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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쉽게 믿지 말라(2) (마 25:31-46)
우리나라 여름절기는 초복, 중복, 말복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런 절기 때에는 개들이 수난을 받습니다. 그런데 태평양 건너 미국은 개들의 천국입니다. 얼마 전 미국 워싱턴에서는 애완동물 대회를 열었습니다. 거기에서 학자들이 나와 토론과 강연을 하고 각종 이벤트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이 애완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전제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애완동물 예찬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위성TV에 그 장면들이 방영 됐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나온 한 장면을 잠시 소개를 하면 애완동물 애호가들이 인터뷰를 했는데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애완동물이 천국에 갈 수 없다면 천국은 없을 것이다." 또 한 사람은 "내가 죽은 후에 제일 갖고 싶은 것은 바로 애완개이다." 또 한 사람은 자기 개를 카메라 앞에 비추어 주면서 "이렇게 예쁜 개에게 어떻게 영혼이 없을 수 있느냐." 이런 대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혼합주의적 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애완동물 영생론을 이야기합니다. 애완동물도 영성이 있다는 범신론적 신학에 근거하여 교회가 애완동물에게 영세식을 행하기도 하고 애완동물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이론들을 내기도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의 장면이 펼쳐집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예비한 영생의 나라를 상속하게 하고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마귀와 그 사자들이 갇히는 영원한 지옥에 던져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왼편에 있는 자들은 영벌에, 오른편에 있는 자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사람 외에는 영혼이 있다는 암시를 전혀 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동물도 영혼이 없습니다.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만 영혼이 있고 인간에게만 영생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중요한 한 가지 진리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지난 주일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나와 현존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어야 함을 나누었습니다. 머릿속에 가두어두는 믿음이 아니고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때 필요한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삶 속에 현존하시는 하나님, 내 손과 발과 함께 일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되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입니다. 순간을 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을 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물질세계를 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의 하나님이요 영원한 하나님이요 영생을 위한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심판의 장면은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번 스쳐 가는 심판사건이 아니고 악인은 영벌에,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우리 앞에 펼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6장 25, 26절에 사도 바울은 이런 선언을 합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나니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에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그 복음은 바울이 만들어낸 복음이 아닙니다. 그 시대의 복음이 아닙니다. 이 복음은 영세 전부터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복음이 지금 드러났고 이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선포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믿어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외치고 있습니다.
시편 137편 3절에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영원을 향한 우리의 예배입니다. 이 예배의 행위가 오늘의 한 순간의 행사가 아니라 영원과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상당히 현실적인 말로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영원한 것과 보이는 것과의 대결
예수님과 마귀가 마태복음 4장에서 대결을 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께 공격하는 것은 돌들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마귀의 공격은 모두가 보이는 것들입니다.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은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상대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4:4). 보이는 떡과 보이지 않는 말씀의 대결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것과 영원하신 것의 대결입니다. 이 땅 위에 육의 것과 영원하신 하나님의 것으로 대결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싸움이 우리 현실 안에서도 그대로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면서 보이지 않습니다. 영원하시면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나의 삶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이 오늘만 내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영원한 가치, 영원한 믿음은 오늘 육의 세계에서 순간적으로 고백되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3,500년 전에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습니다. 요즘 성지순례 코스 가운데 시내산 등정은 필수코스입니다. 2,285미터로 대단히 높은 산입니다. 1,500미터 지점까지 차를 타고 올라갑니다. 거기서 고도 700미터를 등산합니다. 새벽에 일어나 한 시나 두 시부터 등산을 하게 됩니다. 높고 험한 산이기 때문에 대단히 힘듭니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갔을 때에 일출이 시작되어 해가 뜨는 장면을 보고 기도를 하며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저는 두 차례 시내산 등산을 해보았습니다. 정상에서 감동을 받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도 가져보았지만 두 차례의 시내산 등산에서의 참담한 모습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제가 시내산에서 충격을 받은 것은 그 정상에 예배당이 하나 있는데 방치된 지 오래된 예배당입니다. 