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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주파수 (행3장1-10)
기독교 영성에 관한 책 가운데 "눈을 뜨는 데는 평생이 걸릴 수도 있지만 보는 것은 찰라에 이루어진다." 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눈을 뜬다"고 하는 것은 물론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인생의 의미나 진리를 깨닫기까지 수십 년 또는 평생이 걸릴 수도 있지만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매주일 교회에 오고, 또 매일 매일 성경을 읽는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는 평생이 걸릴 수도 있지만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은 찰라에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보는 것이 찰라에 이루어지고, 깨닫는 것이 찰라에 이루어진다고 해서 저절로 보이게 되고 저절로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눈이 다 볼 수 있고 모든 귀가 다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요즈음 여러분의 눈에 무엇이 잘 보이고 있으며, 여러분의 귀에는 무엇이 잘 들려오고 있습니까? 또한 지금 무엇을 보기를 원하고 무엇을 듣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이 어느 날 한 사람을 동시에 보게 되었을 때 안경가게 주인은 그가 쓴 안경이 눈에 띄게 되고, 신발장수를 하는 사람은 그가 신은 신발이 눈에 띄게 되고, 의상 디자이너는 그가 입은 옷이 먼저 눈에 띄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은 자기의 관심에 따라서 자기의 "주파수"를 맞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요즈음 무엇에 관심이 많으며 자신의 주파수를 어디에 맞추고 있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일에 마음과 생각을 집중하고 있나요? 아니면 앞으로 남은 인생을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믿음의 주파수"를 맞추고 있습니까?
쉬운 예로 우리가 TV에서 무엇을 시청할 때도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으면 그곳으로 채널을 돌려야만 그것을 시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적어도 교회에서 우리의 주파수를 명예를 얻는데, 권력행사를 하는데, 재물 모으는데, 자기 개인의 주도권에 맞춰서는 결단코 안 되고 자신의 영적 성장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역에 섬김과 봉사의 주역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우리의 "믿음의 주파수"를 맞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만난다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복음서에 보면 소경이 예수를 만나면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예수를 만나면 듣게 되며, 문둥병환자가 예수를 만나면 깨끗해지고, 앉은뱅이가 예수를 만나면 일어나 걷게 되고, 귀신들린 자가 예수를 만나면 귀신이 나가고 죽은 사람이 예수를 만나면 살아나 일어났음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읽고 있습니다.
예수를 만나면 이렇게 변화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만난 삶은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삶이 일어나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우리의 삶, 우리의 존재가 180도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서는 이것을 "거듭난다",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인간성" 등등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내용을 반대로 말해서 만약에 우리에게서 아무러한 변화도 없다면 우리는 아직 예수를 만난 것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은혜의 현장
중세시대의 아퀴나스는 "초대교회는 은과 금은 없으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있었는데 그러나 오늘날은 땅, 건물, 사람 즉 은과 금은 우리에게 있으나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은 없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갖가지 장애자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외형적, 신체적 결함을 지니고 불편함을 겪으며 살아가야 하는 육체적 장애자들이 의외로 많지만 실제적으로는 육체적으로는 멀쩡하면서도 심각한 정신적인 결함을 지닌 자들이나, 영적으로 전혀 발육되지 못한 영적인 장애자들이 더 많습니다.
고난은 그 자체가 문제가 된다기보다는 고난이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사람을 소외시키는 현상이 가장 두려운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처한 사람은 고난의 파괴력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며 무력해 집니다. 그 결과 스스로 소외되고 그 가진 귀중한 생명을 고갈시켜 버립니다. 어떻게 하면 생명을 파괴시키는 외로움에서 벗어나 생명을 창조하는 고독으로 전환될 수 있는가? 이것은 바로 고난을 대처하는 첫 번째 선택입니다.
