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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선택 (사무엘상 8:4-11)
프랜시스 윌라드(Frances E. C. Wilard 1839-1898)는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하고 재기발랄했는데 대학생이 되어 장래 직업을 생각하다가, 성직자가 되거나 정치가가 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19세 때 큰 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병상에 누운 윌라드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던 중에 일생을 하나님을 위해 바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후에 그는 노스웨스턴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어느날 윌라드는 두 가지 초빙 제안을 동시에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연봉이 많은 노스웨스턴 대학교 총장직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명예스럽고 풍족한 삶을 보장하는 자리였습니다. 그가 받은 또 다른 제안은 금주 금연 운동을 지휘하는 기독교 여성 절제운동 책임자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봉사직이기 때문에 수입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윌라드는 이름있는 대학의 총장 자리와, 사회 운동 기관의 책임자 자리 중에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밤을 세웠습니다. 결국 윌라드는 ‘기독교 여성 절제운동’의 책임자 자리를 맡기로 결정했습니다. 그후 그녀는 1873년에 미국 기독교 여성 절제운동 본부를 창설하였고, ‘금주 금연 운동’ 뿐 아니라 ‘여성 해방’, ‘여성 노동자 지위향상’ 등에 큰 업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특별히 위기의 순간에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개인은 물론 나라와 인류의 운명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이방민족의 잦은 침입으로 불안정한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사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대신, 왕이라는 인간의 통치를 선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결국 이스라엘을 타락과 멸망으로 이끌고 말았습니다.
매일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우리에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선택은 어떠한 것인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 인간은 그 누구나 위기를 만납니다.
이스라엘의 사사시대 말기에 위대한 지도자 사무엘은 팔레스틴 중부지역을 다스리고 있었고, 그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는 팔레스틴 남부지역 브엘세바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사무엘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두 아들이 사무엘의 지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아들은 사무엘 같은 지도력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백성들에게서 뇌물을 받고 판결을 내리는 등 부정을 자행하여 백성들로부터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세상에! 사무엘같은 위대한 사람의 아들들이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는지 의아할 뿐입니다. 정말 자식의 문제는 부모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세대 교체에 실패한 엘리 제사장 가문이 몰락한 것처럼, 사무엘도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이루지 못하고 위기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사무엘 가문의 위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방 민족과 첨예한 대치 속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위기였습니다. 위대한 지도자인 사무엘로 인하여 안정을 찾았던 이스라엘이, 또다시 지도자 문제로 인하여 걷잡을 수없는 위기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를 맞이하게 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바라보는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위기는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생합니다. 어느 나라나, 어느 사업체나, 어느 가정이나, 개인에게나 위기는 이렇게 갑자기 다가옵니다. 이런 삶의 위기는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찾아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러한 위기가 오히려 큰 축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는 위기가 곧 축복의 기회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이 맞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빈 그물을 손질하는 베드로의 마음은 착잡했습니다. 어부가 고기를 못잡았으니 가족들의 생계는 어떻게 해야 할지, 여간 걱정이 아니었습니다. 평생토록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아 온 베드로는 이렇게 아무 수확도 없이 빈 그물만 씻은 적이 없기에 다만 허탈할 뿐이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더니 그 배를 육지에서 조금 띄어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속이 상해 있는 상황에서 귀찮아 할 수도 있었지만, 베드로는 예수의 요구대로 배를 육지에서 띄어주었습니다. 아무리 위기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베드로처럼 마음을 넓게 가져야 합니다. 그 배에 오르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얼마 후, 말씀을 마치신 예수께서는 다시 베드로에게 다가가 말씀하시기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그날 고기잡이를 제대로 못했다고 하지만, 베드로는 고기잡는 어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습니다. 명색이 어부인 자기도 속수무책이었는데, 젊은 랍비가 하는 말이 가당치도 않게 들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 하고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베드로는 그 길로 예수님을 따라 나서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고, 오늘날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기를 잡지 못한 베드로의 위기는 마음을 넓게 가짐으로써,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로 바꾸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위기는 곧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닥친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이시간, 베드로와 같은 위기를 만난 분이 있다면, 그것이 곧 ‘사람낚는 어부’가 될 수 있는 기회임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위기가 왔을 때, 그것을 축복의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주께서 그 기회를 주십니다.
