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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사는사람 (느헤미야1:3-5)
알렉산더 대왕이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후, 자신을 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참모들에게 소원하는 바를 한가지씩 들어주겠다 했습니다. 전쟁에 지친 참모들은 편히 쉴 수 있는 휴가와 고향을 방문할 경비 등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또 집 한 채 마련해 줄 것을 희망하기도 했습니다. 그 가운데 데닉이라는 참모는 “대왕이시여, 대왕이 정복하신 나라들 중에 하나를 내게 허락하여주십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뜻밖의 당돌한 제안에 다른 참모들은 놀랐습니다. 알렉산더 대왕도 조금 움찔했으나 곧이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라 하나를 그대에게 주겠소. 그대는 나 알렉산더가 나라 하나라도 뚝 떼어줄 수 있을 만한 큰 사람으로 믿었기에 호의를 베푸는 바이오.”
믿음은 삶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믿음은 거세게 밀려오는 운명에 맞설 힘을 주는 창조적인 에너지입니다. 자기 운명과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당대에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느헤미야가 여러 사람의 방해를 실패로 만들고 불가능 했던 예루살렘 성을 52일만에 쌓을 수 있었던 힘, 그리고 건축을 통해 이스라엘의 영적 도덕적 역사적 흐름을 바꿀 수 있었던 힘도 믿음에서 나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느헤미야 믿음의 특징은 하나님을 믿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잘 아는 믿음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믿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첫째 느헤미야가 믿었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었습니다.
5절 처음 부분,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이여’라는 기도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뜻은 물질적이고 인간적인 신과 구별되는 절대적인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을 통치하시고 주관하시며 인간사를 섭리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비단 느헤미야의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고백이었습니다.
신명기 7장 21절에 보면, 가나안을 정복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민족이 보기에 가나안 족속들은 크고 강대해 도무지 그 땅을 정복할만한 힘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일깨워 주십니다.
그들을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운 여호와가 너의 중에 계시는도다. 이스라엘 민족은 곧 힘과 용기를 얻어 하나님을 믿고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현실을 파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허황된 꿈을 좇는 사람이 아니라 백성들이 어떤 어려움 가운데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과 800마일이나 떨어져 있었고 도와줄 수 있는 현실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엿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아야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외면당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생각을 넘어선 하나님, 자신의 물질을 넘어선 하나님, 자신의 지혜를 넘어서는 하나님, 천지를 주관하시고 운영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냅니다. 그래서 느혜미야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갑니다.
앞에 닥친 문제가 아무리 크고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능히 해결하실 수 있음을 믿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무너진 채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살아가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다시 설 힘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다시 바라봐야 합니다. 느헤미야처럼 절망할 순간에 그 일을 능히 감당할 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문제가 아무리 크고 해결이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내가 믿는 하나님이 문제보다 크시고, 능히 다스리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만 변함 없다면 문제는 더 이상 크지 않습니다.
태풍 가운데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베드로는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를 명하여 물위를 걷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말 속에는 자연을 통치하시는 전지전능의 신, 베드로를 명하여 인생의 물위를 걷게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물 위를 걸으라 하셨을 때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좀 전까지만 해도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던 베드로는 태풍이 몰아치고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보고 태풍이 크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물 위를 걸어갈 수 없었습니다. 파도가 두렵게 느껴졌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의 시선에서 떠나버리기 시작했을 때 물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문제가 커서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이 문제입니다. 만약 인간의 한계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이라면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하나님은 사귐과 이해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을 뛰어 넘는 하나님, 절박한 문제 앞에서 해결할 방법을 가지고 계시는 지혜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다시 찾는다면, 오늘 느헤미야에게 있었던 기적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믿음으로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둘째로, 느헤미야는 약속을 지키시는‘언약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본문에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삶의 환경만 보면 희망이 보이지 않고 삶을 영위할 만한 힘도 없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 하나님 주신 약속을 붙들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면 약속은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희망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라는 사실, 한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는 분이라는 사실이 느헤미야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주님 앞에 나가 강렬하게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나라를 바벨론에게 빼앗겨버리고 어려움은 당함는 것은 하나님과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겪는 것임을 고백하며, 하나님과의 약속을 다시 회복한다면 원래 모습을 회복시켜 주시리라 믿고 간구합니다.