도르테 죌레는 “사람이 고난에 처한 사람들의 대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의 삶이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난에 처해 있을 때 그 사람이 그 문제를 가지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는 하나님, 번영의 신 그리고 자기 자신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겟세마네동산에 올라 홀로 하나님과 대면하였고 엘리야는 홀로 시내 산에 올라 하나님을 대면하였고 야곱은 홀로 얍복 강가에 남아서 하나님과 씨름하였습니다. 그 내용이 원망이든 불평이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외감과 고독 가운데 홀로 남아서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 홀로 대면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고난은 사람을 홀로 두어서 단독 대면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그 방향도 모르고 무작정 달려가는 우리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전령을 보내시기도 합니다. “인생의 참 의미를 찾지 못하는 영혼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유태인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고난 가운데서 누구와 대화하고 있습니까? 번영의 신입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까? 고난을 당한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역할은 미래를 환상적으로 그려내는 화가의 역할이 아니라 어두운 눈을 밝게 하는 안과 의사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어두움과 파괴력의 눈을 갖고 있으면 우리의 눈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눈을 밝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를 향하여서 고개를 들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두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볼 때는 그 십자가에서는 그 어떤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영적인 밝은 빛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원망과 분노와 후회로 들끓어 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모든 것을 주께 의탁하면 그때 비로소 내 귀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것이며 우리 눈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한 앉은뱅이의 위대한 변화를 우리들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이 사람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다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새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 기적적인 놀라운 변화는 또 다른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변화를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운명의 변화, 새로운 삶에로의 대 전환, 이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된 것이었습니다.
은혜는 변화를 말한다
은혜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하나님의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는 내가 달라지는 변화,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근본적으로 새로워집니다. 내 자신이 새로워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새로운 삶이 있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과 하나님의 원하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이 주고 싶은 것과 일치해야 합니다. 교회는 병을 고쳐야 하지만 병원은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전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는 안 되고 이하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교회의 사명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앉은뱅이가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절망하고 좌절하는 인간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분이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분이시고, 죽으셨으나 무덤을 열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 승천하신 분이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통치하시고 사랑과 기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시고 , 심판주로 다시 오실 분이십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절망하는 자에게 소망을 주시고, 질병을 고쳐주시고, 죽어 가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며,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게 하실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에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이 사건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생각을 하면 사람이 움직이지만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움직입니다. 기도하면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영적인 사건을 예비하십니다.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만남은 기도하지 않은 자에게는 우연이지만 기도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계획해서 축복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서 내일이 없고 미래가 없는 모습을 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알았고, 그 이름의 능력을 알았기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사도들의 능력의 현장이 은혜의 사건으로 나타나서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곧 뛰어, 서서 걸으며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동안 그는 성전에서 밥벌이하던 자였지만 그 순간 성전은 새로운 의미입니다. 매일 들어가는 집이 새집이 되기 바랍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이 임재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기쁨이 크리스챤의 기쁨입니다. 이제는 자기를 데려다 줄 사람에 대한 염려가 없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불필요한 두려움과 염려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이 두려움과 염려가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일어나는 순간 이 사람의 염려가 다 사라졌고 이 사람의 과거가 순식간에 다 사라졌습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으면 자기의 수치스러운 과거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창녀였던지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이었든지 하나님을 만난 사람에게는 그 과거가 다 사라져 버리고 수치스러운 과거를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됩니다. 지금의 삶이 너무나 영광스럽기 때문입니다. 현재가 불행하니까 자꾸만 과거를 자랑하게 되는데 마음의 상처도 성령이 충만하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9-10절에 보면 사람들이 놀라기 시작했습니다. 한사람의 변화가 많은 사람 변화를 줍니다. 우리가 변하면 세상이 변하게 되고 은혜를 받으면 과거와 단절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것이 다 용서되고, 사라지고, 잊혀 집니다. 과거가 어두운 만큼 영광도 더 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건은 초대교회의 첫 번째 기적의 사건입니다. 소망도 없고 내일도 없는 자이었으나 소망도 있고 내일도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머무는 곳에 기적이 일어난다.
예수님의 이름이 임하는 곳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가는 곳에 사탄이 두려워 쫓겨 가고 육의 병든 부분이 고침을 받고 마음이 상한 자가 평안을 얻고 낙심된 자가 소망을, 슬픔을 당한 자가 위로를 얻습니다. 미천한 자가 귀해지고, 약한 자가 강해지고, 어두운 곳이 밝아지고, 영원히 죽을 자가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은혜의 초점이 마주칠 때 기적이 일어난다.
