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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영목사 (생명의전화 사이버상담위원장)
. 교화와 도움
갈라디아서 6장 2절은 서로의 짐을 나누는 교화와 도움의 원리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이런 방법으로 서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십시오.” 그리고 로마서 14장 19절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평화를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씁시다.”
‘교화(敎化)’란 말은 도움의 한 부분으로, 크리스천의 지혜, 은혜, 덕, 거룩함 안에서 성장을 이끌어 내거나 증진시킨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상담은 교화를 포함해야 한다.
도움은 어떤 사람이 더 나은 것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이 사람이 크리스천의 삶으로 성장하고 건강해 질 수 있기 위해서 내가 이 사람과 달성해야 할 목표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와서 이렇게 물을 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 원하는 것은, 당신이 그의 관점에 동의해 주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부부간의 문제라면, 그는 아마 당신이 자기편을 들어주기를 원할 것이다. 상담자가 어려움에 빠져드는 것이 바로 이것(편들어 주기)이다.
타인을 돕는 또 다른 방법은 격려를 해주는 것이다.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번민이 일지만, 좋은 말 한마디로도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잠 12`:`25).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이, 서로 격려하고, 서로 덕을 세우십시오.”(살전 5`:`11).
경청과 더불어 격려를 하는 일은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돕는 가장 중요한 기술 중의 한 가지이다(살전 5`:`14 참조). 격려란 전진하도록 하며 그가 해야 할 바를 하도록 고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저는 당신을 한 인격체로서 믿습니다. 당신이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과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믿습니다. 이제 당신이 전보다 더 유능해지도록 이 문제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해 보도록 할까요?” 격려를 한다는 것은 상담의 목표 가운데 하나인, 그가 자기 자신의 가치를 믿도록 돕는 데 있다.
상담은 내담자에게 도움뿐만 아니라 고통도 더불어 줄 수 있기 때문에, 상담의 여러 단계를 거치는 동안 위안은 중요하다. 상담자가 “그게 맞을 거야,” “모든 것은 최선이었다는 것이 판명될 거야”라고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결과를 알 수 없다. 그리고 상담을 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말씀의 위안을 언제 그리고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내담자는 먼저 그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당신이 말하는 하나님 말씀의 도우심과 위로를 그가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당신의 말을 신뢰하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는 위안의 여덟 가지 유형이 있다.
1) 내담자는 그들의 문제가 정말 평범하다는 것을 알 때 위안을 얻는다.
2) 그 문제가 이미 알려진 원인을 가지고 있으며 치유될 수 있다는 데서 위안을 얻는다.
3) 그 증상이 성가시긴 하나 위험하지는 않다는 데서 위안을 얻는다.
4) 내담자들은 특별한 치료방법이 사용될 수 있다는 데서 위안을 얻는다.
5)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은 위안이 될 수 있다.
6) 내담자들은 그들이 정신이상이 아닐 것이라는 확신을 필요로 한다.
7) 병이 재발될 수 있지만 재발이 그 상태가 더 악화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결과는 위안이 될 수 있다.
8) 적절한 때, 내담자들은 그들의 문제가 죄된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위안 받아야 한다.
당신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과 상담할 때, 그들이 더 큰 자기 충족감을 느끼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들은 당신의 통찰력, 도움과 상담으로부터 점점 멀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당신의 임무는 그 일로부터 벗어나 당신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며 그 사람과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5. 공감
공감(empathy)이란 효과적인 상담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술 중 한 가지다. 그러나 불행히도, 다른 단어들과 같이 여러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상담에서 공감은 어떤 것인가? 이 단어는 einfulung이란 독일어에서 왔는데, 그것은 ‘-에 대해 느끼다(to feel unto)’ 혹은 ‘-와 함께 느끼다(to feel with)’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운전석에 다른 사람과 함께 앉아 그와 함께 느끼고 경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의 눈을 통해 상황을 보는 것이며, 그의 느낌으로 느끼는 것이며, 갈라디아서 6장 2절과 로마서 12장 15절이 말하는 바와 같이 다른 사람의 짐을 나눠지고, 즐거움을 함께 나누며, 슬플 때 함께 슬퍼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공감이다.