신명기 7장에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겠다는 약속, 죄 가운데 두지 않고 하나님 자녀 삼으셔서 고아와 과부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설교를 듣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도행전 2장 39절에서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여기에 있는 약속의 대상에는 저와 여러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약속은 누구든지 주를 붙들고 의지하며 주께 나아가는 자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베드로는 약속대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약속대로 하나님께 다시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약속대로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떤 죄, 어떤 절망, 어떤 필요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구원의 약속을 붙들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의 희망입니다. 성도들은 절망에 바지지 않고 낙심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낙심되고 절망가운데 처할때ㅑ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일어서는 사람들입니다
존 번연이 지은 ‘천로역정’을 보면 그리스도인과 희망이라는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절망이라는 거인에게 잡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인이 두 사람을 잡아다가 의혹의 성 깊은 지하실에 가두어 버립니다. 빠져나갈 길 없는 막막한 현실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인이 가슴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냅니다. 바로 약속이라는 열쇠였습니다. 시험 삼아 육중한 문을 열어보니 문이 열립니다. 그가 의혹의 성을 통과할 때마다 이 열쇠는 나아갈 길을 만들어 주었고 결국 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거인은 그만 분노로 발작하며 죽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견고하게 닫혀 열 수 없는 절망의 성 앞에서 의심하며 낙심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약속을 기억해야 합니다. 약속을 믿고 주장하며 약속대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희망 없는 현실에서 하나님 약속이 이행될 것을 믿고 담대하게 기도하는 느헤미야처럼 어려운 현실,답답한 현실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다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느헤미야는 긍휼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본문 마지막 부분에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나라를 빼앗겨버렸고 수도예루살렘은 황폐케되어 들짐승들이 사납게 울부짖는 폐허가된 성입니다 이렇게 무너져 내리고 백성들은 기아와 빈곤으로 강제동원된 억압과 착취속에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원망을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탄식하고 낙심에 바져버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문제를 구경만 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아파하시고 동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고백을 하고 잇습니다. NLT 영어성경에 긍휼의 하나님을 ‘Unfailing Love’(언 파일링 러브)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Unfailing’은 ‘없어지지 않는, 끝없는, 변하지 않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확실한’ 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없어지지 않는 사랑, 끝이 보이지 않는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면 끝까지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기대해도 어긋남이 없는 확실한 사랑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나 하나님에게만 사용되었던 표현으로12번 나오는데, ‘긍휼로 마음을 움직여서’라는 뜻인 스프랑크 니조마이’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스프랑크라는 말은 ‘내장’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사람의 내장 속에 감정의 깊은 것과 속내가 모두 담겨 있다고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긍휼이 여기신다는 말은 주님의 가장 깊은 내면, 가장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곳까지 다다른 하나님의 자녀들이 느끼는 아픔과 고통으로 우리 아픔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긍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카밈’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자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향해 마음을 움직이실 때에 하나님의 자궁인 깊은 곳까지 움직이시고 요동하시는 분임을 뜻합니다.
주님의 긍휼이 얼마나 깊고 강력한 감정인지 하나님의 자궁이 움직인다는 식으로 밖에는 표현이 안 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하나님의 여러 모습 중에서도 긍휼하신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헨리 나우웬과 두 친구가 정치에서는 긍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듣기 위해서 어느 날 미국 부통령을 지낸 허버트 험프리 의원을 찾아갔습니다. 의원이 끝에 조그마한 지우개가 달려있는 연필을 집어 들면서 말했습니다. “긍휼이라는 것은 이 지우개와 같은 것입니다. 글을 쓰다 잘못 쓰면 그때 사용하는 것이지요. 좀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긍휼이란 실패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긍휼은 인생의 경쟁에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은 헨리 나우웬은 인간의 속성 중에는 긍휼이란 없다고 했습니다. 긍휼은 인간의 속성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처럼 너희도 자비하라. 아버지의 긍휼하심과 같이 긍휼하라. 긍휼이 없는 자는 긍휼이 없는 심판으로 내가 너희를 대하리라’맞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긍휼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긍휼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보고 그냥 지나가지 않으시고 우리 죄를 공감하시며 자신의 아픔처럼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나서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먼저 구원의 방법을 펼쳐 보이신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백성의 비참하고 고통스런 마음만큼 동참하실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불가능한 일을 요청합니다. “하나님, 이 백성의 성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기도는 강렬했으며 지속적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애가를 통해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되오나 중심에 회상한 즉 오히려 소망이 있음을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도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끝이 없으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라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이미 무너져 절망의 잡초만 무성하지는 않습니까? 민족의 상황도 다를바 없이 낙담만 가득한 것은 아닙니까? 어떤 변화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생각만 했지, 불가능 할 것이라 포기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느혜미야가 믿고 우리들이 믿고있는 전지전능한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나를 도와줄 능력과 마음을 갖고 계신 그 하나님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십시요, 우리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죄를 짓고 어떤 상황 속에 있든지 구원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요, 우리의 죄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분이시기에 십자가에서 죄를 대속하신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주님을 다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에 느헤미야가 세웠던 기적이 우리를 통해서 다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출처/서재중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후, 자신을 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참모들에게 소원하는 바를 한가지씩 들어주겠다 했습니다. 전쟁에 지친 참모들은 편히 쉴 수 있는 휴가와 고향을 방문할 경비 등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또 집 한 채 마련해 줄 것을 희망하기도 했습니다. 그 가운데 데닉이라는 참모는 “대왕이시여, 대왕이 정복하신 나라들 중에 하나를 내게 허락하여주십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뜻밖의 당돌한 제안에 다른 참모들은 놀랐습니다. 알렉산더 대왕도 조금 움찔했으나 곧이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라 하나를 그대에게 주겠소. 그대는 나 알렉산더가 나라 하나라도 뚝 떼어줄 수 있을 만한 큰 사람으로 믿었기에 호의를 베푸는 바이오.”
