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5 : 1-3,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라는 제목으로 잠시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성도들은 영원한 하늘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사실 우리의 소망은 땅위에 있는 것이 라기 보다 영원한 천국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 14:1-3,에서 하늘의 집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기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분명 하늘에 우리가 거할 처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처소를 마련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가 천국으로 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땅에 있는 장막 집은 신자들의 육신의 몸을 의미합니다. 땅에 있는 장막 집은 육체의 나약성과 무가치성을 나타냅니다. 본문에서는 장막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비교해 놓았습니다.
장막같이 무너지기 쉬운 육신과 영원한 집, 하늘에 있는 집을 비교한 것입니다. 여기서 무너진다고 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기 마련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최대의 문제는 곧 죽음의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만일 땅위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안다"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이란 마침표가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국이 있습니다. 이 하늘에 있는 집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쎄크위치의 쿼바디스에 의하면 바울은 순교할 때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마치 이웃에 놀러가는 것 같아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음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요, 영원한 집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2절은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이 땅위에 살면서도 항상 천국을 사모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 5절을 보면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천국 신앙은 성령으로 보증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집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영원한 집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천국에 대하여 성령으로 보증을 받아서 살아나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천국의 보증수표입니다. 스데반은 이 충만한 성령의 보증 속에서 그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났습니다.
오늘 고인이 우리에게 보여준 얼굴은 밝은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여기서 천국의 보증을 받았다는 생각이 왔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영원한 하늘 집을 확신하면서 이 땅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보다 천국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는 복된 유가족과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조억만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