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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선택 (막 10:46-52)
받은 은혜보다 중요한 것은 쏟지 말아야 할 은혜
부자가 되는 길은 돈을 많이 벌어 모으면 되지만 돈을 잘 번다고 해서 돈을 물 쓰듯 하거나 돈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면 몇 날이 못 되어 거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은혜도 마찬 가지입니다. 받은 은혜도 중요하지만, 쏟지 않는 은혜는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미 받은 은혜로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은혜를 쏟는데 선수가 되어 있습니다.
옛말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을 조금 붓더라도 밑이 막힌 독에 물을 부어야만 물을 활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성도들처럼 은혜를 좋아하고 잘 받는 민족이 또 있을까요? 뿐만 아니라, 받은 은혜를 집에 도착도 하기 전에 신속히 쏟아 버리는 민족이 있을까요? 마치 맛나게 먹은 음식이 소화되어 피가 되고 살이 되기도 전에 먹은 음식을 토해 내듯 우리는 맛있게 받은 은혜를 내 것으로 삼기 전에 벌써 쏟아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예배 때의 충만함이 세상과 문제 앞에만 서면 '헤쳐모여'가 됩니다.
요즈음은 귀한 것이 너무 흔하여, 귀한 것이 흔한 것이 되어 버린 시대를 살아갑니다. 은혜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은혜의 홍수시대입니다. 그러나 '홍수나면 마실 물 없다'고 은혜의 홍수시대에 우리는 은혜의 고갈로 인하여 여전히 은혜에 목말라 하는 그 이유는 은혜를 못 받아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은혜를 쏟았기 때문입니다.
진짜 부자들은 쌀 한 톨, 물 한 방울을 아끼려 벌벌 떱니다. 맞습니다. 이미 받은 은혜를 소중히 여겨, 행여 쏟을까 벌벌 떨어야 은혜의 부자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가볍게 여기면, 우리의 인생도 정말 가볍게 됩니다. 은혜를 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한 방울, 한 톨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며, 그 은혜를 쏟지 않기 위하여 애써야만 합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으면 안됩니다. 은혜를 우습게 여기며, 주신 은혜를 자꾸 쏟으면, 있던 은혜도 거두어 가십니다. 뿐만 아니라, 열려 있던 은혜의 문도 자주 닫히게 됩니다.
우리는 은혜를 쏟으면서 이렇게 말한다."또 받으면 되지"그러나, 또 안주시면 어쩌랴. 은혜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의 출혈을 막아야 합니다. 전기도 누스가 되면 전압이 내려갑니다. 마찬가지로 은혜의 누스 현상이 일어나면 우리는 세상의 압력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받은 은혜를 재활용하는 일에 전심을 쏟아야 합니다. 은혜의 사각지대에서 벗어나는 길은 은혜의 밑 빠짐 현상을 막는 길 뿐입니다.
지금은 은혜의 시대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소중하게 생각하면 은혜도 우리를 귀하게 여깁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은 은혜입니다. 아무리 받아도 부작용 없는 것은 은혜뿐입니다. 한 톨의 은혜라도 아껴 '주가 쓰시겠다' 하실 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면서 통째로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재활용, 그 길만이 우리를 믿음의 부자로 만들어 가는 첩경이 될 것입니다. 지난 주간 신년부흥사경회를 통해 받은 은혜를 잘 유지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데 있어서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라고 하는 하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오늘날 군중은 있는데, 자아를 잃어버리고 있고 국가는 있는데, 국민이 없는 경우를 볼 수 있으며 교회는 있는데, 믿음의 한 사람으로서의 나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겪으시고 행하신 이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20장에서는 두 소경으로 기록되고 있고, 눅18장에서는 걸인 한 소경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한 소경 거지 바디매오로서 그 이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막10:46을 봅니다.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시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허다한 무리들과 소경 거지 바디매오를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대로 옷을 입고 있는 무리들과 거지행각에 누추한 옷을 입은 소경 거지가 보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주께서 교훈하시고자 하시는 의도가 있습니다. 이는 무리의 믿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한 사람의 믿음을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리고에서 한 사람의 믿음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예배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눈을 두리번두리번 하면서 교회 안에 참여한 그 무리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무리의 예배를 봅니다. 그 무리의 찬송소리와 기도소리를 듣습니다. 그런데 진정 나의 찬송, 나의 예배를 잃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의 구경꾼이 아니라, 예배자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곧 이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입니다. 주님은 예배드리는 자를 무리로, 무더기로 보시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디매오는 예수 그리스도께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거지로 살아온 소경이 예수님께 무엇을 구했습니까? 예수님 곁에는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이 길에서 구걸하는 소경 거지에게는 절호의 찬스가 왔습니다. 한 두 사람 정도 지나가는 행인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갑니다. 이때야 말로 돈을 많이 얻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돈을 줄 수 있는 그 무리들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한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보기를 구한 것입니다.
