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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에서 불꽃으로 (행 2:37-42)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세상에 예수님이 오신 것이 복된 일입니다. 또 성령강림하신 일도 큰 복입니다. 신앙의 삶은 성령과의 만남의 삶이고 체험의 삶이고 성령을 받아 살아가는 삶입니다. 신앙의 삶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영을 지니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내게 임하는 순간부터 나에게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가 하면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성령을 받고 가장 극적으로 변한 것은 베드로의 변신입니다. 베드로는 여러 번 실패를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아주 용렬한 사람으로 낙인찍힌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를 전후해서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도망가고 부인하고 문을 잠그고 숨어 있다가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거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령이 강림하시던 성령을 받고 나서 베드로는 비로소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베드로가 그 예수의 부활을 전하기 위해서 길거리로 나아갑니다. 사람들이 운집한 곳마다 가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그렇게 설교했더니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매 그날에 믿은 사람들이 3천이나 더했다“고 했습니다.
참 기적 같은 일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가 있습니까. 성령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렇게 역동적으로 만듭니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십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움직이게 하십니다. 의기소침하던 사람이 베드로 같이 입을 열게 하십니다. 입을 열어 전도했더니 한번 설교에 3천명이나 회개하고 그날에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변신이 과연 가능한 일입니까. 이 같은 변신은 성령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넘어진 자리에서, 재에서 어느 날 불꽃으로 타오르는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초라함에서 영광으로, 실패에서 승리의 자리로, 무능에 열정으로, 재에서 불꽃으로 타 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지옥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로 그 생명이 옮겨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이 내게 임하시기만 하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문제는 내가 그 성령께 나아가느냐가 문제입니다. 내가 성령께 나아가기만 하면 이런 변화와 환희의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몇 가지 독특한 일을 하시는 영이십니다.
II
하나는 “인도하시는 영”이십니다. 우리의 삶과 생각과 판단을 인도하시고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갈 길을 안내하시고 할 일을 인도해 주시는 영이십니다. 여러분들이 지나온 과거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돌아보면 내 인생 모두를 성령께서 인도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좀 깊은 신앙적인 안목을 가지고 나의 과거의 삶을 되돌아보면 참 신비할 정도로 오묘하게 하나님의 영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은 인도하시는 영이시고 안내하시는 영이십니다. 인도하시되 선한 길로, 온전한 길로, 은혜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은 합동해서 유익하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불행한 일이 주어질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이 합동해서 유익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그 불행한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섭리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눈을 뜨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영적 세계는 육신의 눈으로 불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육신의 눈은 지극히 적당한 거리에 있는 것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좀 멀어도 깊은 곳도 너무 밝아도 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육신의 눈의 한계입니다. 하물며 이 육신의 눈을 가지고 영적인 세계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하여금 영적인 세계를 바라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 육신의 눈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하고 부활을 믿게 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보고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신비한 일입니다.
인도의 영성신학자 앤소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라는 분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든 채 태어나서 잠든 채 살며 잠속에서 혼인하고 잠속에서 자녀를 낳고 깨어나 본 적이라고는 없이 잠속에서 죽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잠은 생리적인 수면이 아니고 영적차원의 잠을 말합니다. 오늘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에 태어나서 영적으로 깨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다가 그냥 죽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다가 그냥 죽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이 잠에서 깨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 다행스럽게도 이 영적인 눈이 뜨여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부활을 믿고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아 알고 살아가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알고 보면 이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것이 영적인 눈이 뜨여지는 축복입니다.
베드로 일행이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까지만 해도 그 눈이 뜨여지지 않아서 실수를 연발했습니다. 눈이 뜨여지지 않으면 믿고 중심 있게 살아갈 권위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도마가, 가룟 유다가 눈이 뜨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깊이 감추어있는 것을 어떻게 보고 믿을 수 있습니까. 보지 못하면 구체적인 신앙의 길을 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왔다 갔다 하는 신앙인이 얼마나 많으며, 한다 안한다 하는 신앙이 얼마나 많습니까. 구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눈이 뜨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눈이 뜨이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미숙한 일입니다. 지식의 눈이 뜨이질 않으면 보여주어도 알지를 못합니다. 감각이 발달되지 못한 사람은 손에 쥐어주어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제자들이 아직 영적인 눈을 뜨이기 이전이기 때문에 변화산에서 다 보여주었는데도 보고도 믿지를 못했습니다. 내일 십자가에서 죽으면 3일 후에 살아나 부활하리라고 여러 차례 말해 주었지만 제자들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눈이 뜨인다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성령이 오셔서 이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지금 천국을 믿고 부활을 믿고 십자가를 믿고 구속을 믿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세계를 보는 눈을 뜨이게 되면 믿음의 세게도 깊어지지만 동시에 생각도 변화를 받게 됩니다. 이 생각이 변화된다는 것이 또 큰 은혜입니다. 생각이 어떻게 변화되는가 하면 매사를 희망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도록 변화됩니다.
이것이 또 축복입니다. 매사를 소망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소망적으로 희망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복이고 은혜입니다. 그런 판단, 소망, 생각은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또 주변에 그리고 환경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전염됩니다. 그래서 주변을 쇄신시키고 그곳에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긍정적인 생각과 판단은 소망을 불러오고 삶을 실제로 소망 적으로 이끌어갑니다. 성령은 소망의 영이시고 미래의 영이시고 은혜의 영이십니다.
