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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만을 바라보자 (히 12: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우리 주님의 평화가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새해가 시작되어 제가 여러분에게 "일어나자"고 여러 번 권하였지만, 아직도 채 일어나지 못하신 분들도 계신 듯하고, 일어나긴 했지만 제대로 걷거나 뛰지도 못하시는 분들도 있는 듯합니다. 그래도 눈앞에서 넘어지신 분들은 부축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넘어지신 분들과 신앙이 거의 죽어버린 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안타깝기가 그지없습니다. 인생도 그렇지만, 신앙생활도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 마라톤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차게 출발했더라도, 아무리 멀리 뛰어 나갔더라도, 중도에 포기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옛 속담처럼 "가다가 아니 가면, 아니 가는 것만도 못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출발했다면, 아무리 멀리 뛰어가고 있더라도, 자만하지 말고 끝까지 뛰어가야만 합니다. 아무리 지치고 힘들더라도, 설령 중도에 넘어지고 쓰러졌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 뛰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목표에 도달할 수 있고, 상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로마 황제의 극심한 핍박과 내외적인 고난 가운데 있는 교회에 용기와 격려를 주기 위해 쓰여진 말씀입니다. 이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박해 초에는 이방인의 땅에서 믿음을 잘 지켰지만, 박해가 계속되고 살기가 점점 어려워지니까, 낙담하거나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점차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은 그들에게, 예수님처럼 고난을 참고 견딤으로써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잘 마치기를 권합니다. 다행히 오늘 우리는 초대교회가 받았던 그런 극심한 박해는 받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신앙의 자유 때문에 고난을 받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국교회는 점차 무기력해지고 침체되어 갑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 말씀을 드리자면,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첫째로, 무거운 것을 벗어버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믿음의 경주를 하던 초대 교회의 성도들에게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버릴 것"을 권합니다. 모든 운동 시합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달리기 시합에 참석하는 자들은 모두 몸을 가볍게 합니다. 아무리 값지고 귀한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경주를 하려는 사람은 무게가 나가는 것들을 모두 버립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는 결코 끝까지 잘 달릴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믿음의 경주에서 가급적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야만 합니다. 오늘날 믿음의 경주에서 중도에 탈락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대개 몸과 마음을 무겁게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무거운 짐이 된 것은 무엇입니까? 지나친 욕심, 즉 탐심입니다. 지금 자신이 갖고 있는 것들도 너무 무거워서 달리기 어려운데, 주위를 둘러보면서 온갖 탐이 나는 것마다 모두 부러워한다면, 어찌 빨리 달릴 수 있겠습니까?
만약 사람에게 욕심이 전혀 없다면, 그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늘의 천사도, 아니 하나님도 욕심이 있을 것입니다. 욕심이 있어야만, 뭔가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욕심이 완전히 사라지면, 죽어야 할 날만 남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욕심이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성경도 종종 욕심을 경계합니다. 욕심에 끌려가는 삶을 경계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경계하는 욕심은 대개 단순한 욕심이라기보다는 자기중심적인 욕심, 지나친 욕심, 비뚤어진 욕심입니다. 성경은 이를 탐심이라고 말하고, 탐심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중도에서 믿음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은 거의 세상 욕심이 지나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이 마음과 몸을 가득 채우고 보니, 하나님이 들어가실 틈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틈이 좀 있더라도, 그곳마저 세상 욕심으로 가득 채우려다 보니, 결국엔 하나님조차 완전히 쫓아버리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열심히 일하셔서 많은 돈을 버시기를 바랍니다. 배가 뜨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하듯이,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물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마음을 재물로 온통 채우지는 마십시오. 배에 물이 가득 차면 배가 갈아 앉듯이, 마음이 재물로 가득 차면 마음도 망가지고 맙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어쩌다 많은 재물을 갖게 되었다면, 보람있는 일에 잘 쓰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몸과 마음이 돈으로, 세상 욕심으로 가득 차게 되면, 믿음의 경주를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큰 불편이 없다면, 그리고 적당한 낙을 누릴 수 있는 적당한 재물이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리고 남은 시간과 정력과 재물을 믿음의 경주에 쏟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달릴 수 있고, 그래야만 승리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둘째로, 사람들이 믿음의 경주에서 떨어져 나가는 이유는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무거운 것을 벗어버릴 뿐만 아니라, '얽매이기 쉬운 죄'도 벗어버릴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달리기 선수의 손과 발에 무거운 쇠고랑이 채워져 있다면, 어찌 빨리 달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성도가 믿음의 경주를 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붙잡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말씀은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죄를 일일이 설명할 시간은 없습니다. 죄가 무겁고 무서운 것은 심판이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길이 참으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잘못을 일일이 심판하신다면, 살아 있을 자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죄고 무겁고 무섭지만, 죄에 못지 않게 무겁고 무서운 것은 죄책감과 좌절감입니다. 만약 달리기 경주를 하는 선수가 이미 저지른 실수와 잘못에 대한 죄책감에 계속 매어 있다면, 힘차게 앞으로 뛸 수 없습니다. 지나간 상처와 분노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앞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지 못합니다.
