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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만물의 으뜸 (골로새서 1:15~20)
영국의 산부인과 의사였던 제임스 심프슨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라는 창세기 2장 21절 말씀을 읽고 어떻게 하면 수술 환자의 고통을 잊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다가 여러 가지 용도로 널리 쓰이던 클로로포름에 대해서 듣고 그것을 마취제로 사용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위대한 의사요 또한 과학자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그에게 지금까지 그가 발견한 것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발견한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라네!"
참으로 많은 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 역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반발하며 도전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오늘에 와서 그런 현상이 극에 달한 것 같습니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도 “그 스토리 자체가 가설에 불과하고 근거가 전혀 없는 소설이기 때문에 비판하기조차 어렵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예상 외로 커다란 인기를 얻지 않았습니까? 무려 40 개 국어로 번역되어 3,000만 부 이상 팔린 그 소설은 미국에서 138 주 동안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꽤 많이 팔린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을 가리켜서 “기독교의 진리를 공격하는 것을 통해서 만족을 얻으려는 이 시대의 그릇된 풍조와 지적 오만이 짙게 깔려 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도전에 대해서 그 도전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는 과연 어떤 대비책을 세우고 있습니까? 아니 교회의 지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각기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는 그냥 사대 성인 중에 하나가 아니냐?”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또 사람들은 말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어떻고 부처를 믿으면 어떠냐?” 그런 사람들에게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 종교 문제에 대해서 간섭하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따지지 말고 무조건 믿어!”라고 한다면 그것은 “믿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무책임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그런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그 구원의 능력을 부인하려는 시도는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골로새 교회도 그런 도전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제자 에바브라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로서 그가 특별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골로새 교회에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거짓 교사들이 침투해서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로마 감옥에서 그런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곧 이 편지를 써서 보냈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가장 심각한 다툼의 주제가 바로 “예수가 누구인가?”하는 문제였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예수는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릇된 생각을 가진 자들이 예수의 신성을 부인함으로써 교회를 심히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많은 이단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라는 한 인간을 택하셨는데 그 예수는 보통 인간보다 뛰어나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그런 주장대로라면 굳이 예수가 아니라도 누구나 그 사역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게 됩니다. “꼭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느냐?”는 이의 제기도 바로 그런 그릇된 주장에서 비롯될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를 어떻게 고백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를 어떻게 고백하느냐에 따라서 고백하는 사람의 삶이 달라집니다. 예수가 사대 성인 가운데 하나이고 꼭 그를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는 말씀을 믿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단순히 호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청혼하는 사람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동시에 사랑을 고백합니까? 오직 한 사람에게만 청혼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그에게 던지는 결단의 표현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던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의 주, 구원의 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근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하십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4장 4절 말씀을 통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기자도 요한복음 1장 18절 말씀을 통해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이라고 스스로 선포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성부와 성자가 완전히 동등하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십니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만 시간적으로 다른 피조물보다 우선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창조에 있어서 주도성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은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 즉 천사들까지도 모두가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있으며, 그의 능력을 통해서 존재하게 되었고 또한 그를 위해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은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좀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의 힘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지으심을 받았다고 고백한다면 이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옛날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14장 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사나 죽으나 그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 여기서 머리, 근본, 먼저 나신 이, 그리고 으뜸이라는 단어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만물의 관계를 잘 나타내 보여 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위치를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 되신 것은 세상 권세 잡은 자들처럼 무력이나 재물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그 안에 거하기 때문이며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과 화목을 이루심으로써 우리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하나님 되심을 인정할 때 우리도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며 그 어떤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넉넉히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의 위대한 선교사 리빙스턴은 말년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학위 수여식에 앞선 예배 시간에 리빙스턴은 학생들 앞에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그의 오른 팔은 사자의 공격으로 불구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진지하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연설을 마치자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일어서서 그렇게 힘든 아프리카에서의 생활을 잘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리빙스턴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비결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십자가가 나를 끝까지 붙들어 줬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그 구원의 능력을 부인하려는 시도는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참 신이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과연 뭐라고 대답하고 있습니까?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해서 감정적으로 대응하거나 아니면 아예 침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어려운 상황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만물의 창조자가 되시며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확실히 믿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옛날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우리의 존재 근거가 만물의 으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고 그 주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며 그 주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건설하기 위해서 죽도록 충성하기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여러분 모두의 삶의 자리에 하늘의 신비한 기쁨과 평화가 항상 넘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 목사 설교 중에서
영국의 산부인과 의사였던 제임스 심프슨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라는 창세기 2장 21절 말씀을 읽고 어떻게 하면 수술 환자의 고통을 잊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다가 여러 가지 용도로 널리 쓰이던 클로로포름에 대해서 듣고 그것을 마취제로 사용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위대한 의사요 또한 과학자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그에게 지금까지 그가 발견한 것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발견한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라네!"