아마도 처음 세워졌을 때는 그곳에서 예배가 있었을 것이고 성도들의 깊은 기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예배당은 버려진 예배당입니다. 쇠창살에 녹이 슬어 있고 예배당 안은 지저분해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문도 낡았고 아무런 기능을 할 수 없는 버려진 예배당입니다. 비록 그곳에서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감동을 누리며 환호를 지르지만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거기서 마음 아팠던 것은 그 예배당 바로 밑에서 아랍 장사꾼들이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기념품을 판매합니다. 요즘은 한국 라면도 판답니다. 한국 라면이 그만큼 인기있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한국 관광객이 그렇게 많다는 뜻이지요. 장사꾼들의 장사하는 소리는 요란하지만 그곳에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음성은 한 마디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 참담한 시내산 정상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오늘 지상교회가 이 모습으로 타락해가고 있지 않는가'라는 두려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중심과 미래를 보시는 하나님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입니다. 한 때를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주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두 가지 시각으로 다가옵니다. 요1장에서 나다나엘을 보신 주님은 두 가지를 함께 보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의 중심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이런 말씀을 덧붙입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함으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주님이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입장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역사 안에서 더 큰 일들을 볼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보시지 않습니다.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중심을 보신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까지 같이 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그렇게 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그 시각을 가지고 중심을 열어 하나님을 대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겨야 됩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미래를 맡기고 사는 믿음이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일도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다면 그건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을 보신 하나님은 다윗의 일생을 통해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애를 통해서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를 불러주신 줄로 믿습니다. 거기에 우리 영안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다윗이 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요셉도 마찬가집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집니다. 그들의 신앙고백 중에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강렬하게 나타나 있는 고백은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
식사를 하는 도중에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졌습니다. 이것은 겁주려고 던진 게 아닙니다. 죽이려고 던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두 번이나 했습니다. 그래도 다윗은 참았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사울은 십년 동안 군대를 풀어서 추적을 했습니다. 여러분, 왕이 군사를 풀어서 추적하면 한달 아니 한 주간 안에 안 잡힐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십년 동안 다윗을 괴롭혔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다윗은 죽지 않았습니다. 누가 다윗을 보호했을까요? 영원하신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영원하신 하나님께 그의 생명을 맡겼고 그의 삶을 맡겼습니다. 다윗은 두 번이나 사울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기름부은 종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만 붙잡았습니다. 이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과 환난 그의 생애에 부딪혀오는 절망들을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겼던 것입니다.
다윗은 아들에게 반역을 받아서 왕궁을 쫓겨나게 됐습니다. 이 장면도 자세히 보면 다윗이 얼마든지 압살롬을 이길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대단한 장군입니다. 수많은 전쟁을 치룬 사람입니다. 아들의 반역하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대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들에게 왕궁을 내 주고는 피난길을 갑니다. 그때 베냐민 사람 시므이라는 정신나간 친구가 돌을 던지면서 조롱합니다. 한번만 돌을 던진 게 아닙니다. 감람산을 지날 때까지 따라가며 돌을 던지면서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저주를 하면서 따라옵니다. 다윗의 군대장관 아비새가 칼을 빼면서 '왕이여, 저 개 같은 놈을 저렇게 두시렵니까. 나를 명하소서. 당장 머리를 베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때 다윗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무엘하 16장 10절 이하에 "다윗이 가로되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 하겠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 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사 오늘날 그 저주 바람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고 말합니다.
제가 다윗을 존경하지만 이 대목에 와서는 다윗 앞에 항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향하여 저주를 하고 있는 베냐민 사람 시므이를 다윗의 군사들은 개 같은 놈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습니까? 자기를 저주하는 시므이를 보고 "여호와께서 다윗을 저주하라 해서 하는 것이니 그냥 버려두라." 다윗은 그 원수를 보면서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저주하라고 하시는 것인데 누가 말릴 수 있느냐.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나를 반역하는데 저 사람이 나를 저주하는 거야 당연하지 않느냐.