여기 이 앉은뱅이는 지나가는 사람을 자세히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손만 내밀고 한 푼만 도와달라고 구걸했지 누가 주고 가는가를 자세히 쳐다보지도 아니했는데 이 때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를 보라하고 쳐다보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앉은뱅이의 눈과 성령 받은 베드로와 요한의 눈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이는 즉 은혜의 초점이 마주친 것입니다. 사진을 찍을 때도 렌즈의 초점이 잘 맞아야 사진이 선명하게 잘 나오지만 초점이 잘 맞지 않으면 사진이 흐릿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은혜를 받는 것도 축복을 받으려면 우리의 마음과 주님의 마음이 똑바로 맞아야 합니다. 시선이 흐트러진 자세는 정신이 흐트러진 상태입니다. 목표 없는 흐트러진 자세, 광적인 태도는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무엇인가에 지나치게 자신의 마음을 모두 빼앗긴 사람을 중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술이나 마약이나 미움이나 증오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사람은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마주치지 못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는 시선과 시선이 마주치면서 마음과 생각을 주고받아야 하는 것처럼 정신이 주님을 향해 집중될 때 주님과의 올바른 만남으로 은혜와 축복과 갖가지의 기적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협력을 할 때 기적이 일어난다.
여기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한 것을 보면 먼저 은혜 받은 자의 도움이 필요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는데 예수님의 이름이 주효했지만 이미 은혜 받은 사람들의 도움이 또한 필요했습니다. 그와 같이 영적으로 불구 된 사람을 일으켜 고치는데도 먼저 믿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없이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전히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된 영적인 불구자입니다. 이들을 온전한 사람, 구원받는 사람으로 만들려면 먼저 은혜 받고 구원 얻은 우리 성도들이 저들에게 주의 이름을 전달하고 오른 손으로 붙잡아 일으키는 역할이 있을 때 생명을 구원해 낼 수가 있습니다. 이는 현대 우리들에게 이 역할이 꼭 필요한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영적으로 불구 된 수많은 앉은뱅이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 사도 같이 저들에게 주의 이름을 주어 일으켜 세우는 사명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앉은뱅이의 무엇이 무엇으로,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수동적인 입장에서 능동적인 입장으로 변화되었다.
이 사람은 날마다 남의 등에 업혀서 성전 미문에 왔습니다. 40평생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나면서부터 장애자였기에 생계를 위해 성전 미문 앞에 오는 것도 다른 사람들의 발에 의해 옮겨져야 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며 괴로움을 주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성전에 왔으나 예배하러 온 것도 아니고, 기도하러 온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닙니다. 성전에 왔으나 성전 안에 들어오지도 않고 성전 밖에서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이 메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남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구걸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기 스스로 걸을 수 있고, 제 힘으로 일할 수 있고, 남을 도와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 구실을 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사도들에 의해 고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오래 되었으나 아직도 다른 사람에게 이끌려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없는지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는지요? 교회에 나오지만 자기 신앙의 힘으로 제 발로 나오지를 못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의지해서 이끌려 나오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요? 이런 사람은 남의 등에 업혀서야 성전에 오던 앉은뱅이 꼴입니다. 여러분, 미문 밖의 앉은뱅이처럼 수동적인 자리에서 능동적인 자리로 신앙이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구걸하던 위치에서 봉사하는 위치로
본문 2절에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라고 했고, 3절에는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루라도 남들에게 구걸하지 않고서는 먹고 살 수 없었습니다. 남들은 자기 능력껏 열심히 일하여 나날의 양식을 벌고 있었지만, 그는 초조하게 사람들의 동정을 바라면서 그들의 불안정한 적선에 의해서 겨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량한 걸인이었습니다. 그는 미문을 구걸 장소로, 기도 시간을 구걸의 기회로 삼고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워야 할 곳을 가장 어둡게 만들고, 아름다운 미문(美問)앞에 아름답지 못한 모습으로 앉아서 불평만 늘어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금밖에 안 준다는 원망과 불평에만 능해졌을 뿐, 많이 받았다는 감사에 둔해진 그야말로 거지근성으로 꽉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구걸을 더 계속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사실 이것만 해도 큰 봉사인 것입니다. 구걸하던 위치에서 봉사하는 위치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미문에서 성전으로
본문 2절에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매일 성전에 오기는 오되 겨우 미문 밖까지밖에 오지 못했는데 이것이 한심한 일입니다. 오지 않으면 모르되 기왕 올 바에야 성전까지 올 일이지 왜 겨우 미문 밖이며, 기왕 빌 바에야 하나님께 매달려 빌 일이지 왜 겨우 무능한 인간들에게 손바닥을 벌리느냐 말입니다. 오늘날도 교회에 나오지만 앉은뱅이와 같이 성전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성전 밖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앉은뱅이는 지금까지 그러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달라진 것입니다. 이제 그는 미문 밖에서 성전으로 들어 왔으며, 사람을 향해서 구걸하던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향해 찬미하는 생활로 변화되었습니다.
