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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있는 예수 (막1장 21~28)
권위(Authority)와 권력(Power)은 비슷해 보입니다. 사전을 보면 이렇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권위란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이다.” 그리고 “권력이란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이다.” 그러니까 권위나 권력 모두 자기 의지대로 다른 사람을 행동하게 하는 힘이라는 점에서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권위와 권력은 다른 것입니다. 우선 다른 사람들을 행동하게 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권위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자발적으로 행동하게 합니다. 이에 비해 권력은 지위나 힘을 이용해서 강제로 행동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권위는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지만 권력은 어쩔 수 없는 복종을 이끌어냅니다.
다음으로 얻는 과정이 다릅니다. 권위는 사람들을 감동시켜서 얻게 됩니다. 그러나 권력은 합법적으로 갖게 되기도 하고 물려받기도 하고 사기도 하고 빼앗기도 합니다. 그래서 존경받는 지도자는 권위로 사람들을 이끌지만 독재자나 무능한 지도자는 권력으로 사람들을 통제합니다.
80년대 5공 시절 “땡전 뉴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KBS 방송은 오후 9시가 되면 “땡”하고 9시 시보를 알리면서 바로 “전두환 대통령은...”하고 9시 뉴스를 시작했습니다. “땡”하면 “전”하고 뉴스가 시작된다고 해서 땡전뉴스입니다. 사람들은 9시 뉴스가 시작되면 TV를 껐다가 5분쯤 지난 후에 다시 틀곤 했습니다. 당시 대통령이 권력을 장악했지만 국민들로부터 권위를 얻지는 못했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권위로 이끄는 지도자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따르는 추종자들도 역시 행복합니다. 그러나 권위를 잃어버리고 권력을 휘두르는 지도자는 불행합니다. 역시 따르는 추종자들도 불행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불행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권위를 잃어버리고 권력으로 사회를 움직여 나간다는 것입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권위를 잃어버렸습니다. 학교에서 교수나 선생님들이 권위를 잃어버렸습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권위를 잃어버렸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영적 지도자들이 권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행복하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권위를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권위를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마가복음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인간에게 진정한 복음이 무엇인가를 그 시작에서부터 설명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복음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것을 풀이해 보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것이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이점을 보다 자세하게 설명해 나갑니다. 예수가 왜 하나님의 아들이며, 왜 그리스도이신가를 설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신 것은 그분이 가지신 놀라운 권위 때문임을 말씀하고자 합니다. 이분은 이 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저 하늘의 권위를 가지셨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권력도 갖지 못하셨던 분이 그 누구도 가지지 못했던 놀라운 권위를 가지셨다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가지신 이 놀라운 권위를 통해 그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점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예수의 권위를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의 권위
본문 21절을 보면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느 마을처럼 가버나움에도 회당이 있었습니다. 한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는 기회를 얻으셔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22절을 보면 가르치신 후 반응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한 마디로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던 랍비들이나 서기관들과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권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말씀은 왜 권위가 있었을까요?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 말씀 속에서 놀라운 권위를 경험할 수 있었을까요? 본문에서 그 이유를 직접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전체를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신 말씀 자체의 권위 때문입니다.
마 7:28 이하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말씀하신 후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역시 그 말씀에서 놀라운 권위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5:17을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처럼 소중하게 지켜오던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완전케 하시려 오셨다는 것입니다. 랍비들이나 서기관들이 이 말씀들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5:2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율법에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고 써있으니까 살인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형제를 미워하고 때리고 학대해도 괜찮은 것처럼 가르치고 행동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점을 지적하시고 완전케 바로 잡아서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에게 화내는 사람도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니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말씀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놀라운 말씀의 권위로 사람들을 사로잡으셨습니다. 비록 아무런 권력도 없으셨지만 그 놀라운 말씀의 권위로 사람들을 움직이셨습니다. 변화시키셨고 이끄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말씀 속에서 특별한 권위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그분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이 내 삶속에 임하게 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그 말씀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 말씀으로 세상을 움직이고 변화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어떤 권력을 의지하기 보다는 말씀의 권위를 힘 입고 이 세상을 변화시켜나가야 하겠습니다.
둘째, 말씀 실천의 권위 때문입니다.
