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 있는 여성    (롬 16:13)

오늘은 여성시대입니다. 오늘은 여서의 목소리가 커지고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어느 때 보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에 진출해 보니까 여성들의 능력도 월등하고 사회인식도 새로워졌고 그래서 오늘은 어느 때보다 여성들의 활동의 폭도 넓어졌습니다.

마사 발레타라는 분이 “여자한테 팔아라”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을 보면 앞으로 모든 장사는 여성을 상대로 해야 먹고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은행을 터는가” 그것은 “그곳에 돈이 있기 때문이다.” “왜 산에 오르는가” 그것은 “거기 산이 있기 때문이다.” “왜 여성을 상대로 해서 마케팅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여성들이 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남성들은 돈이 없습니다. 남성들이 일터에 나가 일하면 월급은 자동적으로 통장으로 들어가 정작 자신은 월급을 손에 만져볼 기회도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아내에게 용돈을 타 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도 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고 엄마를 무서워합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들이 모든 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모든 권위와 힘이 돈에서 나옵니다.

남자들은 이렇게 뒤에서 큰소리만 칠 뿐 실속이 없습니다. 현재 모든 상품의 구매를 80%를 여성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성을 상대로 선점한 기업만 10년 후에 살아남는다고 말합니다. 백화점에 가 보십시오. 전 매장의 대부분이 여성용 상품입니다. 고객의 절대부분이 여성들입니다. 남성들은 아내 뒤를 좇아가며 짐을 들고 다닐 뿐입니다.

오늘은 과연 여성시대입니다. 여성성이 가장 발달되고 참여도가 가장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는 때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몇 가지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하나는 “성경에는 여성과 남성을 차별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남녀 차별이 심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는 이를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곳에서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때 남존여비 사상이 전 세계적인 문화를 이룬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 차별이 심했던 나라였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잔존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이 문제가 상당히 보편화되고 일반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아주 좋은 현상입니다. 남녀가 차별받는 사회는 분명 미개한 사회입니다. 더구나 사람이 차별받는 사회는 더 낙후된 사회임에 틀림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원칙적으로 남녀의 차별을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차별이 없는 것이 복음적입니다. 더구나 인간을 차별하는 것은 더욱 용납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지니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가는 사회나 국가는 가정 먼저 변화되는 것이 이 장벽이 허물어지는 일입니다. 차별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분명 방벽입니다. 편견입니다. 이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면서 그릇된 인습이나 편견 그리고 방벽들이 허물어 졌습니다. 성경은 분명 이 차별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성경을 보면 여성의 역할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중요한 사역자는 모두 여성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성들의 사역과 역할을 가감 없이 그대로 설명하고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특히 막달라 마리아의 역할은 예수님의 12제자들 보다 훨씬 탁월했습니다. 그의 신앙적 중심으로나 복음적인 열정으로나 주어진 현실에 대처하며 모든 어려움과 두려움들을 극복하는 자세 등을 보면 참 대단한 제자였습니다. 그 여인은 제자들이 감당하지 못한 것도 잘 감당해 냈습니다. 예수님의 3년 공생애 기간 중 언제나 보이지 않게 예수님과 동행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의 절정이었던 십자가의 길을 갈 때에도 마리아는 시종일관하며 그 뒤를 따라갑니다. 모든 제자들은 도망가서 숨어있는 상태에서 말입니다. 성경은 이 여인의 헌신의 삶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자주 장사 루디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여인은 여걸입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과감하게 전도를 위해서 사용할 줄 알았습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전적으로 뒷받침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선교에 성공한 것도 루디아의 그런 후원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또 브리스가의 역할은 어떻습니까.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해서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었던 열정을 가졌던 여인입니다. 헌신적이었습니다. 열정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나오는 루포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여인은 이름도 없습니다. 그의 헌신의 내용이 무엇인지 나타나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그 여인을 가리켜서 “루포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는 내 어머니”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름도 없고 그가 한일이 무엇인지 소개도 하지 않고 있지만 그의 역할이 대단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를 내 어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루포의 어머니가 음으로 양으로 자신의 전도사역을 위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전도자의 길을 걷는 동안 잊지 못할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그중에서도 이 루포의 어머니를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중심 있는 여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용하면서도 자신이 할 일을 다 하고 한일들이 모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보통 역할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막 15:21절을 보면 이 루포의 어머니 이야기가 또 나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가시던 그 길은 아주 힘든 길이었고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렇게 힘들게 십자가의 길을 가실 때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이 그 길을 가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벗겨 자신이 대신 지고 갑니다. 당시는 그 일이 참으로 창피스러운 일로 생각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십자가를 아무 말 없이 지고 올라갑니다. 로마 군병들이 허기지고 상처입어 걷기도 힘들어하는 예수를 채찍질하고 발로 걷어차는 모습을 볼 때 이 시몬이 십자가를 벗어 던지고 제발 예수를 때리지 말라고 항변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의 고난이라는 영화를 보면 그 시몬의 극적이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시몬도 12명의 제자들보다 그 역할이 훨씬 성숙하게 나타납니다. 지금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서 그 자리에 없습니다. 요한은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따랐지만 마리아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의 모습을 보다 못해 시몬은 혼자서 안타까워하면서 로마군인들을 향해서 항변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바로 그 시몬의 아내가 본문에 나와 있는 루포의 어머니입니다. 이쯤 되면 그 루포의 어머니의 역할이 어떤 것인가를 짐작해 알 수 있습니다.

