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742
하나님의 뜻을 이루자 (요6:31-39)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6 : 31-39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혼자서는 살 수 없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이루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도 하고, 도움만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보다는 홀로 역행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것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고, 그 욕구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뜻을 받들어 성취해 드려야 합니다. 부모의 뜻을 무시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인정받고 잘되기 보다는 어그러진 길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라면 부모의 뜻이 자기와는 맞지 않더라도 잘 받아들여서 순종하려고 해야 합니다. 이런 자녀가 참된 자녀인 것입니다.
또한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제자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학생들을 보면 스승의 교훈을 무시하는 풍조가 짙습니다. 물론 가르치는 스승에게도 문제가 있겠지만 교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스승은 학생들에게 덕망이 있고, 학생들은 스승의 교훈을 깨달아 순종한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더욱 밝을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는 국민의 뜻을 국정에 반영하고, 국민은 국가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국가가 발전하고 개인도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또 다른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몇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창조주시오,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오, 우리는 그 분의 청지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요, 우리는 그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만물의 주인이시오, 만유의 아버지이시고, 인간은 그의 만드신 피조물이요, 그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청지기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자녀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창조주 되신 하나님의 뜻, 만물의 주신 되시는 하나님의 뜻, 만유의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 : 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선합니다.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온전합니다. 그리고 기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 38절 이하를 보면,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그의 뜻을 나타내셨고, 또한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1.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오늘 본문 38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죄인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원하십니다. 디모데전서 2 : 4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한 영혼이라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죄인인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으며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멸망당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가만히 보고만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감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행동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기만 하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이 땅에 내려오셔서 사랑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 : 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했고, 계속해서 17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자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 : 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6 : 31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믿어 영생을 얻은 우리를 통하여 또 다른 사람이 예수를 믿도록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2. 침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누가복음 7 : 29,30을 보면,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침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침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이 침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음으로써 궁극적이고도 근본적인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렸다면 이제는 주님의 명령인 침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마태복음 28 : 19은 예수님의 지상 명령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니라 꼭 지켜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 침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침례를 받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침례는 이미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첫 번째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침례는 받아도 좋고 안 받아도 좋은 것이 아니라 꼭 받아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믿게 한 뒤 그 사람에게도 꼭 침례를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3 : 13 이하를 보면,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은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침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침례 속에는 세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로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받으시고 죽으셨으며 부활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그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다시 부활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2 : 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셋째로 주님께서 다시 재림하시는 날 나도 부활하여 그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가 중요한 것이요 꼭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 : 12에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6 : 4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원한다면 침례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3.거룩함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 : 3에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했습니다. 거룩함은 곧 모든 음란을 버리고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아내를 취하며 형제를 해하지 않는 것이라고 2절 이하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7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 : 14,14에서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거룩함을 이루는 것은 구별된다는 뜻이요,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이란 깨끗한 삶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리고 자신 앞에서 정직하고 깨끗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과 자기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더럽고 추악한 세상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이 곧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깨끗한 삶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정결하고도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 자체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거룩해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습니까? 바울은 고린도후서 7 : 1에서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 권면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거룩한 사람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더럽고 추악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오직 거룩한 자만이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 : 2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이 뜻에 살면서 우리를 지켜 거룩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4.항상 선을 좇으며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 : 15 이하에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항상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좋을 때 기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힘들고 피곤할 때, 슬픈 일과 아픈 상처를 받았을 때 기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 있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 주님의 기쁨이 우리 속에 거해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일시적이요, 순간적이요, 찰나적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을 가져다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소유하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다릅니다. 그 기쁨은 영원한 것이요, 절대적인 것이요, 근본적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5 : 11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6 : 22에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상황은 십자가를 앞에 놓은 상황입니다. 십자가는 최고의 고난이요, 모욕이요, 수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기쁨이 충만했고 그 기쁨이 오히려 제자들에게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의 기쁨은 고난 가운데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야만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쁨이 어떻게 해야 우리 안에 올 수 있습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6 : 24을 봅시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할렐루야! 우리는 기도하면 기쁨이 올 줄 믿습니다.
둘째로 성령 안에서 살고 성령을 좇아 행하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 : 17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 : 22, 23에는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희락 곧 기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성령 안에 살 때 맺게 됩니다. 성령 안에 사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 안에 살 때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항상 선을 행할 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 전에 "항상 선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 : 15을 봅시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선을 좇는 생활은 즐거운 삶이며 기쁨의 연속인 것입니다. 선은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먼저 생각할 때 가능합니다. 자기를 보고 남을 보면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한다 하더라도 진한 감동을 주지는 못합니다. 상대방을 보고 그의 필요에 따라 베풀 때 깨끗한 선행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되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계속 기도만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기도 생활을 중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쉬는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가 있을 때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 : 17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도를 하되 쉬지 말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꼭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행하는 것은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만을 위한 것이 됩니다. 누가복음 18 : 1에서도 "항상 기도하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역시 에베소서 6 : 18에서 "무시(無時)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형통할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곤고할 때에도 지난날의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든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감사를 하지 못합니까?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욕심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감사치 아니하고 오히려 현실만 바라보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약 보름이면 갈 수 있는 가나안을 40년이나 걸려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나를 보면, 지나온 과거를 보지 않고 현실만 보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범사에 감사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쏟아질 줄 믿습니다.
마태복음 7 : 21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것이라면 무효입니다. 22절에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고 합니다만, 23절에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직도 뜻이 있기에 우리를 남겨 두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이루어 드리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김충기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