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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나님 나라인가 (사도행전 1:3~11)
지난 3주 전 저는 네 분의 장로님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좋은 교제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특별히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인생의 마지막을 선교 현장에서 좀더 헌신하고 싶어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배순호 장로님이라는 분은 3년 전 국내에서 본인이 맡고 있던 외국은행 책임을 벗어 놓고 선교 훈련을 받은 뒤, 중앙 아시아의 키르키즈스탄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까지 3년이 넘도록 부부가 너무나 멋진 사역을 펼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잠깐 귀국을 했습니다.
그분의 얼굴을 쳐다 보면서 언젠가 그분한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분에겐 두 아이들이 있는데, 한번은 둘째 아들에게서 OM선교에 소속된 둘로스 선에 얼마간 승선을 해서 선교를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때 문득 '혹시 이 아들이 나중에 선교사가 되어 외국으로 나가려는 궁리를 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는 것입니다. 참 인간적인 일면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자식이 선교사가 되는 것마저 겁내던 사람이, 결국 자신이 선교사가 되어 중앙 아시아에 가서 그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면서 선교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선교에 힘쓰고자 지금도 준비하고 있는 분입니다.
또 한 분은 최상일 장로님이신데, 그분은 한국 통신의 최고위급 간부입니다. 그리고 통신 분야에 관한한 한국에서 내노라 할 정도의 기술자입니다. 그런데 평생 하던 그 일을 접어두고, 50대 중반이 넘어선 나이에 선교를 하고 싶다는 뜨거운 가슴을 억제하지 못해 지난 1년 동안 호주에 있는 선교학교에 가서 1년간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미 선교지로 떠났을 것입니다.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수이자 자비량 선교사로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통신분야에서 교수 사역을 하고자 떠나려는 분이었습니다. 20억이 넘는 IT 장비를 기증 받아 그 학교로 갔습니다.
그리고 또 한 분은 남창희 장로님이십니다. 이분도 한국의 유수한 은행에 고위직으로 있다가 은행직을 그만 두고, 이제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러시아 대학에서 한국어 교수로 임명 받아 가게 됐습니다. 한국어 교수가 목적이 아니고, 거기에 가서 제자훈련과 선교훈련을 통해 러시아에 복음의 씨를 뿌리겠다는 것이 그의 포부였습니다.
그도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계 선교를 해야 된다. 우리의 남은 인생에 꿈이 있다면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이다."라는 말을 교회 안팎에서 자주 들었는데, 그 때마다 '나는 아니겠지. 나는 아니겠지.' 하고 남의 이야기로만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아니겠지.'라는 그 말이 계속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하나님의 음성에 붙들려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났습니다. 그 학교에서 교수에게 주는 사택이라고는 주방도 없는 형편 없는 방 한 칸 뿐, 이제 그 부부가 그곳에서 살면서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 한 분은 홍주관 장로님이신데 그분은 한국에서 수재들만 들어 간다고 하는 학교에 모 학부 출신입니다. 그리고 외국계 은행의 대표 이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분도 아직 나이가 창창한데 다 접어두고, 이제 부부가 미국 풀러 신학교에 들어가서 3년 동안 선교학을 전공하기로 하고 입학을 했습니다. 그리고 선교학 공부를 마치면 멕시코로 건너가 복음 전하는 일에 한 생을 바치겠다는 생각을 하고 떠나는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분들이 함께 앉은 저녁 식사 자리가 얼마나 진지했겠습니까? 흔히 사람들이 모이면 얼마나 잘 사느냐, 얼마나 벌었느냐, 얼마나 즐기느냐를 이야기를 하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제가 한 분, 한 분 그분들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 사람들을 저렇게 이상하게 만들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엉뚱한 생각을 갖도록 했을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시던 하나님 나라 비전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이 사람들의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장로가 될 정도로 헌신했다면, 그 모든 삶이 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성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인생을 마무리하겠다는 것입니다. 쉽게 결단하기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면서 고민하면서 주님의 손에 맡겼더니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몰고 가 버리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이렇게 우리 인생을 엄청나게 바꾸어 놓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시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세상을 떠나시기까지 한 가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하나의 주제를 전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분이 대중 앞에 나타나셔서 입을 여실 때 그 입에서 나오는 첫 마디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천국이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유대나라 표현입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느니라." 이것이 그의 첫 마디였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전한 말씀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이제 십자가의 죽음이 서서히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을 때, 그분의 마지막 마무리 메시지가 무엇이지 아십니까?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천국은 마치 손에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열 처녀와 같다고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가지고 생애를 마무리 지으시더니, 나중에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그 무서운 고통을 당하시고 죽음까지 맛 보신 다음 사흘 만에 살아 나셔서 제자들을 간간히 만나셨습니다. 