믿음은 삶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믿음은 거세게 밀려오는 운명에 맞설 힘을 주는 창조적인 에너지입니다. 자기 운명과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당대에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느헤미야가 여러 사람의 방해를 실패로 만들고 불가능 했던 예루살렘 성을 52일만에 쌓을 수 있었던 힘, 그리고 건축을 통해 이스라엘의 영적 도덕적 역사적 흐름을 바꿀 수 있었던 힘도 믿음에서 나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느헤미야 믿음의 특징은 하나님을 믿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잘 아는 믿음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믿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첫째 느헤미야가 믿었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었습니다.
5절 처음 부분,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이여’라는 기도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뜻은 물질적이고 인간적인 신과 구별되는 절대적인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을 통치하시고 주관하시며 인간사를 섭리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비단 느헤미야의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고백이었습니다.
신명기 7장 21절에 보면, 가나안을 정복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민족이 보기에 가나안 족속들은 크고 강대해 도무지 그 땅을 정복할만한 힘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일깨워 주십니다.
그들을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운 여호와가 너의 중에 계시는도다. 이스라엘 민족은 곧 힘과 용기를 얻어 하나님을 믿고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현실을 파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허황된 꿈을 좇는 사람이 아니라 백성들이 어떤 어려움 가운데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과 800마일이나 떨어져 있었고 도와줄 수 있는 현실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엿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아야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외면당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생각을 넘어선 하나님, 자신의 물질을 넘어선 하나님, 자신의 지혜를 넘어서는 하나님, 천지를 주관하시고 운영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냅니다. 그래서 느혜미야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갑니다.
앞에 닥친 문제가 아무리 크고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능히 해결하실 수 있음을 믿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무너진 채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살아가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다시 설 힘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다시 바라봐야 합니다. 느헤미야처럼 절망할 순간에 그 일을 능히 감당할 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문제가 아무리 크고 해결이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내가 믿는 하나님이 문제보다 크시고, 능히 다스리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만 변함 없다면 문제는 더 이상 크지 않습니다.
태풍 가운데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베드로는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를 명하여 물위를 걷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말 속에는 자연을 통치하시는 전지전능의 신, 베드로를 명하여 인생의 물위를 걷게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물 위를 걸으라 하셨을 때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좀 전까지만 해도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던 베드로는 태풍이 몰아치고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보고 태풍이 크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물 위를 걸어갈 수 없었습니다. 파도가 두렵게 느껴졌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의 시선에서 떠나버리기 시작했을 때 물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문제가 커서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이 문제입니다. 만약 인간의 한계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이라면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하나님은 사귐과 이해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을 뛰어 넘는 하나님, 절박한 문제 앞에서 해결할 방법을 가지고 계시는 지혜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다시 찾는다면, 오늘 느헤미야에게 있었던 기적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믿음으로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둘째로, 느헤미야는 약속을 지키시는‘언약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본문에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삶의 환경만 보면 희망이 보이지 않고 삶을 영위할 만한 힘도 없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 하나님 주신 약속을 붙들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면 약속은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희망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라는 사실, 한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는 분이라는 사실이 느헤미야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주님 앞에 나가 강렬하게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나라를 바벨론에게 빼앗겨버리고 어려움은 당함는 것은 하나님과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겪는 것임을 고백하며, 하나님과의 약속을 다시 회복한다면 원래 모습을 회복시켜 주시리라 믿고 간구합니다.
