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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6-31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자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어느 정신병원에서 입원하고 있던 정신질환 환자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나는 나폴레옹이다"라고 되풀이하며 뛰어다녔습니다. 그랬더니 뒤이어 다른 환자가 "너는 나폴레옹이 아니다"고 응수를 하며 뒤따라가고 또 다른 환자가 "내가 언제 너를 나폴레옹으로 임명했느냐"고 하더랍니다. 우리가 정신이 온전할 때는 가리는 것도 많고, 체면도 생각하고, 이웃도 생각하며 한 마디의 말에도 신경을 쓰며 또 행동합니다. 그러나 정신질환자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에게서 가장 솔직하고 가장 진실한 인간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내가 나폴레옹이다"라는 왕의 개념이 들어앉아 있지 않나 생각해봅시다. 즉 인간 내부 깊은 곳에서 왕이라는 교만이 본성으로 감추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정신이 온전할 때는 온유한 것 같기도 하고 순종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술이 들어가면 대개가 다 왕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술 취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가 누군 줄 알고?" 하면서 자기를 잘 알아 모시지 않는 것이 천부당 만부당하다고 안하무인격으로 호령을 하며, 잘났다고 큰 소리로 떠듭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본심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세상을 살면서 마지못해 온유도 하고 마지못해 순종도 합니다만 저 깊은 곳에서는 왕이 되고자 하는 높은 교만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인간 본성의 타락에서 오는 진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이 무엇입니까? 히브리 원문대로는 그림자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과 닮은꼴로 비슷하게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닮았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고 있습니까? 이천 년 동안 내려오면서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닮았다면 하나님도 사람 비슷하게 생겼을 것이라고 상상하여 하나님을 그릴 때는 늙은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표현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닮았지만 하나님이 사람을 닮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그 형상 됨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개혁신학자들의 주장하는 바는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성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 존재의 신령한 면을 닮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분명히 동물성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동물성 위에 영적 존재의 본질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적인 것을 닮아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판단력이 있고, 지성이 있고 그리고 자율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 자율성을 지녔기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자율성은 아주 중대한 문제입니다.
둘째는 도덕성과 거룩성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그 마음 깊은 곳에는 착함이 있습니다. 선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고 영원한 가치의 것을 찾아 헤매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덕성과 거룩하고자 하는 마음, 즉 성결로 향하는 속성이 인간의 본질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이라 봅니다.
세 번째로 만물을 다스리는 주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 번째의 특성이 오늘 생각하고자 하는 본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시고 그 만물을 다스리는 것 같은 그러한 그림자, 그 비슷한 무엇을 우리가 가졌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되었고, 좀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만물을 다스리기 위해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즉 모든 것을 다스리기 위하여 인간은 존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다스림이 없다고 한다면 인간은 인간되지 못한다는 주요한 의미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특권, 축복은 바로 이 다스림에 있습니다. "다스리라, 정복하라, 충만하라." 이러한 최고의 복을 가지고 인간은 태어났습니다. 여기에 인간 됨의 자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스림에 필요한 자유의지, 지혜, 능력, 지도력, 그리고 권세를 주셨고, 위엄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복도 여기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쁨이라는 것도 다스림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의 물질을 소유했다는 기쁨, 즉 그만한 물질을 내가 다스린다는 행복의 영역이 있는 것입니다. 가정을 가졌다는 것도 하나의 왕국으로 그 곳에 기쁨이 있는 겁입니다. 회사의 사장, 그가 가지고 있는 권력 등, 다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윗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전체를 지배한다는 지배욕에서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영광, 칭찬, 존경 등 모두가 통치권적인 기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바로 될 때는 통치하는 자나 통치 받는 자가 같이 기쁨을 얻을 수 있지만, 잘못되면 폭군이 되고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폭군도 노예도 타락된 통치권의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스리라 하셨는데 "다스린다"라는 것은 다른 말로 책임을 진다는 뜻입니다. 언제나 다스리는 자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다스리는 자는 그가 누리는 자유만큼 그가 가진 권리입니다.
