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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이 선택한 에덴동산 (창 13:1 - 13)
돈 버는 것을 생의 목적으로 삼고 돈만 있으면 모든 행복이 다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돈을 번 부자가 있었습니다. 소원대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많은 돈을 두고 갈 생각을 하니 너무 너무 마음이 아파서 이걸 어떻게 할까 하다가 남은 얼마라도 가지고 가야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죽은 다음에 관속에 누가 돈을 넣어 줄 수 있을까……. 그걸 믿을 수가 없어서 많이 생각 하다가 세 사람을 지목했습니다. 목사, 의사, 변호사, ‘세 사람 중에 하나는 제대로 해 주겠지.’ 하고 세 사람을 불러서 백만 불씩을 주고 현금을 주고 “내가 죽은 다음에 장례식 날 관에다가 이거 좀 넣어주구려…….”그래요. “그러시죠.” 세 사람이 약속을 했습니다. 장례식 날이 되어서 정말 세 사람이 나아가서 관 뚜껑을 열고 거기다가 돈을 넣었습니다. 뚜껑을 닫아서 장례식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목사님이 좀 마음이 괴롭다고 참회를 했습니다. “사실은 제가 십일조를 떼었거든요?” 그게 좀 마음에 걸린다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의사는 말하기를 “내가 지금 병원을 짓다가 돈이 모자라서 좀 기왕에 좋은 일 하시라고 제가 50만 불을 땠습니다.” 그랬더니 변호사가 펄쩍 뛰면서 “아니, 그게 어떤 유언이요 어떤 돈인데 그걸 때느냐”고. “나는 전액을 다 관에다 넣었노라. 그런데 현금은 내가 가지고 자기앞 수표를 써서 딱 넣었노라.” 그랬다 그래요. 여러분 생각하는 바가 많습니다. 못 가지고 갑니다. 그건 얼마나 비참한 이야기입니까? 사람은 어쨌건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그게 인간의 특징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의 결과. 내 운명을 내가 선택합니다. 거기에 중요한 삶의 의미가 있어요. 내가 무엇을
추구하고 사느냐.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사느냐. 그리고 거기에 따른 운명을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바에 대해서 부득불 책임을 져야 합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 지시하시는 대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갑니다. 그것의 아브라함의 신앙이었습니다. 동으로 가든 서로 가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선택하고 그가 인도 하는 대로 살아가기로 그렇게 작정을 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롯이라는 조카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그는 아브라함을 선택했습니다. 자기가 믿음이 있었던 거 같지 않습니다. 삼촌이 좋아서 삼촌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는 대로 따라갔습니다. 동으로 가면 동으로, 서로 가면 서로, 애굽으로 가면 애굽으로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시 벧엘로 돌아옵니다. 어쨌든 그는 자기가 선택한 게 아니고 아브라함이 선택한 길을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아브라함을 좋아했고 아브라함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거기까지는 잘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니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땅이 좁아서 용납할 수가 없을 만큼 소와 양이 많이 있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큰 부자가 될 때, 부득불이 땅이 좁아서 세간을 내야 되겠어요. 두 가정이 갈라져야 되겠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말합니다. “나를 떠나라. 이제는 네가 그만큼 컸으니까 나를 떠나라.” 이래서 두 가정이 갈라지는 그런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 시간
에 또 다시 택함 받은 자의 모습으로 중요한 선택을 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거죠. 여러분 삶에 있어서 지혜 중에 가장 큰 지혜가 priority 입니다. 무엇이 중요하냐 하는 겁니다. 그 아주 중요해요. 그걸 결정해야 됩니다.
