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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을 보시는 예수님 (요 1:43-51)
제자를 부르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사람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소수의 제자를 불러 선택하고 그들을 교육하고 세워주셨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불완전한 사람을 불러서, 성숙한 이가 아닌 미숙한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재목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격려와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제자 선택’은 선택과 집중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무엇을 선택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다른 많은 것을 포기하고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수천명의 사람이 아닌 소수인 열두 명의 제자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삶을 보면 수 많은 군중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았고, 소수의 몇 사람을 위해 3년을 투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강의실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함께 공동생활을 하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특이합니다. 예수님은 대중에게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수천, 수만 명 사람들의 인기와 환호성에 귀 기울이지 않으셨고, 언제나 새벽 미명에 산이나 바닷가에서 하나님과 은밀한 시간을 많이 가지셨고, 소수의 제자들에게 비전을 나누어주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생애의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공생애 마지막에 고난과 수치와 험난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넓은 길과 화려한 길이 많이 있었지만 그는 좁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이 제자 네 사람을 부르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다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과 만났습니다. 안드레의 경우는 자기 스승인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베드로는 동생인 안드레가 전도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이 직접 선택해서 부르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친구인 빌립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안드레를 부를 때 메시지는 아주 간단합니다. 만나자마자 ‘와보라’고 합니다. 단순한 말인데 아주 설득력 있고 의미심장합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전도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자기 말로 설명하기보다 ‘와 보십시오. 예수님 만나보십시오’라고 자신있게 말하십시오. 자신감이 없으면 못하는 말입니다. 이 말에 안드레는 즉각 응답을 합니다. 참된 부름에는 참된 응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름은 곧 응답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부르실 때 ‘아멘’ 하고 즉각 응답하십시오.
성도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예배만 드리는 ‘교인’이 있고 주인의 부름에 응답한 ‘제자’가 있습니다. 교인의 삶과 제자의 삶은 다릅니다. 보통 교인은 주일날 한 번 교회 오고 적당히 예수 믿고 세상에서는 세상방법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제자는 선교지에 가든 가지 않든 간에 자기의 삶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채우고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나를 좇으라’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나자 마자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냐? 내가 너를 장차 게바로 만들어 주겠다”고 예언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초청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현재를 보지 않고 언제나 미래를 보십니다. 현재는 외롭고 절망적이고 고달픕니다. 현재 이루어 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러분이 변화될 미래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예언해 주십니다.
빌립의 경우는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셨습니다. 43절을 보겠습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43절은 예수께서 빌립을 만나기 위해 갈릴리로 가셨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갈릴리로 가시는 도중에 우연히 빌립을 만났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결론은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빌립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의도적으로 부르십니다. 여러분을 찾아가서 ”나를 따르라. 나와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초청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시지만 사실 그 길은 화려한 길이 아닙니다. 넓고 멋있는 길이 아닙니다. 죽으러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고난의 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런 길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세상에 수 많은 화려한 길이 있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좁은 길을 가자고 말하십니다. ‘나를 좇으라’ 오늘 이 음성을 듣고 제자의 삶을 결단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 세상을 보면 잘못된 부름으로 청춘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잘못된 사상의 노예가 되어서 평생 데모하고 투쟁하다가 자기 젊음을 다 불사릅니다. 나중에 갖게 되는 것은 허탈함뿐입니다. 잘못된 사상이 진리인 줄 알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을 위해 분신 자살도 하고, 그것을 위해 자기 젊음을 송두리째 바쳐 투쟁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그뿐 아니라 잘못된 종교의 노예가 되어 패가망신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번 뉴욕 테러 사건을 보십시오. 잘못된 종교, 생각으로 인해 전 세계를 극도의 혼란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잘못된 가치관, 잘못된 교육, 잘못된 환상, 이런 것으로 인해 수많은 영혼이 얼마나 방황하고 있습니까?
그런 것에 비하면 예수님의 부름은 소박합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어 줄 것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것이 예수님의 부름입니다.
