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뭉크(edvard munch)
활동년도 : 1863~1944
작가소개 :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 1863~1944)는 노르웨이가 낳은 가장 위대한 화가로서 사랑, 고통, 죽음, 불안 등을 주제로 하여 내면 세계를 시각화하였으며, <영혼의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독창성 있는 작품 세계를 통하여 미술사의 흐름에 한 전환점을제기하였다.
그의 작품 세계는 19세기 말 대두된 자연주의, 인상주의에 대한 역작용으로 상징주의나 아트 누보Art-Nouveau와 일련의 관계를 가지면서 발생되어진 주관주의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고갱, 앵소르, 고흐, 호들러 등과 함께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되어지고 있다. 회화에 있어 극적 테마, 요약된 강한 형태, 강렬한 색채 등을 통하여 이탈된 회화는 평범한 대상 묘사가 아닌
자유 분망한 자기 표현을 나타낸 점이 주관주의 회화와 공통된다.
뭉크의 작품은 사랑, 고통, 죽음, 불안 등을 테마로 내면의 자기 표현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의 가정은 병과 죽음의 가정으로서 예고없이 찾아오는 죽음과 가정으로서 예고없이 찾아오는 죽음과
인간 생명의 불가사의함에 대한 상념에 늘 싸여 있었다. 뭉크는 죽음을 응시하는 자세는 내향적이었으며, <안으로의 응시>의 특징은 줄곧 죽음을 향한 불안에 근거를 두고 존재되어졌다. 이런
속에서 관찰된 인간의 슬픔과 기쁨을 주제로하여 <생명프리이즈The Frieze of Life> 시리즈를 위시한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이외의 <절규>를 비롯하여 자화상, 입맞춤, 마돈나, 인간들, 초상화 등의 유화, 판화 작품들을 남겼다. 근년에 이르러 뭉크에 대한 예술적 평가는 다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젊은 층으로부터 많은 공감을 강하게 갖게 되는데 이는 생명과 죽음, 사랑에 대한 깊은 감동과 불안 등이 뭉크의 예술과 공통되는 청년기 특유의 감수성 때문일 것이다. 뭉크 예술의 특징적인 것은 모티브의 변화는 약간 있기는 하나, 양식의 변천은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지 않다.
뭉크의 가정은 19세기 노르웨이에서는 상류 계급에 속하는 존경받는 전통적 전형이었다. 아버지 크리스찬 뭉크Christian Munch는 군의관이었고, 백부인 페타 안드레 뭉크Peter Andreas Munch는 유명한 역사가로 집안의 자랑이었다.
뭉크는 1863년 12월 12일 남 노르웨이의 로이뎅 근처 엔겔호이크에서 태어났으며, 뭉크가 태어나자 일가는 현재의 오슬로인 크리스티아니아로 이사를 했다. 뭉크는 다섯 남매 가운데 둘째로서 그가 다섯 살인 1868년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집안은 불행을 맞게된다.
국교 신도인 아버지는 하류층을 상대로 한 병원을 개업했는데, 어머니의 죽음은 아버지에게 성격의 변화를 일으킨 듯 거칠면서도 편벽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어머니 대신 가정을 맡아 돌봐주던 한 살 위인 누나 소피에도 뭉크 나이 14세 때 결핵으로 죽었다. 이런 환경에서 죽음을 응시하는 내향적 성격 형성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소년 시절을 경험은 일생 지워지지 않은 속에 비극적인 제재를 중심으로 반복하여 그렸다. 후에 유화, 판화로 제작한 <병든 아이>는 누이 소피에의 모습으로 그녀에 대한 추억이 깊이 잠재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기사가 되기 위한 과정의 공업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그림을 지망하여 오슬로 국립공예학교에 입학한 후 조각가 미테르 트웅과 화가 크리스티나 크록에게 사사하게 된다.
