기를 했기 때문에 양의 첫 새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열납지 않으셨고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11:4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인의 제사는 믿음이 없이 드리는 형식적인 제사였기에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던 것이고 아벨의 제사는 믿음으로 드린 제사였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셨고 그의 제사에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무슨 죄보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죄를 가장 크게 생각하십니다. 다른 죄를 범해도 하나님의 자녀에서 제해지지는 않습니다. 천국에 못 들어가는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에서 제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이 출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사울의 칼을 피해 도망 다니면서도 하나님은 나의 힘이요 방패라고 고백했습니다. 심지어 압살롬의 군대가 자기를 포위할 때에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두렵지 않다고 천만인이 자기를 둘러 포위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의 남다른 믿음이 하나님을 감동시켰고, 다윗의 믿음으로 인하여 감동하신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왕 중의 왕으로 삼아주셨던 것입니다.
4) 믿음으로 말씀을 행할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사느냐 말씀대로 살지 않느냐 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상당히 중요한 일입니다. 마7장에서는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 같아서 비바람이 몰아쳐도 무너지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신앙의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사람과 같아서 비바람이 몰아치면 그 무너짐이 심하게 됩니다. 그만큼 말씀대로 사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상을 받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든지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지만 말씀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다시 말씀대로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지만 또 다시 실패하고 맙니다. 결심하고 실패하는 일이 몇 번 반복되다보면 나중에는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고 말씀대로 사는 것을 결심하는 일마저 포기합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접근방법의 문제입니다. 행위에 초점을 두고 접근하느냐 믿음에 초점을 두고 접근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쉽게 말하면 말이 앞서느냐 마차가 앞서느냐의 문제입니다. 마차를 앞세우고 말을 뒤에 묶어두면 마차는 달릴 수 없습니다. 말을 앞에 두고 마차를 뒤에 달아야 마차가 달리는 것입니다.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행하려고만 하면 실패합니다. 믿음을 키우고 믿음을 앞세우면 성공합니다.
야고보서 전체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행함 있는 믿음입니다. 행함 있는 믿음은 결심하고 노력하여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키우면 행함은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을 말합니다. 향수를 뿌리면 향기가 나듯이 온전한 믿음을 가지면 행함은 자동으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경호원이 가는 곳에 대통령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가는 곳에 경호원이 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행함이 가는 곳에 믿음이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가는 곳에 행함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5) 믿음으로 기도응답을 받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지만 기도하는 만큼 기도응답을 받지는 못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에만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막11:24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 역시 양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질인데 기도의 질을 결정해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눅18:8에 보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서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인자가 올 때는 두 가지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마지막 때를 말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입니다. 그 때에 주님은 우리들의믿음을 보시고 영생과 영벌을 구분 짓습니다. 둘째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려고 영으로 오실 때를 말합니다. 주님은 그 때에 우리들의 믿음을 보시고 믿음 있는 자에게는 응답하시고 믿음 없는 자에게는 응답해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약5:15에 보면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일으키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병든 자를 일으키는 기도의 능력은 믿음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기도응답의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시면 다음과 같이 하십시오. 첫째,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기도응답의 축복을 누리고 싶어 하더라도 실제로 기도하지 않으면 응답은 없습니다. 둘째는 기도의 방향을 점검하십시오. 기도하는 내가 하나님과 같은 방향을 보고 기도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방향을 보고 기도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아무리 충만한 믿음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계속해서 기도하더라도 하나님과 방향이 맞지 않으면 기도응답은 없습니다. 셋째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기도는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기만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기만당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6) 믿음으로 표적이 나타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적이 따른다는 것은 신나는 일입니다. 낙심 중에 있던 사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적이 나타나면 새 힘을 얻습니다. 표적은 낙심된 자를 일으키고 신앙생활에 자신감을 줍니다. 초대교회 대에는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하게 전했고 그 결과 큰 부흥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나 이삭에게 아비멜렉과 군대장관이 찾아와서 “너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인정하는 말을 했습니다. 불신자였던 아비멜렉과 비골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인정하게 된 배경은 무엇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음의 사람인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적이 따르는 것을 여러 번 봤던 것입니다.
막16:17을 보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라고 말씀하시고 5대 표적을 말씀합니다. 표적이 따르는데 어떤 사람에게 따른다고 말합니까? 목사나 전도사 혹은 40일 금식을 했거나 10일 정도는 철야기도를 해야 표적이 따른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는 자입니다. 믿는 자에게 표적이 따르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적을 자주 목격하곤 합니다. 제 목회에는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표적이 다릅니다. 그 이유는 제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7) 믿음으로 사단의 공격을 방어합니다..
