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쉽게 믿지 말라(1)   (마 2:7-8, 3:7-9)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쉽게 믿는 사람은 영적으로 대책이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롯 대왕은 하나님을 쉽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를 찾아왔던 동방박사들이 유대의 왕으로 나신 그 별을 보고 왔는데 그 장소가 어디인지 알고자 한다고 했을 때 헤롯은 선지자의 한 말을 기억했습니다. 유대에 메시야가 나서 왕으로 만국을 다스릴 것을 알고는 그는 메시야가 나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는 동방박사에게 호의를 베풀고는 이런 말로 아주 교활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너희들이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메시야를 찾거든 내게 알려달라.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헤롯의 이 말은 위장된 신앙고백입니다. 그는 메시야를 잡아 죽이려는 음흉한 흉계를 가지고 거짓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고의 메시지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그 자리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다가왔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들을 향하여 무서운 욕설을 퍼붓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 중에 가장 무서운 독설이며 저주의 말입니다. 세례요한은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아브라함이 너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독사의 자식들아" 그 호칭보다도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 말은 너희들은 길거리에 뒹구는 돌맹이보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 세대는 하나님을 안 믿는 세대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을 너무 쉽게 믿는 세대입니다. 이 두 가지 현상은 하나님이 다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쉽게 믿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과 하나님을 쉽게 믿다가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책망을 받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왜 하나님께로부터 이렇게 책망을 받고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너무 쉽게 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시각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시각이 달라져야 됩니다. 동방박사와 헤롯은 무엇이 다릅니까? 동방박사들이 보는 메시야는 왕입니다. 아기 예수가 왕이라는 믿음의 눈으로 메시야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메시야를 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왕입니다. 자기 외에는 왕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야는 죽여야 될 대상이지 경배할 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메시야를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다릅니다. 동방박사들과 헤롯 대왕, 그 두 부류의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고 계시는가 이 점이 중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동방박사들의 믿음을 바로 인정하시고 동방박사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거짓고백이 탄로 나고 하나님이 그를 거부했습니다. 12절에 보면 "꿈에 헤롯으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고 했습니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박사들은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 헤롯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만약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에게 가서 일러주었다면 동방박사들도 죽임을 당하고 메시야로 나신 아기 예수도 위태해지는 상황에 처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방박사에게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쉽게 믿지 말아야 된다는 것은 바로 이 점에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쉽게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쉽게 믿으면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쉽게 믿으면 결국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당합니다. 이것이 동방박사와 헤롯을 다루는 하나님이 보여주는 교훈입니다. 메시야를 왕으로 보는 동방박사들의 영안을 우리가 갖기를 바랍니다.
     양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참 재미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컨디션이 좋으면 10점짜리 과녁이 크게 보인답니다. 그래서 쏘는 것마다 10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과녁을 보는 눈이 열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수천 번의 연습을 통해서 10점짜리 과녁이 크게 보이는 그 자리까지 시각을 훈련해야 됩니다. 과녁을 보는 눈이 열려야 명궁이 되지 과녁을 볼 때마다 까마득하고 멀어 보이면 절대로 실력발휘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요지는  부자는 부자의 눈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성공을 하려면 성공할 수 있는 어떤 안목을 가져야 됩니다. 안목이 열리지 않고는 성공의 길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하나님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아니하면 결코 우리가 그 하나님을 바로 인식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쉽게 믿고 있는가. 여러분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쉽게 하고 있는가.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왜 우리의 삶의 현존 속에서 그렇게 하나님과 동떨어지게 살고 있느냐?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는데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보면 하나님과 너무 멀리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사실을 가볍게 믿으면 하나님은 멀리 계십니다. 무능한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관념 속의 하나님을 탈출시키라