오슬로에서 그는 마네의 뛰어난 기술과 색채를 노르웨이에 전하였다고 하는 크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음과 동시,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받기 시작하였다. 고독과 우수만이 내재된속에 죽음만을 생각하던 그는 미술을 통해 생의 전환기를 갖게 되었으며, 1893년 그룹 전람회에 참가하기로 하는데 중요한 진보의 계기가 된 것은 오슬로의 크리스티아나 보헤미안 파와의 교류로 인한 시대 의식을 민감하게 흡수하기 시작하면서이다. 보헤미안 파에 대하여 <그들의 무신론, 그러한 두려움을 모르는 태도는 노르웨이 시민의 녹슨 것 같은 혼에 불안의 그림자를 안겨 주었다.
1880년대 초에 뮌헨에 있던 화가 중 가장 우수하고 의욕적인 젊은 화가들은 파리에 이동하고 있다가 그들도 귀국하여 왔다. 그들은 인상주의나 아나키즘 등 새로운 사상으로 차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무정부주의적일 만큼 철저한 개인주의자였으며, 문단에서는 입센HenrikIbsen, 비요른손Bjornstjerne Bjornson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에밀졸라(Emile Zola)를 존경하였으며, 졸라의 자연주의에 심취한 크로그가 이끄는 보헤미안과의 접촉을 통해 정신면에서의 진보와 함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89년 프리츠 다우로의 추천으로 국비 장학생으로 파리에 유학하게 되는데 마네의 안상파에서 강렬한 자극을 받게 되며 피사로, 고호, 고갱, 로트렉 등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서는 <카를 요한 거리의 군악대>, <병든 아이>, <사춘기> 등의 걸작을 남기고 있다.1889부터
1892년까지 파리에 머물게 된 뭉크는 처음에는 아카데믹한 초상화가 레옹 보나 Leon Bonat의 아틀리에에 다니면서 비례, 구도에 대한 기초적인 소묘 기법을 연구한 것으로 알려졌고 뭉크의 예민한 감수성은 후에 새로운 예술에 접하면서 인상파,신안상파로부터 공감을 받은 후 나비파,상징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체험을 통한 극기 후에 주관주의적인 작품 해석으로 승화 발전하게 된다.
188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며, 이해 생 클루Saint Cloud로 이사를 하고 이 시기에 <생명 프리이즈> 연작을 구상케 된다. 생 클루에 머물면서 쓴 그의 일기 중에 <남자들이 책을 읽고, 여자들이 뜨게질을 하고 있는 따위의 실내화는 더 이상 그릴 필요가 없다. 내가 그리는 것은 숨을 쉬고, 느끼고, 괴로와하고, 사랑하며, 살아있는 인간이어야 한다. 보는 사람은 이 주제에서 신성함과 숭고함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모자를 벗을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1892년 베를린에서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단체와의 교류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게 되며 그 해 오슬로로 돌아와 개인전을 개최했는데 반자연주의적인 내용의 작품으로 스캔들을 일으킨다. 인상파나 마네의 작품에 대한 문제성에 대해 귀결도 못보던 당시의 화단은 주관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이 너무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물의로 인해 개인전은 중지되었으나 상대적으로 유명해졌으며, 그의 예술을 이해하여 주는 예술가, 시인, 평론가, 콜렉터등의 주위에서 지지와 호응을 안겨 주었다.
1893년에는 드레스덴, 뮌헨, 베를린, 94년에는 함부르크, 드레스덴, 프랑크푸르트, 코펜하겐 등 북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전람회를 개최하는 한편 개성적이면서도, 확고한 예술 세계를 위해 정진했다. 1895년은 베블린 시대의 문인들과의 접촉으로 그들의 초상화를 판화, 유화로 그렸는데 특히 이 시기는 뭉크가 판화 제작에 적극적으로 종사하기 시작한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동판, 드라이포인트를 시도한 것은 1894년이며, 채색 석판화, 목판화를 시작한것은 1896년으로서 <병든 아이>, <죽음과 소녀>, <마돈나>, <절규>, <입맞춤>등의 무수한 판화 버전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판화를 회화만큼 중요시 다루었던 그는, 판화의 창의적 시도와 기법 혁신을 유화와의 동질로서 같은 모티브에 대한 재확인 식으로 깊이 있게 연구하였다.