40일 동안 제자들과 만나 많은 이야기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장 3절에 보면 주제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제자들과 만나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다고 나옵니다. 즉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승천하실 때까지 주님의 최대 관심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주님의 꿈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모든 생각은 하나님 나라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만큼 하나님 나라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다소 불만을 가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현실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그러한 불만이 1장 6절에 표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눈 앞에 계십니다. 세상의 죽음을 이겼다면 최고의 관계가 아닙니까? 게다가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후,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예수님에게 위임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 예수님보다 능한 자도, 강한 자도, 높은 자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이 제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만 자꾸 할 것이 아니라 현실 문제를 말씀해 주시면 얼마나 좋겠나 하는 생각을 제자들이 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1장 6절과 같이 "예수님, 이스라엘 나라가 해방될 날이 언제입니까? 좀 가르쳐 주세요."라고 여쭤보았던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나라는 수 백 년 동안 로마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착취와 고통을 받으면서 신음하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다급한 현실입니까? 얼마나 답답한 현실입니까? 힘만 있다면 당장 로마의 쇠사슬에서 해방시켜 주고싶은 생각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처참한 환경이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놓고 주님은 한마디도 안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이야기만 하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만 가지고 말씀하시는 주님에 대해서 약간의 불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자들과 비슷한 생각을 할 것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을 손에 쥐기 보다는 신문을 먼저 듭니다. 그만큼 우리의 관심은 세상에 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경건하게 살기를 작심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면 성경 말씀 들고 조용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앉는 분들 외에는, 교회는 다니지만 성경보다도 신문지를 먼저 손에 쥐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만큼 세상 일이 우리에게는 심각한 사안이란 말입니다. 세상 일 치고 우리에게 심각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요즘 정치 상황을 보십시오. 이래서는 나라가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누구를 해임하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신문지 전체를 도배질 하면서 날마다 이 일만 거론하고 있습니다. 쳐다보면 짜증스럽기만 합니다. 앞으로 이 나라가 어떻게 될는지 누구나 자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치 문제가 우리에게는 발등의 불입니다. 정치가 바로 안되면 우리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정치가 잘못되어 망하는 우리 민족을 바로 코 밑에 놓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정치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경제문제 또한 얼마나 우리에게는 시급한 문제입니까? 온 세계가 장기 불황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탐탁치 않은 말들을 신문, 혹은 TV를 통해 들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불안해집니까? 사람이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갖추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고, 세계에서도 민족으로서 대우 받을 수 있는데 경제가 급격히 나빠지게 되면 남미와 같이 처참한 상황으로 굴러 떨어질 확률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제문제는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사항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교육 문제도 얼마나 시급합니까? 그 밖에 부부 문제, 사업, 건강, 앞으로 내가 추구하는 목표와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성공의 문제 등 우리에게 있어서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현실 문제라고 해서 다 속된 것이 아닙니다. 현실 문제라고 해서 신앙과 관계가 없지 않습니다. 너무나 중요합니다. 예배하는 우리라고 해서 현실문제와 동떨어진 구름 잡는 소리만 하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것을 모르셨을까요? 병든 사람의 사정을 예수님이 모르겠습니까? 가난한 사람의 사정을 모르겠습니까? 압박 당하면서 신음하는 백성들의 사정을 주님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관심은 현실에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제자들처럼 현실 문제에 너무 집착하고 하나님 나라를 잊어 버리면 우리의 인생은 비참해집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 인생관 안에 하나님 나라가 발붙일 자리가 없다고 한다면 아무리 성경 끼고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그 사람의 인생의 끝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설 땅이 없는 인생관을 움켜쥐고 세상을 산다면, 그와 같은 인생관을 가지고 세상을 살고 있다면 그는 분명히 비참해 질것입니다. 