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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4:1, 9-1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이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고민이 없는 동물보다는 차라리 고민이 있는 인간이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민의 원인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인간의 인간다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적 고민 그 속에 인간의 매력도 있고, 인간의 의미도 있고, 인간의 삶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때로 괴로움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답지 못한 생각입니다. 항상 계속적으로 고민과 싸워가면서 인간의 인간 됨으로 깨닫고 성장해 나가는 것 같습니다.
배고프다, 춥다 하는 문제는 인간의 인간적 고민은 아닙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이 어떤 때는 가장 절실하고 절대적인 여건이기도 합니다마는 가장 큰 것은 아닙니다. 비교해 보면, 배고픈 것이 고통이긴 하지만 배신당한 고통만큼 크지는 않습니다. 추운 것도 괴로운 것이지만 뼈아프게 느끼는 죄책만큼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사람다운 고통이란 배신, 죄책감, 굴욕감, 저주, 절망, 허무, 고독 등으로 가장 괴롭고 깊은 고통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인간의 고민은 대체로 불신에 근거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더 큰 고민은 믿음에 근거합니다. 주변에는 혹 양심을 부정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부정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양심의 가책을 좀 떠나 살아보겠다는 뜻에서 니체는 초인간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니체 자신도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민했습니다. 이런 양심, 이성의 고민을 부정하고 살아보려는 사람에 비해서 양심을 긍정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사는 사람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양심을 희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일단 죄를 범하고 나면, 양심의 소리는 뇌성보다 더 강하게 크게 들려 옵니다. 이래서 우리는 양심을 따라 산다는 것에 더 큰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이 감찰하시는 무서운 눈길을 느끼면서 산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을 시시각각으로 느낄 때 그는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믿음 안에 있는 고통입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양도하시지 않는 강한 섭리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진실에 도달할 때까지 어떠한 고난도 주시는 것을 불사하십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하나님이 하시는 어떤 거룩함이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수준의 겸손에 이르기까지 여지없이 무서운 고통을 주시기도 합니다. 절대 양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한 번 붙들면 절대로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할 때는 도망가려고 노력해도 절대로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배역하려고 해도 배역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꼭 붙들리면 어찌할 수 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끌려가는 절박한 상황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길을 보고 사는 사람은 두려울 수밖에 없고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포로가 됩니다. 그는 자기의 나약함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한 사실도 있기에 도저히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일할 수 없는 자신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사양합니다. 그는 남달리 소심하고 육체적으로도 어려운 여건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붙들었고 결국 그는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할 때는 내게 저주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강하게 느끼고 붙들린 사도 바울은 또 하나의 무서운 고통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려고 했지만 놓아주질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강하게 붙들린 자의 두려움의 고통이었습니다.
요나의 고민도 이런 고등한 고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구원도 믿고, 진리도 믿고, 하나님의 능력도 믿었고, 하나님의 심판도 믿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믿음은 있었지만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믿지 않았고 사랑을 거역했었습니다. 사랑을 외면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못마땅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는 남다른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의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라고 요한 1서 4:18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두려움 뒤에는 반드시 사랑의 결핍이 있는 것입니다. 내 고민의 깊음 속에는 사랑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피곤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첫 사랑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두려움에 살아야 합니까? 사랑을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부모의 살아도,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도 배신했기에 스스로 고민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랑을 못 받았다고, 사랑이 없었노라고 원망도 해봅니다만 다 거짓입니다. 마음의 고민은 진정 사랑의 배신 때문입니다.
니느웨 성은 앗시리아의 수도이며 앗시리아는 큰 나라로서 제국입니다. 그러나 유대 나라는 작은 나라로서 늘 앗시리아가 쳐들어 와서 강탈하고 노획하고 포로를 만들어 짓밟곤 했습니다. 고로 유대인들은 앗시리아가 원수의 나라이며 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입니다. 이럴 때 니느웨 성이 죄악으로 망한다고 하나님께서 요나를 불렀습니다. 요나서 1장에 보면 성읍 니느웨는 죄가 관용했고 악이 사무쳤다고 했습니다. 악이 끝까지 도달했기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이 도성이 망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인 요나로서는 박수를 칠 일입니다. 우리가 손대지 않고 스스로 망하니 잘되고 통쾌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에게 "요나야, 니느웨 성에 가서 40일 후에 망한다고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못마땅했습니다. 죽는 데도 준비가 필요하고 망하는 데도 준비가 필요하다고 혼자 중얼거렸음 직합니다. 망한다면 망하게 내버려두시지, 뭘 가서 예고를 하느냐고 하나님께 불평을 했음직도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그는 심각한 말을 하나님께 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인줄을 내가 알았음이나이다."
40일 후에 망한다는 말을 하라고 하실 때 벌써 요나는 눈치를 챘습니다. 만약 내가 가서 외쳤을 때 그들이 회개하면 하나님은 그의 뜻을 돌이키시리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원수 나라가 망한다는데 내가 왜 외치겠는가 하고 다시스로 도망간 것입니다. 도망가다가 고래 뱃속에 붙들렸고 고래가 토하는 바람에 니느웨 성으로 직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는 수없이 거리에 다니며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시원치 않게 억지로, 40일 후에 망한다고 외치는데도 이 사람들은 회개를 하고 생각했던 대로 하나님은 뜻을 바꾸게 됩니다.