1895년부터 1897년에 걸쳐 파리에 있는 동안은 삽화, 무대 장치 등에도 손을 대었으며, 앙데팡당, 아르누보전 참가, 개인전 등을 통해 의욕적인 자세를 보였다. 1898년부터 1907년까지는 독일,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건강을 위한 요양 생활을 하는 한편, 새로운 작업을 위해 매진하였다. 베를린 분리파 전람회에 <생명 프리이즈> 22점을 출품하고 파리 앙데팡당전에 참가한 것도 이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 뒤에는 알콜 중독과 노이로제, 정서적 강박 관념등으로 인해 괴로워 하는 개인적인 모습이 있었는데 그는 이런 문제들로 인해 1908년 코펜하겐의 야곱슨 교수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퇴원을 한 후에는 자연에 대한 친숙함을 표현키 위해 풍경화를 많이 그리기도 했다.
1911년 오슬로 대학 페스티벌 홀의 벽화 콩쿠르에 당선되면서 기념비적인 작품을 많이 남기게 된다. 1912년에는 쾰른에서 개최된 분리파 대전람회에 세잔, 고호, 고생과 동시에 전시를 갖게 되는 영광을 안으면서 뭉크 예술에 대한 평가는 점점 높아지게 된다. 같은 해 처음으로 미국에서 전시를 갖게 되는데 뉴욕에서 개최된 현대 스칸디나비아전에 이어 1913년 유욕 아몰리쇼와 1922년 취리히 미술관, 1927년 베를린 국립 미술관 등에서 각각 대회 고전이 열리게 되는 등 국제적으로 위치를 확립하게 된다. 그러나 1937년에는 칸딘스키 등과 함께 퇴폐 예술이란 낙인을 찍히고 나치스에게 작품을 압수당하는 굴욕을 겪기도 한다. 1944년 1월 23일 나이 80세가 되는 해 사망했다.
뭉크는 사랑과 죽음, 불안, 자화상, 초상화, 판화 등을 주제로 한 연작을 남기고 있다. 사랑과 죽음을 주제로 한 <생명 프리이즈>는 인상파 작가들이 다루려는 직관적 감각성과 달리 작가 자신의 의식에 배어있는 내재적 상태를 중요시했으며 인간 내부적인 심성을 나타내려 했다.
1894년 스톡홀름에서, 1895년 베를린에서 전시된 것이 <사랑> 연작으로서 이 22점의 프리이즈는 사랑의 싹툼, 사랑의 만개, 애락哀落, 생의 불안, 죽음으로 구성된 악장으로 된 연작으로서 이 거대한 테마는 그의 체험적 사고에서 발생된 것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작품에서의 분위기는 1880년대의 갈등으로부터 생겼으며, 당시 주류를 이루던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이루어졌다고 할수 있겠는데 이 연작이 그중 가장 대표적이면서도 중요한 작품이다.
또 뭉크의 작품에서는 사랑, 죽음, 불안 등과 언제나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은 정신 분열에 의한 두려움의 개인적인 고백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생활 자체를 존재의 사실성으로 복귀시키려는 자아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뭉크의 자화상 시리즈는 삶과 죽음과 싸우는 속에 죽음을 관념으로 확대하여 받아들이려는 자세로서 생을 향한 불안의 극복은 전생애를 통한 자기 완성에의 도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뭉크는 생애를 통해 가장 위대한 초상 화가였으며 항시 그리는 대상은 그 자신이었고 전 인생을 통해 변천
되어진 자아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한 마디로 객관적인 사실성을 초월하여 자신의 내적 혼과 정신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연계적인 그의 자화상은 뭉크 자신의 내면성의 고백, 죽음에 대한 갈등, 대결, 불안 등에 대한 상징으로서 죽음을 수용하려는 모습이 기조가 되고 있다.
복수 예술로서 다원성을 지닌 판화는 뭉크에 있어 회화에 필적하는 것으로 중요시 하였다. 뭉크가 처음으로 판화를 한 것은 1894년 8장의 에칭Etching과 1장의 목판화를 제작한 것부터인데 1896년 파리 시대는 가장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초기에는 유화의 중요한 작품과 초상화가 판화를 위한 출발점이었으나, 오랜 시간이 경과하면서 반대로 유화로 옮겨진 것도 있다. 그는 수많은 시도를 통해 회화 못지 않게 판화 작품을 제작하였고,판화 기법상으로도 다양한 혁신을 주고 있다. 판종을 여러가지로 병용하거나, 판목을 분리해서 합성하기도 했으며 부식판을 통해 릴리프적 효과를 의식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뭉크의 현대에 와서 더욱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으며, 단순히 복제품이라고 하는 사고에서 독립된 미술의 예술품으로 발전시켰다.