그 다음 대목이 참 의미 깊습니다. "여호와께서 저 사람 저주하는 일로 내가 억울함을 당하는 이 일을 여호와께서 감찰하시고 내게 선으로 갚아 주시리라." 다윗의 이 믿음은 단순합니다. 돌을 던지며 저주하는 시므이의 행동은 순간적인 일입니다. 그 순간에도 다윗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원수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은 나의 현실 속에서 영원하신 분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라 해서 현실을 잊어버리신 하나님으로 알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생을 가진 사람이지만 가장 현실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을 가장 진지하고 충실하게 바로 살아야 되는 사람입니다.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
강영우 박사님은 우리나라 최초로 맹인으로서 박사가 되신 분입니다. 피츠버그 대학에서 공부를 했고 지금은 대학교수로 계십니다. 이 분은 이 시대에 성공한 한국인 중에 한 사람으로 뽑힐만한 사람입니다. 이 분은 지금 부시 미국 대통령의 자문정책 이사입니다. 그리고 UN장애위원회에 부회장으로 계시는 분입니다. 이 분이 한국에도 가끔 나와서 강연회도 하고 책도 여러 권 썼는데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이것이 요즘 베스트셀러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의 이야기에는 참 배울 점이 많습니다.
이 사람이 시력을 잃어 맹인이 되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두 개 밖에 없더랍니다. 점쟁이가 되던지 안마사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선배 맹인들이 먹고사는 직업이라는 게 점쟁이 아니면 안마사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아무 것도 할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영우 박사님은 귀중한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태도와 가치다.' 살아가는 태도와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서 성공하고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맹인으로서 아무 것도 할게 없더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점쟁이가 될 수도 없었고 또 선배들처럼 안마사로서 살기도 싫었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강영우 소년에게 빛을 주셨습니다. 생각을 바꾸게 하셨습니다. '그렇다. 맹인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맹인은 아무거나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운전을 못하는 게 너무 아쉽더랍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운전을 못하면 다리가 없는 것과 방불합니다. 거기서 그가 깨달은 진리는 '내가 못하는 것은 잊어버리자. 나는 운전을 못한다. 맹인은 운전을 할 수 없다. 그러면 못하는 것은 다 잊어버리자.' 그러니까 할 수 있는 게 자꾸 눈에 보이더랍니다.
이 분은 결혼도 하고 정상적인 가정생활도 합니다. 그런데 강영우 박사의 위대함은 교육에 있습니다. 교육학에도 일가견이 있지만 자기 아이들을 모델로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강박사의 자녀교육론이 지금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학교교육에도 이 사람의 교육이론을 적용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한번은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세 살짜리 애가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아빠 눈을 뜨게 해주세요. 아빠가 눈을 떠서 내게 야구도 가르쳐 주시고 자전거 타는 법도 가르쳐 주시도록 우리 아빠 눈을 뜨게 해주세요." 그렇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강박사가 가만히 보니 이놈이 아버지가 못하는 것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마음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내 아이들에게 나는 아무 것도 못하는 아버지, 야구도 못 가르쳐 주는 아버지, 자전거도 못 배워주는 아버지, 아무 것도 못하는 아버지로 비취니까 견딜 수 없는 위기감을 느낀 것입니다. 아이들이 앞으로 커서 무엇이 될 것인가 생각하니까 위기가 온 것입니다. 그때부터 강박사가 아이들을 붙잡고 교육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애를 붙잡고 이런 이야기부터 했습니다. "얘야, 아빠는 눈을 못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굉장히 많아. 야구는 못하고 내가 네게 자전거는 못배워 주지만 아빠가 눈이 안보이기 때문에 더 잘하는 것도 굉장히 많아. 아빠가 눈을 감고도 얼마든지 성경이야기를 할 수 있어. 다른 사람은 못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도 불을 끄고도 성경 전체를 다 읽을 수 있어." 아이를 재울 때마다 성경을 읽어주는 것입니다. 목욕을 시킬 때도 성경을 읽어줍니다. 아빠는 눈을 잃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것을 아이들 앞에 하나 하나 보여준 것입니다.