루포의 어머니는 남편을 좋은 신앙인으로 만들어 유사시에 고난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내 놓았습니다. 아들을 신앙적으로 키워서 사도바울이 선교하는 길에 내 놓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전도자들의 오가는 길목에 위치해서 언제나 소리 없이 나타남 없이 할 일을 다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사도바울은 너무나 감동을 받았고 따뜻한 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의 어머니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을 진정한 여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여인이 가장 힘 있는 여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은 조용히 배후에서 남성을 움직이는 힘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배후에서 할 일을 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자는 전면에 나타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남성은 목소리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바울은 가정을 말할 때 언제나 “아내들아” 하고 남편에 앞서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양육 담당자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이나 자녀 양육담당을 여성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이 두 가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고 사명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기초적인 단체는 가정입니다. 가정이 건실해야 세상이 건실해집니다. 가정에서 사회 지도자가 양육되고 길러집니다. 그래서 가정은 기초적 교육장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가정 교육장의 책임을 여성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기초적인 근본은 가정입니다. 그리고 그 기초의 한 중앙에 있는 사람은 어머니이고 아내이고 여성입니다. 그래서 위인을 말할 때는 의례히 어머니가 등장하고 어머니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를 말할 때는 그의 어머니 요게벳을 말하게 됩니다. 그 여인이 모세를 양육할 때 그냥 젓만 먹이는 단순한 유모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들에게 유대인의 정신과 혼과 책임을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 모세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강조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품에서 모세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무엘을 말할 때는 언제나 한나를 말하게 됩니다. 그도 사무엘에게 많은 정신을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디모데에게는 유니게 라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라나는 디모데에게 구약의 쉐마 즉 이스라엘의 전통교육을 강조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대에 디모데라는 전도자가 탄생하게 됩니다. 맹자를 말할 때는 이름도 없는 어머니를 말하게 됩니다. 이름도 없고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맹자 하면 그의 어머니를 누구나 쉽게 떠오르게 합니다. 그만큼 아들 맹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이 그의 어머니였기 때문입니다. 율곡은 어질고 정숙한 어머니 신사임당이 배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율곡하면 그의 그 훌륭한 인품이 그의 어머니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양육법은 사명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상기의 여인들은 한결같이 자라나는 아들에게 사명을 강조하고 교육한 어머니들입니다. 함께 살고 더불어 살고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는 사명의 삶을 강조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교육이고 양육이고 훈련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구조가 이 사명이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무시하고 가르치지 않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함께 살아가는 사명이나 역할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가 오늘 이처럼 서툴고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서툰 것입니다.