참으로 많은 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 역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반발하며 도전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오늘에 와서 그런 현상이 극에 달한 것 같습니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도 “그 스토리 자체가 가설에 불과하고 근거가 전혀 없는 소설이기 때문에 비판하기조차 어렵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예상 외로 커다란 인기를 얻지 않았습니까? 무려 40 개 국어로 번역되어 3,000만 부 이상 팔린 그 소설은 미국에서 138 주 동안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꽤 많이 팔린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을 가리켜서 “기독교의 진리를 공격하는 것을 통해서 만족을 얻으려는 이 시대의 그릇된 풍조와 지적 오만이 짙게 깔려 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도전에 대해서 그 도전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는 과연 어떤 대비책을 세우고 있습니까? 아니 교회의 지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각기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는 그냥 사대 성인 중에 하나가 아니냐?”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또 사람들은 말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어떻고 부처를 믿으면 어떠냐?” 그런 사람들에게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 종교 문제에 대해서 간섭하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따지지 말고 무조건 믿어!”라고 한다면 그것은 “믿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무책임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그런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그 구원의 능력을 부인하려는 시도는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골로새 교회도 그런 도전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제자 에바브라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로서 그가 특별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골로새 교회에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거짓 교사들이 침투해서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로마 감옥에서 그런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곧 이 편지를 써서 보냈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가장 심각한 다툼의 주제가 바로 “예수가 누구인가?”하는 문제였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예수는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릇된 생각을 가진 자들이 예수의 신성을 부인함으로써 교회를 심히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많은 이단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라는 한 인간을 택하셨는데 그 예수는 보통 인간보다 뛰어나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그런 주장대로라면 굳이 예수가 아니라도 누구나 그 사역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게 됩니다. “꼭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느냐?”는 이의 제기도 바로 그런 그릇된 주장에서 비롯될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를 어떻게 고백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를 어떻게 고백하느냐에 따라서 고백하는 사람의 삶이 달라집니다. 예수가 사대 성인 가운데 하나이고 꼭 그를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는 말씀을 믿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단순히 호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청혼하는 사람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동시에 사랑을 고백합니까? 오직 한 사람에게만 청혼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그에게 던지는 결단의 표현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던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의 주, 구원의 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근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하십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4장 4절 말씀을 통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기자도 요한복음 1장 18절 말씀을 통해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이라고 스스로 선포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성부와 성자가 완전히 동등하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십니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만 시간적으로 다른 피조물보다 우선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창조에 있어서 주도성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은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 즉 천사들까지도 모두가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있으며, 그의 능력을 통해서 존재하게 되었고 또한 그를 위해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은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좀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의 힘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지으심을 받았다고 고백한다면 이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옛날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14장 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사나 죽으나 그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 여기서 머리, 근본, 먼저 나신 이, 그리고 으뜸이라는 단어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만물의 관계를 잘 나타내 보여 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위치를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 되신 것은 세상 권세 잡은 자들처럼 무력이나 재물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그 안에 거하기 때문이며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과 화목을 이루심으로써 우리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하나님 되심을 인정할 때 우리도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며 그 어떤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넉넉히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의 위대한 선교사 리빙스턴은 말년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학위 수여식에 앞선 예배 시간에 리빙스턴은 학생들 앞에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그의 오른 팔은 사자의 공격으로 불구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진지하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연설을 마치자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일어서서 그렇게 힘든 아프리카에서의 생활을 잘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리빙스턴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비결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십자가가 나를 끝까지 붙들어 줬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그 구원의 능력을 부인하려는 시도는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참 신이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과연 뭐라고 대답하고 있습니까?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해서 감정적으로 대응하거나 아니면 아예 침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어려운 상황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만물의 창조자가 되시며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확실히 믿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옛날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우리의 존재 근거가 만물의 으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고 그 주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며 그 주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건설하기 위해서 죽도록 충성하기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여러분 모두의 삶의 자리에 하늘의 신비한 기쁨과 평화가 항상 넘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