아이들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를 자랑하기 시작하는데 학교 가서 아버지 자랑을 할 때 아이들이 다 놀래는 것입니다. 자기 집에 아버지는 도무지 못하는 것을 애 아버지는 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뜬 아버지들이 흉내도 못내는 걸 시력을 잃은 강박사는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 애가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목욕을 시키니까 "아빠, 나중에 내가 아이 낳거든 그때도 아빠가 우리 애 목욕 시켜줘야 돼." "그때는 네가 목욕시키면 되잖니?" "목욕은 되는데 성경 읽어주는 건 못해요. 그러니까 아빠가 와서 해 주셔야 돼요." 그렇게 아양을 떨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할 수 없는 걸 붙잡고 탄식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못하는 것은 잊어버립시다. 그것을 왜 자꾸 붙잡고 있습니까? 내가 못하는 것을 잊어버리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강박사의 성공비법이 그것입니다. 그는 육신의 눈을 잃었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늘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이 분은 이 시대에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신앙의 사람입니다. 이 분의 강연회는 큰 감동이 있습니다. 이 분이 너무도 생생한 하나님을 만나고 동행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그에게 위대한 일을 이루어 가시기에 우리 모두가 그에게 감동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성냥불과 등잔불은 다릅니다. 성냥불은 켜면 처음에는 강렬합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 사그라지고 꺼져 버립니다. 등잔불은 꾸준히 불타는 그런 불입니다. 기름이 공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성냥불 삶인지 등잔불의 삶인지 우리의 자세를 검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가치를 검토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하늘나라의 등잔불처럼 우리에게 영원한 언약으로 은혜를 공급하고 계신 것처럼 한결 같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늘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보이는 현상을 다스리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에 중심을 보시고 우리의 미래까지 다 보십니다. 영혼과 연결시켜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 우리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응답하고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용호목사 설교 중에서
우리나라 여름절기는 초복, 중복, 말복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런 절기 때에는 개들이 수난을 받습니다. 그런데 태평양 건너 미국은 개들의 천국입니다. 얼마 전 미국 워싱턴에서는 애완동물 대회를 열었습니다. 거기에서 학자들이 나와 토론과 강연을 하고 각종 이벤트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이 애완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전제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애완동물 예찬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위성TV에 그 장면들이 방영 됐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나온 한 장면을 잠시 소개를 하면 애완동물 애호가들이 인터뷰를 했는데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애완동물이 천국에 갈 수 없다면 천국은 없을 것이다." 또 한 사람은 "내가 죽은 후에 제일 갖고 싶은 것은 바로 애완개이다." 또 한 사람은 자기 개를 카메라 앞에 비추어 주면서 "이렇게 예쁜 개에게 어떻게 영혼이 없을 수 있느냐." 이런 대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혼합주의적 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애완동물 영생론을 이야기합니다. 애완동물도 영성이 있다는 범신론적 신학에 근거하여 교회가 애완동물에게 영세식을 행하기도 하고 애완동물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이론들을 내기도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의 장면이 펼쳐집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예비한 영생의 나라를 상속하게 하고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마귀와 그 사자들이 갇히는 영원한 지옥에 던져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왼편에 있는 자들은 영벌에, 오른편에 있는 자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사람 외에는 영혼이 있다는 암시를 전혀 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동물도 영혼이 없습니다.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만 영혼이 있고 인간에게만 영생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중요한 한 가지 진리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지난 주일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나와 현존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어야 함을 나누었습니다. 머릿속에 가두어두는 믿음이 아니고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때 필요한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삶 속에 현존하시는 하나님, 내 손과 발과 함께 일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되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입니다. 순간을 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을 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물질세계를 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의 하나님이요 영원한 하나님이요 영생을 위한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심판의 장면은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번 스쳐 가는 심판사건이 아니고 악인은 영벌에,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우리 앞에 펼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6장 25, 26절에 사도 바울은 이런 선언을 합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나니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에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그 복음은 바울이 만들어낸 복음이 아닙니다. 그 시대의 복음이 아닙니다. 이 복음은 영세 전부터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복음이 지금 드러났고 이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선포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믿어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외치고 있습니다.
