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믿음(1)  (딤전1:12-17)


최근 한국은행은 2009년 상반기부터 발행할 10만원과 5만원권의 화폐인물 후보를 공개했습니다. 먼저 애국지사로 김구, 안창호, 한용운 선생, 여성으로는 신사임당과 유관순 열사, 문인으로 김정희, 주시경 선생, 그리고 과학자 장영실, 정약용과 바다의 왕 장보고 장군 등입니다. 앞으로 여론을 조사하여 이들 가운데 두 사람이 새로 발행될 화폐의 주인공으로 선정될 것입니다.

   한나라의 화폐는 이처럼 자국의 역사에 위인의 초상화를 그려 넣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입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화폐에는 사람이 아닌 동물들의 그림만 들어있습니다. 예를 들면 코뿔소, 코끼리, 사자, 표범 등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화폐가 도안되어 있습니다. 남아공은 쓸모없이 버려진 땅이 아닙니다. 그곳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무려 350년간 그 땅을 통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화폐에는 사람의 얼굴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백인들이 흑인을 강압적으로 통치하여 존경받을만한 인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1994년 오랜 유혈 투쟁 끝에 흑인이 참정권을 획득하였고 그해 실시된 흑백 동시 선거에서 세계적인 흑인 인권운동가인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표면적으로는 백인정권이 물러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런 역사요 실정에서 남아공은 지금까지 화폐에 등장할만한 존경받을만한 인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지난 뒤에 혹 만델라 전 대통령의 초상화가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동물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화폐가 그 나라의 역사요, 문화여서 대표할 만한 인물을 집어넣는 것이 통례라고 한다면,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대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물입니다. 보통 인물,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을 대표하는 여러 믿음의 인물을 보았습니다. 구약을 넘어 신약에 들어와 대표하는 인물을 꼽는다면 베드로에 이어 바울입니다. 바울을 빼놓고 신약을 논할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의 반 이상을 바울이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바울의 믿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본문을 중심으로 찾아보겠습니다. 바울은 어떤 믿음의 사람일까요?