항상 “폐하 잘된 일입니다”하고 말하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과 사냥을 갔습니다. 왕이 잘못해서 손가락 하나를 잃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때 이 신하가 “폐하 참 잘되었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 한마디 때문에 이 신하가 미움을 받아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얼마 후 이 왕이 다시 사냥을 갔습니다. 사냥하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식인종에게 붙잡혔습니다. 식인종이 입맛을 다시며 다가와 몸에 무슨 상처가 있는가 조사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손가락 하나가 없는 것을 보고는 먹이에 흠이 있다고 버리고 그냥 가 버렸습니다. 그 왕이 왕국에 돌아와 감옥에 있는 그 신하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왕이 지금까지 된 일을 자세하게 말하고 “미안하네, 자네 덕분에 내가 살았네” 하고 사과했습니다. 그때 그 신하가 또 말했습니다. “폐하 참 잘된 일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감옥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폐하와 또 사냥을 갔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저는 꼼짝없이 흠 없는 음식이 되어 식인종의 밥이 되었을 것 아닙니까“하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그 삶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언어이고 마음이고 생각이고 판단입니까.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도 성령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자연적 인간은 누구나 다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소망적으로 말하고 판단하며 살아가는 것도 성령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매사를 소망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갈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환경을 또한 소망적인 환경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능력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내 안의 상태를 일신시키시는 영이십니다. 그래서 때로 감격하게 하시고 감동하게 하시고 나를 변화시키기도 하십니다. 요한 웨슬리가 1738. 5. 24 저녁에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뜨거운 벅찬 감격이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밤 9. 15분경에 이르자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마음속의 모든 정욕과 죄가 물러가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온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영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웨슬리는 성령운동을 시작하여 마침내 부패와 타락으로 얼룩진 영국을 건져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능력의 상징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디엘 무디가 34세 때 11월 어느 날 뉴욕의 거리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때 걸으며 무디는 “성령이여 나를 강하게 붙잡으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그 입에서 방언이 터지면서 성령의 능력을 입게 되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그 능력에 힘입어 전무후무한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찰스 피니라는 전도자는 성령을 체험하고 난 후 19세기 2차 대전 때 미국에서 대 각성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그의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사람들이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설교할 때 사람들이 구르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고 합니다. 본문을 보면 성령을 체험한 후 베드로가 설교할 때 3천명이 회개했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인도하시기도 하고 벅찬 감격도 주시지만 때로 능력으로 나타나시기도 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실 때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전이라는 설교가가 말하기를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설교를 60년 하는 것 보다 성령의 능력으로 여섯 마디 하는 설교가 낫다“고 했습니다.
네 번째는 “성령은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전도와 선교하는 일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순전히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입니다. 목회도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목사를 통해서 교회를 부흥하게 하시고 사역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선교와 전도는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와 선교는 성령과 함께 동역하고 매사를 함께 하여야 비로소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 8:29를 보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하라고 하나님의 영이 빌립에게 명령”하셨습니다. 행 16:6을 보면 “사도 바울로 하여금 아시아에서 전도하지 못하도록 막으셨다”고 했습니다. 전도와 선교는 순전히 하나님의 영이 사람을 통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은 이렇게 인도하시고 안내하시고 능력을 주시고 전도하게 하십니다.
III
이렇게 되려면 몇 가지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성령은 움직이시는 영이십니다. 삶을 이끄시는 역동적인 영이십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많은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움직이시고 사용하시고 활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지금도 사람들을 불러내시고 활용하시고 사용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여기 이 자리에 까지 나와 앉게 된 것도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여기 이 자리에 까지 와 앉게 된데 는 누군가로부터 인도받고 안내받고 오셨지만 성령은 그 사람을 통해서 여러분을 여기 이 자리에 까지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성령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또 하나는 “성령과 인격적으로 동행하는 일”입니다. 성령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힘으로 이해하고 능력을 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하면 안 됩니다. 물론 성령은 힘으로 다가오시고 능력으로 다가오시지만 그 성령과는 인격적으로 동행하는 삶이 더 진정한 신앙인의 삶입니다. 사람과도 인격적으로 대하게 되면 더 깊어지고 이웃과도 인격적으로 대하게 되면 더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성령과의 관계도 이 인격적인 관계의 삶이 중요합니다.
미국에서 목회하시는 베니 힌 목사라는 분은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을 잘 때까지 수시로 성령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상담하고 동행하는 삶이 성령 충만한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순간마다 때마다 성령과 상의하고 묻고 상담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성령과의 인격적인 만남이고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인격적으로 모시지 않으면 성령을 거부하는 삶이고 성령을 무시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신앙인이 이렇게 성령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무시하며 살면 성령의 생각은 없어지고 육신의 정욕에 이끌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간적인 욕망에 집착하게 되고 내 뜻을 이루려고 몸부림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 5:16절을 보면 그런 삶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그리하면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육신의 열매인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롬 8:5를 보면 “육신을 따르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따르는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신앙인은 성령의 내주하심과 내재하심과 동역하심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강한 내주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신앙인이고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때 무능하기로 소문난 베드로가 하루아침에 능력의 사람으로 변화되듯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 받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에서 실패의 자리에서 불꽃으로 타오르는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