시편 137편 3절에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영원을 향한 우리의 예배입니다. 이 예배의 행위가 오늘의 한 순간의 행사가 아니라 영원과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상당히 현실적인 말로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영원한 것과 보이는 것과의 대결
예수님과 마귀가 마태복음 4장에서 대결을 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께 공격하는 것은 돌들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마귀의 공격은 모두가 보이는 것들입니다.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은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상대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4:4). 보이는 떡과 보이지 않는 말씀의 대결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것과 영원하신 것의 대결입니다. 이 땅 위에 육의 것과 영원하신 하나님의 것으로 대결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싸움이 우리 현실 안에서도 그대로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면서 보이지 않습니다. 영원하시면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나의 삶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이 오늘만 내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영원한 가치, 영원한 믿음은 오늘 육의 세계에서 순간적으로 고백되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3,500년 전에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습니다. 요즘 성지순례 코스 가운데 시내산 등정은 필수코스입니다. 2,285미터로 대단히 높은 산입니다. 1,500미터 지점까지 차를 타고 올라갑니다. 거기서 고도 700미터를 등산합니다. 새벽에 일어나 한 시나 두 시부터 등산을 하게 됩니다. 높고 험한 산이기 때문에 대단히 힘듭니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갔을 때에 일출이 시작되어 해가 뜨는 장면을 보고 기도를 하며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저는 두 차례 시내산 등산을 해보았습니다. 정상에서 감동을 받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도 가져보았지만 두 차례의 시내산 등산에서의 참담한 모습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제가 시내산에서 충격을 받은 것은 그 정상에 예배당이 하나 있는데 방치된 지 오래된 예배당입니다. 아마도 처음 세워졌을 때는 그곳에서 예배가 있었을 것이고 성도들의 깊은 기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예배당은 버려진 예배당입니다. 쇠창살에 녹이 슬어 있고 예배당 안은 지저분해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문도 낡았고 아무런 기능을 할 수 없는 버려진 예배당입니다. 비록 그곳에서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감동을 누리며 환호를 지르지만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거기서 마음 아팠던 것은 그 예배당 바로 밑에서 아랍 장사꾼들이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기념품을 판매합니다. 요즘은 한국 라면도 판답니다. 한국 라면이 그만큼 인기있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한국 관광객이 그렇게 많다는 뜻이지요. 장사꾼들의 장사하는 소리는 요란하지만 그곳에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음성은 한 마디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 참담한 시내산 정상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오늘 지상교회가 이 모습으로 타락해가고 있지 않는가'라는 두려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중심과 미래를 보시는 하나님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입니다. 한 때를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주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두 가지 시각으로 다가옵니다. 요1장에서 나다나엘을 보신 주님은 두 가지를 함께 보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의 중심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이런 말씀을 덧붙입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함으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주님이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입장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역사 안에서 더 큰 일들을 볼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보시지 않습니다.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중심을 보신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까지 같이 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그렇게 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그 시각을 가지고 중심을 열어 하나님을 대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겨야 됩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미래를 맡기고 사는 믿음이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일도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다면 그건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을 보신 하나님은 다윗의 일생을 통해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애를 통해서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를 불러주신 줄로 믿습니다. 거기에 우리 영안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다윗이 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요셉도 마찬가집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집니다. 그들의 신앙고백 중에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강렬하게 나타나 있는 고백은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
식사를 하는 도중에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졌습니다. 이것은 겁주려고 던진 게 아닙니다. 죽이려고 던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두 번이나 했습니다. 그래도 다윗은 참았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사울은 십년 동안 군대를 풀어서 추적을 했습니다. 여러분, 왕이 군사를 풀어서 추적하면 한달 아니 한 주간 안에 안 잡힐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십년 동안 다윗을 괴롭혔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다윗은 죽지 않았습니다. 누가 다윗을 보호했을까요? 영원하신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영원하신 하나님께 그의 생명을 맡겼고 그의 삶을 맡겼습니다. 다윗은 두 번이나 사울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기름부은 종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만 붙잡았습니다. 이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과 환난 그의 생애에 부딪혀오는 절망들을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겼던 것입니다.