허무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관심 없는 인생관을 가지고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산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삶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삶입니다. 어떤 면에는 일평생 후회하는 잘못된 인생의 마무리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후회 없는 삶을 살길 원합니까? 의미 있고 보람된 삶을 원합니까? 처음보다 끝이 화려한 사람을 원합니까? 영원히 넘는 인생을 한번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우리 인생관의 우선 순위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내 모든 관심사 중 가장 중요한 부분에 하나님 나라가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고, 예수님의 사상이었고 생각이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이켜 보십시오. 예수님에게 더 가깝습니까? 아니면 제자들에게 더 가깝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스스로 한번 대답을 해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정확히 대답할 수 있으면 여러분의 관심은 그만큼 하나님 나라에 가 있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빨리 정의가 내려지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관심이 그만큼 흐트러져 있다는 것을 의미할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나라는 흔히 천국을 이야기 합니다. 죽어서 들어가는 나라로 말합니다. 그것은 반쪽 진리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가 들어가는 천국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더 넓고 더 크고 더 높은 의미를 갖은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에서 부활하시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통치하는 영역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지배를 받는 곳입니다. 이 나라는 영원히 이어질 나라입니다. 영원히 예수님이 통치하실 나라입니다.
누가복음 1장 33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히 예수님이 왕 노릇 하는 나라요, 영원히 이어질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에는 몇 가지 중요한 특성이 있습니다. 잘 기억해 두십시오. 이 나라는 영적인 나라입니다. 영적인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영토를 가진 나라가 아닙니다. 총칼로 정복하는 나라도 아닙니다. 지도에 표시해 두어 언제든지 들여다 보면 볼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17장 20절 이하에 보면 한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임합니까?"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 나라가 어떤 식으로 임하는 것입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눈에 보이도록 임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속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마음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영혼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니라." 곧 영적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흔히 세상 나라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전혀 이해가 안됩니다. 가치관도 다르고, 그 나라의 특징도 다르고, 그 나라가 지향하는 목표도 다릅니다. 따라서 세상 나라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은 아무리 귀가 아프도록 외쳐도 그 나라에 대한 개념조차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영적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중생 받고 그 영혼에 눈이 열린 사람, 그 영혼에 귀가 뚫린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또한 하나님 나라는 범세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독점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수 백만의 이스라엘 백성들만 모여서 세우는 나라가 아닙니다. 1장 8절을 보면 성령이 임하시면 처음에 하나님 나라가 '예루살렘'부터 시작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온 유다와 사마리아'까지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어디로 확장됩니까? '땅끝까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됩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 나라는 협소한 민족주의가 절대로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인종의 차별도 없습니다. 국경의 차이도 없습니다. 계층간 차이도 없습니다. 남녀 성별 차이도 없습니다. 모든 백성, 모든 민족이 초청을 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가 완성될 즘이면 요한계시록 7장 9, 10절에 나타나는 황홀한 정경이 우리 눈 앞에 벌어지게 됩니다. 거기에 이런 말씀, 이런 예언이 있습니다. "내가 보니 각 나라와 백성과 족속과 방언에서 누구든지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백성 중에, 방언 중에" 이 말은 범세계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말합니다.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이 말은 예수님께서 깨끗하게 해주신 예수님의 의를 힘입었음을 말합니다.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큰 소리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렇게 찬송하고 있다고 예언합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여러분, 한번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흑인도, 백인도, 황인도,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그 나라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흑인, 백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모두 천사와 같이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흰 옷을 입고 종려가지를 들고 "구원 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하면 저 끝에선 소프라노, 저 끝에선 엘토로 우렁차게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것입니다.