요일 1:1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사도 요한이 편지에 쓴 내용입니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말씀을 들었을 뿐 아니라 눈으로 보았고 그것도 자세히 보았고 또 손으로 만졌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듣는 것인데 그 말씀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또 만졌다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3년간 예수님과 동거동락했습니다.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까 그분 자신이 말씀이셨습니다. 그분이 사신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만졌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말씀을 듣게 해 주실 뿐아니라 말씀을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친히 죽으셨습니다. 말씀을 듣게 해 주실 뿐아니라 말씀을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요 20:24 이하를 보면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여러 차례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증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의심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손가락을 내밀어 그 옆구리 창 자국을 만져보게 하셨습니다.
도마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부활하신 예수님 그 자체가 놀라운 권위였습니다. 감히 누가 부활할 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누가 부활한다고 그대로 부활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삶 자체가 말씀이셨습니다. 그분의 삶이 말씀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하신 말씀과 삶이 온전히 하나였습니다. 거기에서 놀라운 권위를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신 주님의 그 놀라운 권위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한 말을 철저하게 지킴으로 나름대로의 권위를 세워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권력을 추구하기 보다는 말과 실천을 하나로 만들어 가면서 권위를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능력의 권위
본문 2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계실 때 방해하는 세력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바로 귀신입니다.
귀신은 이미 한 영혼을 완전히 장악하여 파멸케 했습니다. 그 사람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귀신에게 완전히 장악되어 귀신의 노예로 비참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땅 택하신 백성 중에 이미 귀신에 사로잡힌 영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려 할 때 가로막고 나선 것입니다. 방해하고 나선 것입니다. 귀신이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마침” 그 때 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던 가버나움 회당 바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가로막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신이 역사합니다. 우선 사람 속에 들어와 그 영혼을 파멸시킵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호시탐탐 노립니다. 여러 경우 그 심령 속에 들어가 장악합니다. 꼼짝 못하게 하고 노예처럼 부립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에 이미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습니다. 말씀의 역사를 방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분열시키고 무너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여러 경우 이 귀신의 세력에 장악당한 교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 볼 수 없이 노예처럼 귀신의 뜻대로 끌려다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속으면 안됩니다. 우선 귀신이 없다는 말에 속으면 안됩니다. 오늘과 같은 과학문명이 발달한 시대에 귀신이 어디있느냐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귀신은 에덴동산 때부터 있었고 성경시대에도 있었고 오늘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또한 귀신이 이렇게 생겼다 저렇게 생겼다는 말에 속으면 안됩니다. 요즘 덥다고 공포체험이라 해서 처녀귀신, 드라큐라같은 귀신, 시체와 같은 귀신 등 야단입니다. 귀신은 절대로 나 이렇게 생겼다고 광고하고 나타나지 않습니다. 위장합니다. 자신의 정체를 속입니다.
본문 25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귀신을 그 놀라운 권위로 제압하시고 쫓아내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꾸짖으셨다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야단치셨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귀신에게 속아서 그 정체를 모를 때, 또 많은 심령이 그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쩔쩔 매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귀신의 정체를 바로 알아보시고 꾸짖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신적인 권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잠잠하라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말을 막다” “재갈을 물리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귀신을 꼼짝 못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귀신을 제압하시고 꼼짝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당할 수 없던 귀신을 일거에 제압해 버리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놀라운 권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26절을 보면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귀신도 꼼짝하지 못하고 그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감히 귀신도 그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놀라운 권위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놀라운 권위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소리지릅니다.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의 권위를 우리가 받았다는 것입니다. 눅 10:19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예수님께서 70명의 전도대에게 예수님의 능력의 권위를 허락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저들이 귀신의 방해를 제압하고 복음을 전하여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모두 이런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 앞의 앉은뱅이를 고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예수의 이름의 권세를 받았고 이것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 이름의 권세보다 은과 금을 의지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이 은과 금은 하나의 권력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의 권력화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권력화의 길을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위를 되찾아야 합니다. 오늘 성도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마찬가지로 은과 금을 의지하려한다는 것입니다. 역시 권력을 추구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위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권력이 없으셨던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누구도 갖지 못했던 놀라운 권위를 가지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권력을 탐하기 보다는 권위를 갖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고 또한 말씀의 권위를 세워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능력의 권위를 누리며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출처/박봉수 목사 설교 중에서
권위(Authority)와 권력(Power)은 비슷해 보입니다. 사전을 보면 이렇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권위란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이다.” 그리고 “권력이란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이다.” 그러니까 권위나 권력 모두 자기 의지대로 다른 사람을 행동하게 하는 힘이라는 점에서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권위와 권력은 다른 것입니다. 우선 다른 사람들을 행동하게 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권위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자발적으로 행동하게 합니다. 이에 비해 권력은 지위나 힘을 이용해서 강제로 행동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권위는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지만 권력은 어쩔 수 없는 복종을 이끌어냅니다.