47-48절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주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이 소경 바디매오의 믿음을 축복하셨습니다. 막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그의 믿음이 그의 인생의 새로운 눈을 뜨게 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믿음은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눈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믿음이 없는 자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신의 시력을 잃는 것보다 더욱 불행한 것은 바로 믿음을 잃는 것입니다. 믿음은 빌딩의 기초입니다. 내가 믿음을 잃으면, 모든 기초를 잃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주님이 열어놓으신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길에서 좇았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예수님에게서 시선을 놓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떠한 경우에도 믿음의 주 예수님을 바라보시고 무리의 소리에 낙심하지 말고, 믿음위에 자기를 건축하고 성령으로 기도하고 새로운 영안을 가지고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앞으로 달려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 바디매오는 거지로 살다가 인생의 대전환이 일어납니다. 그 계기가 바로 신앙을 갖게 되면서 부터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이렇게 한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마음속에서 신앙의 열정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소리질러 가로되" 이 부르짖음은 바디매오가 얼마나 신앙적으로 뜨겁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부르짖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바디매오의 마음속에서 신앙의 열정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본문 47절,48절을 보게 되면 "나사렛 예수시라 하는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바디매오의 열정적인 신앙의 모습을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소리질러 가로되” 그러므로 이 부르짖음은 바디매오가 얼마나 신앙적으로 뜨겁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부르짖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본문을 보면 신앙의 열정이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첫째는, 신앙고백의 열정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 지르는 신앙의 고백이 열정적이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고백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신 나의 메시아요,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신만이 나를 죄와 사망과 질병과 고통에서 구원하실 참된 구주십니다."라는 신앙의 고백인 것입니다. 나의 삶의 현장에서 우러나는 신앙고백 "주님은 나를 구원하신, 그리고 계속 구원해 나가시는 하나님이시군요"라고 고백하는 신앙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둘째는, 기도의 열정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생활의 열정입니다. 바디메오는 소리 지르며 몸부림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열정입니다. 그는 길에서 즉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믿음은 아름다움 선택을 이룬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본문 50절에 보면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겉옷을 내어 버렸다는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치마와 같은 큰 통치마를 겉옷으로 입었습니다. 이 겉옷은 밤에는 침구로 낮에는 옷으로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낮은 덥고 밤은 쌀쌀합니다. 그러므로 겉옷은 생활의 필수품입니다. 그런 필수품은 바디매오는 왜 버렸을까요? 앞은 안보이고 주님은 부르시고 마음은 급합니다. 바디매오는 겉옷을 다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주님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때로 우리에게 포기해야할 것을 요청합니다. 나의 자아를 포기해야 합니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택을 보세요. 51절에 보면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인가를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소경은 무엇을 보기 원했던 것일까요? 원문 성경에는 "주님 당신을 보기 원합니다."라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디매오의 간절한 소원은 주님을 보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한번 봤으면 다른 소원이 없겠다. 는 것입니다. 거지라도 좋으니 자기의 평생소원은 그리스도를 한번 만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52절). 그 다음 그의 행동을 보십시오. 52절입니다.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보십시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겉옷을 버려두고, 거지의 생활을 버려두고, 동냥으로 돈 버는 것도 버려두고, 옛 생활을 다 포기하고 그 자리에서 주님을 따라나서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도 그의 구원을 책임지셨고, 그의 소원도 책임지셨고, 그의 치유도, 그의 영원한 삶도 모두 책임지셨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좇는 사람을 주님도 모든 것을 책임지셨습니다.