다른 교회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교회가 힘차게 전진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많은 분들이 과거에 매여 자유롭지 못합니다. 과거의 실수와 잘못이 우리 교회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심각하게 얽어매는 것은 죄책감과 좌절감입니다. 지난 시절에 누가, 어떻게 실수하고 잘못을 했든지 간에, 하나님은 이미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과거의 잘못을 훌훌 털어야 합니다. 나도 용서하고, 남도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용기를 갖고 새 출발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여러분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서로에 대해 불신과 원망을 품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아직까지 옛날에 받았던 상처와 옛날에 경험했던 좌절감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시지는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모두 죄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신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실수와 잘못만 저질렀습니다. 나도 안 되지만, 저 사람도 안 됩니다. 우리 교회는 안 됩니다. 앞으로도 해 보나마납니다."라고 변명하면서, 무슨 일을 해보기도 전에 이런저런 핑계부터 둘러대고, 무슨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섣불리 체념하고 성급히 좌절하는 것도 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뛰지 못하게 하는 과거의 죄, 아니 죄책감과 좌절감을 제발 훌훌 털어 버립시다.
(3) 셋째로, 사람들이 믿음의 경주에서 떨어져 나가는 이유는 인내심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고 말합니다.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 경주는 속도보다는 지속적인 힘이 더 중요합니다. 마라톤은 그리스에서 시작된 경기입니다.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의 동북방에 위치한 옛 싸움터의 지명 이름이 '마라톤'이라고 합니다. 마라톤 경주의 표준 거리는 42.195km 입니다. 세계최고 기록이 2시간 6분대라고 합니다. 2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뛰는 일은 보통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라톤 경기에는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숨이 차서 꼭 죽을 것만 같은,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이 있다고 합니다. 특히 42km나 되는 거리에서 28km에서 32km의 지점이 고비라고 합니다. 이 지점에서 선수들이 가장 고통스럽고 힘이 든다고 합니다. 바로 이 때가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있는 가장 힘겨운 때라고 합니다. 이 고비만 넘기면, 그 다음부터는 오히려 새로운 힘이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때에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극복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라톤'을 육상경기의 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라톤에서 승리한 자에게는 '금메달'뿐만 아니라 '월계관'도 머리에 씌워 줍니다. 마라톤 경기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때때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공의 비결은 남다른 재수나 특별한 능력에 있다기보다는, 어려운 고비를 잘 참고 넘기는 인내심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괴테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 '파우스트'를 약 60년 동안 썼다고 합니다. 지금 한창 방영되고 있는 '토지'라는 대하소설도 박경리씨가 거의 평생 동안 썼다고 합니다. 독일에 가보면, 500년 이상 짓고 있는 거대한 성당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공은 능력의 열매라기보다는 인내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낙심할 때도 있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게을러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참고 견디십시오. 그래야만 승리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습니다.