자기 요구대로 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불평이나 불만을 품고 하나님을 등지고 교회를 외면하기를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마음에 내키지 않고 , 기대할 것이 없어 보여도 결코 교회를 멀리하거나 떠나지 마시고 여러분의 생활 무대가 교회가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신앙과 생활은 아직도 미문 밖에서 배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미문에서 성전으로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도 앉은뱅이 된 사람처럼 수동적인 자리에서 능동적인 자리로, 구걸하던 위치에서 봉사하는 위치로, 미문에서 성전으로 들어가 새롭게 변화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의 주파수를 새롭게 맞추어 교회생활하면서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하는 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를 만나기 전에 내 욕심만 생각하고 나 중심의 삶을 살았다면 예수를 만난 이후에는 우리라는 중심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할 것이고 예수를 만난 후 우리의 삶은 나 자신을 비우는 그런 겸손의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전에 나의 삶이 거짓과 부정의 삶이었다면 예수를 만난 뒤의 나의 삶은 진실과 의로움과 깨끗한 삶으로 변화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욕망으로 가득한 나로부터 자유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크리스천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자신의 의지와 기질, 기분과 욕망 등을 한쪽으로 젖혀놓고 오직 그리스도의 뜻, 그의 삶만을 수용하며 자기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하나님께 의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은혜 중에 최고의 은혜는 나를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까지 질 수 있는 사명을 찾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진정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은혜는 첫째는 내가 거듭나고 새로워지는 것이고, 두 번째는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한 지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고, 세 번째는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 자신을 드리고 내 자신을 쓰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향해서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발전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은혜의 세계입니다.
출처/서정호목사 설교 중에서
기독교 영성에 관한 책 가운데 "눈을 뜨는 데는 평생이 걸릴 수도 있지만 보는 것은 찰라에 이루어진다." 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눈을 뜬다"고 하는 것은 물론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인생의 의미나 진리를 깨닫기까지 수십 년 또는 평생이 걸릴 수도 있지만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매주일 교회에 오고, 또 매일 매일 성경을 읽는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는 평생이 걸릴 수도 있지만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은 찰라에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보는 것이 찰라에 이루어지고, 깨닫는 것이 찰라에 이루어진다고 해서 저절로 보이게 되고 저절로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눈이 다 볼 수 있고 모든 귀가 다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요즈음 여러분의 눈에 무엇이 잘 보이고 있으며, 여러분의 귀에는 무엇이 잘 들려오고 있습니까? 또한 지금 무엇을 보기를 원하고 무엇을 듣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이 어느 날 한 사람을 동시에 보게 되었을 때 안경가게 주인은 그가 쓴 안경이 눈에 띄게 되고, 신발장수를 하는 사람은 그가 신은 신발이 눈에 띄게 되고, 의상 디자이너는 그가 입은 옷이 먼저 눈에 띄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은 자기의 관심에 따라서 자기의 "주파수"를 맞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요즈음 무엇에 관심이 많으며 자신의 주파수를 어디에 맞추고 있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일에 마음과 생각을 집중하고 있나요? 아니면 앞으로 남은 인생을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믿음의 주파수"를 맞추고 있습니까?
쉬운 예로 우리가 TV에서 무엇을 시청할 때도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으면 그곳으로 채널을 돌려야만 그것을 시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적어도 교회에서 우리의 주파수를 명예를 얻는데, 권력행사를 하는데, 재물 모으는데, 자기 개인의 주도권에 맞춰서는 결단코 안 되고 자신의 영적 성장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역에 섬김과 봉사의 주역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우리의 "믿음의 주파수"를 맞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만난다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복음서에 보면 소경이 예수를 만나면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예수를 만나면 듣게 되며, 문둥병환자가 예수를 만나면 깨끗해지고, 앉은뱅이가 예수를 만나면 일어나 걷게 되고, 귀신들린 자가 예수를 만나면 귀신이 나가고 죽은 사람이 예수를 만나면 살아나 일어났음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읽고 있습니다.
