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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르게 선택합니다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옛날 어떤 마을에 마늘도둑이 한 사람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어떤 집에 들어가서 마늘을 훔치다가 그만 그 집 주인에게 발각이 되었습니다. 그는 관가로 끌려왔습니다.
고을 원님은 안 그래도 그 즈음에 집집마다 마늘도둑이 들어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마늘도둑질에 대한 뿌리를 완전히 뽑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서 아주 엄한 벌을 내리리라 작정했습니다. 원님은 마늘도둑에게 세 가지 벌을 제시하면서 그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일렀습니다.
첫 번째 벌은 마늘을 훔쳤으니까, 그 원대로 마늘 100개를 날 것으로 먹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벌은 곤장을 50대 맞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벌은 벌금으로 금전 한 냥을 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늘도둑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 곤장 50대를 맞으려고 하니까 너무 아플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벌금으로 금전 한 냥을 내려고 하니까 너무 아까웠습니다. 그 당시에는 금전 한 냥이 매우 많은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늘도둑은 벌로 마늘 100개를 먹겠다고 아뢰었습니다.
처음 그가 마늘을 한 두개 먹을 때는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10개쯤 먹으니까 입안도 얼얼하고 속도 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이왕 먹기 시작한 것이니까 끝까지 먹어야되겠다고 작정했습니다. 그는 마늘을 20개나 먹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온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습니다. 눈알도 빠져나오는 듯 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먹을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는 원님에게 마늘을 먹는 대신에 곤장을 맞게 해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그의 사정이 받아들여져서, 그는 곤장을 맞기 시작했습니다. 10대를 맞았더니 엉덩이가 터지고 살갗에서 피가 새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5대를 맞았더니 정신이 까물까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20대를 맞았을 때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서 까무러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한참 뒤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더 이상 맞다가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금 원님에게 곤장을 맞는 대신에 벌금을 내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결국 그는 애꿎게 마늘을 20개나 먹고, 곤장을 20대나 맞고, 그리고 나서 벌금으로 금전 한 냥을 내고 난 후에 간신히 풀려나올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선택을 바르게 했어야지요. 괜히 잘못 선택해서 온갖 곤욕을 다 치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일에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물론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한 바에 대한 결과는 우리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신중하게 생각하면서 바르게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가 가진 문제점이 무엇인지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들의 의는 외식적이었습니다. 또 온전하지도 못하고 부분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고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와 같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는 더 나은 의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는 무엇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받게 되는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받은 자만이 천국의 백성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산상설교에서 이 두 가지 의를 계속해서 비교하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쪽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 곧 인간적인 의입니다. 다른 한쪽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도 더 나은 의,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하셨습니다. 아울러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우리 각자가 져야할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하반부에서 세 가지 비유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 번째, 13-14절에 있는 문과 길의 비유입니다.
두 번째, 15-23절에 있는 두 나무의 비유입니다.
세 번째, 24-27절에 있는 두 집의 비유입니다.
오늘은 이 세 가지 가운데서 첫 번째 해당되는 두 문과 두 길의 비유를 우리가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걸어가는 자들입니다. 바르게 선택을 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도 더 나은 의가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천국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나서 그런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어떤 공로가 있어어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우리의 인간적인 의를 결코 내세우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두 문과 두 길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옛날에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성벽을 쌓고 성안에 모여서 살았습니다. 성벽에는 많은 문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가운데 있는 문은 제일 컸습니다. 물론 그 길도 넓었습니다. 전쟁에서 아군이 승리하고 돌아올 때는 그 문은 개선문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나와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군들을 환영했습니다.
성벽의 후미진 곳에는 작은 문이 하나 나 있었습니다. 바늘귀처럼 좁은 문이 있었습니다. 다른 문이 다 닫히고 난 뒤에라도 꼭 필요한 경우에는 그 좁은 문을 통해서 들어오고 나가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비상구처럼 사용되는 문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적병들이 그 속으로 한꺼번에 들어오면 안되니까 그 주변의 길도 당연히 좁고 협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광경을 염두에 두고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넒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아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넓은 길로 걸어가지 말아라. 좁은 길로 걸어가라."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넓은 문과 넓은 길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인간적인 의를 으스대면서 뽐내었습니다. 마치 자기들이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영광을 자기들이 다 받으려고 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결코 자기의 인간적인 의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겸손히 고개를 수그리고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고,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까? 시골에 사시는 어떤 할아버지가 서울 나들이를 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사는 청와대를 꼭 한 번 구경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차를 타고서 청와대 앞까지 왔습니다. 청와대 문은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건장하게 생긴 사람이 제복을 입고서 떡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그에게 다가가서 자기의 주머니에 있는 쌈짓돈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이만하면 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때 문을 지키고 있던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안됩니다. 이곳은 돈을 주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아무리 제게 많은 돈을 주어도 이 문을 열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초청을 받은 사람은 그 누구라도 단 한 푼을 내지 않아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을 받고서 그 부르심에 응한 사람은 자기의 공로가 전혀 없어도, 내세울 만한 인간적인 의가 없어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천국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은 은혜의 문이요, 그 길은 은혜의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10:9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또 예수님은 요14:6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 자신이 곧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는 문이 되시며, 길이 되십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는 유일한 문이요, 유일한 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4:12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그 문은 좁은 문이요, 이 길은 좁은 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좁은 문과 좁은 길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의를 내세우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적인 의를 내세우는 것보다 더 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언제나 겸손하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십시다.