운명을 바꾼 사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운명을 극복하고 바꾸어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관상을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수상 위에 관상 있고 관상 위에 심상 있고, 심상 위에 신앙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인간은 운명을 타고나는 것은 틀림없지만 자신의 운명을 신앙으로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디매오』라는 사람이 그러한 사람입니다. 실로 신앙의 힘은 자신에게 처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디매오가 자신에게 주어진 열악한 장애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기회를 포착한 사람
바디매오는 소경에다가 거지였습니다. 이 둘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디매오가 거지가 된 데에는 소경이라는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배우지 못했고, 배우지 못했기에 생활 능력이 없어졌고, 생활 능력이 없으니까 구걸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완전히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멸시와 조롱으로 이미 자존심은 망가졌고, 오래 전에 자포자기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기회포착의 능력이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위기가 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위기를 위기로 맞아 자멸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위기를 기회로 선용하며 대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은 그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였습니다. 인생의 성공자와 실패자는 기회 앞에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바디매오의 위대성은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데 있습니다. 47절에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이 말이 중요합니다.
환경을 극복한 사람
실패자의 대부분은 환경을 탓합니다. 나는 부모를 잘 못 만났기 때문에, 혹은 가난하기 때문에, 줄을 잘 못 섰기 때문에, 머리가 나쁘기 때문에 등등의 핑계로 자신의 실패를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환경을 역으로 이용할 줄 압니다.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습니다. 역사의 위대한 사람들의 자라온 환경은 한결같이 불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환경을 탓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냈습니다. 가장 열악한 환경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불굴의 믿음을 가진 사람
철은 연단을 통해서 강해지고 인생은 시련을 통해서 강해집니다. 철이 담금질을 통해 강해지듯이 우리의 믿음도 시련을 통해 박해를 통해 강해지고 깨끗해집니다. 바디매오는 사람들의 지탄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48절을 봅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마치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이 바디매오는 사람들의 핍박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강하게 돌진하였습니다. 이러한 바디매오의 적극성이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의 기회를 포착하는 적극성이, 환경을 극복하는 과감한 추진력이, 어떤 문제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그의 열정이, 그리고 박해와 비난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불굴의 믿음이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7절-8절까지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
최근 유전자 정보를 해독해보니 인간은 무한한 잠재력과 창조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일생동안 약 3-5%만이 사용할 뿐 나머지는 사장시킨 체 인생을 끝낸다고 합니다. 환경을 탓하지 말고 적극적인 신앙의 키를 가지고 주어진 운명을 바꾸었던 바디매오와 같이 여러분의 운명에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무한 에너지를 활용하여 새로운 운명의 도전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네가 무엇을 바라느냐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기도할 때는 간절히 기도하다가도 내가 원하는 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쉽게 절망해 버리고 맙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응답 가운데는 무응답의 응답이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루어 주시지 않는 것도 응답일 수 있고 심지어는 나에게 어떤 소유를 거두어 가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고로 어떤 일에나 절망을 하고 하나님을 멀리 하는 건 인간의 생각이요 비신앙적인 모습입니다. 절망처럼 무서운 병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절망보다 더 무서운 게 있는데 그건 잘못된 희망입니다. 참된 희망! 신앙적 희망이 있는 성도는 때로 넘어지고 좌절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잘못된 희망은 그게 성취되었어도 성취 자체가 불행이고 절망스러운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지느냐 마느냐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건 정말 우리가 근본적인 뜻에 합당한 것을 바라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기도라는 것은 내 희망사항을 나열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에 내 희망사항을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면 열심히 구해서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닐 때는 아무리 좋아도 포기할 수 있는 용기,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주님의 역사적인 기도를 기억합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를 보고 프린스턴 대학의 실천신학교수인 도날드 캅스(Donald Capps)는 예수님의 의지의 포기라고 했습니다. 포기할 수 있는 의지, 나를 부인할 수 있는 용기 이것이 참다운 믿음입니다.