예수를 만나면 이렇게 변화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만난 삶은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삶이 일어나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우리의 삶, 우리의 존재가 180도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서는 이것을 "거듭난다",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인간성" 등등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내용을 반대로 말해서 만약에 우리에게서 아무러한 변화도 없다면 우리는 아직 예수를 만난 것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은혜의 현장
중세시대의 아퀴나스는 "초대교회는 은과 금은 없으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있었는데 그러나 오늘날은 땅, 건물, 사람 즉 은과 금은 우리에게 있으나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은 없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갖가지 장애자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외형적, 신체적 결함을 지니고 불편함을 겪으며 살아가야 하는 육체적 장애자들이 의외로 많지만 실제적으로는 육체적으로는 멀쩡하면서도 심각한 정신적인 결함을 지닌 자들이나, 영적으로 전혀 발육되지 못한 영적인 장애자들이 더 많습니다.
고난은 그 자체가 문제가 된다기보다는 고난이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사람을 소외시키는 현상이 가장 두려운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처한 사람은 고난의 파괴력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며 무력해 집니다. 그 결과 스스로 소외되고 그 가진 귀중한 생명을 고갈시켜 버립니다. 어떻게 하면 생명을 파괴시키는 외로움에서 벗어나 생명을 창조하는 고독으로 전환될 수 있는가? 이것은 바로 고난을 대처하는 첫 번째 선택입니다.
도르테 죌레는 “사람이 고난에 처한 사람들의 대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의 삶이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난에 처해 있을 때 그 사람이 그 문제를 가지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는 하나님, 번영의 신 그리고 자기 자신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겟세마네동산에 올라 홀로 하나님과 대면하였고 엘리야는 홀로 시내 산에 올라 하나님을 대면하였고 야곱은 홀로 얍복 강가에 남아서 하나님과 씨름하였습니다. 그 내용이 원망이든 불평이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외감과 고독 가운데 홀로 남아서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 홀로 대면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고난은 사람을 홀로 두어서 단독 대면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그 방향도 모르고 무작정 달려가는 우리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전령을 보내시기도 합니다. “인생의 참 의미를 찾지 못하는 영혼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유태인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고난 가운데서 누구와 대화하고 있습니까? 번영의 신입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까? 고난을 당한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역할은 미래를 환상적으로 그려내는 화가의 역할이 아니라 어두운 눈을 밝게 하는 안과 의사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어두움과 파괴력의 눈을 갖고 있으면 우리의 눈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눈을 밝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를 향하여서 고개를 들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두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볼 때는 그 십자가에서는 그 어떤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영적인 밝은 빛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원망과 분노와 후회로 들끓어 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모든 것을 주께 의탁하면 그때 비로소 내 귀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것이며 우리 눈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한 앉은뱅이의 위대한 변화를 우리들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이 사람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다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새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 기적적인 놀라운 변화는 또 다른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변화를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운명의 변화, 새로운 삶에로의 대 전환, 이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된 것이었습니다.