예수님의 초청과 부름에 응답하지 않고 여러분이 원하는 길, 꿈꾸는 길을 살아 왔다고 한들 지금까지 살아온 길이 만족스럽습니까? 아닙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새벽부터 저녁까지 만인이 만인에 대한 적을 삼고 투쟁하고 경쟁하고 살아왔지만 우리의 삶은 피곤하고 허무합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삶을 살아왔을 지라도 우리의 삶은 고독하고 외롭고 허무한 것입니다.
사모함이 있으면 만난다
44절을 보면 빌립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하나 얻게 됩니다. 44절을 보십시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안드레와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빌립은 이들과 한 동네 사람이기 때문에 늘 같이 만났을 겁니다.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겠습니까? 안드레와 베드로는 아마 신이 나서 빌립에게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만났다. 메시야를 만났다.’ 빌립이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부러웠겠습니까? ‘안드레와 베드로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분을 따라다니는데 그분은 누굴까? 나도 그분을 만나고 싶다.’ 이런 사모함이 분명히 빌립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모함이 있으면 예수님을 꼭 만나게 됩니다. 그리움이 있으면, 그분에 대한 기대감과 감격이 있으면 예수님이 만나주십니다. 저는 예수님에 대해 그런 목마름, 그리움, 사모함, 안타까움이 여러분의 가슴에 가득 차기를 축원합니다.
한편 빌립의 경우는 베드로와 안드레가 예수님께 계속 그에 대한 얘기를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시다가 빌립을 보자 마자 ‘나를 쫓으라’고 했을 것입니다. 아무 생각도 없고 연관도 없었다면 어떻게 빌립을 불렀겠습니까? 어떤 분이 아직 예수를 믿지 않지만 여러분이 계속해서 예수님께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 예수님이 그분을 잘 기억하고 있다가 언젠가 그분을 덜컥 부르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여기서 배우게 됩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만나면 삶이 바뀝니다. 예수님을 만나고도 과거의 삶이 계속 된다면 진정으로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진짜 예수님을 만나면 첫사랑을 느낀 사람처럼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평안과 기쁨과 삶의 목적과 의미가 생깁니다.
안드레는 처음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그의 친구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도 이런 반응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걸음걸이가 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뛰듯이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질병, 고난, 실패가 나를 막지 못합니다. 그런 고난이 옴으로써 내가 더 변하는 것이고 더 적극적이 되는 것이고 더 기쁨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만남’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그의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45절 말씀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이 분명하게 ‘우리가 그를 만났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에 대해 들었다’나 ‘그에 대해 이해했다’ 와는 다릅니다. ‘예수님을 내가 알았다. 예수님에 대한 설교를 들었다. 예수님에 대해 흥미가 있다.’ 이런 말이 아닙니다. ‘그분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한 그분’ 이라고 말합니다. 선지자들이 그렇게 외치고 예언했던 그분이라는 겁니다. 열두 선지자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아들’이고 ‘나사렛에서 사는 예수’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제자란 ‘예수님에 대해 이해하고, 깨닫고, 체험하고, 만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살고 예수의 이름을 전하고 예수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을 가리켜 예수의 제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빌립이 소개했던 나다나엘은 어떤 사람일까요? 46절을 보겠습니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이 말씀을 보면 나다나엘은 예수님에게 소개할 만한 재목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다나엘은 냉소적인 반응입니다. 진리에 대해 편견이 많고 자기 생각에 대한 고집이 많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무엇이든 확인하지 않고는 잘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설득하기 굉장히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나다나엘의 내면의 세계를 들어가 보면 굉장히 착하고 간사한 것이 없는 순진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나다나엘의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면은 지나칩니다. 그 사람의 편협한 기질을 문제삼지 않습니다. 47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현재를 보지 않고 미래를 봤습니다. 나다나엘의 겉모습이 아닌 속 중심을 보고 계셨습니다. ‘저 사람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구나. 저 사람에게는 간사한 것이 없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람 보는 눈이 놀랍습니다. 그 사람의 입이 험하다거나, 행동이 험한 것을 보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가진 상처라고 하십니다. 환경에서 그 사람이 너무나 힘들게 살아왔기에 부정적이 되었지 그 사람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살고 싶어하고 진실하게 살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한 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주위에 이런 분이 있으면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하는 말에 시험 들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다 지나치십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있겠느냐’ 라는 말은 지나치시고 상처도 받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진실함, 순수함,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논쟁하지 않고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를 축복하고, 인정하고 그를 격려했습니다. 48절을 보십시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충격은 나다나엘이 받습니다. ‘빌립이 소개하기 전에 이미 내가 너를 알고 있었다.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너를 알았고 네가 나를 찾기 전에 나는 너를 찾고 있었다. 너는 내 것이다. 난 너를 부를 것이다. 네가 험악한 인생을 살아왔다 할지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네 진심은 그것이 아니다. 너도 진실하게 살고 싶고 아름답게 살고 싶었던 욕망이 네게 있었던 것을 내가 안다. 그리고 너는 정말 깨끗하고 양심 바른 사람이다.’