둘째로, 두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넓은 길에 서 있는 사람은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에 14절에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에 서 있는 사람은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문과 길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가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 생각에 문이 먼저일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길이 먼저일 것 같습니까? 문을 먼저 통과하고 나서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길을 다 지나고 난 뒤에 마지막으로 통과하는 것이 문입니까? 어떤 사람은 문을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좁은 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신앙의 결단을 의미하고, 그 뒤에 계속해서 우리가 천국을 향해서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좁은 길로 보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문이 먼저일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길이 먼저고 문이 나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십자가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고 난 뒤에 마지막으로 천국을 향해서 통과해야할 관문이 좁은 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문이 먼저냐, 길이 먼저냐, 예수님은 본문에서 이것을 따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생각해 보았습니다. 넓은 문, 넓은 길은 둘 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 곧 인간적인 의를 의미합니다. 반면에 좁은 문, 좁은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가리킵니다. 지금 예수님은 두 가지 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우리에게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문과 길은 시간적으로 앞과 뒤의 문제라기 보다는 나란히 함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좁은 문과 좁은 길에 서 있는 사람들의 수가 적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천국은 너무 비좁아 들어갈 수 있는 인원수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요14:2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이 왜 천국을 작게 만드셨겠습니까? 천국은 모든 사람들이 들어가도 넉넉한 장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품이 조용하시기에, 천국이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벧후3:9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우리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고 천국에 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면 천국에 이르는 문은 너무 좁아서, 한 사람씩만 겨우 간신히 통과할 수 있기 때문에 길게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어서 들어가는 수가 적은 것입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요6:37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믿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는 자는 누구라도 좁은 문을 들어갈 수 있고,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에 걸어가는 사람의 수가 적습니까? 14절을 다시 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찾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스스로가 그 문과 그 길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 문은 좁고 그 길은 협착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복음의 편협성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기독교는 너무 독선적이야.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고 기독교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그런 배타적인 종교가 어디 있어? 그러면서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보다 행동이 못할 때가 얼마나 많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의로는 이 세상에서 그 누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능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받아야만 합니다. 그 의를 받는 길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만이 하나님의 의는 주어집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이 좁은 문과 좁은 길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든지, 어떠한 삶을 살고 있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넓은 문과 넓은 길에 서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두 종류의 종말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넓은 문과 넓은 길의 종말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3절에 기록된 대로 멸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좁은 문과 좁은 길의 마지막은 무엇입니까? 14절에 기록된 대로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만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백두산 정상의 천지에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빗방울이 조금만 서쪽으로 기울어지면 압록강을 따라서 서해로 흘러가게 됩니다. 반대로 그 빗방울이 조금만 동쪽으로 기울어지면 두만강을 따라서 동해로 흘러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똑같이 천지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에는 수 만리나 서로 떨어지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 간에 선택한 방향이 달랐기 때문에, 서로 간에 가는 길이 달랐기 때문에 그 결과도 엄청나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선택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길을 걸어가는데 눈 앞에 천 원짜리 한 장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옆에 만 원짜리 한 장이 또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여러분은 그 두 장 가운데서 어느 쪽을 택해서 줍겠습니까? 점잖으신 체면이라서 그냥 보고 지나치겠습니까? 이것저것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둘 다 주우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땅 위에 떨어진 돈은 둘 다 주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과 길의 선택은 그렇지 않습니다. 둘 다 선택할 수 없습니다.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포기해야 합니다. 여러 개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하는 의미의 choice가 아니고, 좁은 문과 좁은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 넓은 문과 넓은 길의 삶을 단념해야 하는 결단을 의미하는 decision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재촉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좁은 길로 걸어가라."
아직은 그 문이 열려있고, 아직은 그 길이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문이 닫혀지고, 그 길의 통행이 막힐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좁은 문과 좁은 길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변에는 아직도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넓은 길로 걸어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문이 닫혀지기 전에 우리는 그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힘써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좁은 문과 좁은 길의 삶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입니까? 이것을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컨대 우리의 심령은 가난해야 합니다. 우리는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으로서 우리 자신을 녹여야 합니다. 세상의 빛으로서 우리 자신을 불태워야 합니다. 마음으로라도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마음으로라도 간음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우리의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까지 돌려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다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대접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곧 좁은 문과 좁은 길의 삶입니다. 물론 이렇게 사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희생과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여기에 축복이 있습니다. 여기에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마28:20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보다 앞서 좁은 문과 좁은 길로 들어가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시고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루는 아브라함이 자기 조카 롯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롯아, 우리 서로 다투지 말자.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하면서 사랑하는 조카 롯을 위해서 모든 것을 양보했습니다. 그러나 롯은 삼촌 아브라함에게 전혀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넓은 문과 넓은 길을 택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쪽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되고 말았습니까? 그는 거기에서 천국의 삶을 꿈꿨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지옥의 심연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넓은 문과 넓은 길의 종말은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만을 생각하면서 조카 롯을 위해서 모든 것을 양보했던 아브라함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좁은 문과 좁은 길을 택한 아브라함에게 무한한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땅과 자손의 복을 주셨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그 길을 보장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두가 좁은 문에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걸어가는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양보하면서 사십시다. 져주면서 사십시다. 거기에 참된 승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제는 불평과 원망에 가득 찬 광야의 삶을 다 끝내버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축복의 삶,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생명의 길을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끝까지 기쁨으로 잘 걸어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박상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