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990
사도행전 13:20-23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벌써 여러 해 전의 이야기입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 험프리 의원이 존슨 대통령을 대신하여 프린스턴 대학에 와서 연설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점퍼 차림의 그는 운집한 대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서두를 꺼냈습니다. "도대체 민주주의란 무엇입니까? 두 사람의 후보를 내놓고 투표하여 60%이상의 득표수로 당선되는 것이 정말 민주주의라고 합니까? 국민들이 스스로 원하는 자를 자유롭게 투표하여서 당선이 된다면 모르겠지만 오직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어떻게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에서 법은 매우 중요합니다. 법에 의해 모든 것을 집행하고 또 국민들의 삶을 제약하지만 그러나 법은 만들면 되는 것이며 그 법은 또한 해석하기에 달린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누가 정권을 잡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권을 잡은 사람의 인격과 양심이 문제가 되며 더 나아가서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신앙이 문제입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서는 나는 법과 민주주의를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내 인격과 신앙을 믿어줄 수 있으면 한 표를 던져 주십시오." 험프리 의원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거기 모였던 수많은 학생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환영하였습니다.
아무리 사회제도가 복잡해지고 정치■경제 등의 문제가 우리를 위압한다 하더라도 결국 우리의 삶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인격과 양심이요 신앙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사람을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 중에 90%가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라고도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그의 뜻을 이루는데 쓰시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서 다윗을 보시고 "이는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이를 통하여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을 그는 귀중히 쓰십니다. 그럼 과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었던 사람,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사무엘상 16장에는 하나님이 사무엘로 하여금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가 그의 아들들을 만나볼 때, 큰아들 엘리압을 보고 그를 택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삼상 16: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나 지혜 또는 인간적인 용기를 보시지 않습니다.
오직 그의 중심, 속 사람이 하나님 마음에 흡족한 자를 귀히 쓰시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사도 바울은 신장이 4척밖에 안 되는 왜소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안질로 인하여 일생 동안 고생한 사람이었으며, 행동이 남들처럼 민첩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달변가도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처음에 예수님을 몹시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는 이들을 직접 찾아다니면서까지 죽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속마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불타는 정열을 보았습니다.
역대하 16:9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는 그 속마음이 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기울어지는 사람을 귀히 쓰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5:17에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 왕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이 말을 상고해 본다면 스스로 작게 여겨 겸손할 때에 하나님은 귀히 쓰셨다는 말입니다.
야고보서 4장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낮추어라. 그리하면 너를 높이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겸손한 자를 위하여 은혜를 베푸시고 또 그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어느 날 제자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기독교인으로서 최고의 덕은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은 "겸손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러면 두 번째 덕은 무엇입니까?"라고 다시 질문하자 "그리스도인의 덕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스스로 작게 여기는 마음,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인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국회의원 선거 때에 신문의 만화를 보면 국회의원 후보들이 유권자들 앞에서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혀 절을 하거나 심지어 마당에 나와 꿇어 엎드려 있는 풍자적인 그림이 종종 나오는 것을 봅니다.
그 때마다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은 "이들의 절이 진심으로 한 것이라면■. 이렇게 국민이 왕이 될 수 있는 사회가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입니다. 선거 기간만 고개를 숙이고 한 표를 부탁하다가 일단 당선이 되고 나면 국민들 위에서 군림하는 정치 세계, 이와같이 국민이 주인이 되지 못하는 세계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비원에 가서 임금이 거처하던 궁궐을 가만히 살펴보면 아주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왕이 집무하던 궁전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최고 권력을 가진 왕이기 때문에 지나가는 새들이 앉을 수 있는 용마루가 왕위에 있을 수 없었구나라고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왕의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새조차도 막아보려던 교만이 건축에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도 바로 그 교만 때문에 넘어진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의 본명은 사울이었습니다. 그가 어렸을 적의 별명은 바울이었는데 이것은 키가 너무 작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에는 스스로 "사울"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바울"이라는 이름을 택하였습니다. 키가 작아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는 겸손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다윗은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에서 무려 800번이나 그의 이름이 나오며 신약에서도 60번씩이나 나오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도 잘 알듯이 그는 매우 많은 허물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은 까닭은 그의 겸손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왕", "나의 주 하나님"이라고 불렀으며, 또 "하나님이 나를 항상 심판하고 다스린다"라고 말할 정도로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일생은 크게 셋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생활이요, 둘째는 범죄한 생활, 그리고 셋째는 참회의 생활입니다.