     가인이 아벨을 들에서 쳐죽였습니다. 적어도 가인이 아벨을 들판에서 죽일 그 때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왕 앞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순간에는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부하의 아내 밧세바를 불러다가 간음을 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다윗도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믿음의 사람들이 넘어지고 범죄하는가? 그 순간에는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쉽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관념 속에서 자꾸 강조합니다. 다윗이 죄를 지을 때, 아브라함이 거짓말할 때 하나님을 아마 관념 속에서는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이러면 거짓말인데, 이것은 간음인데, 내가 이런 짓을 해서는 안되지. 얼마든지 그런 관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관념 속에 머물러서는 나를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많이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쉽게 말할 수 있고 생각 속에 담아둘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고 나를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이 되려면 관념으로부터 하나님을 탈출시켜야 됩니다. 관념에 머무는 하나님이 되면 안됩니다. 그런 하나님은 진열장에 장식되어 있는 골동품밖에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으로서 나와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생각 속에 가두어진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손과 발을 움직이면서 행동하는 그 현장에 하나님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블란서의 쿠코 선교사님이 은혜를 받고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파송이 되었습니다 결국 원주민이 쏜 총에 맞아서 순교를 했습니다. 그는 「사하라의 불꽃」이라는 선교 자서전을 남기고 갔는데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선교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고난이 부딪칠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맹수도 아니고 원주민도 아니고 풍토병도 아니고 자기가 선교하면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은 고난 중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을 믿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믿어지면 다른 것은 안됩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예배당 하나님으로 가두어 두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예배당에 머무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계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을 다스리시는 가운데 오늘 나 하나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도 다스리기를 원하는 하나님. 삶의 현장에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임재의식의 주관성을 버리라

     그러나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의식에서 주관성을 버리지 못합니다. 내가 만든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내 삶의 현존에 역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기분이 좋으면 하나님도 좋고 내가 조금 상황이 좋아지면 하나님도 좋은 하나님으로 내가 자꾸 하나님을 만듭니다. 지난 봄에 하나님이 다르고 금년 여름에 하나님이 달라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주관성을 버리지 못합니다.
     어느 집 애가 엄마 몰래 숨겨놓은 과자를 훔쳐 먹었습니다. 엄마가 그 버릇을 고쳐 주려고 철아, 너 주일학교 다니지. 예. 너 하나님 살아 계시는 거 믿니? 예. 너 과자 훔칠 때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거 믿어? 예. 하나님이 너보고 뭐라 하던? '철아, 너하고 나하고 둘만 있으니까 두 개를 훔쳐라' 하더랍니다. 이 꼬마는 나쁜 짓을 해도 하나님이 자기편이라고 맘대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주관성을 버리지 못하고 믿기 쉬운 오류를 경고하는 이야기입니다.

     비늘을 벗으라

     사도행전 9장 18절에 사울이 아나니아를 통해서 안수받는 것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다시 보게 된지라." 사울은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열심인줄 알았습니다. 자기가 믿는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줄 알았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열심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벗겨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하나님을 보게 됐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러 가다가 다메섹에서 하나님의 빛을 받고 거꾸러졌습니다. 그때 시력을 잃었습니다. 사흘동안 먹지 못하고 시력을 잃은 이 사울에게 아나니아가 와서 안수해줌으로써 그의 눈에 비늘이 벗겨졌습니다. 비늘이 벗겨져서 하나님의 세계를 새로 보게 된 사울, 이것이 오늘 우리가 영적인 경험으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우리의 눈에서 편견의 비늘이 벗겨져야 됩니다. 불신의 비늘이 벗겨져야 됩니다.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미움의 비늘이 벗겨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의 훈련과정을 요하는 일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는 게 아닙니다.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교인들이 교회에 새로 오면 신앙생활을 엮어 가는 과정이 있습니다 초신자든 기존 신자든 우리 교회에 처음 오시면 제일 먼저 예배를 접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두 가지를 평가를 합니다. 하나는 예배를 통하여 목사님을 만납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직접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처음오는 사람이 제일 먼저 만나는 대상이 담임목사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담임목사를 만나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를 인식합니다. 예배 분위기를 보면서 이 교회는 이런 교회일 것이다 라고 교회를 평가합니다. 교회에 처음 오는 사람들은 예배를 경험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은혜롭게 드려야 하고 은혜로운 예배를 위해서 목사는 사력을 다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교회 오는 사람은 예배를 통해서 목사를 보고 교회를 보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신앙이 훈련되지 않습니다. 예배만 드리고 그 외의 것은 외면하고 있으면 그 믿음이 그것으로 머물고 맙니다. 한 단계 믿음이 성숙되어 가려면 이제 부교역자들과 교류를 해야 됩니다. 부교역자들이 심방을 오게 되고 부교역자들에게 어려움을 호소하고 부교역자들과 교제가 되고 이렇게 부교역자들과 교류하는 단계로 교회생활이 한 걸음 진보가 되어야 됩니다. 때로는 부교역자는 상대하지 않고 담임목사만 상대하면서 신앙생활 하려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생활에서는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부교역자들의 관심이 함께 연결되는 단계까지 가야 됩니다.
     세번째는 소그룹의 교제가 되어야 합니다. 교역자들만 만나고 소그룹에서 교인들끼리 만나는 일, 교인들끼리 함께 섬기고 일하는 것이 연결되지 않는 사람은 얼마 후에는 교회를 떠납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은 교역자를 만나는 것은 가끔 만나야 되고 영구적으로 신앙생활을 옳게 하려면 같이 은혜 받은 교인들끼리 어울릴 줄 알아야 됩니다. 구역에서, 기관에서, 교육기관에서 함께 일하면서 함께 하나님을 섬기면서 성도들끼리 소그룹에 적응이 되어야만 그 믿음이 성숙되어 가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의미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설교를 들으면서 인식하는 것 가지고는 한계가 있습니다. 교회생활에 깊이 적응이 되고 성도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면서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을 경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내게 이루신 일

