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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선택 (마27:11~26)
우리 인생은 선택과 그 결과로 만들어져 갑니다. 물론 우리 인생에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부모, 성별, 인종, ... 그러나 그 외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닥치는 것들은 얼마든지 우리가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의식주 문제, 진학 문제, 취직 문제, 결혼 문제, 심지어는 신앙 문제조차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이런 문제들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적어도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선택의 문제들인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 앞에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됩니다. 선택은 우리의 권리인 동시에 책임입니다. 선택할 수 있는 기회와 자유 의지를 부여받았다는 점에서는 권리이고, 그 결과를 떠안아야 된다는 점에서는 책임입니다. 이 선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런데 선택의 과정이 말처럼 그리 쉽지 않습니다. 특히 예상치 못한 문제가 갑자기 닥쳐오면 난감해지기도 하고, 얼떨결에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사소한 문제라면 잘못된 선택을 해도 대수롭지 않겠지만, 중요한 문제의 경우라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집에 불이 났답니다. 그 집 여주인이 겁에 질려 혼자 뛰쳐나왔다가 갑자기 불 속으로 용감하게 뛰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귀금속이 든 상자를 안고 나옵니다. “휴, 이제 살았다. 귀고리, 목걸이, 팔찌, 보석을 다 찾았다. 천만다행이네.” 그런데 얼마 뒤 사람들이 소리칩니다. “여보세요! 저기 창가에 아이들이 있어요.”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여주인은 발을 동동 구르며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그 아이들은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순간 올바른 선택으로 아이들을 구했다면 평생 가슴의 상처를 안고 후회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큰일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역사 상 가장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당시 로마 총독 빌라도, 그리고 유대인들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최악의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들의 인생은 돌이킬 수 없는 큰 비극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오늘 이 시간 그들의 잘못된 선택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우리 인생길에 지혜로운 선택을 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선택으로 인해 늘 승리와 축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최악의 선택을 한 사람들 : 빌라도와 유대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특별히 이스라엘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거부 하고 배척하고 핍박하였습니다.
① 잘못된 선택 :
예수님이 말씀을 전파하시고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자 일반 대중들은 예수님을 환영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유대인 중에서 특히 기득권을 가진 대제사장과 장로 등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오해하고 시기합니다. 그런 나쁜 감정이 쌓이고 쌓이다가 마침내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심을 합니다. 그들은 당시 이스라엘 국회에 해당되는 산헤드린 공회를 밤중에 급히 소집합니다. 물론 불법이죠. 그리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사칭했다며 신성모독죄로 사형을 결의합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어느 정도 자치권을 보장받기는 했지만, 사형 선고권과 사형 집행권은 갖지 못했습니다. 고민하던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부리나케 예수님을 이끌고 빌라도에게 갑니다. 그리고 사형시켜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그들이 덮어씌운 죄목을 바꿨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로마 법 상으로 신성모독죄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활하게도 사형죄에 해당하는 국가반역죄로 죄목을 바꾸게 된 겁니다.
하지만 빌라도가 아무리 예수님을 심문해 봐도 죄를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석방하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군중들을 충동질시켜 빌라도에게 항의합니다. 총독으로서는 식민지 백성들이 소란을 피우면 골치 아픕니다. 잘못되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고, 심한 경우 총독 자리에서 파면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그는 타협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합니다. 그 일련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을 잘 보면, 빌라도가 석방하려고 자기 나름대로는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무죄한 사람을 유죄로 선고한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결국 유대인들과 타협하고 맙니다. 그 과정을 잠시 살펴봅니다.
15절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사면하려고 합니다. 당시에는 유대인의 명절 때 백성들이 요구하는 죄수 한 명을 사면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이용해서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라바라는 죄수를 내세웁니다. 바라바는 열심당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로마에 반역행위를 하고 살인죄를 지어 십자가 사형에 선고된 악명 높은 인물입니다. 빌라도는 내심 유대인들이 설마 그런 바라바를 사면시키라고 요구하지는 못하겠지 하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사면시키라고 요구합니다.