가령 돈이 많다 하면, 돈이 많은 만큼 자유가 많습니다. 가난한 자는 결코 자유할 수 없습니다. 결국 얼마만큼의 돈을 가졌다 하면 그 가진 만큼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만한 돈을 다스리는 책임이 있습니다. 또 지식이 있다 하면 있는 만큼 자유합니다. 무식한 자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역시 지식이 있는 만큼 그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무거운 책임을 얻은 것입니다.
주어진 주권만큼 책임이 있고 주어진 자유만큼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느 만큼 자유와 그에 따르는 권력을 주셨습니까?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신 다음,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니 따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내가 따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는 그만큼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배반할 수도 있고, 순종할 수도 있는 엄청난 자유를 주셨습니다. 생물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요즈음은 이 지구를 몽땅 불태울 수도 있는 권력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책임도 큽니다. "너희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살고 죽는 것은 네가 결정하고 네가 책임져라, 즉 네가 선택하고 책임지라는 어마어마한 자율성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힘입어서 이만한 자유를 누리고 동시에 이만한 책임도 맡았습니다. 내 책임은 내가 지고, 나는 다스리는 자로서 다스려야 하는 책임도 졌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이요, 나아가서는 우리의 의무와 행복의 길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좋지 못한 습관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 생기면 그 불행의 원인을 다른 어디로 돌리는 습관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죽은 자의 탓을 산 자에게 돌리는 경우입니다. 아들이 죽으면 며느리가 나빠서 아들을 죽었다고 합니다. 또 어린 아이가 극성스럽게 울어대면 저 아이가 저러니 어머니가 죽었다고 쉽게 말합니다. 왜 죽은 자의 책임을 산 자에게 묻습니까? 어떤 때는 돈의 탓으로 돌리고, 또는 세상의 탓으로, 이웃, 친구, 부모의 탓으로 전부 돌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돌리는 속에서 우리는 비인간화되어 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는 것은 내가 그를 다스리지 못한 것이 되고 맙니다. 돈 때문이라고 말하지 맙시다. 히브리 사람들의 유명한 격언 중에 "돈을 다스려라, 그러면 돈은 네게 충종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나 돈을 섬기면 돈은 너에게 폭군이 되리라. 너는 비참한 돈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돈을 다스려야 할 사람이 돈의 지배를 받아놓고 그리고 망한 다음 돈의 탓으로 돌려도 좋습니까? 벌써 인간인 주관자가 없어진 것입니다. 사회는 사람이 만든 사회입니다. 사회의 탓으로 돌리겠습니까? 누구의 탓으로 돌리는 한 노예 되고, 타락하고, 마지막에는 비인간화되어 버린 존재로 나타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책임 전가하지 맙시다. 잘한 것이든 못한 것이든 책임을 전가는 자기 스스로 자기 주권을 잃어버리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비인간화되고 존재 상실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스린다는 말은 사랑과 보호를 의미하고 바른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관계에 서서 같은 특권, 자유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특권이요, 내게 주신 형상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이기에 먼저 소중히 여기고 지켜야 하겠습니다.
또한 다스린다, 책임진다라는 것은 주인 의식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책임을 지는 자가 주인입니다. 남편이 책임지면 남편이 주인이요, 아내가 책임지면 아내가 주인입니다. 주인은 자기 것을 사랑하게 되고 너그럽게 대합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너그럽게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회사에서 물건을 만들 때도 각자 내가 하나의 월급받고 남의 물건을 만든다는 방관자의 의식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것은 우리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주인 의식을 가지고 대하는 독립적인 의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눈이 올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는데 눈이 많이 쌓이면 산에 사는 짐승들이 먹을 것이 없어 동네로 다 모여듭니다. 노루, 토끼, 꿩 할 것 없이 내려오면 사람들은 올무를 놓아 이 동물들을 잡으려고 사냥할 준비를 했었습니다. 눈만 오면 동물들이 배고파 동네로 들어오는 것을 기회로 보고 마구 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공부하러 미국 미시간 주에 가서 보니 눈만 쌓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동물들이 굶지 않게 눈 위에다 신문지를 깔고 먹이를 많이 놓아주며 멀리서 즐겁게 바라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 광경을 보고 회개했습니다. 짐승들이 굶어서 동네로 내려오면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원칙이지, 그것을 기회로 이용해서 잡아먹겠다는 우리의 생각은 정말 고약했었습니다.