3:10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된 것을 보고 요나는 화가 나서 "나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겠다"고 야단을 했습니다. 그는 원수가 사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고 싶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요나에게 하나님은 네가 화내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타이르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요나가 뜨거운 햇빛을 피하게 하기 위하여 박넝쿨을 준비하셔서 가리우게 했습니다. 그는 시원하고 좋아서 아주 기뻐했는데 난데없이 버러지가 넝쿨을 먹어 버려 다 말라버렸습니다. 그러자 바로 요나는 뜨거운 햇빛에 괴로워 또 화를 내었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고 하셨고 이에 대한 요나의 대답은 맹랑했습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하나님께 이렇게 달려드는 경우는 드문 것 같습니다. 요나의 마음속에는 미움이 가득차서 성내고 죽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가꾸지도 아니한 박넝쿨 하나도 말랐다고 아끼는데 이 성(成)에는 좌우를 가리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 명이 있으니 내가 어찌 이 성을 아끼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와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서 대화를 한 번 이어 보았습니다.
요나 : 하나님, 나의 체면은 뭐가 되는 것입니까? 망한다고 했으면 망해야지 내가 거짓말로 예언한 사람밖에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 이 사람아, 이 성이 망하는 것보다는 자네가 거짓말하는 사람이 되는 쪽이 훨씬 낫지 않느냐.
여러분, 언제까지 하나님과 대항하겠습니까. 대항해 봐야 안되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의 체면도 생각하고, 자기의 생각하는 의도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 대단히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했습니다.
4■19혁명 후 얼마 동안은 자유당의 부정부패가 그대로 신문에 노출되었습니다. 부정 정치인은 물론 부정 경제인도 그대로 다 발표했었습니다. 대학 교수 몇 분이 신문을 읽으면서 이럴 수가 있나 하고 개탄을 했으며 특히 그 중에 한 분은 왜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여지껏 살려두셨나 하며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계속 불평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중에 신앙을 가진 교수 한 분이 말씀하기를 "선생님, 만약 이 명단 속에 당신 아들이 끼어 있다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하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불평하시던 교수는 "그럼 할 말이 없겠지요." 이 때 질문했던 교수가 "당신이 보기에는 나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는 그래도 자기 아들이었던 모양이지요, 여태껏 살려 두셨으니까요" 이제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여러분, 비판도 좋고, 충고도 좋고, 정의도 좋습니다. 단 사랑을 기초로 해야 합니다. 사랑을 잃어가면서, 사랑을 끊어가면서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이기는 사랑이 있습니다. 협소한 민족주의, 자기 중심의 생각으로 남을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심리학에서 흑백 논리가 있는데 이 말은 자기 중심적 편견을 의미합니다. 흑이 아니면 백이요, 원수 아니면 애인입니다. 내게 좋은 사람은 다 좋고 내게 나쁜 사람은 다 나쁘다는 이런 사고 방식을 가져도 좋겠습니까? 내게 비록 나쁜 사람일지라도 좋은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내게는 원수지만 훌륭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기를 중심한 생각에서 속된 편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내가 보는 시선이 있고 하나님이 보시는 시선이 따로 있습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일치할 때는 좋다고 하고 서로 엇갈릴 때는 불평을 합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한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여기에 진정한 자유함이 있고 화평이 있습니다. 내 뜻을 고집하는 동안에는 불편함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기 위한 고민입니다. 양심을 거역하기 위한 고민이며, 진리에 대항하기 위한 고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기피하려고 하니 고민입니다. 여기에 길이 있음을 알면서도 뒷걸음치니 고민입니다. 하나님의 지시하신 길을 거역하기 때문에 고민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5-7에 보면 "믿음에 덕을, 덕에 자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처음과 마지막을 연결하면 믿음에 사랑을 공급하라. 즉 믿음 위에 사랑을 세우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율법 위에 은혜를 더하고 내 뜻 위에 하나님 뜻을 두어야 하며 내 고집 위에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두어야 합니다. 사실 요나가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 귀한 뜻을 알았다면 그의 마음은 평안했을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못마땅하더라도 일단 순종을 했더라면 니느웨 성이 구원받는 것을 그는 기뻐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못마땅합니까? 고민의 원인이 무엇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깊은 마음, 크신 뜻을 모르기 때문이며 나아가서 알고도 그 길을 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기 때문입니다. 또 좀더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지시하시는 귀한 섭리를 알면서도 역행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나는 고민했습니다. 요나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거울을 보십시다. 우리와 같은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깊은 고민 속에 사랑을 배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음을 분명히 시인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사랑하고 순종할 때 참 평안과 기쁨이 있고 놀라운 감격이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기도 : 믿노라 하면서도 고민이 많고 사랑을 외치면서도 항상 번민하는 저희들 불쌍히 여기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 믿음 위에 사랑을 더하시고 내 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사랑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이로써 순종하여 참 평안과 참 기쁨과 참 능력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곽선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