주님은 우리를 이렇게 대해 주십니다. 세상에서는 조금만 잘못해도 백배 확대 해석해서 ‘너는 피가 나빠. 본질이 고약해’라며 믿어주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믿어주십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우리를 믿어주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겠습니까?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평가했다면 우리는 예수님 앞에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부족하고 실수가 많고 연약한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변할 것을 믿으셨습니다. 여러분이 변할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의 미래는 변할 것입니다. 새 사람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전도하려는 사람이 교회를 비판하거나 예수님을 비판해도 절대 논쟁하지 마십시오. 그를 축복하고 붙잡으십시오. 그를 끝까지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베드로, 나다나엘, 안드레, 빌립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시는 관점이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굉장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가룟 유다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그 제자들을 붙들고 싸우셨습니다.
49절을 보십시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여러분이 전도하는 사람이 이런 고백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정말 나다나엘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정직한 사람이었고 간사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드디어 그 속 사람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말을 듣고 두 가지를 축복해주셨습니다. 50절과 5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이보다 더 큰 일이 여러분에게 일어날 줄을 믿습니다. 기도하는 대로 됩니다. 믿는 대로, 헌신하는 대로 됩니다. 나이, 건강, 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51절을 보십시오.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너는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너는 인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좇으라, 와 보라. 너는 게바라.’ 할렐루야. 우리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제자를 부르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사람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소수의 제자를 불러 선택하고 그들을 교육하고 세워주셨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불완전한 사람을 불러서, 성숙한 이가 아닌 미숙한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재목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격려와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제자 선택’은 선택과 집중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무엇을 선택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다른 많은 것을 포기하고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수천명의 사람이 아닌 소수인 열두 명의 제자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삶을 보면 수 많은 군중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았고, 소수의 몇 사람을 위해 3년을 투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강의실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함께 공동생활을 하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특이합니다. 예수님은 대중에게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수천, 수만 명 사람들의 인기와 환호성에 귀 기울이지 않으셨고, 언제나 새벽 미명에 산이나 바닷가에서 하나님과 은밀한 시간을 많이 가지셨고, 소수의 제자들에게 비전을 나누어주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생애의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공생애 마지막에 고난과 수치와 험난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넓은 길과 화려한 길이 많이 있었지만 그는 좁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이 제자 네 사람을 부르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다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과 만났습니다. 안드레의 경우는 자기 스승인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베드로는 동생인 안드레가 전도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이 직접 선택해서 부르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친구인 빌립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안드레를 부를 때 메시지는 아주 간단합니다. 만나자마자 ‘와보라’고 합니다. 단순한 말인데 아주 설득력 있고 의미심장합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전도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자기 말로 설명하기보다 ‘와 보십시오. 예수님 만나보십시오’라고 자신있게 말하십시오. 자신감이 없으면 못하는 말입니다. 이 말에 안드레는 즉각 응답을 합니다. 참된 부름에는 참된 응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름은 곧 응답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부르실 때 ‘아멘’ 하고 즉각 응답하십시오.
성도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예배만 드리는 ‘교인’이 있고 주인의 부름에 응답한 ‘제자’가 있습니다. 교인의 삶과 제자의 삶은 다릅니다. 보통 교인은 주일날 한 번 교회 오고 적당히 예수 믿고 세상에서는 세상방법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제자는 선교지에 가든 가지 않든 간에 자기의 삶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채우고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나를 좇으라’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나자 마자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냐? 내가 너를 장차 게바로 만들어 주겠다”고 예언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초청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현재를 보지 않고 언제나 미래를 보십니다. 현재는 외롭고 절망적이고 고달픕니다. 현재 이루어 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러분이 변화될 미래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예언해 주십니다.
