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 - 자비  (사63: 7-14,눅6:27-36)


오늘은 성령의 다섯 번째 열매로 '자비'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자비(慈悲)'라는 단어를 불교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많이 사용하지 않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경에는 '자비'라는 단어가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불교에서는 부처가 중생을 불쌍히 여겨 고통을 덜어주고 안락하게 해 주려는 마음을 가리켜 자비라고 합니다.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마음으로 인간에게 베푸시는 선의를 뜻합니다.

자비의 뜻


출애급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 자비로운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 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출 34:6


"주 너희의 하나님은 자비로운 하나님이시니, 너희를 버리시거나 멸하시지 않고, 또 너희의 조상과 맺으신 언약을 잊지도 않으실 것이다." 신 4:31


시편에서도 수 없이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번역할 때 불교의 용어에서 빌려왔는지 모르지만 '자비'의 개념은 성경의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용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사용된 용어로는 '라훔' 혹은 '라함'이라는 단어입니다. '라함'은 "깊이 사랑하다" "동정심을 갖다"라는 뜻으로 여자의 자궁을 뜻하는 '레헴'과 관계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나온 아기에 대한 그 어머니만이 알 수 있는 압도적이고 온정이 넘치는 사랑을 뜻합니다. 따라서 자비라는 말은 '부드럽다' '친절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아버지의 사랑임과 동시에 부드러운 어머니의 사랑의 속성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자비는 바로 하나님의 부드러운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는 같은 뜻이기는 합니다만 사랑은 좀더 폭넓은 개념이라면 자비는 그 사랑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부드럽게만 표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죄를 지은 이스라엘에게 심판의 채찍을 가하셨다고 할 때 그것도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훈련하시고,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자마다 채찍질하신다"(히 12:6)고 하신 것처럼 채찍을 통하여 사랑이 표현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비는 채찍이 아닌 부드러운 손길을 통하여 나타나는 사랑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그냥 사랑을 베풀어 달라고 하기보다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너무나도 많은 멸시를 받았습니다. 시 123:3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라틴어 "엘레이존"은 희랍어의 올리브 기름을 뜻하는 "엘라이온"과 관계가 있습니다. 올리브 기름은 대단히 중요한 생활필수품으로 상처난 곳에 이 기름을 바르기도 하고 왕을 구별하여 세울 때에 머리에 기름을 붓기도 합니다. 이 기름은 부드러운 것으로 음식의 맛을 내고 부드럽게 하며 상처에 바르므로 상처를 치유하여 줍니다. 자비를 베푸는 것은 이런 올리브 기름을 바르는 것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운 것을 뜻합니다.


이 자비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긍휼입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자비와 긍휼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개역성경에서 팔복 말씀 중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을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자비함을 입을 것이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결국 긍휼이나 자비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성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비가 성령의 열매인 까닭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깨우치실 때 우리 속에도 이 자비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무자비한 인간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나면서 인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자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무자비한 성품으로 변하여 하나님의 세계를 마구 파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런 인간의 무자비함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자기 제사는 받지 아니하시자 아벨을 돌로 때려 죽여버렸습니다. 자기 혈육인 아벨을 무자비하게 때려 죽인 가인은 바로 타락한 인간의 표본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세기 4장 23절에 보면 가인의 후손 가우데 라멕이란 자가 있는데 그가 지은 노래가 있습니다.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하였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 일곱 갑절이다."


사람 죽이는 것을 파리 목숨 끊듯하는 라멕의 포학한 성품을 그대로 나타내는 노래입니다. 살인을 밥먹듯 하면서도 조금도 뉘우침이나 부끄러움이 없는 그의 모습 속에서 인간의 무자비함의 무서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그들의 무자비함 때문이었습니다. 세 천사가 이 성에 찾아와 롯의 영접을 받아 그 집에 들었을 때에 그 성의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그 집에 몰려가 그 손님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이것은 나그네를 귀히 여기며 대접하는 전통을 무시한 무자비한 행동이었습니다. 낯선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자비라면 그 나그네를 욕보이는 것은 무자비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런 무자비한 행동에 대하여 심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 보면,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 신하가 임금의 자비로 그 빚을 탕감 받은 후 나가다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친구를 만나자 그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엎드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간청하였는데도 그를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무자비한 그의 행동을 분노를 느낀 사람들이 임금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그를 데려다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와 대조되는 인간의 무자비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특히 하나님의 율법을 빙자하여 이런 무자비함을 행하는 유대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 붙잡힌 여자를 돌로 때려죽이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죄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하시므로 자비심을 잃어버린 율법주의를 비판하셨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앞는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가 죄 없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 12:7