사단은 기회가 있는 대로 믿음의 사람들을 공격하여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사단이 잘 사용하는 방법은 부정적인 생각과 환경 그리고 사람을 통한 공격입니다. 이 때 사단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어무기가 믿음의 방패입니다. 엡6장에서는 믿음의 사람들이 입어야 할 전신갑주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가운데 적의 불화살을 막아내는 무기는 믿음의 방패입니다.
보통 신앙인들은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의 방패가 너무 작다는 것입니다. 너무 작아서 전신을 방어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방패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적의 불화살이 나라오면 불화살에 맞아 영적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보통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과 환란을 격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믿음의 방패로 적의 공격을 막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의 믿음이 그만큼 컸던 것입니다.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작은 문제 때문에 믿음을 버리고 불신앙의 길로 돌아서는 일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의 방패가 너무나 작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의 믿음의 방패가 자신을 향한 적의 공격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한 공격까지도 막아 줄 수 있는 큰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2. 믿음을 갖게 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1) 은혜의 선물로 믿음을 받습니다.
사람은 믿으려고 해도 믿을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선물로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문에서 문을 열어달라고 노크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면 얼마든지 들어오시는데 열지 않으니 들어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선물을 주는 것은 주는 사람 마음입니다. 주기 싫으면 안 주는 것이고 주고 싶으면 주는 것입니다. 선물을 받는 것은 받는 사람 마음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좋은 선물을 주더라도 내가 거절하면 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마음을 열고 받아드리면 받는 것이고 내가 거절하면 받을 수 없습니다.
2) 말씀을 들을 때 자랍니다.
롬10:17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앗과 같습니다. 씨앗을 뿌리면 때가 되면 열매가 열리듯이 말씀을 들으면 파종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믿음의 싹이 나고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일고 듣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3) 경험을 통해서 더 확실해 집니다.
우리의 육체는 경험하지 않으면 믿지 못합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주님의 능력과 말씀 때문에 주님을 따라다녔지만 확실한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주님과 제자들이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즐거운 결혼식장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물이 좋지 않은 그 지역에서는 포도주가 식수 대신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음식은 있는데 물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큰 문제 아닙니까! 더군다나 결혼식에서는 기쁨을 상징하는 포도주가 모자라는 것은 쿤 문제입니다. 주님은 하인들에게 물을 항아리 아구까지 채우라고 말씀하셨고 하인들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하인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포도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자 놀랍게도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기록된 요2:11에서는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장하는 믿음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주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나옵니다. 무덤 앞에 서신 주님께서 “돌을 옮겨놓으라”고 말씀하시자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주여 죽은지가 이미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뜻은 무덤 문을 연다고 별 뽀족한 수가 없다는 불신앙의 말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40절에 보면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무덤 문을 연 것을 보면 마르다가 주님의 능력을 믿은 것 같습니다. 마르다가 믿은 후에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온 몸을 베로 동인채로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 이 음성을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음성으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창고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은혜와 축복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인색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무엇이든지 주시기를 원하시는 참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생명만 주신 분이 아닙니다. 생명과 함께 온 세상과 안식 그리고 가정을 주신 분입니다. 요3;16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롬8:32에 보면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성도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실제로 받아 누리는 사람이 있고 기본적인 것 외에는 전혀 받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답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것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믿음을 가지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1)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벧전1:9에 보면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영혼의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반대로 믿음이 없으면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무거나 믿어도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아무거나 믿어도 되면 자기 주먹을 믿는 것도 믿는 것이고, 지갑의 돈을 믿어도 믿는 것이니 그 믿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는 결론이 나옵니다. 아닙니다. 아무거나 믿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역사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범죄 하여 저주 가운데 놓인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악의 짐을 대신 짊어지시고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의 고난과 죽음이 나를 대신한 고난이요 나를 대신한 죽음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16:31에서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데, 여기서 구원이라는 것은 영적인 죽음에서의 해방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죽음에서 구원을 받는 것은 가장 중요한 구원입니다. 이 구원이 없다면 다른 부분에 아무리 엄청난 구원의 역사가 있어도 그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요1:12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적 구원의 단 한 가지 조건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영적 죽음에서의 구원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단의 권세로부터의 구원, 환경적 저주로부터의 구원도 포함됩니다. 질병으로부터의 구원과 극복할 수없는 환경으로부터의 구원도 포함됩니다. 심지어 가난으로부터의 구원까지도 믿음으로 인한 구원에 포함됩니다.