2. 인간은 위기 앞에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을 모색합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에 대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던 이스라엘 장로들은 결국 사무엘을 찾아와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 8:5). 이것이 이스라엘 장로들이 제안한 대안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결론이 내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려왔는데, 그 사사로서는 안정적인 국가 운영을 할 수 없으니, 이미 이방 민족이 갖추고 있는 왕권제도를 도입하여, 군사․경제․외교적인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을 의지하고 나선 것입니다.
국가적으로 큰 위기를 맞이하였을 때에,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을 찾아온 것은 잘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들도 문제가 있을 때는 교회를 찾고, 주의 종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할 것입니다. 가정적으로, 사업적으로, 국가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먼저 기도의 자리로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찾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다만 형식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결론과 대안을 내려놓고 주의 종을 찾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 문제가 해결됩니다. 아무리 기가막힌 대안을 가지고 있다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을 때, 그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올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미 모든 결론을 내려놓고 사무엘을 찾았습니다. 이는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의 지도력을 거부하고 그들 나름대로 인간적인 제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방나라처럼 강력한 왕이 나라의 안보와 경제 발전을 도모하기를 원한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인간이 다스리는 것을 원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간파한 사무엘의 마음은 불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정해놓은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 보다는, 자기들 스스로 모든 것을 주관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자율이요, 자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율과 자주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만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할 때, 거기에서부터 독재와 억압이 시작된다는 것을 인류의 역사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에 반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위에 펼치고자 피와 땀을 흘렸던 많은 이들로 인해 인류의 역사는 발전해 왔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져야할 마음 가짐은 ‘주인의식’이 아니라 ‘청지기 의식’입니다. 이 세상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나 자신도 하나님의 것이요, 다만 그분이 맡겨 주신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청지기 의식’이 중요합니다.
인간이 매사에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타락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치 앞도 바라보지 못하는 인간이 스스로 내린 결정이나 판단이 얼마나 부족한 것인지는 스스로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의 창조자시오,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분의 경륜과 지혜를 덧입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타율적인 모습이 아니라, 가장 지혜로운 모습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잠 9:10).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는 말씀처럼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다스림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구해야 합니다.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쓰여질 것입니다.
3. 인간이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왕으로 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꿰뚫어보셨습니다.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그래서 사무엘은이스라엘 장로들의 생각을 못마땅해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선택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삶이나 공동체에서 결정하는 것을 인간 자신에게 맡기십니다. 물론 모든 결정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내린 결정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게 하십니다. 깊은 체험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만이 참된 왕이요, 유일한 통치자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의 요구대로 ‘왕정 제도’가 실시될 경우, 필연적으로 야기될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면 (1)젊은 남녀의 징집(1-13절), (2)곡물과 가축의 징세 및 징용(14-17절), (3) 그외 왕의 폭정으로 인한 온갖 고초(18절) 등입니다. 즉, 모든 백성들의 아들은 군인으로 차출될 것입니다. 또 딸들은 보조적 노동력으로 동원될 것입니다. 왕은 자기 맘에 드는 좋은 땅을 취할 것이며, 과중한 세금을 거두어 들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종으로 부리며, 많은 고통을 안겨 줄 것이라고 사무엘은 경고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폭정을 행사하는 왕으로 인해 하나님께 부르짖을지라도 듣지 않으실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로 왕이 있어야 하리니”(삼상 8:19) 라고 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의 끈질긴 요구는 결국 받아들여져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의 경고 또한 이루어져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상 이상의 폭정을 행한 수많은 왕들로 인해 고통 당하다가 결국 주변 강대국에 의해 멸망당하고 포로로 끌려가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을 세워 달라는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 철저한 책임을 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이 인도하고 보증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배를 거부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그 자신이 결과에 대한 책임을 철저하게 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였다면,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뜻을 굽히지 않고 하나님이 아닌 ‘왕’을 선택함으로써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구한 것이 그대로 응답되었다’고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떠난 계획이나 주장은, 그것이 어쩌다가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복이 아닌 저주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구하기 전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를 한 번 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필연적으로 위기의 순간을 만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경고에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왕이요, 주권자로 모시고 주님이 원하는 것만 선택할 때, “네가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신 28:2)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하신 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