신명기 7장에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겠다는 약속, 죄 가운데 두지 않고 하나님 자녀 삼으셔서 고아와 과부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설교를 듣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도행전 2장 39절에서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여기에 있는 약속의 대상에는 저와 여러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약속은 누구든지 주를 붙들고 의지하며 주께 나아가는 자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베드로는 약속대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약속대로 하나님께 다시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약속대로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떤 죄, 어떤 절망, 어떤 필요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구원의 약속을 붙들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의 희망입니다. 성도들은 절망에 바지지 않고 낙심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낙심되고 절망가운데 처할때ㅑ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일어서는 사람들입니다
존 번연이 지은 ‘천로역정’을 보면 그리스도인과 희망이라는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절망이라는 거인에게 잡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인이 두 사람을 잡아다가 의혹의 성 깊은 지하실에 가두어 버립니다. 빠져나갈 길 없는 막막한 현실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인이 가슴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냅니다. 바로 약속이라는 열쇠였습니다. 시험 삼아 육중한 문을 열어보니 문이 열립니다. 그가 의혹의 성을 통과할 때마다 이 열쇠는 나아갈 길을 만들어 주었고 결국 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거인은 그만 분노로 발작하며 죽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견고하게 닫혀 열 수 없는 절망의 성 앞에서 의심하며 낙심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약속을 기억해야 합니다. 약속을 믿고 주장하며 약속대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희망 없는 현실에서 하나님 약속이 이행될 것을 믿고 담대하게 기도하는 느헤미야처럼 어려운 현실,답답한 현실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다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느헤미야는 긍휼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본문 마지막 부분에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나라를 빼앗겨버렸고 수도예루살렘은 황폐케되어 들짐승들이 사납게 울부짖는 폐허가된 성입니다 이렇게 무너져 내리고 백성들은 기아와 빈곤으로 강제동원된 억압과 착취속에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원망을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탄식하고 낙심에 바져버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문제를 구경만 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아파하시고 동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고백을 하고 잇습니다. NLT 영어성경에 긍휼의 하나님을 ‘Unfailing Love’(언 파일링 러브)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Unfailing’은 ‘없어지지 않는, 끝없는, 변하지 않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확실한’ 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없어지지 않는 사랑, 끝이 보이지 않는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면 끝까지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기대해도 어긋남이 없는 확실한 사랑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나 하나님에게만 사용되었던 표현으로12번 나오는데, ‘긍휼로 마음을 움직여서’라는 뜻인 스프랑크 니조마이’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스프랑크라는 말은 ‘내장’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사람의 내장 속에 감정의 깊은 것과 속내가 모두 담겨 있다고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긍휼이 여기신다는 말은 주님의 가장 깊은 내면, 가장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곳까지 다다른 하나님의 자녀들이 느끼는 아픔과 고통으로 우리 아픔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긍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카밈’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자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향해 마음을 움직이실 때에 하나님의 자궁인 깊은 곳까지 움직이시고 요동하시는 분임을 뜻합니다.
주님의 긍휼이 얼마나 깊고 강력한 감정인지 하나님의 자궁이 움직인다는 식으로 밖에는 표현이 안 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하나님의 여러 모습 중에서도 긍휼하신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헨리 나우웬과 두 친구가 정치에서는 긍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듣기 위해서 어느 날 미국 부통령을 지낸 허버트 험프리 의원을 찾아갔습니다. 의원이 끝에 조그마한 지우개가 달려있는 연필을 집어 들면서 말했습니다. “긍휼이라는 것은 이 지우개와 같은 것입니다. 글을 쓰다 잘못 쓰면 그때 사용하는 것이지요. 좀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긍휼이란 실패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긍휼은 인생의 경쟁에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은 헨리 나우웬은 인간의 속성 중에는 긍휼이란 없다고 했습니다. 긍휼은 인간의 속성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처럼 너희도 자비하라. 아버지의 긍휼하심과 같이 긍휼하라. 긍휼이 없는 자는 긍휼이 없는 심판으로 내가 너희를 대하리라’맞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긍휼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긍휼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보고 그냥 지나가지 않으시고 우리 죄를 공감하시며 자신의 아픔처럼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나서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먼저 구원의 방법을 펼쳐 보이신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백성의 비참하고 고통스런 마음만큼 동참하실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불가능한 일을 요청합니다. “하나님, 이 백성의 성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기도는 강렬했으며 지속적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애가를 통해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되오나 중심에 회상한 즉 오히려 소망이 있음을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도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끝이 없으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라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이미 무너져 절망의 잡초만 무성하지는 않습니까? 민족의 상황도 다를바 없이 낙담만 가득한 것은 아닙니까? 어떤 변화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생각만 했지, 불가능 할 것이라 포기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느혜미야가 믿고 우리들이 믿고있는 전지전능한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나를 도와줄 능력과 마음을 갖고 계신 그 하나님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십시요, 우리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죄를 짓고 어떤 상황 속에 있든지 구원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요, 우리의 죄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분이시기에 십자가에서 죄를 대속하신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주님을 다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에 느헤미야가 세웠던 기적이 우리를 통해서 다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출처/서재중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