다음으로 얻는 과정이 다릅니다. 권위는 사람들을 감동시켜서 얻게 됩니다. 그러나 권력은 합법적으로 갖게 되기도 하고 물려받기도 하고 사기도 하고 빼앗기도 합니다. 그래서 존경받는 지도자는 권위로 사람들을 이끌지만 독재자나 무능한 지도자는 권력으로 사람들을 통제합니다.
80년대 5공 시절 “땡전 뉴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KBS 방송은 오후 9시가 되면 “땡”하고 9시 시보를 알리면서 바로 “전두환 대통령은...”하고 9시 뉴스를 시작했습니다. “땡”하면 “전”하고 뉴스가 시작된다고 해서 땡전뉴스입니다. 사람들은 9시 뉴스가 시작되면 TV를 껐다가 5분쯤 지난 후에 다시 틀곤 했습니다. 당시 대통령이 권력을 장악했지만 국민들로부터 권위를 얻지는 못했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권위로 이끄는 지도자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따르는 추종자들도 역시 행복합니다. 그러나 권위를 잃어버리고 권력을 휘두르는 지도자는 불행합니다. 역시 따르는 추종자들도 불행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불행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권위를 잃어버리고 권력으로 사회를 움직여 나간다는 것입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권위를 잃어버렸습니다. 학교에서 교수나 선생님들이 권위를 잃어버렸습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권위를 잃어버렸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영적 지도자들이 권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행복하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권위를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권위를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마가복음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인간에게 진정한 복음이 무엇인가를 그 시작에서부터 설명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복음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것을 풀이해 보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것이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이점을 보다 자세하게 설명해 나갑니다. 예수가 왜 하나님의 아들이며, 왜 그리스도이신가를 설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신 것은 그분이 가지신 놀라운 권위 때문임을 말씀하고자 합니다. 이분은 이 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저 하늘의 권위를 가지셨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권력도 갖지 못하셨던 분이 그 누구도 가지지 못했던 놀라운 권위를 가지셨다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가지신 이 놀라운 권위를 통해 그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점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예수의 권위를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의 권위
본문 21절을 보면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느 마을처럼 가버나움에도 회당이 있었습니다. 한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는 기회를 얻으셔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22절을 보면 가르치신 후 반응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한 마디로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던 랍비들이나 서기관들과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권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말씀은 왜 권위가 있었을까요?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 말씀 속에서 놀라운 권위를 경험할 수 있었을까요? 본문에서 그 이유를 직접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전체를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신 말씀 자체의 권위 때문입니다.
마 7:28 이하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말씀하신 후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역시 그 말씀에서 놀라운 권위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5:17을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처럼 소중하게 지켜오던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완전케 하시려 오셨다는 것입니다. 랍비들이나 서기관들이 이 말씀들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5:2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율법에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고 써있으니까 살인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형제를 미워하고 때리고 학대해도 괜찮은 것처럼 가르치고 행동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점을 지적하시고 완전케 바로 잡아서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에게 화내는 사람도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니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말씀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놀라운 말씀의 권위로 사람들을 사로잡으셨습니다. 비록 아무런 권력도 없으셨지만 그 놀라운 말씀의 권위로 사람들을 움직이셨습니다. 변화시키셨고 이끄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말씀 속에서 특별한 권위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그분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이 내 삶속에 임하게 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그 말씀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 말씀으로 세상을 움직이고 변화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어떤 권력을 의지하기 보다는 말씀의 권위를 힘 입고 이 세상을 변화시켜나가야 하겠습니다.
둘째, 말씀 실천의 권위 때문입니다.