(4) 사람들이 믿음의 경주에서 떨어져 나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목표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마라톤을 모든 경기의 꽃이라 말합니다. 마라톤은 꽃처럼 아름답고 귀하고 영광스럽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식물이 키우는 이유는 대개 꽃을 보기 위함입니다. 물론 열매를 따기 위해 식물을 키우는 사람들도 많지만, 대개 모든 열매도 꽃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든 식물 자신이든, 꽃을 피우려고 얼마나 수고를 많이 하겠습니까? 오직 꽃을 피우려는 일념으로 식물은 모든 시련을 견디어 냅니다. 오직 꽃을 따려는 일념으로 사람들은 꽃을 정성껏 가꿉니다. 이처럼 마라톤에 참석하는 선수들도 오직 꽃과 같은 마라톤 경기에서 꽃과 같은 열매를 따려고, 즉 최후의 상급을 따려고 끝까지 뜁니다. 아니 설령 일등을 하여 금메달과 면류관을 받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온갖 장애를 무릅쓰고, 꼴찌가 되더라도, 끝까지 달리는 선수들도 큰 박수갈채를 받습니다. 어떤 때에는 일등을 차지한 선수보다 끝까지 달린 선수가 더 훌륭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뛸 수 있습니까? 물론 무거운 것들을 벗어버려야 하고, 얽매는 것들도 벗어버려야 하고, 끝까지 참고 뛰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목표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목표의식이 뚜렷하고 분명해야 합니다. 아무리 잘 달려도, 다른 목표 지점으로 달려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목표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선수는 끝까지 뜁니다. 오늘날 믿음의 경주에서 떨어진 사람들은 대개 인생의 목표를 잘못 정했거나, 중도에 그 목표를 잃어버렸거나, 엉뚱한 목표로 달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달리기 전에 먼저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하며, 달리는 중에도 끝까지 목표를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경주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물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상급은 아직 우리에게 희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로 확실히 인도할 분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분을 분명히 보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단지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분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또한 믿음의 목표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모범일 뿐만 아니라 믿음의 목표입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짐과 죄를 벗어버리고 경주를 시작하신 분만이 아니라, 인내로 경주를 잘 마치신 분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하나님과 나란히,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세상에서 죽음의 심판을 받으신 예수님이 이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분명히, 끝까지 바라봄으로써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합시다.
출처/이신건 목사 설교 중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우리 주님의 평화가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새해가 시작되어 제가 여러분에게 "일어나자"고 여러 번 권하였지만, 아직도 채 일어나지 못하신 분들도 계신 듯하고, 일어나긴 했지만 제대로 걷거나 뛰지도 못하시는 분들도 있는 듯합니다. 그래도 눈앞에서 넘어지신 분들은 부축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넘어지신 분들과 신앙이 거의 죽어버린 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안타깝기가 그지없습니다. 인생도 그렇지만, 신앙생활도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 마라톤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차게 출발했더라도, 아무리 멀리 뛰어 나갔더라도, 중도에 포기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옛 속담처럼 "가다가 아니 가면, 아니 가는 것만도 못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출발했다면, 아무리 멀리 뛰어가고 있더라도, 자만하지 말고 끝까지 뛰어가야만 합니다. 아무리 지치고 힘들더라도, 설령 중도에 넘어지고 쓰러졌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 뛰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목표에 도달할 수 있고, 상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로마 황제의 극심한 핍박과 내외적인 고난 가운데 있는 교회에 용기와 격려를 주기 위해 쓰여진 말씀입니다. 이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박해 초에는 이방인의 땅에서 믿음을 잘 지켰지만, 박해가 계속되고 살기가 점점 어려워지니까, 낙담하거나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점차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은 그들에게, 예수님처럼 고난을 참고 견딤으로써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잘 마치기를 권합니다. 다행히 오늘 우리는 초대교회가 받았던 그런 극심한 박해는 받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신앙의 자유 때문에 고난을 받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국교회는 점차 무기력해지고 침체되어 갑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 말씀을 드리자면,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첫째로, 무거운 것을 벗어버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믿음의 경주를 하던 초대 교회의 성도들에게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버릴 것"을 권합니다. 모든 운동 시합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달리기 시합에 참석하는 자들은 모두 몸을 가볍게 합니다. 아무리 값지고 귀한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경주를 하려는 사람은 무게가 나가는 것들을 모두 버립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는 결코 끝까지 잘 달릴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믿음의 경주에서 가급적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야만 합니다. 오늘날 믿음의 경주에서 중도에 탈락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대개 몸과 마음을 무겁게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무거운 짐이 된 것은 무엇입니까? 지나친 욕심, 즉 탐심입니다. 지금 자신이 갖고 있는 것들도 너무 무거워서 달리기 어려운데, 주위를 둘러보면서 온갖 탐이 나는 것마다 모두 부러워한다면, 어찌 빨리 달릴 수 있겠습니까?