한편 19절을 보면, 빌라도의 아내가 사람을 시켜 메시지를 전합니다. 꿈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이 의인이니까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겁니다. 전승(傳承)에 의하면 그 부인은 클라우디아 프로크라라는 여인인데, 예루살렘에 온 이후 유대교로 개종하였고, 은밀하게 예수님을 믿던 여인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전승의 신빙성이 확실치 않더라도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죄 없는 분임을 그 여인도 잘 알고 증거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을 듣고 빌라도가 타협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계속 예수를 못 박으라고 난리를 칩니다. 22절~23절 보면, 소란이 점점 커져서 이제는 아예 민란 직전의 상황까지 갔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슬그머니 타협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24절 보면, 손을 씻으며 자신은 전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제스처는 유대인의 관습으로 자신은 죄가 없고, 아무 책임도 없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책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자기가 재판관인데 책임을 모면할 수 있나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빌라도는 천추에 씻을 수 없는 큰 죄악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유대인들의 태도입니다. 빌라도가 이렇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자 유대인들은 얼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할 욕심으로 무서운 말을 내뱉습니다.
25절 말씀입니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 ” 기가 막힌 말입니다. 자신들과 후손들이 책임질 테니까 빨리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기나 하라는 겁니다. 말이 싸가 되는데 그렇게 함부로 말한 겁니다. 빌라도도, 유대인들도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쳐 놓고 살인강도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 최악의 선택이었습니다.
② 선택의 결과 :
빌라도는 제 딴에는 아무 죄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결코 그 책임을 모면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무서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수년 후 로마 중앙 정부의 소환 명령을 받고 고민하다가 자살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를 보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는 자살로써 자기 스스로를 심판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그를 무섭게 뒤쫓았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눈앞에서 직접 뵐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런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직접 심문하면서 예수님이 죄가 없을 뿐 아니라 아주 기이한 분임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일 그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고 영접했다면, 최소한 타협하지 않고 공의를 지켰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이 다른 방식으로 인류를 구원하셨겠죠. 어쨌든 너무 안타깝게도 그는 자살함으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영원한 지옥 형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역사 상 두고두고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앞으로 인류 역사가 종말을 고할 때까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그의 죄악이 만천하에 정죄될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 ” 이렇게 그와 그의 후손들은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또 유대인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말대로 됐습니다. AD 70년 디도(Titus) 장군의 로마 군대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당시 명절에 모인 유대인 들 중 110만 명이 학살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도 그 숫자면 대도시인데, 그 고대에 그렇게 많은 수가 학살당한 것은 엄청난 비극입니다. 그 후 그들은 오랜 세월 각 나라에 흩어져 유랑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 근세에는 나치 독일에 의해 6백만 명이나 학살을 당합니다. 이스라엘은 역사 상 가장 비참한 일을 당한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그들이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는 돌아오겠지만 아직도 강퍅하게 버티고 있는 그들은 여전히 고난 중에 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세계의 대표적인 분쟁 지역이요 화약고입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와 유대인들은 그 중요한 순간에 최악의 선택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두고두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성경적, 역사적 진리를 기억하면서 우리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늘 조심하고 근신해야 합니다.
[2] 최선의 선택 : 믿음의 선진들과 우리들의 모습
빌라도와 유대인들의 최악의 선택은 우리에게 타산지석이 됩니다. 우리는 최악이 선택이 아닌 최선의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선택하고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지 살펴봅니다.