이제는 단순히 자녀를 양육한다는 차원에서 사명을 강조하는 양육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건실한 교육은 사명을 강조하는 교육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강조하는 교육이 가장 좋은 교육인 것입니다. 요게벳이 자라나는 모세에게 이 사명을 얼마나 심도 있게 강조했겠습니까. 한나가 사무엘에게, 신사임당이 율곡에게, 유니게가 디모데에게 얼마나 이 사명의 삶을 강조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이 땅의 여인들에게 주신 몫이고 사명이고 역할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소중한 역할이고 사명입니까. 이 역할을 다하는 것이 여성의 여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이 소중한 역할을 잊으면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는 것입니다.


오늘 세상에는 지혜 있고 중심 있는 여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역할을 다하는 여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여인의 역할도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도 포기하는 어머니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혐오감을 가정중심의 정신을 메마르게 하는 어머니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가정을 떠나 밖으로 돌며 탈선하는 자녀도 있고 남편도 있습니다. 모두 주어진 역할에 대해서 소홀히 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로버트 슈만이라는 사람은 프랑스의 외무장관을 지냈고 수상도 역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갑니다. 그분이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간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합니다. 그때 실수로 뒤에 있는 여인의 발을 밟게 됩니다. 그래서 당황한 그는 그 여인에게 사과하려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 여인은 구두를 털면서 마치 진돗개처럼 욕을 퍼부으며 “병신아, 멍청아, 눈 뒀다 뭐하느냐”하고 욕을 해댔습니다. 한창을 욕을 하던 그 여인은 얼굴을 들고 쳐다보는 순간 얼굴이 빨개지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러더니 사과하기를 “아 선생님 미안합니다, 나는 남편인줄 알고” 라며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그는 순간적으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갑니다. 그 여인에게서 본 그 흉악한 모습에서 이 세상의 모든 여인에 대한 좋지 않은 편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 좋지 못한 순간의 모습이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 인생의 방향을 돌려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여인의 모습에서만 나타나겠습니까. 이 땅의 여성들 중 결혼을 포기하고 평생 독신주의를 고집하는 여성의 경우 많은 여성은 아버지에게서 본 부정적인 견해 때문이라는 조사도 있습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에서 세상의 남자들은 모두 아버지 같을 것이라는 편견이 마음에 자리 잡은 것입니다. 어쩌면 나의 한순간의 잘못된 행동이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 씻지 못할 상처로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대해서 소홀히 함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여성들에게는 섬세한 역할을 주셨습니다. 때로 그 역할이 섬세하기 때문에 작게 여겨지고 무시하게 되는데 사실은 그 역할이 거의 정신적인 역할이기 때문에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인은 주어진 역할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이 엄청난 역할을 도외시하면 안 됩니다. 진정한 여성상은 중심 있게 자신의 할 일을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그런 여성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여인이 루포의 어머니입니다. 이 여성이야 말로 가장 여성다운 여성상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여기 나타난 루포의 어머니는 이름도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한 일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를 가리켜서 내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남편이나 아들이 모두 가장 절박하고 긴요한 시간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잘 소화해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가장 힘들고 절박해 할 때 남편을 투입시켜서 그 십자가를 대신 지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장 필요로 할 때 아들을 투입해서 전도자로 그를 돕게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가장 힘들고 어려워할 때 마다 자신이 나서서 그에게 안식과 쉼과 물을 마시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를 잊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 말이 “그는 내 어머니다”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이것이 진정한 여성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여성이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면에 나서서 남자들과 똑같이 큰소리로 떠들고 의자를 나란히 놓아야 여성을 높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에게는 여성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역할이 있습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