만약 사람에게 욕심이 전혀 없다면, 그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늘의 천사도, 아니 하나님도 욕심이 있을 것입니다. 욕심이 있어야만, 뭔가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욕심이 완전히 사라지면, 죽어야 할 날만 남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욕심이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성경도 종종 욕심을 경계합니다. 욕심에 끌려가는 삶을 경계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경계하는 욕심은 대개 단순한 욕심이라기보다는 자기중심적인 욕심, 지나친 욕심, 비뚤어진 욕심입니다. 성경은 이를 탐심이라고 말하고, 탐심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중도에서 믿음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은 거의 세상 욕심이 지나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이 마음과 몸을 가득 채우고 보니, 하나님이 들어가실 틈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틈이 좀 있더라도, 그곳마저 세상 욕심으로 가득 채우려다 보니, 결국엔 하나님조차 완전히 쫓아버리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열심히 일하셔서 많은 돈을 버시기를 바랍니다. 배가 뜨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하듯이,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물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마음을 재물로 온통 채우지는 마십시오. 배에 물이 가득 차면 배가 갈아 앉듯이, 마음이 재물로 가득 차면 마음도 망가지고 맙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어쩌다 많은 재물을 갖게 되었다면, 보람있는 일에 잘 쓰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몸과 마음이 돈으로, 세상 욕심으로 가득 차게 되면, 믿음의 경주를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큰 불편이 없다면, 그리고 적당한 낙을 누릴 수 있는 적당한 재물이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리고 남은 시간과 정력과 재물을 믿음의 경주에 쏟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달릴 수 있고, 그래야만 승리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둘째로, 사람들이 믿음의 경주에서 떨어져 나가는 이유는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무거운 것을 벗어버릴 뿐만 아니라, '얽매이기 쉬운 죄'도 벗어버릴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달리기 선수의 손과 발에 무거운 쇠고랑이 채워져 있다면, 어찌 빨리 달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성도가 믿음의 경주를 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붙잡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말씀은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죄를 일일이 설명할 시간은 없습니다. 죄가 무겁고 무서운 것은 심판이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길이 참으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잘못을 일일이 심판하신다면, 살아 있을 자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죄고 무겁고 무섭지만, 죄에 못지 않게 무겁고 무서운 것은 죄책감과 좌절감입니다. 만약 달리기 경주를 하는 선수가 이미 저지른 실수와 잘못에 대한 죄책감에 계속 매어 있다면, 힘차게 앞으로 뛸 수 없습니다. 지나간 상처와 분노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앞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지 못합니다.
다른 교회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교회가 힘차게 전진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많은 분들이 과거에 매여 자유롭지 못합니다. 과거의 실수와 잘못이 우리 교회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심각하게 얽어매는 것은 죄책감과 좌절감입니다. 지난 시절에 누가, 어떻게 실수하고 잘못을 했든지 간에, 하나님은 이미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과거의 잘못을 훌훌 털어야 합니다. 나도 용서하고, 남도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용기를 갖고 새 출발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여러분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서로에 대해 불신과 원망을 품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아직까지 옛날에 받았던 상처와 옛날에 경험했던 좌절감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시지는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모두 죄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신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실수와 잘못만 저질렀습니다. 나도 안 되지만, 저 사람도 안 됩니다. 우리 교회는 안 됩니다. 앞으로도 해 보나마납니다."라고 변명하면서, 무슨 일을 해보기도 전에 이런저런 핑계부터 둘러대고, 무슨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섣불리 체념하고 성급히 좌절하는 것도 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뛰지 못하게 하는 과거의 죄, 아니 죄책감과 좌절감을 제발 훌훌 털어 버립시다.