지라드 이건은 말하기를 공감은 다른 사람의 내면에 동참하고, 그의 관점을 통해 세상을 보며, 그가 세상을 느끼는 대로 느끼는 판별력을 포함한다고 한다. 판별력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의 감정과 행동에 함께 동참한다는 것을 느끼도록 하면서 우리의 이해를 전달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기쁨을 볼 수 있는 것이며, 그 기쁨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는 것이며, 그리고 이러한 이해를 그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조수아 리브만(Joshua Liebman)은 공감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방법으로 나타난다. 첫째, 그것은 우리들 내부로부터 다른 사람을 이해하도록 한다. 우리는 더 깊은 수준으로 의사소통하며 좀 더 철저하게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 이러한 의사소통과 더불어, 우리는 종종 그 사람을 수용하며 인정과 동정의 관계로 나가는 것을 안다. 다른 측면에서, 공감은 우리에게 개인적인 위안의 근원이 된다.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들의 마음상태와 동일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위안을 받는다. 우리는 한 인격체로서 이해되고 받아들여진다는 데서 만족감을 갖는다. 다른 사람이 단지 우리의 말을 이해할 뿐 아니라, 그의 메시지 속에 칭찬이 숨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느끼는 것은 중요하다. 그 때 우리는 우리가 특별한 사람으로 인정되고 수용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친구 사이에 공감이 안될 때, 우리는 실망스럽고, 좌절감을 느끼기도 한다. 공감이 부족할 때, 우리의 자기인식과 자존감은 감소된다. 그 때 우리는 한 인격체로서보다는 하나의 대상으로서 스스로를 경험하게 된다.
공감이란 내담자를 진단적으로 이해한다기보다는 내담자와 함께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공감은 사실적인 지식을 넘어서는 능력을 요구하며 내담자의 감정의 세계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삶의 경험을 개인적으로 겪어보지 않고서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은 개개인의 독특한 감정을 경험할 수는 없다. 즉 그것은 지나친 수용이다. 공감적(empathetic) 반응은 오로지 다른 사람이 표현한 감정에만 초점을 맞춘다. 동정적(sympathetic) 반응은 다른 사람을 안심시킬 목적으로 당신의 보호나 돌봄을 표현하는 데 초점을 둔다.
도날드 헛츠(Donald Houts)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여하는 용어로서 공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사랑이란, 본래 다른 삶과 돌봄의 관계를 갖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의 삶 속에 관여시키는 능력이다. 그들의 약함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며, 그들을 위험하게 하는 일들을 싫어하며, 그들의 힘든 마음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런 분명한 관계들은 마음이 무척 힘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해주는 것들이다.
윌리엄 크레인은 공감의 기초로서 아가페적 사랑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공감에 있어서 이러한 “보다 큰사랑”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8절에 대한 필립스(J. B. Phillips)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러한 사랑은 오래 참는다. 그래서 사랑은 건설적인 방법인 것 같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즉, 감동을 주려고 애쓰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약함을 지나치지 못한다. 반대로 진리가 전파될 때, 모든 선한 사람들과 함께 기뻐한다.”
“사랑은 없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란다. 사랑은 어떤 것보다 오래 견딘다. 사실 사랑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더라도 굳건히 서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통받은 사람에 대해 참지 못하면, 공감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내담자의 흥미나 관심보다는 자기 자신의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을 때 일어난다. 인내의 부족은 공감의 어떤 가능성도 없애 버린다. 그것은 언어나 행동이나 태도에 의해 내담자에게 쉽게 전달될 수 있다.
때때로 상담자는-아마 자신의 ‘중요한 과업’을 시작하기 위해-내담자를 너무 빨리 그의 문제에 다가가도록 “밀어붙임”으로써 자신의 인내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공감으로부터 일어나는 기본적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이다.” “성내는 것”은 상담자의 입장에서 볼 때 과민한 정도를 의미하는 데 , 그것은 내담자의 요구에 관심을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내담자의 칭찬이나 인정을 받으려는 데 더 많은 관심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 한 예가 있다. 상담자가 자기의 정서적인 장애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하여 깨닫지 못할 때, 문제가 생기고 공감에 실패하거나 또는 무엇보다도 공감관계 형성을 불가능하게 한다.
성내는 상담자는 내담자를 도울 수 있는 건설적인 방법들을 찾기 보다는 자신의 성격이나 가치관을 나타내는 일에 우선적으로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신경증적인 상담자는 성내는 경향이 훨씬 더 극단적이며 내담자의 사소한 말이나 행동-상담자가 내담자 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에 방어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사랑은 또한 “악을 생각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약함을 보고 피하지” 않는다.
상담자는 남을 판단하기보다는 진리에 대해 모든 선한 사람들과 함께 기뻐한다. 이것이 상담자가 내담자 안에 선한 능력이나 진리의 증거가 보일 때마다 내담자에게 응하는 것을 말한다. 상담자의 기쁨은 공감의 깊이나 강도에 기여하는 한 가지 요인이다.