   첫째, 풍성을 누리는 믿음입니다. 본문 14절에서 바울은 먼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입니다. 바울은 그가 주님을 만나 믿음으로 평생 살면서 모든 것에 넘치도록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믿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 안에 있을 때 그리스도인의 삶은 넘치도록 풍성한 삶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은혜가 풍성하다고 먼저 고백합니다. 은혜는 풍성한 것입니다. 모자라지 않습니다. 결코 고갈되지 않습니다. 사모하는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넘치도록 풍성합니다. 바울은 또한 믿음과 사랑도 풍성하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모자라지 않고, 사랑도 역시 넘치도록 풍성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적게 사랑해도 하나님은 많이 사랑하고, 우리는 계산적으로 사랑해도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조건적으로 사랑해도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고, 다 알 수도 없습니다. 바다를 먹물삼아도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아도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내리사랑이란 말이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그런 사랑입니다. 아무리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관심 갖고 돕는다고 해도, 부모가 자녀를 생각하는 만큼은 되지 않습니다. 결국 자녀가 또 부모가 되어야 그 사랑을 자녀에게 주면서 내려갑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은 내려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위에서 내려오는 그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를 향한 그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도록 풍성합니다. 은혜도, 믿음도, 사랑도 풍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 부족한 것은 없습니다. 믿음의 영역에 모자라는 것은 없습니다. 언제나 넘치고, 언제나 넉넉하고, 언제나 가득합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놀라운 고백이요, 실제로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할 때 보십시오. 남자만 오천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에게 배불리 먹게 하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귀한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한 삶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때 바울의 고백처럼 늘 풍성합니다. 이 풍성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은혜의 풍성함, 사랑을 넉넉함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 풍성함 속에 날마다 넉넉하게, 풍요롭게, 촉촉하게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의 믿음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직분의 고귀함을 아는 믿음입니다. 1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기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이것이 바울의 믿음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으로 직분을 받은 것을 알았습니다. 너무도 소중하고 고귀한 직분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여기에서 직분에 대하여 몇 가지 의미를 전합니다. 먼저, ‘맡겼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의도해서 준 것이 아니라 그의 직분은 주님이 직접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또한, ‘충성되이 여겨’라는 말을 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바울이 직분을 받을만한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격이 없었습니다. 본문에서 그가 얼마나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는가를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충성되이 여겼다는 것입니다. 가능성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인정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셨기에 하나님이 그에게 능력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능하게 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평생 이 귀한 사실을 알았기에 자기를 충성되다 인정해 주시고,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감사’의 고백을 합니다. 그는 직분에 대하여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직분에 대하여 남용하거나 거드름피우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직분은 일하는 것이기에 감사함으로 평생 주의 영광을 위해 헌신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받은 직분이 무엇일까요? 디모데후서 1장 11절에서 그가 받은 직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것이 바울의 직분입니다. 그는 반포자, 즉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 선교사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또한 사도라는 특별한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교사의 직분도 받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사는 오늘날 교사의 의미보다도 성경을 해석하고 전하는 설교자, 목회자의 직분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런 직분을 받았고, 그의 고백처럼 자기를 충성되어 여겨 직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해 잘 감당한 것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은 주님의 몸 된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에게도 직분을 주셨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교사등의 직분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직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소중하고 고귀한 직분입니다. 내가 무슨 자격이나 조건을 갖추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나를 충성되어 여기신 하나님의 은혜, 나를 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직분에 대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맡은 직분에 바울처럼 충성하는 것입니다. 신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직분은 명예와 권위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섬기고 봉사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울처럼, 앞서간 신앙의 선진들처럼 직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사랑과 충성을 다짐하며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자기를 비교하는 믿음입니다. 바울의 믿음을 보여주는 본문의 말씀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그가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서를 기록할 당시는 바울의 생애 가운데 거의 마지막 때입니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바울의 마음과 생각에 변함없이 자리잡고 있었던 믿음은 바로 자기를 늘 돌아보면서 그의 과거와 지금을 비교했다는 것입니다. 아주 먼 옛날의 자신을 보고, 지금 현재 나의 모습을 봅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에 있어서 너무도 중요한 모습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는 자기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며 말합니다. 전에 그는 훼방자, 핍박자, 포행자, 죄인중의 괴수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의 긍휼로 예수를 알고 사명을 받아 주의 일꾼이 되어 달려왔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참 놀라운 믿음입니다.

   믿음의 세계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이 비교의식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오직 목표의식과 사명의식만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남과 비교하고, 다른 사람과 견주어 자기가 우월하다는 의식을 갖습니다. 결국 모든 문제의 근원과 출발은 비교의식에서 시작됩니다. 가만히 잘 지내다가도 남과 비교하는 순간에 열 받고, 그야말로 뚜껑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처럼 하지 않는 것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줍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기를 남과 비교하여 상대적인 우월감을 갖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너와 달라, 너는 아무리 노력해도 나처럼 될 수 없어..’라는 우월의식 속에서 사람이 교만해 지고, 좀처럼 나은 인격과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 모두는 옳지 않습니다. 비교의식은 버려야 합니다. 오직 목표의식만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비교하려고 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굳이 비교하기 원한다면 바울처럼 나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야 합니다. 내가 전에는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좋은 믿음, 바른 믿음입니다. 남과 비교하여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빠지지 마시고, 자기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고 얼마나 자기를 비교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과거와 지금을 비교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내가 전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바울처럼 훼방자, 폭행자, 핍박자, 죄인중의 괴수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과거의 나와 비교해서 지금의 나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주님을 만나 지금까지 교회를 다니고 믿음생활하면서 과연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얼마큼 변화되었습니까? 그것은 내가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까? 자신 있게,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인정해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 다른 것 없이 그냥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는 과연 어떤 사람, 어떤 믿음의 사람입니까?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와 비교할 것이 없습니다. 더 큰 교회와 비교하여 주눅들 이유가 없고, 더 작은 교회와 비교하여 만족해서도 안됩니다. 34년이 되어가는 우리교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과거의 현재입니다. 과거의 우리 교회에 비해 지금은 어떠합니까? 좋은 것은 잘 유지하고 있습니까? 나쁘다고 생각하고, 빨리 고쳐야 할 것이 잘 고쳐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민족공동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주는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합니다. 근대사의 우리 역사 속에 남의 나라와 비교할 거 없습니다. 어쩌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입니다. 이것을 비교해 보면서 지금 우리의 현재가 어떻게 왔는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도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못 먹어서 죽는 사람이 없습니다. 평균수명도 많이 올라갔습니다. 젊은이들이 참 명랑하고 밝습니다. 어린아이들도 당당하고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옛날처럼 코를 질질 흘리는 아이, 버짐이 생기는 아이, 꽤 재재한 아이를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런 풍요와 축복은 과거 없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과거가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잘 살게 된 것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남의 나라의 식민지도 경험했고, 전쟁도 치렀고, 아시아에서,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중의 하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기성세대는 이것을 알기에 지금의 풍요가 주는 의미를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세대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릅니다. 생각하려고 하지도 않고, 얘기를 해도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금 믿음의 세대는 과거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과거 없이 현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인터넷에서 김충배(金忠培) 육군사관학교 교장의 연설문이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준 적이 있습니다. 이 연설의 요지는 어려운 나라의 상황을 생각하며 계층과 세대의 화합을 강조하고 우리민족이 열정으로 일구어낸 한강의 기적을 잊지 말고 다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모든 연설이 그렇듯이 이 글이 나온 후의 반응은 긍정도 있고 부정적인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합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계층을 변호하거나 옹호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에 대하여 평가를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과거 우리 민족이 걸어왔던 역사의 흔적을 알고, 또 그것을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한번 들어보십시오.