다윗은 아들에게 반역을 받아서 왕궁을 쫓겨나게 됐습니다. 이 장면도 자세히 보면 다윗이 얼마든지 압살롬을 이길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대단한 장군입니다. 수많은 전쟁을 치룬 사람입니다. 아들의 반역하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대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들에게 왕궁을 내 주고는 피난길을 갑니다. 그때 베냐민 사람 시므이라는 정신나간 친구가 돌을 던지면서 조롱합니다. 한번만 돌을 던진 게 아닙니다. 감람산을 지날 때까지 따라가며 돌을 던지면서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저주를 하면서 따라옵니다. 다윗의 군대장관 아비새가 칼을 빼면서 '왕이여, 저 개 같은 놈을 저렇게 두시렵니까. 나를 명하소서. 당장 머리를 베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때 다윗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무엘하 16장 10절 이하에 "다윗이 가로되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 하겠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 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사 오늘날 그 저주 바람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고 말합니다.
제가 다윗을 존경하지만 이 대목에 와서는 다윗 앞에 항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향하여 저주를 하고 있는 베냐민 사람 시므이를 다윗의 군사들은 개 같은 놈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습니까? 자기를 저주하는 시므이를 보고 "여호와께서 다윗을 저주하라 해서 하는 것이니 그냥 버려두라." 다윗은 그 원수를 보면서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저주하라고 하시는 것인데 누가 말릴 수 있느냐.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나를 반역하는데 저 사람이 나를 저주하는 거야 당연하지 않느냐.
그 다음 대목이 참 의미 깊습니다. "여호와께서 저 사람 저주하는 일로 내가 억울함을 당하는 이 일을 여호와께서 감찰하시고 내게 선으로 갚아 주시리라." 다윗의 이 믿음은 단순합니다. 돌을 던지며 저주하는 시므이의 행동은 순간적인 일입니다. 그 순간에도 다윗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원수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은 나의 현실 속에서 영원하신 분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라 해서 현실을 잊어버리신 하나님으로 알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생을 가진 사람이지만 가장 현실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을 가장 진지하고 충실하게 바로 살아야 되는 사람입니다.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
강영우 박사님은 우리나라 최초로 맹인으로서 박사가 되신 분입니다. 피츠버그 대학에서 공부를 했고 지금은 대학교수로 계십니다. 이 분은 이 시대에 성공한 한국인 중에 한 사람으로 뽑힐만한 사람입니다. 이 분은 지금 부시 미국 대통령의 자문정책 이사입니다. 그리고 UN장애위원회에 부회장으로 계시는 분입니다. 이 분이 한국에도 가끔 나와서 강연회도 하고 책도 여러 권 썼는데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이것이 요즘 베스트셀러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의 이야기에는 참 배울 점이 많습니다.
이 사람이 시력을 잃어 맹인이 되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두 개 밖에 없더랍니다. 점쟁이가 되던지 안마사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선배 맹인들이 먹고사는 직업이라는 게 점쟁이 아니면 안마사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아무 것도 할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영우 박사님은 귀중한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태도와 가치다.' 살아가는 태도와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서 성공하고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맹인으로서 아무 것도 할게 없더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점쟁이가 될 수도 없었고 또 선배들처럼 안마사로서 살기도 싫었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강영우 소년에게 빛을 주셨습니다. 생각을 바꾸게 하셨습니다. '그렇다. 맹인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맹인은 아무거나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운전을 못하는 게 너무 아쉽더랍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운전을 못하면 다리가 없는 것과 방불합니다. 거기서 그가 깨달은 진리는 '내가 못하는 것은 잊어버리자. 나는 운전을 못한다. 맹인은 운전을 할 수 없다. 그러면 못하는 것은 다 잊어버리자.' 그러니까 할 수 있는 게 자꾸 눈에 보이더랍니다.