다스리라는 것은 굶으면 먹이라는 뜻입니다. 다스리라는 것은 보호하라,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귀중한 말씀입니까? 다스린다는 것이 잡아먹으라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겠습니다.
또한 서커스 하는 사람을 보면 길들이기 어려운 표범을 잘 길들여 마음대로 타고 놀고 껴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표범하고 그렇게 친하게 지낼 수 있습니까?" 대답에 진리가 있었습니다. "내가 저 맹수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을 맹수들이 알면 결코 나를 해치지 않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얘기입니까? 모든 동물은 사람을 무서워합니다.
사람이 동물들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면 그들은 사람을 해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들을 사랑하고 믿고 다스려 준다는 것을 알면 아무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맹수도 이것을 알기만 하면 같이 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는 동물과 얘기를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냥 흘려버릴 얘기가 아닙니다. 만물을 사랑으로 다스리고 긍휼로 다스려서 보호하라는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주권을 잃어버리는 동안은 일대 일로 싸우는 관계, 원수의 관계로 변하고 맙니다.
만물을 다스리라 지배하라는 뜻은 사랑과 질서와 조화를 의미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그렇습니다. 화평, 샬롬, 즉 화평을 이루고 화평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화평을 이루고 화평을 창조하기 위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아닐 경우 그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나아가 인간이 인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한 후에 하나님이 "너 왜 선악과를 따먹었느냐?" 물으실 때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여자가 따먹으라고 해서 먹었나이다" 여자를 지배해야 할 남자의 대답이 이래서 되겠습니까? 최소한 이런 대답은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내 아내를 잘못 다스려 이런 결과가 왔으니 책임은 내게 있습니다." 이렇게 아담이 대답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겁니다. 책임질 줄 모르는 남자는 믿을 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또한 하와 역시 너는 왜 먹었느냐고 물었을 때 뱀이 먹으래서 먹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나는 인간이 아니고 뱀의 노예라서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스림의 권세를 버리고 변명해 버리는 순간 그는 자기의 소중한 권리를, 즉 인간 됨의 본질을 상실하고 맙니다. 자포 자기를 의미합니다. 창세기 4:7에 보면 "죄의 소원은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라고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잠언 16:32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네 마음도 네 지혜도, 네 가정도 네 사회도 네 건강, 물질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다스림에는 원리가 있습니다. 이 중요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사울 왕이 겸손할 때 왕위에 올려놓았고 사울 왕이 교만할 때에 왕위를 폐하신 하나님입니다. 겸손, 오직 겸손만으로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에 겸손 아닌 것으로 다스릴 때는 폭군이 되고, 때로 노예도 하고, 원수도 되는 것입니다. 겸손의 힘으로 다스리고, 진실의 능력으로 다스리고, 솔직한 권세로 다스릴 수 있을 때에 바른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흥부와 놀부의 얘기에서 제비 다리 하나라도 치료해 주면 그 것에 복이 있었다는 것,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것이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내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더 이상 돌리지 맙시다. 내 책임 내가 지고, 다른 사람의 책임까지 내가 지는 주인의 의식을 가져야겠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인간 됨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의 길이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겸손으로 자기를 다스리고, 믿음으로 죄를 다스리고 사랑으로 만물을 다스릴 수 있을 때에 여기에 평화가 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이 있고 영광이 있습니다.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엄청난 자유와 권세를 주셨지만 이 권세를 바로 행사하지 못함으로 이 땅에는 폭군이 있고 노예가 있습니다. 그리고 싸움과 죄악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기도하오니 다스리라는 주의 말씀대로 죄도, 욕심도 그리고 사회도, 사랑으로, 겸손으로, 진리로 다스려 나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곽선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