안식일이라고 생명을 구하기를 거부한 유대교의 무자비함에 대하여 예수님은 항거하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유대 종교의 무자비함을 또한 비판하셨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친 레위인과 제사장은 바로 자비를 잃어버린 유대교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대조적으로 사마리아인은 그를 돌보아 주었다고 하므로 누가 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가까이 있는가를 물으셨습니다. 그 때 질문을 던졌던 율법교사가 대답을 하였습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오늘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경제 세계화를 외치는 가진 자들에 의하여 오늘 가난한 자들은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있습니다. 힘있는 자들이 만든 법을 따라 힘없는 자들을 마구 짓밟아 버리는 무자비함 때문에 세계 도처에서 굶주림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의 가정이 파괴되고 있으며,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무자비함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 전체를 파괴하여 가고 있습니다. TV 보도를 통하여 보는 대로 멸종 되어가는 들짐승들을 마구 포획하는 사람들의 잔인함과 나무들을 마구 벌채하여 삼림을 황폐화시켜 버리는 무감각한 인간들, 이로 인하여 지금 피조세계 전체가 신음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무자비함을 통해서 파괴 되어가는 세계를 보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의 자비심의 회복이 시급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종교는 교리를 따지고 신학을 논하기에 앞서 자비를 회복하여야 할 때입니다.

아버지가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하라


예수님은 우리로 자비를 회복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오늘 읽어 드린 누가복음 말씀에 보면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할만한 사람을 사랑하는데 그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은 그를 배반하고 떠나간 이스라엘 자손들을 다시 돌이키시고 붙잡혀 갔던 바벨론 땅에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남편을 버리고 떠나간 아내 고멜을 다시 데려다가 아내로 삼는 호세아의 사랑을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자비는 주로 가난한 자, 고난 당하는 자, 찢긴 자, 울부짖는 자에게 내미는 사랑의 손길입니다. 강한 자, 부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약한 자를 찾아 나서며,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가 그들을 돕습니다.


우리 총회 사회부 산하에 노숙자 야간이동 상담이라는 이름으로 밤마다 각 지하철역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을 순회하면서 저들에게 따뜻한 차 한잔 혹은 사발면 같은 것을 나누어주고 저들을 위로하여 주는 전도사님이 계십니다. 몇 교회에서 자원하여 나온 학생 봉사자들과 함께 매일 밤 250여명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따뜻한 물 한 잔과 말 한마디가 절망에 빠진 노숙자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됩니다. 교회가 그래도 이런 자비를 베풀 줄 알 때 교회는 교회로써 온전하게 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큰 아들에게 요청하시는 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가지고 나가서 탕진하고 빈손으로 돌아온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큰 아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볼 때 맞는 이야기입니다. 작은 아들은 마땅히 처벌받아야 할 대상이지 잔치를 베풀어 환대할 대상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아버지도 이런 사실을 다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도 죽었다고 생각되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에 대하여 기뻐하는 마음을 가질 때이기에 그래서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경우에 자비심을 베푸는 것이 마땅한 인간의 자세임에 틀림이 없지만, 우리는 자비를 베풀기보다는 따지고 비판하면서 상대방을 구석으로 몰아붙이기를 좋아하고 그렇게 그가 당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통쾌함을 느끼곤 합니다. 이것이 우리 속에 자리한 무자비함의 모습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돌아온 아우를 보면서 먼저 달려가 껴안고 울 수 있는 자비가 형된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약 2:13


우리가 베푼 자비는 우리에게 다가올 심판을 면하게 한다고 야고보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심판의 비유에서도 주린 자에게 목마른 자에게, 병든 자에게, 옥에 갇힌 자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들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갔고, 그렇게 자비를 베풀지 않은 사람들은 지옥불로 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으로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 속에 자리잡았던 이기심과 탐욕들이 사라지게 되고 그 자리에 그가 하늘로부터 가져오신 자비한 마음이 자리잡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 비로소 우리는 거듭나게 되고 그리스도의 자비하심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약한 자를 불쌍히 여길 줄 아는 마음, 고난 당한 자를 돌아볼 수 있는 자비심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할 때에 가능합니다. 내가 얼마나 죄악에 치우친 존재이며,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인가를 깨닫고 회개하며 거듭날 때에 비로소 남을 돌아보게 되고 남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모두가 성령의 역사이기에 자비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비는 단순한 동정이 아닙니다. 자비의 행위는 바로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키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무자비함으로 파괴된 하나님의 세계를 회복하고 그 무자비함으로 인하여 고난당한 자들을 위로하며 붙들어 주는 일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여러분 가까이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목 마른 자에게 물 한 그릇을 대접하십시오. 그것이 그 사람을 진정으로 돕는 것이 되지 못한다고 핑계 대지 말고 무조건 자비를 베푸십시오. 절망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들을 붙들어 주십시오. 따뜻한 말 한 마디가 그들을 그 절망에서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고픈 자에게 밥 한 그릇을 주십시오. 저들의 허기진 배를 채움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입니다. 자비는 냉철한 이성의 판단을 앞세우기보다는 먼저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따지기보다는 먼저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오늘의 그늘진 현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자비를 베풀지 않는 것은 죄악입니다. 고난의 현장을 외면하지 않고 찾아가서 그들을 돕는 일은 오늘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우리가 베푼 자비는 하나님의 자비를 우리에게 더욱 풍성하게 넘치게 하는 첩경임을 기억하면서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인 자비를 우리의 삶 속에 항상 넘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제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여러분의 친절한 자비의 손길을 펼치십시오. 그 손길이 닿는 곳에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무자비하게 파괴되어가는 하나님의 세계를 회복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유경재목사님 설교자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