이번에 중국에 갔더니 중국에서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중국에는 가만히 보면 여자들이 되게 쌔거든요. 어떤 모임에나 여자들이 주도하는 것을 많이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당신네들은 참 여성이 좀 주도성이 강하다”고 했더니 “그럼요,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언제나 남자가 결정을 합니다.” 그래요. 그래서 “그거 참 옳구먼.” 그랬더니 그 다음 말이 중요해요. “무엇이 중요하냐 하는 것은 여자가 결정합니다.” 그러더라구요. 그거 말 되더라구요, 가만히 보니깐. 어쨌든 무엇이 중요하냐 하는 거예요. 그것이 중요한거거든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생각했습니다. 화목이 중요하다. 화평이 중요하다. 우리 다투지 말자. 너나 나나, 네 목자나 내 목자나 우리 아랫사람들까지도 다투지 말자. 화평 하자. 화평이 중요하니깐……. 그래서 그 다음 보니깐 양보합니다. 여러분 양보 없이 화평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화평은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됩니다. 내 이득을 다 취하면서 화목을 구해봐야 되지 않습니다. 내가 손해보지 않고 화평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안되느냐. 화평은 좋아하고 화평해야겠다고 하면서도 내 잇속을 다 차리겠답니다. 양보가 없으니깐 화해가 없는 거죠. 가만히 보면 요새 많은 사람들이 하나야 되야겠다.
단결해야 되겠다. 그렇게 시위를 하면서도 하나가 안돼요. 손해 볼 마음이 없어요. 조금도 양보할 마음이 없으니깐 하나가 될 수가 없는 거죠. 그런데 아브라함은 크게 양보했습니다. 이렇게 크게 양보할 수가 없어요. 보세요. ‘네가 우 하면 나는 좌 하리라.’ ‘너 가지고 남는 거 내가 가지마.’ 큰 양보입니다. 이 마음이 참으로 복된 자의 마음이요. 선택받은 자의 마음입니다.
저는 오래 전에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기억 할 때가 있습니다. 그건 참으로 중요한 제게 주신 교훈이었습니다. 필라델피아에 가면 팬 대학이라고 있습니다. 그 대학이 아주 몇 명 안되던 때, 몇 백명 안되던 옛날에 초창기에 들려줬던 이야기입니다. 학생들이 전부 기숙사에 들어가서 공부하는데 이제 개학이 되고 보따리를 들고 기숙사에 돌아오면 방을 정하게 됩니다. 방을 정하게 될 때는 언제든지 먼저 온 사람이 우선권이 있습니다. 먼저 와서 좋은 방을 가지고, 그런데 방이 다 같지가 안잖아요? 계단 밑에 있는 것도 있고, 화장실 옆에 있는 것도 있고, 시끄러운 문간에 있는 것도 있고 여러 방이 있는데 먼저 온 사람이 언제나 제일 좋은 방. 3층 7호실, 제일 좋은 방 하나. 그 다음 사람 와서 그 다음 방, 그 다음 방 이렇게 얻게 되어 있는데 어느 날 학생 하나가 가방을 가지고 와서 내려놓고 “제게 방을 하나 주시죠.” 그러니 총무처장이 “그래. 어떤 방을 원하는가?” 했더니 대답을 이렇게 하는 겁니다. “다른 학생들 다 가지고 남는 방이 있으면 저 하나 주세요.” 총무처장 수십 년 동안 보았지만 이런 사람 만나본 적이 없어요. 깜짝 놀랐어요.