“인내의 끝이 없다”는 것은 사랑 안에 지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모든 면에 대해서 인내할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데 다음 요소는 더 어렵다. 사랑은 “믿음의 끝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상담자들-특히 모든 목회 상담자들-에게는 위선과 불성실, 그리고 거짓의 옷을 입고 오는 사람들이 있다. 불성실한 사람들은 신경증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상담자들의 성실성을 시험해 보려고 한다.
어떤 내담자들은 그들의 목회자와 상담을 하면서 미소짓는 얼굴, 부드러운 말씨, 그리고 과장될 정도로 경건한 태도를 보이면서 상담자를 잠시동안 속일 수 있다. 결국은 그의 진짜 본성이 밝혀지며, 그때에야 상담자는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게 된다. 상담자는 내담자를 신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거짓과 속임수와 불성실로 가득찬 내담자를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실제로 그는 믿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움이 필요한 내담자를 믿고, 그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이에 덧붙여 그는 ‘훌륭한 상담자’인 성령의 현존과 능력에 대해서 굳게 믿어야만 한다. 그분은 상담자를 통해 내담자를 믿지 못할 사람에서 통합되고 존경받는 사람으로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러한 근본적인 인격의 변화는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상담자는 상담에 있어서 성공의 가능성과 바람직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를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상담자가 돌보아 주는 사람에게 민감하고 공감적인 사람으로 보이려면, 그러한 감정을 전하는 언어를 사랑할 필요가 있다. 똑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 지루하다. 상담자는 적절한 도입을 위한 일련의 관용구들이 필요하다. 다음은 공감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는 일련의 목록들이다. 상담자는 그런 말들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나중에 자신의 것이 될 때까지, 몇 번이고 그 말들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공감적 반응을 이끌어 내려면
“내가 이해하기에, 당신은 …라고 느꼈을 거예요.”
“나는 당신이 …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당신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뒀었다면….”
“당신이 말한 바와 같이, 나는….”
“당신의 말을 듣기에 아마….”
“당신에게 그렇게 느끼도록 하는 것은….”
“당신이 지금 가장 옳다고 느끼는 것은 …인 것 같군요.”
“그래요, 당신이 느끼기엔….”
“내가 당신이 말한 바를 듣기에….”
“그래요, 당신이 보는 것처럼 그것은….”
“내가 이해한 바로는, 당신은 …라 말했을 거예요.”
“내가 들은 것으로 추측컨대….”
“나는 당신의 말을 확신할 수 없지만….”
“어쩐지 나는 당신이 …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당신은 …라고 느끼고 있군요.”
“나는 당신이 …라고 말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당신이 …이라 관심을 표현하실 지 염려되는 군요.”
“그것은 당신이 …과 같은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들립니다.”
“나는 당신의 …라고 말하는 것을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같은 것에 높은 가치를 두고 있군요.”
“그것은 당신에게 …같이 보이는군요.”
“바로 지금처럼….”
“당신이 종종 느끼듯이….”
“당신이 느끼기에, 아마….”
“당신은 …라고 느끼는 것 같아요.”
“그것은 당신에게 …같아 보이는군요.”
“내가 듣기에, 당신은….”
“그래요, 당신이 있는 곳으로부터….”
“당신의 지금 느낌은 …이군요.”
“나는 당신을 …으로 이해합니다.”
“때때로 당신은….”
“당신은 …같은 것을 느껴야 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라 느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메시지는 …으로 보이는 데, 나는….”
“당신은 …같아 보입니다.”
“당신 말을 잘 들으면, 그것은 마치 …과 같군요.”
“제가 수집한 바로는….”
“그래서 당신의 세계는 당신이 …한 곳이군요.”
“당신은 …같은 감정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공감적인 말은 내담자의 표면적 감정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될 수 없고 그 당시에는 충분히 알 수 없는 그들의 더욱 깊은 감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종종 어떤 사람이 그의 분노를 표시할 때, 동시에 그의 상처를 느끼기도 한다. 당신은 이런 두 가지 감정에 대해 반응할 수 있다. 이것은 때때로 ‘부가된 공감적 반응’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담자가 더 깊은 감정들을 말로 표현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담자로 하여금 추론을 해보도록 요구한다. 이러한 말들은 명확한 사실로서가 아니라 매우 잠정적인 방식으로 진술된다. 그것은 내담자가 그 진술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버릴 수 있도록 한다. 당신의 반응의 일부는 정확했고 일부는 부정확했다는 것을 내담자에게 말하도록 한다. 다음의 몇 가지 표현들이 있다.
“그것은 마치 …과 같이 들리는군요.”
“당신이 …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군요.”
“추측컨대….”
“아마….”
“…과 같은 가능성이 있습니까?”
“이것이 …에 적합할까요.”
“당신은 …과 같이 가정하고 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