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춘교수

우리는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여러 가지 주문을 하며 이렇게 하면 치유될 것이라고 처방한다. 그러나 상처는 그 나름대로 자율성을 가지고 있으며 상처를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의 뜻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상처 나름대로의 법을 따라 움직이며, 심지어는 상처의 법이 오히려 그 사람을 지배하여 상처의 인격을 가지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식의 처방으로는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 지 난 주에 언급한 바 있는 ㄱ 부부의 문제는 상처의 법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자기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해에서 시작되었다. 남편도 아내도 서로에게 자기의 마음의 상처들을 다스리라고 요구하고 그 요구대로 따르지 않았을 때에 화가 나고 그 때문에 다시 상처를 입는 악순환이 그들에게 반복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상처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인가?

1.
참여적인 공감 첫 번째는 상처 입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그것은 그가 상처입고 그 때문에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공감하는 것이며, 그 사람도 그것을 고치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여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요, 그의 마음의 상처는 그 나름대로의 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그 상처를 지배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상처가 그 사람을 지배하여 우리가 보기에 소위 멍청한 짓이나 엉뚱한 일, 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동시에 상처 입은 그 사람도 자기 나름대로 거기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많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의 속에 숨어 있는 선한 열정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사람의 행동이나 실패나 잘못을 책망하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무시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이것은 율법주의자들처럼 나타난 어떤 것 때문에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자로 취급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나도 너와 같은 사람이요, 나도 마음의 상처로 말미암아 저주와 고통의 삶을 경험하였으며, 그래서 너를 이해하며 너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다는 공감적 참여를 의미한다. 이것은 너가 나의 요구나 지시를 따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일 뿐 아니라 네가 이런 상태에 있더라도 너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받아들이며 아끼고 사랑하겠다는 사랑의 만남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우리에게 명령만 내리시지 않으시고 성육신 하여서 세상에 내려와서 우리들 사이에서 우리들을 만나며 우리들을 있는 그대로 받으시며, 존중하시고, 우리의 짐을 함께 지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ㄱ 부부와 어떻게 대화의 문을 열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들도 행복한 부부 생활을 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남편도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그들이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행복한 부부의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실현하고자하는 열망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나름대로 노력하였고 애를 썼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의욕을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들을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시기까지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태도를 가지고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을 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저들 부부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저들을 위하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저들 부부의 행복을 진정으로 원하시며, 그것을 위하여 아무것도 아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저도 하나님의 그 사랑을 가슴에 품고 저들 부부를 만나게 하시옵소서! 오직 나의 마음에 저들을 행복하게 하고자하는 그 열망과 꿈만 가지고 그들을 만나게 하시옵소서!"

2.
영의 눈을 열어주기 두 번째로 우리는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영의 눈을 열어 주어야 한다. 우리 의 상처는 우리를 불행에 빠뜨릴 만큼 그렇게 큰 것이 아니다. 아무리 그 상처가 크더라도 우리 하나님은 그것을 얼마든지 고치실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하고 그대로 안고 살고 있는 이유는 그 상처 때문에 우리의 마음의 눈과 영의 눈이 막혀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의 눈과 영의 눈을 바로 뜨고 그것을 바르게 본다면 얼마든지 그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마음의 눈과 영의 눈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그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험한 산 속일지 라도 바르게 방향을 잡고 가면 드디어 밝은 길을 찾을 수 있다.
상담학자들은 마음의 눈을 열어서 그들이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게 도우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교역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는 것을 보고자 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마음의 눈을 여는 것보다도 먼저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영의 눈이 열리고 마음의 문도 쉽게 열린다고 믿는다.