은혜는 변화를 말한다
은혜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하나님의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는 내가 달라지는 변화,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근본적으로 새로워집니다. 내 자신이 새로워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새로운 삶이 있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과 하나님의 원하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이 주고 싶은 것과 일치해야 합니다. 교회는 병을 고쳐야 하지만 병원은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전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는 안 되고 이하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교회의 사명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앉은뱅이가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절망하고 좌절하는 인간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분이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분이시고, 죽으셨으나 무덤을 열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 승천하신 분이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통치하시고 사랑과 기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시고 , 심판주로 다시 오실 분이십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절망하는 자에게 소망을 주시고, 질병을 고쳐주시고, 죽어 가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며,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게 하실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에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이 사건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생각을 하면 사람이 움직이지만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움직입니다. 기도하면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영적인 사건을 예비하십니다.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만남은 기도하지 않은 자에게는 우연이지만 기도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계획해서 축복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서 내일이 없고 미래가 없는 모습을 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알았고, 그 이름의 능력을 알았기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사도들의 능력의 현장이 은혜의 사건으로 나타나서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곧 뛰어, 서서 걸으며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동안 그는 성전에서 밥벌이하던 자였지만 그 순간 성전은 새로운 의미입니다. 매일 들어가는 집이 새집이 되기 바랍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이 임재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기쁨이 크리스챤의 기쁨입니다. 이제는 자기를 데려다 줄 사람에 대한 염려가 없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불필요한 두려움과 염려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이 두려움과 염려가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일어나는 순간 이 사람의 염려가 다 사라졌고 이 사람의 과거가 순식간에 다 사라졌습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으면 자기의 수치스러운 과거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창녀였던지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이었든지 하나님을 만난 사람에게는 그 과거가 다 사라져 버리고 수치스러운 과거를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됩니다. 지금의 삶이 너무나 영광스럽기 때문입니다. 현재가 불행하니까 자꾸만 과거를 자랑하게 되는데 마음의 상처도 성령이 충만하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9-10절에 보면 사람들이 놀라기 시작했습니다. 한사람의 변화가 많은 사람 변화를 줍니다. 우리가 변하면 세상이 변하게 되고 은혜를 받으면 과거와 단절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것이 다 용서되고, 사라지고, 잊혀 집니다. 과거가 어두운 만큼 영광도 더 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건은 초대교회의 첫 번째 기적의 사건입니다. 소망도 없고 내일도 없는 자이었으나 소망도 있고 내일도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머무는 곳에 기적이 일어난다.
예수님의 이름이 임하는 곳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가는 곳에 사탄이 두려워 쫓겨 가고 육의 병든 부분이 고침을 받고 마음이 상한 자가 평안을 얻고 낙심된 자가 소망을, 슬픔을 당한 자가 위로를 얻습니다. 미천한 자가 귀해지고, 약한 자가 강해지고, 어두운 곳이 밝아지고, 영원히 죽을 자가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은혜의 초점이 마주칠 때 기적이 일어난다.
여기 이 앉은뱅이는 지나가는 사람을 자세히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손만 내밀고 한 푼만 도와달라고 구걸했지 누가 주고 가는가를 자세히 쳐다보지도 아니했는데 이 때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를 보라하고 쳐다보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앉은뱅이의 눈과 성령 받은 베드로와 요한의 눈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이는 즉 은혜의 초점이 마주친 것입니다. 사진을 찍을 때도 렌즈의 초점이 잘 맞아야 사진이 선명하게 잘 나오지만 초점이 잘 맞지 않으면 사진이 흐릿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은혜를 받는 것도 축복을 받으려면 우리의 마음과 주님의 마음이 똑바로 맞아야 합니다. 시선이 흐트러진 자세는 정신이 흐트러진 상태입니다. 목표 없는 흐트러진 자세, 광적인 태도는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무엇인가에 지나치게 자신의 마음을 모두 빼앗긴 사람을 중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술이나 마약이나 미움이나 증오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사람은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마주치지 못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는 시선과 시선이 마주치면서 마음과 생각을 주고받아야 하는 것처럼 정신이 주님을 향해 집중될 때 주님과의 올바른 만남으로 은혜와 축복과 갖가지의 기적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협력을 할 때 기적이 일어난다.
여기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한 것을 보면 먼저 은혜 받은 자의 도움이 필요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는데 예수님의 이름이 주효했지만 이미 은혜 받은 사람들의 도움이 또한 필요했습니다. 그와 같이 영적으로 불구 된 사람을 일으켜 고치는데도 먼저 믿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없이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전히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된 영적인 불구자입니다. 이들을 온전한 사람, 구원받는 사람으로 만들려면 먼저 은혜 받고 구원 얻은 우리 성도들이 저들에게 주의 이름을 전달하고 오른 손으로 붙잡아 일으키는 역할이 있을 때 생명을 구원해 낼 수가 있습니다. 이는 현대 우리들에게 이 역할이 꼭 필요한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영적으로 불구 된 수많은 앉은뱅이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 사도 같이 저들에게 주의 이름을 주어 일으켜 세우는 사명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앉은뱅이의 무엇이 무엇으로,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수동적인 입장에서 능동적인 입장으로 변화되었다.