이 분은 결혼도 하고 정상적인 가정생활도 합니다. 그런데 강영우 박사의 위대함은 교육에 있습니다. 교육학에도 일가견이 있지만 자기 아이들을 모델로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강박사의 자녀교육론이 지금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학교교육에도 이 사람의 교육이론을 적용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한번은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세 살짜리 애가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아빠 눈을 뜨게 해주세요. 아빠가 눈을 떠서 내게 야구도 가르쳐 주시고 자전거 타는 법도 가르쳐 주시도록 우리 아빠 눈을 뜨게 해주세요." 그렇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강박사가 가만히 보니 이놈이 아버지가 못하는 것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마음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내 아이들에게 나는 아무 것도 못하는 아버지, 야구도 못 가르쳐 주는 아버지, 자전거도 못 배워주는 아버지, 아무 것도 못하는 아버지로 비취니까 견딜 수 없는 위기감을 느낀 것입니다. 아이들이 앞으로 커서 무엇이 될 것인가 생각하니까 위기가 온 것입니다. 그때부터 강박사가 아이들을 붙잡고 교육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애를 붙잡고 이런 이야기부터 했습니다. "얘야, 아빠는 눈을 못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굉장히 많아. 야구는 못하고 내가 네게 자전거는 못배워 주지만 아빠가 눈이 안보이기 때문에 더 잘하는 것도 굉장히 많아. 아빠가 눈을 감고도 얼마든지 성경이야기를 할 수 있어. 다른 사람은 못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도 불을 끄고도 성경 전체를 다 읽을 수 있어." 아이를 재울 때마다 성경을 읽어주는 것입니다. 목욕을 시킬 때도 성경을 읽어줍니다. 아빠는 눈을 잃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것을 아이들 앞에 하나 하나 보여준 것입니다.
아이들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를 자랑하기 시작하는데 학교 가서 아버지 자랑을 할 때 아이들이 다 놀래는 것입니다. 자기 집에 아버지는 도무지 못하는 것을 애 아버지는 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뜬 아버지들이 흉내도 못내는 걸 시력을 잃은 강박사는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 애가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목욕을 시키니까 "아빠, 나중에 내가 아이 낳거든 그때도 아빠가 우리 애 목욕 시켜줘야 돼." "그때는 네가 목욕시키면 되잖니?" "목욕은 되는데 성경 읽어주는 건 못해요. 그러니까 아빠가 와서 해 주셔야 돼요." 그렇게 아양을 떨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할 수 없는 걸 붙잡고 탄식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못하는 것은 잊어버립시다. 그것을 왜 자꾸 붙잡고 있습니까? 내가 못하는 것을 잊어버리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강박사의 성공비법이 그것입니다. 그는 육신의 눈을 잃었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늘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이 분은 이 시대에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신앙의 사람입니다. 이 분의 강연회는 큰 감동이 있습니다. 이 분이 너무도 생생한 하나님을 만나고 동행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그에게 위대한 일을 이루어 가시기에 우리 모두가 그에게 감동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성냥불과 등잔불은 다릅니다. 성냥불은 켜면 처음에는 강렬합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 사그라지고 꺼져 버립니다. 등잔불은 꾸준히 불타는 그런 불입니다. 기름이 공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성냥불 삶인지 등잔불의 삶인지 우리의 자세를 검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가치를 검토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하늘나라의 등잔불처럼 우리에게 영원한 언약으로 은혜를 공급하고 계신 것처럼 한결 같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늘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보이는 현상을 다스리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에 중심을 보시고 우리의 미래까지 다 보십니다. 영혼과 연결시켜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 우리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응답하고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용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