2) 믿음으로 바라는 것이 실제가 됩니다.
히11:1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대하고 바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있어도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히11:1에서는 그 차이를 믿음의 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도 자식이 없었습니다. 사라를 통해서 자식을 얻기를 원했지만 사라가 임신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통해서 자식을 주신다고 해도 확실한 믿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으니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셨습니다. 그런데 전에는 믿어지지 않아서 콧방귀나 끼던 그 일이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믿음대로 역사하셔서 이삭이라는 자식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꿈과 비전을 갖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가진 꿈과 비전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꿈과 비전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고 그것을 기대하도 그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신앙의 사람들은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있어도 실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아람군대가 사마리아 성을 포위했을 때 성 중에 형편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비참했습니다. 나귀머리도 삶아먹고 비둘기 똥도 거래가 될 만큼 비참했습니다. 이 때 모든 사람들은 양식이 풍족해 질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그런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엘리사가 성중에 양식이 풍족해 질 것에 대해서 예언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엘리사의 말을 다 믿는데 한 군대장관은 엘리사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기대는 해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엘리사의 말대로 양식이 풍족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군대장관은 양식이 풍족해지기 시작하는 그 순간에 성문을 몰려 나가는 사람들에게 갈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가 기대하던 일이 일어났지만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실제가 될 수 없었던 사건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모두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바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렇게도 기대하고 바랐던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 단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기대는 했지만 가나안의 실제를 경험할 수는 없었습니다.
3)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히11:6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역으로 해석하면 믿음으로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말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가인은 농사꾼이었기에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치기를 했기 때문에 양의 첫 새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열납지 않으셨고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11:4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인의 제사는 믿음이 없이 드리는 형식적인 제사였기에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던 것이고 아벨의 제사는 믿음으로 드린 제사였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셨고 그의 제사에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무슨 죄보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죄를 가장 크게 생각하십니다. 다른 죄를 범해도 하나님의 자녀에서 제해지지는 않습니다. 천국에 못 들어가는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에서 제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이 출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사울의 칼을 피해 도망 다니면서도 하나님은 나의 힘이요 방패라고 고백했습니다. 심지어 압살롬의 군대가 자기를 포위할 때에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두렵지 않다고 천만인이 자기를 둘러 포위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의 남다른 믿음이 하나님을 감동시켰고, 다윗의 믿음으로 인하여 감동하신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왕 중의 왕으로 삼아주셨던 것입니다.
4) 믿음으로 말씀을 행할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사느냐 말씀대로 살지 않느냐 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상당히 중요한 일입니다. 마7장에서는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 같아서 비바람이 몰아쳐도 무너지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신앙의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사람과 같아서 비바람이 몰아치면 그 무너짐이 심하게 됩니다. 그만큼 말씀대로 사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상을 받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든지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지만 말씀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다시 말씀대로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지만 또 다시 실패하고 맙니다. 결심하고 실패하는 일이 몇 번 반복되다보면 나중에는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고 말씀대로 사는 것을 결심하는 일마저 포기합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접근방법의 문제입니다. 행위에 초점을 두고 접근하느냐 믿음에 초점을 두고 접근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쉽게 말하면 말이 앞서느냐 마차가 앞서느냐의 문제입니다. 마차를 앞세우고 말을 뒤에 묶어두면 마차는 달릴 수 없습니다. 말을 앞에 두고 마차를 뒤에 달아야 마차가 달리는 것입니다.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행하려고만 하면 실패합니다. 믿음을 키우고 믿음을 앞세우면 성공합니다.