(3) 셋째로, 사람들이 믿음의 경주에서 떨어져 나가는 이유는 인내심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고 말합니다.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 경주는 속도보다는 지속적인 힘이 더 중요합니다. 마라톤은 그리스에서 시작된 경기입니다.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의 동북방에 위치한 옛 싸움터의 지명 이름이 '마라톤'이라고 합니다. 마라톤 경주의 표준 거리는 42.195km 입니다. 세계최고 기록이 2시간 6분대라고 합니다. 2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뛰는 일은 보통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라톤 경기에는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숨이 차서 꼭 죽을 것만 같은,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이 있다고 합니다. 특히 42km나 되는 거리에서 28km에서 32km의 지점이 고비라고 합니다. 이 지점에서 선수들이 가장 고통스럽고 힘이 든다고 합니다. 바로 이 때가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있는 가장 힘겨운 때라고 합니다. 이 고비만 넘기면, 그 다음부터는 오히려 새로운 힘이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때에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극복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라톤'을 육상경기의 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라톤에서 승리한 자에게는 '금메달'뿐만 아니라 '월계관'도 머리에 씌워 줍니다. 마라톤 경기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때때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공의 비결은 남다른 재수나 특별한 능력에 있다기보다는, 어려운 고비를 잘 참고 넘기는 인내심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괴테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 '파우스트'를 약 60년 동안 썼다고 합니다. 지금 한창 방영되고 있는 '토지'라는 대하소설도 박경리씨가 거의 평생 동안 썼다고 합니다. 독일에 가보면, 500년 이상 짓고 있는 거대한 성당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공은 능력의 열매라기보다는 인내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낙심할 때도 있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게을러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참고 견디십시오. 그래야만 승리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습니다.
(4) 사람들이 믿음의 경주에서 떨어져 나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목표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마라톤을 모든 경기의 꽃이라 말합니다. 마라톤은 꽃처럼 아름답고 귀하고 영광스럽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식물이 키우는 이유는 대개 꽃을 보기 위함입니다. 물론 열매를 따기 위해 식물을 키우는 사람들도 많지만, 대개 모든 열매도 꽃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든 식물 자신이든, 꽃을 피우려고 얼마나 수고를 많이 하겠습니까? 오직 꽃을 피우려는 일념으로 식물은 모든 시련을 견디어 냅니다. 오직 꽃을 따려는 일념으로 사람들은 꽃을 정성껏 가꿉니다. 이처럼 마라톤에 참석하는 선수들도 오직 꽃과 같은 마라톤 경기에서 꽃과 같은 열매를 따려고, 즉 최후의 상급을 따려고 끝까지 뜁니다. 아니 설령 일등을 하여 금메달과 면류관을 받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온갖 장애를 무릅쓰고, 꼴찌가 되더라도, 끝까지 달리는 선수들도 큰 박수갈채를 받습니다. 어떤 때에는 일등을 차지한 선수보다 끝까지 달린 선수가 더 훌륭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뛸 수 있습니까? 물론 무거운 것들을 벗어버려야 하고, 얽매는 것들도 벗어버려야 하고, 끝까지 참고 뛰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목표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목표의식이 뚜렷하고 분명해야 합니다. 아무리 잘 달려도, 다른 목표 지점으로 달려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목표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선수는 끝까지 뜁니다. 오늘날 믿음의 경주에서 떨어진 사람들은 대개 인생의 목표를 잘못 정했거나, 중도에 그 목표를 잃어버렸거나, 엉뚱한 목표로 달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달리기 전에 먼저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하며, 달리는 중에도 끝까지 목표를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경주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물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상급은 아직 우리에게 희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로 확실히 인도할 분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분을 분명히 보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단지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분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또한 믿음의 목표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모범일 뿐만 아니라 믿음의 목표입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짐과 죄를 벗어버리고 경주를 시작하신 분만이 아니라, 인내로 경주를 잘 마치신 분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하나님과 나란히,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세상에서 죽음의 심판을 받으신 예수님이 이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분명히, 끝까지 바라봄으로써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합시다.
출처/이신건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