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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포기 (룻 1:6-14)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을 떠나고 두 자부도 그와 함께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
편을 두지 못할찌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룻기 1:6-14>
1. 현실의 삶은 <선택>과 <포기>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운명적으로,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지는 현실이 있습니다.
이번 설날 TV를 보고 우리네 과거의 삶이 얼마나 살기가 어려웠던 시대인가를 뼈저리게 느껴 보았습니다.
그때는 모두 생활이 어려워 자식을 버리고 떠나야하는 어머니들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헤어졌던 아들이 어머니를 찾고, 그렇게 가슴에 묻고 살던 어머니가 아들 딸을 찾는 그런 프로그램을 보면서, 저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미혼모들이 낳은 어린것들이 입양만을 기다리면서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것을 보면서 저 애들이야말로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존재들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우리는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또 나라와 민족을 선택하여 태어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 외에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는 선택과 포기의 연속이 바로 우리의 삶이란 말입니다.
한 사람 살아가는 일평생에서 선택과 포기는 계속 진행됩니다.
한번 선택을 잘못함으로 평생을 그늘에서 지내는 경우도 있고, 한번 선택을 잘함으로 평생을 행복하게 지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의지는 약함으로, 그리고 어떤 길이 자기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있는 길인지 몰라서 방황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누구에게나 삶에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의 과정이 몇 차례 있습니다.
그 하나가 배움의 선택이고, 다음이 배우자의 선택이고, 마지막으로 사망과 영생의 선택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다 중요합니다.
어느 것을 등한하게 여길 수 없는 것들입니다.
배움의 선택, 매우 중요합니다.
어느 학교를 졸업했느냐 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닙니다.
또 인생의 가장 분기점이 바로 배우자의 선택입니다.
무한한 가능의 세계에서 어느 한 사람과 평생을 같이 하겠다고 하는 선택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옳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나온 세월이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그만큼 선택과 포기의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대로만 되어진 것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선택도 중요하지만, 포기도 잘해야 합니다.
포기할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지 못함으로 오는 비극도 매우 큽니다.
2. 본문에 두 여인을 통하여 <선택>과 <포기>의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오르바와 룻은 모두 남편과 사별한 슬픔을 지닌 여인들이었습니다.
저들은 모두 같은 환경 속에서 같은 불행을 안고 자신의 미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시어머니를 선택하고 친정을 포기해야 하나, 아니면 시어머니를 포기하고 친정을 택해야 하나, 갈림길이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아들 없는 두 며느리를 보면서 친정으로 돌아갈 것을 강권하였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적으로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젊은 며느리들의 앞길을 열어준다는 의미에서 최대한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새 출발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두 며느리가 다 함께 어머님을 따르겠다고 하였지만, 중간에 큰며느리 <오르바>는 친정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친정을 포기하고 시어머니를 선택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포기와 선택의 신앙적 교훈을 생각하게 됩니다.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 가장 힘든 선택이 바로 신앙의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보면 큰며느리의 선택이 더 잘한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젊은 여자가 평생 아들도 없는, 그것도 이방 나라인 외국으로 시어머니를 따라 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오르바>와 <룻>은 같은 현실에서 고민하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편으로는 오르바의 선택이 잘하는 것 같이 보이고, 룻의 포기가 잘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자고 아무 친척도 없는 타국으로 시어머니를 좇아가겠다고 친정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3. 룻의 포기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신앙의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룻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의 여인이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친정을 포기하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선택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룻1:16-18)
룻기서에 나타난 낱말 중에 '돌아가다' (go back)는 말이 제일 많이 나옵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오던 길에서 다시 뒤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길은 결코 나온바 세상으로 돌아서는 길이 아닙니다.
신앙의 길은 더 높은 것을 바라보며 새로운 선택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길은 현실에서는 미련하게 보일지 모릅니다.
신앙의 길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지 모릅니다.
신앙의 길은 때로는 순간마다 회의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참된 신앙은 뒤로 돌아서 가는 <포기>가 아니라, 위로부터의 그 약속을 바라보고 그것을 <선택>하는 현실적인 행동입니다.
결코 신앙은 현실과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선택하는 용기입니다.
여기에 무한한 미래가 열리게 됩니다.
복음성가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운 일 보네
/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때 슬픔 없네 두려움
없네 / 주님의 그 자비로운 손길 /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 사랑스레 아픔과 기쁨을 / 수고와 평안과 안식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두 여인에게서 <남편>이란 모두 든든한 언덕이었습니다.
남편이 없다는 현실은 인간적으로 보면, 언덕이 무너진 현실이라고 봅니다.
둑이 무너진 하천과 같이 비가 내리면 범람할 수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그럴 때 남편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 나선다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룻은 결국 다윗의 조상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혈통으로 오게 되었으니, 만인 구원의 혈통의 원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큰며느리 <오르바>의 행적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마 다른 남자를 만나 아들딸 낳고 살았는지도 모를 것이고, 아니면 몇 번씩 더 결혼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결국 그렇게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을 통하여 오늘의 우리의 선택과 포기의 교훈을 생각하게 됩니다.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세상적인 방법으로 되돌아가느냐? (go back)
아니면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길을 선택하느냐?
어느 쪽이냐?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철학자 키엘케코울(J.Kierkegaard)는 신앙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의 선택이라고 하였습니다.
칼 바르트는 같은 신학자는 신앙에는 완충지대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은 사망이냐? 생명이냐? 의 선택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본헤퍼 같은 목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와서 죽으라고 하는 명령에 나선 사람들'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처했던 나치 정권 하에서 한 말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오늘의 물질만능의 세속 사회에서 장차 오는 내세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에 온갖 부귀영화에 대한 포기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부른 소명에 응하여 미래에 펼쳐질 약속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항상 선택과 포기의 연속이란 말입니다.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면서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고 (go back) 위에서 부른 부름의 상을 바라보면서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고린도 후서 4:16-18 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 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 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24-26절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고 하였습니다.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현실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선택입니까?
그러기에 모세가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말입니다.
요즘 우리 같았으면,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기 위하여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경우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룻의 선택을 본 받아 갈 바를 알지 못하고도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택한 것처럼, 믿음으로 결단하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출처/김이봉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