  우리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 젊은이들이여!
여러분들은 50, 6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조국을 위하여 얼마만큼 땀과 눈물을 흘렸는가? 지금 누리는 풍요로움 뒤에는 지난날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5. 16혁명 직후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때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박정희 소장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이제 가난한 한국을 도와 줄 나라가 없었다. 돈 빌려줄 나라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서독에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방해를 무릅쓰고 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하는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데 4만6천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서독 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해 온 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들의 가족, 친척들이 흘리는 눈물로 바다가 되었다.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 간호사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코올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았다. 하루종일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다.

  한국의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했을 때, 광부들은 독일 대통령 앞에 큰절을 하며 울면서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를 수없이 반복했다. 대통령의 연설이 끝나고 광부들은 떠나는 대통령과 영부인을 붙잡고 ‘우릴 두고 어디가세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부모님이 보고 싶어요.’ 하며 한동안 놓아 줄 줄을 몰랐다.

  60년대 우리는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를 동원하여 ‘머리카락 파세요!’ 하며 아낙네들의 머리카락을 모았다. 시골에 나이 드신 분들은 서울간 아들의 학비를 보태주려고, 또 먹고 살 쌀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팔았고, 곰 인형을 만들어 팔았다. 또 전국에 쥐잡기 운동을 벌려 코리안 밍크를 만들었다. 그야말로 돈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만들어 팔았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전후 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올림픽과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가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국력을 키웠던 것은 광부와 간호사들, 월남전 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명심할 것은 이방인의 시신을 닦던 간호사와 수 천 미터 지하 탄광에서 땀흘리며 일한 우리의 광부, 목숨을 담보로 이국전선에서 피를 흘린 국군장병, 사막의 중동 건설현장에서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국가경영을 세계와 미래라는 큰 틀로 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참고 국민소득 4만불의 고지 달성 때까지 우리들 신, 구세대는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갈라져 반목하고 갈등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이제 우리 모두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며 같은 뿌리에 난 상생의 관계임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뭉쳐보자.

  우리 모두 선배를, 원로를,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며, 우리 모두 후배들을 격려하고, 베풀고, 이해해주면서 함께 가보자. 그러면 이제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에 더욱 밝은 빛이 비추어 지리니...!

   성도 여러분, 과거 없이 현재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남과 비교하는 대신,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야 합니다. 개인과 교회와 공동체에 이런 믿음이 정말 필요합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우리는 맡겨진 직분을 더 성실히 감당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사랑을 더 풍성하게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한주간의 문을 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