이런 나라가 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마지막의 모습입니다. 거기에 무슨 증오, 무슨 악의, 무슨 미움과 사기가 있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죽임, 아픔, 눈물이 있겠습니까? 바로 그 나라가 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그런 범세계적인 나라가 온다고 예언했으므로 그대로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또한 점진적으로 확장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금방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의하면 성령이 임하시면 복음이 증거되기 시작된다고 말씀합니다. 그 다음에 13절에 가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왜 그 두 사건이 나란히 기록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언제 시작됩니까? 하나님 나라 생일이 언제입니까? 하나님 나라 탄신일은 성령이 임하시던 날입니다. 그래서 1장 8절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2장에 넘어가면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그때가 바로 하나님 나라 탄생이 이제 우리 눈 앞에 보이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완성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11절에 보면 승천하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하나님 나라는 완성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시고 이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그 중간기에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벌써 2천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갔습니다. 따라서 그 중간기는 점점 더 좁아집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는 전세계적으로 계속 확대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중간기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중간기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성령의 권능을 받은 증인들로 인해 계속 선교로 채워져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던 그 날로 시작해서 주님이 재림하실 그날까지 그 중간은 오직 증인들을 통해서 복음으로 이 세계를 채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예수 믿고 돌아 오도록,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모든 민족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일에 우리가 전력을 쏟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에 이미 동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하였습니다. 이미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나라를 위해서 정말로 중요한 직분을 소명으로 받고 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희박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그 삶 자체가 빗나간 것이요, 세속화 된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삶이 됨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악의 세력이 이토록 무서울 정도로 온 세상을 짓밟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도 우리가 절망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가 점점 더 완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오만 가지 악이 자녀들을 끌어가고, 이 세상을 더럽히고, 이 세상을 지옥같이 만듦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 가는 것을 영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십자가가 얼마나 무겁습니까? 아침 저녁으로 눈물 마를 날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주여" 하고 하루하루를 힘있게 살려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에 대해 주인 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가 주인이요, 세상 나라만 늘 생각하는 사람은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늘 대망하고 살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기대하는 그 사람이 이 역사에 주인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교회 다니는 이상 하나님 나라와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거나 행동해선 안됩니다. 그것은 자기 모순입니다.
저는 나이가 좀 들어 가면서 예수님이 왜 하나님 나라만 이렇게 골똘히 생각하시고 말씀하셨는지 조금 이해할 것 같습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런 이유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너무 악합니다. 우리 눈에도 이렇게 악한데 예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악하겠습니까? 이것은 증명이 필요 없습니다. 10년 전에 비해 오늘날 이 세상이 얼마나 지옥입니까? 사람들은 점점 마귀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과연 인간입니까? 과연 마음 놓고 살 만한 곳입니까? 얼마나 악합니까?
그러므로 이 악한 세상에 대해서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악한 세상의 종말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세상은 갈 때까지 갑니다. 아무리 우리가 노력해도 세상은 갈 때까지 갑니다. 구제불능인 것입니다. 어떤 정치가도, 어떤 과학의 발달도, 어떤 사상의 발전도 이 세상을 구제하지는 못합니다. 이 악한 세상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달려가고 말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세상이나 인생은 덧없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시겠습니까? 우리가 살아봐도 덧없는 인생이라고 하루 몇 번씩 고백을 하는데, 예수님이 인생을 보면서 덧없다는 생각을 한 두 번 하셨겠습니까? 덧없는 인생의 종말은 허무입니다. 허무 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이 허무한 인생을 놓고 우리가 한 생을 희생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보고 명령하셨습니다. "나가서 외쳐라." 그러자 이사야가 하나님께 뭐라고 외쳐야 되는지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40:6-8) 이 말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인생이 꽃이나 풀이 아니라고 착각하며 삽니다. 그래서 깨우치고자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소리를 내어 외쳐라. 인생은 풀이라고. 인생의 아름다움이 대단해도 그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아 하루 아침에 시드느니라. 하루 아침에 말라 버리느니라. 인생은 그렇다고 외쳐라." 한 마디로 덧없는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무슨 소망이 있어 예수님이 세상 이야기를 자꾸 하시겠습니까?
최근에 집안에 환자가 있어 중환자실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날마다 2번씩 드나들었더니 생각이 이상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에는 같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이쪽 끝에는 신생아실, 저쪽 끝에는 중환자실이 있었습니다. 참 묘했습니다. 한쪽에선 시도 때도 없이 "응아응아" 하며 애가 태어납니다. 반면에 중환자실에서는 회복 되는 사람도 가끔 있지만 거의 절망적인 사람이 들어가기 때문에 시체가 자주 나옵니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입니다. 건강할 때에야 가능한 수명인 7,80년이 그 복도 안에서 다 결정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얼마나 덧없습니까?