빌립의 경우는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셨습니다. 43절을 보겠습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43절은 예수께서 빌립을 만나기 위해 갈릴리로 가셨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갈릴리로 가시는 도중에 우연히 빌립을 만났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결론은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빌립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의도적으로 부르십니다. 여러분을 찾아가서 ”나를 따르라. 나와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초청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시지만 사실 그 길은 화려한 길이 아닙니다. 넓고 멋있는 길이 아닙니다. 죽으러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고난의 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런 길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세상에 수 많은 화려한 길이 있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좁은 길을 가자고 말하십니다. ‘나를 좇으라’ 오늘 이 음성을 듣고 제자의 삶을 결단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 세상을 보면 잘못된 부름으로 청춘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잘못된 사상의 노예가 되어서 평생 데모하고 투쟁하다가 자기 젊음을 다 불사릅니다. 나중에 갖게 되는 것은 허탈함뿐입니다. 잘못된 사상이 진리인 줄 알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을 위해 분신 자살도 하고, 그것을 위해 자기 젊음을 송두리째 바쳐 투쟁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그뿐 아니라 잘못된 종교의 노예가 되어 패가망신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번 뉴욕 테러 사건을 보십시오. 잘못된 종교, 생각으로 인해 전 세계를 극도의 혼란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잘못된 가치관, 잘못된 교육, 잘못된 환상, 이런 것으로 인해 수많은 영혼이 얼마나 방황하고 있습니까?
그런 것에 비하면 예수님의 부름은 소박합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어 줄 것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것이 예수님의 부름입니다.
예수님의 초청과 부름에 응답하지 않고 여러분이 원하는 길, 꿈꾸는 길을 살아 왔다고 한들 지금까지 살아온 길이 만족스럽습니까? 아닙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새벽부터 저녁까지 만인이 만인에 대한 적을 삼고 투쟁하고 경쟁하고 살아왔지만 우리의 삶은 피곤하고 허무합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삶을 살아왔을 지라도 우리의 삶은 고독하고 외롭고 허무한 것입니다.
사모함이 있으면 만난다
44절을 보면 빌립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하나 얻게 됩니다. 44절을 보십시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안드레와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빌립은 이들과 한 동네 사람이기 때문에 늘 같이 만났을 겁니다.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겠습니까? 안드레와 베드로는 아마 신이 나서 빌립에게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만났다. 메시야를 만났다.’ 빌립이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부러웠겠습니까? ‘안드레와 베드로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분을 따라다니는데 그분은 누굴까? 나도 그분을 만나고 싶다.’ 이런 사모함이 분명히 빌립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모함이 있으면 예수님을 꼭 만나게 됩니다. 그리움이 있으면, 그분에 대한 기대감과 감격이 있으면 예수님이 만나주십니다. 저는 예수님에 대해 그런 목마름, 그리움, 사모함, 안타까움이 여러분의 가슴에 가득 차기를 축원합니다.
한편 빌립의 경우는 베드로와 안드레가 예수님께 계속 그에 대한 얘기를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시다가 빌립을 보자 마자 ‘나를 쫓으라’고 했을 것입니다. 아무 생각도 없고 연관도 없었다면 어떻게 빌립을 불렀겠습니까? 어떤 분이 아직 예수를 믿지 않지만 여러분이 계속해서 예수님께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 예수님이 그분을 잘 기억하고 있다가 언젠가 그분을 덜컥 부르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여기서 배우게 됩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만나면 삶이 바뀝니다. 예수님을 만나고도 과거의 삶이 계속 된다면 진정으로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진짜 예수님을 만나면 첫사랑을 느낀 사람처럼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평안과 기쁨과 삶의 목적과 의미가 생깁니다.