야고보서 전체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행함 있는 믿음입니다. 행함 있는 믿음은 결심하고 노력하여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키우면 행함은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을 말합니다. 향수를 뿌리면 향기가 나듯이 온전한 믿음을 가지면 행함은 자동으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경호원이 가는 곳에 대통령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가는 곳에 경호원이 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행함이 가는 곳에 믿음이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가는 곳에 행함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5) 믿음으로 기도응답을 받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지만 기도하는 만큼 기도응답을 받지는 못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에만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막11:24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 역시 양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질인데 기도의 질을 결정해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눅18:8에 보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서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인자가 올 때는 두 가지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마지막 때를 말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입니다. 그 때에 주님은 우리들의믿음을 보시고 영생과 영벌을 구분 짓습니다. 둘째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려고 영으로 오실 때를 말합니다. 주님은 그 때에 우리들의 믿음을 보시고 믿음 있는 자에게는 응답하시고 믿음 없는 자에게는 응답해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약5:15에 보면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일으키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병든 자를 일으키는 기도의 능력은 믿음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기도응답의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시면 다음과 같이 하십시오. 첫째,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기도응답의 축복을 누리고 싶어 하더라도 실제로 기도하지 않으면 응답은 없습니다. 둘째는 기도의 방향을 점검하십시오. 기도하는 내가 하나님과 같은 방향을 보고 기도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방향을 보고 기도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아무리 충만한 믿음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계속해서 기도하더라도 하나님과 방향이 맞지 않으면 기도응답은 없습니다. 셋째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기도는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기만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기만당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6) 믿음으로 표적이 나타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적이 따른다는 것은 신나는 일입니다. 낙심 중에 있던 사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적이 나타나면 새 힘을 얻습니다. 표적은 낙심된 자를 일으키고 신앙생활에 자신감을 줍니다. 초대교회 대에는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하게 전했고 그 결과 큰 부흥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나 이삭에게 아비멜렉과 군대장관이 찾아와서 “너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인정하는 말을 했습니다. 불신자였던 아비멜렉과 비골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인정하게 된 배경은 무엇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음의 사람인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적이 따르는 것을 여러 번 봤던 것입니다.
막16:17을 보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라고 말씀하시고 5대 표적을 말씀합니다. 표적이 따르는데 어떤 사람에게 따른다고 말합니까? 목사나 전도사 혹은 40일 금식을 했거나 10일 정도는 철야기도를 해야 표적이 따른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는 자입니다. 믿는 자에게 표적이 따르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적을 자주 목격하곤 합니다. 제 목회에는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표적이 다릅니다. 그 이유는 제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7) 믿음으로 사단의 공격을 방어합니다..
사단은 기회가 있는 대로 믿음의 사람들을 공격하여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사단이 잘 사용하는 방법은 부정적인 생각과 환경 그리고 사람을 통한 공격입니다. 이 때 사단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어무기가 믿음의 방패입니다. 엡6장에서는 믿음의 사람들이 입어야 할 전신갑주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가운데 적의 불화살을 막아내는 무기는 믿음의 방패입니다.
보통 신앙인들은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의 방패가 너무 작다는 것입니다. 너무 작아서 전신을 방어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방패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적의 불화살이 나라오면 불화살에 맞아 영적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보통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과 환란을 격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믿음의 방패로 적의 공격을 막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의 믿음이 그만큼 컸던 것입니다.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작은 문제 때문에 믿음을 버리고 불신앙의 길로 돌아서는 일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의 방패가 너무나 작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의 믿음의 방패가 자신을 향한 적의 공격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한 공격까지도 막아 줄 수 있는 큰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2. 믿음을 갖게 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1) 은혜의 선물로 믿음을 받습니다.
사람은 믿으려고 해도 믿을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선물로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문에서 문을 열어달라고 노크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면 얼마든지 들어오시는데 열지 않으니 들어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선물을 주는 것은 주는 사람 마음입니다. 주기 싫으면 안 주는 것이고 주고 싶으면 주는 것입니다. 선물을 받는 것은 받는 사람 마음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좋은 선물을 주더라도 내가 거절하면 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마음을 열고 받아드리면 받는 것이고 내가 거절하면 받을 수 없습니다.
2) 말씀을 들을 때 자랍니다.
롬10:17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앗과 같습니다. 씨앗을 뿌리면 때가 되면 열매가 열리듯이 말씀을 들으면 파종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믿음의 싹이 나고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일고 듣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3) 경험을 통해서 더 확실해 집니다.
우리의 육체는 경험하지 않으면 믿지 못합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주님의 능력과 말씀 때문에 주님을 따라다녔지만 확실한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주님과 제자들이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즐거운 결혼식장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물이 좋지 않은 그 지역에서는 포도주가 식수 대신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음식은 있는데 물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큰 문제 아닙니까! 더군다나 결혼식에서는 기쁨을 상징하는 포도주가 모자라는 것은 쿤 문제입니다. 주님은 하인들에게 물을 항아리 아구까지 채우라고 말씀하셨고 하인들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하인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포도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자 놀랍게도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기록된 요2:11에서는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장하는 믿음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주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나옵니다. 무덤 앞에 서신 주님께서 “돌을 옮겨놓으라”고 말씀하시자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주여 죽은지가 이미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뜻은 무덤 문을 연다고 별 뽀족한 수가 없다는 불신앙의 말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40절에 보면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무덤 문을 연 것을 보면 마르다가 주님의 능력을 믿은 것 같습니다. 마르다가 믿은 후에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온 몸을 베로 동인채로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 이 음성을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음성으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