자아가 부정되고 거기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실현될 때 무서운 힘과 용기가 생깁니다. 본문 51절에서 예수님은 거지 맹인 바디매오에게 "네가 원하는게 무엇이냐?" 물으셨습니다. 어찌 이 바디매오는 거지이면서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 겉옷까지 버렸습니까? 그는 가치관이 분명하게 자리 잡은 사람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귀한 것으로 아는 지혜의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붙잡기 위해 지엽적이고 일시적인 것을 용감하게 버릴 각오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앞에 그 믿음이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사실 그에게 겉옷이란 자기의 전 재산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겉옷이 아니고 유대지방에서는 겉옷을 담요처럼 비슷하게 만들어서 추위를 피하는 긴요한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비록 냄새나고 더럽지만 그것은 바디매오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붙들기 위해 던져버렸습니다. 왜 그라고 인간적인 욕망이 없겠어요? 거지였으니까, 보통 사람보다 물질적 필요가 더 절박했을 것입니다. 음식을 살 수 있는 돈도 필요하고 깨끗한 집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치관이 분명했습니다. 물질과 명예를 구하던 제자와는 달랐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과 가치관을 당장 바꿔야 합니다. 탐욕의 붉은 깃발과 십자가 가운데 하나만 선택하여야 합니다. 십자가는 다른 것과 함께 설 수 없습니다. 가난한 자리, 욕심이 다스려진 자리, 우리의 끝과 하나님의 처음 이 맞닿은 자리, 거기에 십자가가 설 수 있습니다. 탐욕이 충족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설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욕구가 충족되는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주님을 더 확실히 알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얻고 그리스도의 온전한 성품을 닮아가는 길이라면 오히려 내 소유가 없어지고 손해가 나도 기뻐하고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귀머거리요 벙어리요 장님이었던 헬렌켈러 여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눈이 멀어 앞을 못 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정작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도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정작 비극적인 것은 버젓이 눈이 있는데도 볼 것을 보지 못 하는 것입니다. 귀가 없어서 못 듣는 것,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정작 이상한 것은 들을 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에 마음이 강퍅해진 사람들을 향해서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 하며,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도다.’ 진리를 보고 깨닫는 열린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진리를 듣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열린 귀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은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러분, 마음의 귀를 여십시오. 마음의 눈을 여십시오.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온전히 듣고 볼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지십시오. 요한복음 9 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된 한 젊은이가 등장합니다. 이 불행한 사람이 눈을 뜨는 엄청난 기적, 메시야적 사건을 바라보면서도, 바리새인들은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아서,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비난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주님은 점잖게 꾸짖으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스스로 본다 하면서도 진리를 보지 못하는 자들의 소경됨을 드러내며, 스스로 소경이라고 절망하면서도 실상은 진리를 깨닫는 이들이 결코 소경이 아님을 깨닫게 하러 왔노라’눈치 빠른 바리새인들이 화를 내며 물었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우리가 소경이란 말입니까?’ 그 때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차라리 소경이었더면, 죄가 없었겠지만, 본다고 하니, 죄가 있느니라’
요한계시록 3:17 절 이하에서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책망하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보지 못하면서도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죄, 깨닫지 못 하면서도 깨닫고 있다고 착각하는 죄, 의를 행하지 못 하면서도 스스로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죄,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죄였습니다. 실속은 없는데 아직도 부자라고 착각하는 것, 벌거벗었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죄였습니다.
착각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착각이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속에 암이 자라고 있는데도, 보디빌딩으로 단련된 제 자신의 몸매만을 자랑했습니다. 몸이 전과 달리 좀 찌뿌둥하니까, 운동을 게을리 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점점 더 열심히 역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역기를 들다가, 허리가 내려앉았습니다. 병원에 가 보니, 암이 벌써 등뼈에까지 전이가 되어 마침내 부러지고 만 것입니다.
속은 썩어 가고 있는데, 겉모습만 그럴듯하다고 안심하는 착각이 있습니다. 알맹이는 다 없어지고 말았는데도 전에 보이던 껍데기가 아직 성하다고, 그저 잘 되겠지 하는 거짓 평안이 있습니다. 내 마음 속의 영적 세계는 온통 다 뒤섞여 엉망인데 증상이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그렇게 어리석게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착각합니까? 사람들이 왜 진실을 보지 못 합니까? “뭔가가 눈을 가리웠기” 때문입니다. 욕심이나, 미움이나, 거짓이 눈을 가리면, 진실을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미움의 눈으로 보면,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다 악하고 교활하게 보입니다. 거짓의 눈으로 보면, 세상에 진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가리웠던 눈이 열리면, 모든 진실이 보입니다.
오랜 동안 목회자를 오해했던 성도 한 분이 그 오해가 풀리던 날, 자신이 손수 쓴 글씨를 표구해서 선물로 싸들고 왔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진실이 바로 보인다”.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십니까? 어떤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십니까?
예루살렘으로 오르던 예수님 앞에 소경거지 바디메오가 소리소리 지르며 외쳤습니다.‘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에게 다가와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물으시는 예수님 앞에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부르짖었습니다. ‘보기를 원합니다.’ 보기를 열망하십시오. 마음의 눈과 귀를 가린 모든 탐욕과 시기, 미움과 억울함, 편견과 잘못된 경험의 덮개들을 다 걷어 버리고,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사랑과 진실을 온전히 바로 볼 수 있도록 은총 주시기를 열망하며, 주 앞에 겸허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서정호목사 설교자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