안드레는 처음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그의 친구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도 이런 반응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걸음걸이가 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뛰듯이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질병, 고난, 실패가 나를 막지 못합니다. 그런 고난이 옴으로써 내가 더 변하는 것이고 더 적극적이 되는 것이고 더 기쁨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만남’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그의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45절 말씀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이 분명하게 ‘우리가 그를 만났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에 대해 들었다’나 ‘그에 대해 이해했다’ 와는 다릅니다. ‘예수님을 내가 알았다. 예수님에 대한 설교를 들었다. 예수님에 대해 흥미가 있다.’ 이런 말이 아닙니다. ‘그분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한 그분’ 이라고 말합니다. 선지자들이 그렇게 외치고 예언했던 그분이라는 겁니다. 열두 선지자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아들’이고 ‘나사렛에서 사는 예수’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제자란 ‘예수님에 대해 이해하고, 깨닫고, 체험하고, 만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살고 예수의 이름을 전하고 예수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을 가리켜 예수의 제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빌립이 소개했던 나다나엘은 어떤 사람일까요? 46절을 보겠습니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이 말씀을 보면 나다나엘은 예수님에게 소개할 만한 재목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다나엘은 냉소적인 반응입니다. 진리에 대해 편견이 많고 자기 생각에 대한 고집이 많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무엇이든 확인하지 않고는 잘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설득하기 굉장히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나다나엘의 내면의 세계를 들어가 보면 굉장히 착하고 간사한 것이 없는 순진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나다나엘의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면은 지나칩니다. 그 사람의 편협한 기질을 문제삼지 않습니다. 47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현재를 보지 않고 미래를 봤습니다. 나다나엘의 겉모습이 아닌 속 중심을 보고 계셨습니다. ‘저 사람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구나. 저 사람에게는 간사한 것이 없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람 보는 눈이 놀랍습니다. 그 사람의 입이 험하다거나, 행동이 험한 것을 보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가진 상처라고 하십니다. 환경에서 그 사람이 너무나 힘들게 살아왔기에 부정적이 되었지 그 사람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살고 싶어하고 진실하게 살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한 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주위에 이런 분이 있으면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하는 말에 시험 들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다 지나치십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있겠느냐’ 라는 말은 지나치시고 상처도 받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진실함, 순수함,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논쟁하지 않고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를 축복하고, 인정하고 그를 격려했습니다. 48절을 보십시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충격은 나다나엘이 받습니다. ‘빌립이 소개하기 전에 이미 내가 너를 알고 있었다.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너를 알았고 네가 나를 찾기 전에 나는 너를 찾고 있었다. 너는 내 것이다. 난 너를 부를 것이다. 네가 험악한 인생을 살아왔다 할지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네 진심은 그것이 아니다. 너도 진실하게 살고 싶고 아름답게 살고 싶었던 욕망이 네게 있었던 것을 내가 안다. 그리고 너는 정말 깨끗하고 양심 바른 사람이다.’
주님은 우리를 이렇게 대해 주십니다. 세상에서는 조금만 잘못해도 백배 확대 해석해서 ‘너는 피가 나빠. 본질이 고약해’라며 믿어주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믿어주십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우리를 믿어주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겠습니까?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평가했다면 우리는 예수님 앞에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부족하고 실수가 많고 연약한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변할 것을 믿으셨습니다. 여러분이 변할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의 미래는 변할 것입니다. 새 사람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전도하려는 사람이 교회를 비판하거나 예수님을 비판해도 절대 논쟁하지 마십시오. 그를 축복하고 붙잡으십시오. 그를 끝까지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베드로, 나다나엘, 안드레, 빌립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시는 관점이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굉장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가룟 유다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그 제자들을 붙들고 싸우셨습니다.
49절을 보십시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여러분이 전도하는 사람이 이런 고백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정말 나다나엘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정직한 사람이었고 간사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드디어 그 속 사람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말을 듣고 두 가지를 축복해주셨습니다. 50절과 5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이보다 더 큰 일이 여러분에게 일어날 줄을 믿습니다. 기도하는 대로 됩니다. 믿는 대로, 헌신하는 대로 됩니다. 나이, 건강, 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51절을 보십시오.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너는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너는 인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좇으라, 와 보라. 너는 게바라.’ 할렐루야. 우리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