여러분, 한번 뒤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꿈을 꾸는 것처럼 행복했던 어린 시절. 지금 어떻게 기억되고 있습니까? 그 기억이 여러분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듭니까? 그 황홀했던 허니문, 과연 돌아보니 어떻습니까?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그렇게 아름답고 힘이 넘치던 20대, 30대의 젊음, 지금 어디 있습니까? 내 마음을 다 하고 시간을 바치고 나의 젊음을 송두리째 쏟아서 뭔가 손에 넣고 싶어했던 어떤 목적, 아마 달성하신 분들이 꽤 될 것입니다. 그것을 손에 쥐고 보니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밤낮으로 브라운관에 등장해서 우리가 보지 않을래야 보지 않을 수 없는 그 막강한 권세와 명예를 가졌던 그 인물들. 하지만 5년, 10년, 20년 지난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대부분의 인생은 풀과 같은 인생에 속고 꽃과 같은 아름다움에 속아 한 생을 살다가 벼랑 끝에 서버리고 맙니다. 허무만 남습니다. 이런 세상인데 예수님이 무슨 기대를 가지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비록 현실 문제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현실 문제를 적당히 다루고 넘어가면 됩니다. 다 꿈이요, 꽃이요, 풀이므로 적당히 그때 그때 최선을 다하고 그냥 넘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관심은 하나님 나라에 있어야 됩니다. 세상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 되려면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선택 받은 자들이 계속 돌아와야 합니다. 그들을 불러 들이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가 권능을 갖고 전도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서 전도하면 안 믿을 것 같은 사람이 예수 믿고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믿읍시다."라고 한 마디 했는데 이상하게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뀌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성령의 권능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은 성령의 권능을 주시고 우리 입에 복음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5대양 6대주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민족 방언을 하는 족속들이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바로 그 일을 우리가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없다, 옆에 안 믿는 사람을 보아도 전도할 생각도 없다, 어떤 사람이 예수 안 믿다가 내 옆집에서 죽어도 마음에 아픔도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대각성전도집회를 1982년도에 우리교회가 시작했습니다. 벌써 19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18회의 대각성 전도집회를 했습니다. 통계를 보니 그 동안 우리가 전도해서 이 자리에 나와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총 수가 38,326명에 달합니다. 거의 4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지난 18년 동안 이 자리에 와서 복음을 들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를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예수 믿겠다고 그 자리에 일어나 카드를 써낸 사람이 13,872명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들은 사람 중 45%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 들이고 예수를 믿기로 결단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14,000명이 적은 수입니까? 그리고 그 가운데서 한꺼번에 가장 많이 예수 믿기로 결신한 것이 작년이었습니다. 작년 나흘 동안 전도집회를 통해 2,622명이 예수 믿기로 결단했습니다.
여러분, 지난 18,20년 동안 대각성전도집회가 우리 교회에 없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래서 날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 기독교에 대해서 정통한 사람들, 소위 영적으로 영발이 서는 사람들만 모여 날마다 "예수, 예수" 했다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오늘날과 같은 생명력이 있는 교회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이런 놀라운 집회를 앞두고 있는데 주보를 보십시오. 지금까지 3개월 동안 준비하면서 태신자 등록하신 분이 535명 밖에 안됩니다. 2만 명 성인들이 출석하는 교회에 535명이 3개월 동안 태신자 등록을 했습니다. 그리고 1,200명 정도의 태신자가 지금 교회 등록이 된 상태입니다. 그러고도 사랑의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주변에 전도 할 사람이 그렇게도 없어요? 아직도 안 믿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다시 말합니다. 세상은 악합니다. 세상 나라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인생은 덧없습니다. 아무리 호화로운 인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허무만이 남습니다. 하나님 나라 모르는 인생. 어떤 면에서 그것은 살아갈 가치 조차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소망적으로 자꾸 좋은 말 하려고 떠들 뿐, 우리가 영적으로 이 세상을 보고 인생을 보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없다면 살고 싶은 세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있기에 오늘도 태산을 지나 험곡을 가도 찬송 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나라를 위하여 무언가 소명을 갖고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는 증인들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살 맛이 나는 것입니다. 가난하던 잘 살던, 못 살던, 잘났던, 못났던 상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벽돌 하나씩 옮기는 엄청남 역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 때문에 세상을 사는 것 아닙니까?