① 세상보다 예수님을 선택하기 :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은 일생일대에 최선의 선택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것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영생과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을 둘로 나눕니다. 십자가를 믿는 자는 천국 백성, 십자가를 거부하는 자는 지옥 백성이 됩니다. 요3:16~1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신앙적 선택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 선택으로 인해 인생의 영원한 운명이 갈라집니다. 영영 만날 수 없는 길로 갈라지게 됩니다. 백두산 꼭대기에 천지가 있습니다. 물이 하나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동쪽으로, 서쪽으로 갈라져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동쪽은 두만강을 거쳐 동해로 흘러갑니다. 서쪽은 압록강을 거쳐 서해로 흘러갑니다. 똑같은 곳에 있던 물이 이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각각 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을 선택함으로 영생과 천국을 얻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② 순간의 이익보다 영원한 가치를 선택하기 :
사람들은 육적인 존재이므로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이익만 추구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눈앞에 보이는 것보다 영원한 것, 육신의 것보다 영적인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 사실을 명심하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됩니다. 고후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③ 불의한 이익보다 의로운 고난을 선택하기 :
우리는 연약한 존재인지라 고난 받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편하자고 이익을 보겠다고 불의를 행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장은 이익을 보는 것 같지만 두고두고 후회되는 일이요 크게 손해 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를 위한 고난을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하늘의 상을 받는 지름길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마5:10~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④ 넓은 길보다 좁은 길을 선택하기 :
사람들에게는 군중 심리라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우르르 몰려가면 무조건 거기에 뭐가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간다고, 넓은 길이라도 무조건 바른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좁은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마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성경에 이런 선택으로 승리한 믿음의 선진들이 수두룩합니다. 특히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실 때 얼마든지 십자가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를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죽음이었지만 그 후에 부활이 있었고, 승천과 하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존재가 그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주(主)로 고백하게 된 것은 최고의 승리입니다.(빌2:5~11 참조)
모세는 애굽 궁궐의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광야의 고난을 선택했습니다.(히11:24~25) 그러나 그것은 역시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모세는 구약 시대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고, 아마 우리가 천국에 가면 그의 영광에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자 사자 굴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털끝 하나 상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대제국의 1등 총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풀무 불을 선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을 머리털 하나 그슬리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좋은 조건들을 배설물처럼 다 포기하고 예수님을 아는 복음의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러한 선택에 주님께서 반드시 의의 면류관을 예비해 주셨음을 확신했습니다.(딤후4:7~8 참조)
성경 외에도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의 간증이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프랑스의 화가 밀레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본래 누드 화가였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전시회를 열었는데, 한 그림 앞에서 청년들이 킬킬거리며 음담패설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예술을 한다며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민 끝에 누드화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들의 마음을 순화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림만 그리기로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돈을 포기하는 선택이었습니다. 그의 부인도 적극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는 빈곤했지만 그로 말미암아 역사에 남는 화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선택이 위대한 인생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석유 왕 록펠러를 아시죠? 그의 인생에 관한 미담이 많이 있지만, 한 마디로 표현하면 기적의 생애였습니다. 그의 인생에는 대표적인 3대 기적이 있었습니다. 가장 가난했던 사람이 가장 큰 부자가 된 것, 가장 많은 돈을 남에게 나눠준 것, 그리고 98세까지 건강 장수한 것등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적들은 그의 신앙적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주일은 철저하게 지킬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주일학교 교사 등으로 봉사하면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성결을 지킬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술과 담배를 일절 입에 대지 않았고, 춤 방에 드나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매일 성경 읽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말년에 눈의 피로를 느끼자 심지어 성경 읽어주는 비서를 채용할 정도로 철저했습니다. 역시 위대한 선택이 위대한 인생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나의 오늘의 삶은 어제까지 나의 선택의 결과입니다. 오늘 내 모습이 만족스럽다면 좋은 선택을 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혹 내 모습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잘못된 선택을 하며 살아온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나의 내일의 모습이 어떻게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오늘 매 순간 순간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올바른 선택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이 사순절에 십자가를 묵상하시고, 그 가운데 지혜로운 선택의 비결을 터득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무쪼록 늘 최선의 선택으로 최선의 미래를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선택은 위대한 인생을 만든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출처/홍문수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