이 사람은 날마다 남의 등에 업혀서 성전 미문에 왔습니다. 40평생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나면서부터 장애자였기에 생계를 위해 성전 미문 앞에 오는 것도 다른 사람들의 발에 의해 옮겨져야 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며 괴로움을 주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성전에 왔으나 예배하러 온 것도 아니고, 기도하러 온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닙니다. 성전에 왔으나 성전 안에 들어오지도 않고 성전 밖에서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이 메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남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구걸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기 스스로 걸을 수 있고, 제 힘으로 일할 수 있고, 남을 도와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 구실을 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사도들에 의해 고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오래 되었으나 아직도 다른 사람에게 이끌려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없는지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는지요? 교회에 나오지만 자기 신앙의 힘으로 제 발로 나오지를 못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의지해서 이끌려 나오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요? 이런 사람은 남의 등에 업혀서야 성전에 오던 앉은뱅이 꼴입니다. 여러분, 미문 밖의 앉은뱅이처럼 수동적인 자리에서 능동적인 자리로 신앙이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구걸하던 위치에서 봉사하는 위치로
본문 2절에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라고 했고, 3절에는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루라도 남들에게 구걸하지 않고서는 먹고 살 수 없었습니다. 남들은 자기 능력껏 열심히 일하여 나날의 양식을 벌고 있었지만, 그는 초조하게 사람들의 동정을 바라면서 그들의 불안정한 적선에 의해서 겨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량한 걸인이었습니다. 그는 미문을 구걸 장소로, 기도 시간을 구걸의 기회로 삼고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워야 할 곳을 가장 어둡게 만들고, 아름다운 미문(美問)앞에 아름답지 못한 모습으로 앉아서 불평만 늘어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금밖에 안 준다는 원망과 불평에만 능해졌을 뿐, 많이 받았다는 감사에 둔해진 그야말로 거지근성으로 꽉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구걸을 더 계속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사실 이것만 해도 큰 봉사인 것입니다. 구걸하던 위치에서 봉사하는 위치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미문에서 성전으로
본문 2절에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매일 성전에 오기는 오되 겨우 미문 밖까지밖에 오지 못했는데 이것이 한심한 일입니다. 오지 않으면 모르되 기왕 올 바에야 성전까지 올 일이지 왜 겨우 미문 밖이며, 기왕 빌 바에야 하나님께 매달려 빌 일이지 왜 겨우 무능한 인간들에게 손바닥을 벌리느냐 말입니다. 오늘날도 교회에 나오지만 앉은뱅이와 같이 성전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성전 밖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앉은뱅이는 지금까지 그러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달라진 것입니다. 이제 그는 미문 밖에서 성전으로 들어 왔으며, 사람을 향해서 구걸하던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향해 찬미하는 생활로 변화되었습니다.
자기 요구대로 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불평이나 불만을 품고 하나님을 등지고 교회를 외면하기를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마음에 내키지 않고 , 기대할 것이 없어 보여도 결코 교회를 멀리하거나 떠나지 마시고 여러분의 생활 무대가 교회가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신앙과 생활은 아직도 미문 밖에서 배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미문에서 성전으로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도 앉은뱅이 된 사람처럼 수동적인 자리에서 능동적인 자리로, 구걸하던 위치에서 봉사하는 위치로, 미문에서 성전으로 들어가 새롭게 변화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의 주파수를 새롭게 맞추어 교회생활하면서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하는 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를 만나기 전에 내 욕심만 생각하고 나 중심의 삶을 살았다면 예수를 만난 이후에는 우리라는 중심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할 것이고 예수를 만난 후 우리의 삶은 나 자신을 비우는 그런 겸손의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전에 나의 삶이 거짓과 부정의 삶이었다면 예수를 만난 뒤의 나의 삶은 진실과 의로움과 깨끗한 삶으로 변화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욕망으로 가득한 나로부터 자유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크리스천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자신의 의지와 기질, 기분과 욕망 등을 한쪽으로 젖혀놓고 오직 그리스도의 뜻, 그의 삶만을 수용하며 자기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하나님께 의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은혜 중에 최고의 은혜는 나를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까지 질 수 있는 사명을 찾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진정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은혜는 첫째는 내가 거듭나고 새로워지는 것이고, 두 번째는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한 지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고, 세 번째는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 자신을 드리고 내 자신을 쓰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향해서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발전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은혜의 세계입니다.
출처/서정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