제가 지난 주에 재미있으면서도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부산에 가면은 부산에서 지금 제일 성장이 빠른 교회가 호산나 교회 아닙니까? 우리 교회 부목사로 있다가 간 최홍준 목사님이 지난 15년 가까이 목회를 한 교회 입니다. 그 교회에 어느 여집사님이 계셨는데 남편이 안 믿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남편에게 이렇게 사정을 했다고 합니다. "여보, 나는 교회에 가면 꼭 과부 같아요. 다른 사람들이 날 보고 과부라고 그럴 거에요. 날마다 혼자 와서 앉아 있으니 말이예요. 그러니 여보, 한번만 나와서 내가 과부가 아니라는 것 좀 증명해 줘요."
그러자 그 말을 듣다, 듣다 남편이 어느 날은 작심을 했습니다. '그래. 나가주자. 그것도 내가 안 들어 주어서야 되겠냐.' 그래서 나왔는데 성령께서 그 마음을 어떻게 뒤집어 엎었는지 나오자 마자 그 날 등록하고 예수 믿기로 결심을 해 버렸습니다. 그 후 이들 부부가 지난 7년 동안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했습니다. 특별히 장애인 사역을 하는 사랑부에 들어가서 열심히 헌신했다고 합니다. 그 가정은 사업을 하는 아주 잘 사는 집안이었습니다.
그 가정에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아들이 이태리에 성악 공부를 하기 위해 유학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주 전에 그 아들이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는 비보를 받았습니다. 그런 일은 안 당해 보면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도 그 절망을 알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예수 잘 믿고 믿음으로 바로 살겠다는 집안에 이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믿음이 그냥 뿌리 채 뽑힐 것입니다. 왠만한 사람 같으면 아마 몇 달 동안 일어 나지도 못할 것입니다.
이 부부가 이제 이태리로 가고자 비행기에 탔습니다. 그런데 옆에 앉은 승객을 보니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태리로 가면서 그 부부가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한 것입니다. 그 승객이 가만히 보니 목사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슨 여행을 다니는 사람 같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자기에게 진지하게 예수 믿으라고 하기에 물어보았답니다. "근데 선생님, 선생님은 뭘 하시는 분인데 이렇게 날 보고 예수 믿으라고 합니까?" 부부는 지금 어떤 상황에서 이태리를 가고 있는지 자초지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이 얼마나 큰 쇼크였겠습니까? 예수 믿으면 죽었던 아들이 살아나야 될 판인데 멀쩡하던 아들이 죽었으니 저주 받은 거나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를 욕하지 않고 자기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니 얼마나 쇼크였겠습니까? 그래서 그 승객이 예수를 믿었나 봅니다.
이태리기 도착해보니 사고를 낸 사람은 평소 자기 아들이 전도하고 싶어 친하게 지내던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보상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 오는 비행기 안에서 옆에 있는 사람을 또 전도했습니다. 나중에 교회에 돌아와 이런 간증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면 돌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이상한 짓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딱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앞에 점점 더 다가 오기 때문에 그 나라에 가면 주님께서 내가 당한 이 모든 슬픔에 대한 대답을 분명히 해 주실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이것이 절대 비극이 아니었고 나에게 불행이 아니었다는 분명한 사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있기에 나는 전도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처럼 여러분의 관심에, 중심에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까? 삶의 최우선 순위가 하나님 나라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종점은 하나님 나라입니까? 그리고 그 나라에 지금 내가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얼마만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세상 나라를 위해 뛰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뛰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밤이 되면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오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여러분의 삶은 분명히 하나님 나라 중심입니까? 내가 월급쟁이든 사업을 하든 간에, 내가 세상에서 똑똑하든 어리석든 간에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 완성을 위해서 기여하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 주변에 믿지 아니하는 형제 자매들을 볼 때 직간접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내가 오늘 쓰임 받았노라고 말할 수 있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누굽니까?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스스로 대답하십시오.
출처/옥한흠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