다윗은 어렸을 적에 철저한 믿음의 소년이었습니다. 비록 몸은 왜소하지만 마음은 담대하여 양을 치면서 사자를 찢어 죽였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는 다윗과 블레셋 장군 골리앗과의 대결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상대할 수 없었던 거인 골리앗 장군을 물맷돌 다섯 개로 완전히 굴복시킬 때에 다윗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정말 굉장한 믿음입니다. 그 후 왕이 되어서도 변함없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철저한 신앙을 갖고 모든 전쟁에 임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무척이나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어찌나 흥겹게 춤을 추었던지 사울의 딸이자 그의 아내인 미갈은 "왕으로서 체통도 없이 모든 신복들 앞에서 몸을 드러내다니"라고 심중에 비웃었습니다. 그 때 다윗이 섭섭해하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기뻐 춤을 춘 것이라 그가 나를 택하사 왕으로 삼으셨으니 나는 그 여호와 앞에서 뛰어 놀리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백향목으로 만든 궁전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법궤가 휘장 안에 있음을 염려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가난하고 어려울 때에 하나님을 애타게 찾다가도 영광과 행복을 누릴 때에는 하나님을 잊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영광 중에 하나님을 생각했고 극히 평화로운 가운데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결심하였습니다.
시편 42편에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하나님을 찾는 다윗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과 사랑이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만든 것입니다.
언젠가 재미있는 기록을 본 적이 있습니다. 가난하여 남의 빨래를 해주면서 생계를 이어가는 어려운 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교회에 아주 열심히 다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매주 교회에 나올 때마다 언제나 5센트씩 헌금을 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그 교회 장로님이 그 자매님을 몹시 측은하게 생각하여 목사님께 "그 자매님은 남의 빨래를 해주면서 아이들과 아주 어려운 생활을 하는데 5센트라는 돈은 자매님에게 매우 큰돈입니다. 앞으로 제가 자매님 대신 5센트씩 헌금을 드리겠으니 자매님께 말씀 좀 해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장로님의 제안을 무척 그럴듯하게 생각한 목사님은 자매님에게 장로님의 취지를 잘 설명하고 받아들일 것을 종용하였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들은 이 과부는 눈물을 흘리며 "어찌하여 당신들은 비록 5센트지만 그것을 하나님 앞에 바치면서 얻는 나의 작은 기쁨마저 빼앗아가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치면서 오히려 기쁨과 감사를 느끼는 이 믿음이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따르던 믿음도 이런 종류의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헌신하면서 감사하고 찬양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범죄의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를 보면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다윗의 씻을 수 없는 죄목이었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탐하여 결국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얻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범죄한 이후 뜨거운 눈물로 하나님 앞에 회개와 참회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회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다윗은 죄를 자복함에 있어서 결코 자기가 일시적으로 우연하게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시편 51편에서와 같이 "내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물론 그것은 어머니가 어떤 불륜의 관계에서 다윗을 낳았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나는 본래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며 우리야의 아내를 취한 범죄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 본래의 죄가 열매를 맺어 이룩된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범죄를 우리야나 그의 아내 밧세바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았고 또 그 날의 어떤 상황에다 그 이유를 붙이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모든 것을 자기의 잘못으로 돌렸고 또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본래 그의 마음속에 숨어 있었던 죄가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회개는 참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둘째로 그의 회개는 구체적이며 실생활 속에서 느끼는 회개였습니다. 그는 아들 압살롬에게 배반을 당하여 피난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하 16장에 보면 그 피난 시절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을 저주하였습니다. 옆에 있던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을 위하여 그의 목을 베려 할 때 다윗은 그를 말리며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내게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여도 그 모든 것을 여호와께서 주관하시는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시편 속에서도 그가 여러 번 되풀이한 것은 전쟁에 패한 것도 질병도 원수들이 자기를 조소하는 것도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구체적인 현실 생활 속에서의 회개였습니다.
그는 나단 선지자의 충고를 겸손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일생동안 회개하는 자세로 살았습니다. 입술로만 회개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회개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게 된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시편은 모두 150편이나 되는 방대한 시입니다. 그 중에 73편이 다윗 왕의 자작시입니다. 그 73편중에서도 제 34, 52, 54, 56, 57, 63, 142편은 다윗 왕이 고민 중에 쓴 시이며, 그가 회개하면서 쓴 시는 제 3, 16, 18, 30편입니다. 제 6, 32, 38, 51, 102, 130, 143편으로서 여기에는 다윗의 뼈아픈 회개와 눈물이 담겨 있습니다.
그에게 남다른 지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또한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겸손한 사람으로 항상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송을 드렸던 사람입니다. 역경 중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성의 비판을 누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역설적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질병 가운데에서도, 실패와 낙담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세워 성군 다윗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를 다 이루고자 하시는 데 쓰일 그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오늘도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불러모으고 계십니다.
기도:오늘까지 연약한 저희들을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겸손함과 진실로 주를 향한 믿음과 감사와 찬송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버린 바 된 사람이 되게 마옵시고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믿음 그리고 겸손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인간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이 귀히 쓰시는 도구로 만들어 주옵시며 항상 지켜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아멘.
출처/곽선희목사 설교 중에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