요일 1:1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사도 요한이 편지에 쓴 내용입니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말씀을 들었을 뿐 아니라 눈으로 보았고 그것도 자세히 보았고 또 손으로 만졌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듣는 것인데 그 말씀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또 만졌다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3년간 예수님과 동거동락했습니다.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까 그분 자신이 말씀이셨습니다. 그분이 사신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만졌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말씀을 듣게 해 주실 뿐아니라 말씀을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친히 죽으셨습니다. 말씀을 듣게 해 주실 뿐아니라 말씀을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요 20:24 이하를 보면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여러 차례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증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의심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손가락을 내밀어 그 옆구리 창 자국을 만져보게 하셨습니다.
도마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부활하신 예수님 그 자체가 놀라운 권위였습니다. 감히 누가 부활할 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누가 부활한다고 그대로 부활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삶 자체가 말씀이셨습니다. 그분의 삶이 말씀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하신 말씀과 삶이 온전히 하나였습니다. 거기에서 놀라운 권위를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신 주님의 그 놀라운 권위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한 말을 철저하게 지킴으로 나름대로의 권위를 세워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권력을 추구하기 보다는 말과 실천을 하나로 만들어 가면서 권위를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능력의 권위
본문 2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계실 때 방해하는 세력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바로 귀신입니다.
귀신은 이미 한 영혼을 완전히 장악하여 파멸케 했습니다. 그 사람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귀신에게 완전히 장악되어 귀신의 노예로 비참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땅 택하신 백성 중에 이미 귀신에 사로잡힌 영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려 할 때 가로막고 나선 것입니다. 방해하고 나선 것입니다. 귀신이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마침” 그 때 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던 가버나움 회당 바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가로막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신이 역사합니다. 우선 사람 속에 들어와 그 영혼을 파멸시킵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호시탐탐 노립니다. 여러 경우 그 심령 속에 들어가 장악합니다. 꼼짝 못하게 하고 노예처럼 부립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에 이미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습니다. 말씀의 역사를 방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분열시키고 무너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여러 경우 이 귀신의 세력에 장악당한 교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 볼 수 없이 노예처럼 귀신의 뜻대로 끌려다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속으면 안됩니다. 우선 귀신이 없다는 말에 속으면 안됩니다. 오늘과 같은 과학문명이 발달한 시대에 귀신이 어디있느냐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귀신은 에덴동산 때부터 있었고 성경시대에도 있었고 오늘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또한 귀신이 이렇게 생겼다 저렇게 생겼다는 말에 속으면 안됩니다. 요즘 덥다고 공포체험이라 해서 처녀귀신, 드라큐라같은 귀신, 시체와 같은 귀신 등 야단입니다. 귀신은 절대로 나 이렇게 생겼다고 광고하고 나타나지 않습니다. 위장합니다. 자신의 정체를 속입니다.
본문 25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귀신을 그 놀라운 권위로 제압하시고 쫓아내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꾸짖으셨다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야단치셨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귀신에게 속아서 그 정체를 모를 때, 또 많은 심령이 그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쩔쩔 매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귀신의 정체를 바로 알아보시고 꾸짖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신적인 권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잠잠하라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말을 막다” “재갈을 물리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귀신을 꼼짝 못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귀신을 제압하시고 꼼짝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당할 수 없던 귀신을 일거에 제압해 버리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놀라운 권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26절을 보면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귀신도 꼼짝하지 못하고 그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감히 귀신도 그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놀라운 권위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놀라운 권위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소리지릅니다.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의 권위를 우리가 받았다는 것입니다. 눅 10:19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예수님께서 70명의 전도대에게 예수님의 능력의 권위를 허락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저들이 귀신의 방해를 제압하고 복음을 전하여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모두 이런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 앞의 앉은뱅이를 고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예수의 이름의 권세를 받았고 이것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 이름의 권세보다 은과 금을 의지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이 은과 금은 하나의 권력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의 권력화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권력화의 길을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위를 되찾아야 합니다. 오늘 성도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마찬가지로 은과 금을 의지하려한다는 것입니다. 역시 권력을 추구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위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권력이 없으셨던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누구도 갖지 못했던 놀라운 권위를 가지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권력을 탐하기 보다는 권위를 갖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고 또한 말씀의 권위를 세워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능력의 권위를 누리며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출처/박봉수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