“아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러니깐 “아니, 다른 분들 다 방 갖고 그리고 뭐 계단 밑이라도 좋습니다. 하나 남는 방 절 주세요.” 이 이야기가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그 옆에 대학 총장이 이 소리를 들었어요. 내가 이 수십 년 대학 총장에 이런 말을 들어본 일이 없어요. 그래서 그 학생 이름을 수첩에다가 딱 적어놨어요. 이 학생이 장차 어떻게 되나 보자. 몇 십년 후에 그 대학 총장이 됐어요. 여러분 이런 양보 이러한 말해 보신 적 있습니까? 다른 사람 다 좋은 거 갖고 그저 남는 거 굳은 일 그거 제가하겠습니다. 이 마음이 복 받는 마음이에요. 아브라함이 이렇게 양보하고 있어요. ‘네가 가져라! 남는 거 내가 가지마.’ 왜?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이 세상일에 대해서 흥미가 없거든요. 부하면 어떻고 가난하면 어때요? 어디서나 하나님 섬기면 되는 거예요. 여호와께 제사하고 단을 쌓았어요. 이곳이 좋아요.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 예배하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지, 동이면 어떻고 서면 어떻습니까? 산지면 어떻고 평지면 어떻습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중요하지 않았더라는 이야기요.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경건 생활을 지켜갈 수 있으면 이것으로 더 바랄 것이 없어요. 그런고로 이렇게 너그럽게 양보할 수 있었던 거예요. 네가 먼저 가져. 그러면 내가 가질 것이야. 그는 현재가 중요하지 않았어요. 미래가 중요했어요. 신앙생활이 중요했고, 거룩한 생활이 더 중요했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에 비해서 롯은 어떻습니까? 조카는? 내 성경을 읽으면서 조카가 조금 얌체다 그런 생각을 해요. 삼촌이 이렇게 말하면 “무슨 말씀입니까 삼촌 먼저.” 그래야 될 거 아니에요? 그 사람 그런 말이 없어요. 딱 쳐다보고는 요쪽을 내가 갖겠습니다. 물이 많고 부유하고 물이 넉넉해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에덴동산 같고, 그리고 애굽 땅과 같더라. 비옥하다는 이야기죠. 그쪽을 자기가 선택을 합니다. 이 선택하는 기준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건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이권만 생각해요. 삼촌은 생각하지 않았어요.
신앙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직 부요함만 생각했어요. 본즉, 그랬어요. 보는 것만 생각했어요. 본다는 거 중요합니다. 무엇을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 아주 중요하지만 화려함과 외형과 겉만 보는 것 사람도 겉만 보아선 안돼요. 속을 봐야 되는데 겉만 보다가 많은 실수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물질의 풍요함만 보았어요. 현재만 보고 미래도 보지 않았어요. 인간을 보지 않았고 인간의 도덕성도 보지 않았어요. 외적인 번영, 자유, 화려한 세계만, 풍요만 생각했더라는 이야기죠.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데 믿기는 믿는데 돈 밖에 몰라요.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부자 되게 해주세요. 부자 되게 해달라고 몇 년을 기도했는데도 부자가 못 되더래요. “아……. 내가 기도를 좀 바꿔야겠다. 이제 구체적으로 해야겠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백만 불을 주세요. 백만 불을 주세요.”
몇 년 기도해도 또 응답이 없더래요. “아하……. 내가 잘못을 했구나. 좀 고쳐야겠다.”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백만 불 주면 십일조를 떼겠습니다. 십일조를 내겠습니다. 하나님. 백만 불을 주세요.” 그것도 몇 년 기도해도 응답이 없더래요. 마지막에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그러면 먼저 십일조를 때고 남는 거만 나 주세요.” 그저 시종일관 돈 밖에 몰라요. 모든 가치관의 기준이 거기에 있다는 말이에요.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란 가치관이 바뀌어야 되요. 세계관이 바뀌어야 되요. 이 관, 오늘 보니깐 이 사람이 보는걸 잘 못 보았어요. 화려한 것만 보고 풍요만 보았더라. 물질적인 세계만 보았어요. 거기서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 다음에 오늘 성경 말씀을 자세히 보면 기막히고 충격적인 말씀이 있어요. 장막을 옮겨가더라.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갔더라.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자기 장막에 머물지 않고 소돔 고모라 그 죄악의 도성으로 자꾸 옮겨갔어요. 자세히 연구해 보면 롯에게도 아브라함과 함께 살아서 얼마간의 믿음이 있었던 거 같아요. 좀더 깊이 연구해 보면 이 땅은 죄악의 땅이요 언젠가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인정했던 거 같아요. 그렇게 다소간의 믿음이 있으면서도 여기서 떠나질 못했어요. 이렇게 하면 안 되지 하면서 그 길을 갔어요. 여기서 떠나질 못했어요. 이러하면 안 되지 하면서 그 길을 갔어요. 사람의 불행 중에 가장 큰 불행이 뭐냐면 불행할 줄을 알면서도 그쪽으로 계속 가고 있다는 것이죠. 불행 할 줄 알면
서도 그 쪽으로 가고 있어요. 종교 개혁자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롯은 장차 낙원 속에서 살 것이라고 상상했으나 지옥의 수면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이래선 안될 것을 알아요. 한번만 더 금년만 더 한탕
만 더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 그 쪽으로 계속 가고 있는 거예요. 이 잘못된 선택이 멸망을 초래하는 것이죠.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헬라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그는 행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즐거움이라는 것은 소유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성취감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두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다. 그 옛날에 벌써 이런 말을 했어요. 먼저는 억지로 하는 것 강요되어서 하는 일은 언제나 불행한 것이다. 안 그렇습니까? 먹는 거 좋아요. 그러나 억지로 먹는 건 힘들어요. 무엇을 하던지 억지로 하는 것 게다가 타성에 끌려서 욕심에 끌려서 노예적으로 하는 일은 다 불행한 것이다. 어느 사이에 선택권을 잃어버리고 줄줄 끌려가고 있어요.