3.
상처 입은 목사의 영적인 눈 열기 ㄴ 목사는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경험하면서 가정도 깨어져 가고, 목회의 능력도 상실하고, 하나님의 비전도 사그러져 가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중대 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는 마음이 엉망으로 헝클어졌을 뿐 아니라, 육체의 건강도 위태스러운 지경에 빠졌고, 사람들과도 만나기 싫어하는 기피현상을 경험하고 있고, 하나님도 저 멀리 하늘 높은 곳에 계셔서 전혀 만날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인생의 와해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에 그는 영의 눈을 열어 주는 신비한 몇 가지 체험을 하였다. 그 한가지는 전화기 자동 응답기에 담겨져 있었다. 자기가 전혀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고 서로 간에 아무런 관계도 없는 순복음교회 집사가 자기의 전화 자동응답 기에 메시지를 남겨 놓았는데 그것은 ㄴ 목사의 사정을 정확히 알고 주는 하나님의 메시지였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이 말씀은 ㄴ 목사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이었다. 그런데 서로 알지도 못하는 다른 교단 여자 집사가 어떻게 알고 그 메시지를 자동응답기에 남겼는지 ㄴ 목사는 지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후에 그 집사를 찾아내어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고 메시지를 남겼는가고 물으니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전화번호에 메시지를 남기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ㄴ 목사는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과 저주의 순간에도 자기를 지키시며 돌보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한 가지는 ㄴ 목사가 경제적인 위기를 맞고 있었고 상당한 액수의 돈이 꼭 필요 한 형편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돈을 주시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어려움을 아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을 수 있겠다고 기도했는데, 얼마 후에 아는 분이 그 사이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내용과 함께 자기에게 꼭 필요한 액수의 돈을 보내 준 것이다. 그는 별로 믿지도 않으면서 기도했는데 기도하자마자 이렇게 응답을 받기는 처음이라서 오히려 이것이 기도의 응답인가하고 믿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꿈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 그는 자기 아내와 함께 큰 건물을 나오고 있는데 자기 아내가 거기에서 안내 책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그 책이 무슨 책인가하고 보았는데 자기도 알지 못하는 영어가 쓰여 있었다는 것이다. 잠을 깨고 사전을 찾아 읽으니 그것은 "사명자" 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는 그 단어의 뜻을 찾아 읽는 순간 ''아,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사명의 위기를 책망하고 있구나! 하나님이 세웠는데 하나님이 하실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세 가지 사건을 만나면서 그것이 합리적인 것도 아니요, 지식으로 이해 할 수 있는 사건도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살아 계시고 자기를 결코 내버려두지 않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까지 자기에게 닥치고 있는 사건들을 보고 자기 마음에 들끓고 있는 혼란과 상처와 절망스러운 환경을 보면서 끝났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이런 사건을 만나면서 드디어 하나님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신비한 사건들이 그에게 영의 눈을 열어 준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며 하나님이 자기를 지키실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이 고난 을 의미 없이 주신 것이 아니고 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을 이루고자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 그는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곁에 계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마치 용광로 속에 원광석이 녹아 내리는 아픔을 경험하고 있지만 거기에 사람이 서서 그 용광로를 지키고 있으며 때에 맞추어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금을 만들어 내듯이 자기는 하나님의 용광로 속에 들어가 있으나 하나님은 바로 그 앞에서 계시다는 믿음이 그에게 왔다. 그에게 영의 눈이 열려져서 하나님이 거기에 계심을 보았을 때에 그의 삶은 정리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자기가 겪고 있는 고난의 세월이 자기에게 파멸과 절망이 아니라 분명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고 도대체 이 고난과 저주 속에 어떤 의미가 들어 있을까를 드려다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의 가정에 행복을 계획하신 하나님이 도대체 이렇게 어그러져 가는 가정 가운데서 어떻게 역사할 것인가를 기대하는 마음도 생겼다. 그리고 이러한 저주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은 무엇을 하려고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까지 환경과 사건들과 문제들만 보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기에 임재하여 무엇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지 못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저주를 돌아보지 않으시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의 영의 눈이 열리면서 다시 그곳을 드려다 보니 하나님께서는 바로 거기에서 자기를 위하여 일하고 있었던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남겨놓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나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고 생각했던 그곳에 수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힘들지만 그것들을 하나 하나 해 나가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마련한 미래의 문을 열 수 있었다.

4.
영적 전인성의 회복 치유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상담자는 하나님의 치유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상담자가 할 첫 번째 일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난 당하는 사람에게 공감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그 사람의 영의 눈을 열어 거기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공감적인 참여를 먼저 해야 하는 이유는 고난은 단절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공감적 참여를 통해서 단절된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고난과 저주의 순간에 이웃에게 통하는 문, 하나님께 통하는 문, 심지어는 자기에게로 향하는 문까지 닫아 버리고 오직 그 고난과 저주에 빠져 버린다. 그 사람의 닫힌 문은 그를 만나서 그의 상한 마음에 공감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을 향하여 열리며, 그 문이 열리기 시작할 때에 그는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러나 공감적인 참여의 문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 영적인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진정한 치유는 기대하기 힘들다. 단순히 그를 공감하고, 이해하고, 존중하며, 그의 마음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만으로는 원상의 회복도 어렵다. 신앙적으로 치유라고 말할 때 그것은 회복을 의미할 뿐 아니라 치유하는 동안에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한 단계 높은 발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상처 입은 사람들 가운데 임하여 단순히 그 상처만을 치유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를 치료함과 동시에 그에게 영적 전인성을 회복하려고 하신다.
이것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관계적인 건강을 회복하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지으실 때에 그 사람을 향하여 가지고 계셨던 풍성한 삶(요 10:10)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치유의 목적이 다. 그 목적의 실현은 공감적 참여를 넘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여 영적인 눈이 열려야만 시작되는 것이다. ㄴ 목사는 세 가지 상징적인 사건을 통하여 영의 눈을 열기 시작했다.
목회상담자의 두 번째의 일이 바로 이것이다. 상담자는 상처입은 자와 만나서 그의 아픔에 공감 적으로 참여하면서 그에게 일어나고 있으나 그가 발견하지 못하는 상징적인 사건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해석하여 주어야 한다. ㄴ 목사에게 있어서와 같이 그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일 (전화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하나님의 말씀) 일수도 있고, 기도의 응답일수도 있고, 꿈이나 환상으로 본 것일 수도 있다. 목회상담자가 마 음을 기울여 상처 입은 자를 듣고 관찰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들 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버려 두지 않으신다. 그에게 무언가 자기를 알 수 있는 실마리를 남겨 놓는다. 그는 지금 자기의 고난 때문에 그 것을 볼 수 없을지 모르나 상담자는 아직도 객관적으로 거기 임하기 때문에 실마리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찾아서 내담자에게 들려주어 내담자의 마음을 거 기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께 돌려세우는 것은 치유의 중대한 전환점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치료를 위한 전 단계에 불과하다. 위에 언급한 ㄱ 부부에게 공감 적인 참여를 통하여 대화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함으로 치유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치유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치유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치유가 아니다. 치유는 그들 속에 응어리져 있는 해 묵은 감정들을 정화시키는 과정,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전환, 그리 고 그들의 스스로의 결단으로 하나님의 치유에 참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것은 다음에 이야기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