     사도 바울이 훗날 사도가 되어 예루살렘에 총회가 열렸을 때 그가 와서 이런 보고를 합니다. 사도행전 15장 4절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울이 믿는 하나님이 얼마나 힘이 있는 하나님인가. 바울이 총회 와서 보고할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행하신 모든 일을 말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일예배가 바로 그래야 됩니다. 한 주간 동안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서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신 그 일이 예배 드리는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감사의 조건이 됩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 것, 그 분이 나를 통해서 일하신 것을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목사님이 한 분 있습니다. 내가 인도하는 세미나에 왔는데 오랜만에 만나 반가워서  차를 한잔 나누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가 자랑삼아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목사님 저는 두 달마다 한번씩 기도원에 가서 특별히 기도를 하고 그렇게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으면서 목회를 합니다. 그렇게 안하고는 자꾸 허전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미나도 거의 매월 한번씩 참석을 하면서 배우고 은혜를 받고 그렇게 힘을 얻으면서 교회를 섬기고 있다고 자랑삼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그것을 듣고 보니 이 친구가 조금 선을 넘고 있다 싶어서 두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자네,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는 것은 좋다,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제가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내가 오늘 선배로서 충고를 한 마디 하는데 자네, 두 달마다 한번씩 기도원에서 특별기도해서 은혜 받고 매월 세미나 와서 은혜 받고 하는데 그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야. 그러나 내가 볼 때는 지금 자네에게 약간의 문제가 있다. 기도원에 가야만 그렇게 은혜를 받고 세미나 와야만 은혜를 받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자네가 섬기는 교회에서 경험하기를 바란다. 목사는 두 군데서 감동을 받아야 목사다. 첫째는 서제다. 서제에서 교인들 앞에 증거할 설교를 만들면서 감동받지 못하면 그건 감동이 아니야. 설교를 만들면서 은혜 받고 이 말씀을 교인들과 함께 나누기를 기뻐하는 그 감동을 서제에서 받아야 된다. 기도원에서 받는 그 감동을 서제에서 받아야 된다. 그리고 주일날 예배를 인도하는 강단에서 그것을 경험해야 된다. 세미나 와서 은혜 받은 이 기쁨을 자네가 강당에서 설교를 전하면서 경험을 해야 된다. 그러니까 기도원은 일년에 두 번만 가도 된다. 세미나도 프로그램을 보고 두 번만 해도 충분하다. 자네처럼 이렇게 다니는 것은 옳지 않아. 내가 아주 정중하게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사실입니다. 목사가 서제에서 감동하고 예배를 인도하면서 은혜 받지 않고 다른데 가서 무엇을 구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맺는 말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은 여러분의 서제요 여러분의 강단입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 가사를 하면서 그리고 여러분이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현존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이 믿음으로 사는 감동과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너무 쉽게 믿지 마십시오. 쉽게 믿으면 돌맹이보다 못한 취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자기들에게 세례 받으러 오는 유대인들을 보고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교만하지 말아라. 하나님은 차라리 이 돌들로 소리지르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길거리에 뒹구는 돌맹이보다도 못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땅에 살 가치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함부로 값싼 신앙생활을 하고 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쉽게 믿어서는 안됩니다. 나의 손발을 움직이는 삶의 현장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고난을 이기게 하시는 현존의 하나님으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용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