불행한 것이에요. 그렇다면 자원적이고 자발적일 때 스스로 항상 새롭게 선택하며 맑은 이성으로 맑은 양심으로 선택하며 하는 일. 그것만 행복한 것이다 그랬고요. 두 번째 더 재밌는 말이에요. 온 몸으로 거기에 함께 하며 동참 할 때에 행동으로 옮길 때 행복이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음악을 들어 말했습니다.
여러분 음악은 들으면서 행복합니다. 그러나 부르는 사람이 더 행복합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되요. 오늘도 우리 귀한 성가대 성가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들어서 행복합니다. 성가대원들은 부르면서 행복합니다. 저 사람들이 훨씬 더 행복해요. 더 많이 행복합니다. 자 우리가 피아노 연주도 우리가 피아노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그러나 피아노 연주하는 사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고 있는 거요. 그와 같이 우리는 선한 일을 할 때 의로운 일을 할 때 사모하고 주장하고 말하고 그러는 게 아니고 몸을 바쳐서 봉사하라 이거예요. 몸을 바쳐서 수고하고 땀을 흘려 보라 이거예요. 거기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롯은 멀리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았어요. 그 속을 보지 않고 그 죄악도 보지 못했고 아니 뒤에 깨달았어도 그는 돌이키지를 못했어요. 이 땅은 망할 것이다 생각하고 벌떡 일어나서 나와야 되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지를 못했거든요. 자기가 오히려 변화되고 있었어요. 죄악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그는 다 잃어 버렸고 사랑하는 아내도 죽어버렸고 그리고 그것도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위하여 기도하므로 비로소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에 롯은 간신히 생명만 보존했습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그는 선택을 잘못했어요. 잘못된 선택을 수정하지 못했어요. 돌이키지를 못했어요. 당신의 현주소는 어디입니까? 나는 무엇을 선택하고 살아왔습니까? 지금 이 처지에서 나는 무얼 생각해야 합니까? 바로 된 선택이었습니까? 아니면 잘못 살았습니까? 내가 세운 목표가 바로 된 것이었습니까? 내 살아온 인생관이 바로 된 것이었습니까? 후회 없습니까? 여러분 끊어야 할 것은 빨리 끊고 돌이켜야 할 것이라면 지금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선택하고 환경과는 관계없이 그 은혜 안에 행복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의 높은 가치 의식을 가지고 오늘도 바른 선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은혜 주셔서 하나님을 선택하게 하시고, 진리의 길을 따르게 하시고, 오늘도 은혜 생활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원하오니 롯과 같이 겉을 보고 화려한 것을 보고 세상으로 끌려가는 미련한 사람 되지 않게 하시고, 아브라함처럼 비록 산지기에 거하나 여호와를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는 바른 순례자의 길, 바른 성도의 길을 갈 수 있는 주의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곽선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