뭉크의 회화는 사랑, 고통, 죽음, 불안 등을 주제로 한 인간의 내면 세계를 시각화하였으며, 미술사에 한 전화점을 제기하였고 주관주의적 경향을 특징으로 한 속에 대상을 묘사하는 회화로부터 벗어나 자기 표현의 예술세계를 추구하고 완성시켰다.
작품명 : 마돈나
제작년도 : 1894~5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91x70.5cm
소장위치 : 오슬로 국립 미술관 소장
작품설명 : 뭉크는 여자를 세 가지 상으로 보았는데 하나는 꿈꾸는 여인, 또 한편으로는 삶을 갈망하는 여인, 또 체념하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 '마돈나'에 나타난 여인에 대하여 "몸을 바치는 여자- 성모의 고통스런 아름다움에 싸인다."라고 쓰기도 하고, "모든 세계의 움직임이 정지하는 순간, 너의 얼굴은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포함하고 있다. 익어가는 과일처럼 새빨간 너의 입술은 고통 때문이기도한 것처럼 달싹 벌어진다. 그것은 시체의 미소이다. 바야흐로 삶이 죽음에게 손을 내민다. 죽어서 사라진 무수한 세대와 미래의 세대와의 사이에 인연이 맺어진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뭉크의 나이 30세이던 1893년 12월, 베를린에서 '생의 프리이즈' 연작, '흡혈귀', '절규', '입맞춤', '질투'등의 연작을 발표하였는데 중심이 된 것은 이 '마돈나'였다.
작품명 : 사춘기
제작년도 : 1894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150x110cm
소장위치 : 오슬로 국립 미술관 소장
작품설명 : 전나(全裸)의 소녀가 침대에 걸터 앉아, 자신의 알몸을 가능한 감추어야 겠다는 듯이 두 손을 무릎께로 엇갈리게 가져오고 있는 포즈로 그려져 있다. 수줍음과 불안감을 미묘하게 발산하고 있는 소녀의 심리 상황을 상징적으로 말해 주듯 이 뒤의 벽면에는 마치 괴물 같은 형상의 검은 그림자가 커다랗게 나타나 있다. 사춘기의 불안한 소녀의 심리 표현이 뭉크의독특한 수법으로 다루어진 명작이다.
뭉크가 이 주제를 처음으로 그렸던 것은 23세 때인 1886년이었다. 그러나 그 첫 작품은 4년 후에 불타 버리게 되어, 다시 그린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그런데 이러한 포즈의 소녀 나상은 당시 다른 몇몇 화가의 판화와 삽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어, 그 시대를 매혹한 공동의 소재였던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작품명 : 누이동생 잉게르의 초상
제작년도 : 1892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172x122.5cm
소장위치 : 오슬로 국립 미술관 소장
작품설명 : 당시 29세 때 잠시 귀국하여 9월에 오슬로의 토스톨프고렌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갖게 되는데 이때 발표한 초기의 대표작이다. '검은색과 자주색의하모니'라는 제목으로 출품되었던 초상화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눈에서 외부로부터 내면 세계를 투영하려는 의지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정면성에 의한 시선의 초점은 뭉크 세계의 특색이기도 하다. 인물의 표현을 정교하게 나타내고 있는 듯하면서도 특징적인 것외에 불필요한 요소는 생략하였고, 간결한 형태와 조화를 갖춘 색채는 조형적 균형을 이루고 있다.구도적인 면에서 좌우 대칭으로 이루어진 형태는 강인하면서도 엄숙한 고전적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인물 하단부에 바닥을 가로지르는 수평선과의 관계는 화면의 긴장을 강하게 느끼게 하면서 순수한 감동을 더 한층 주고 있다.
작품명 : 죽음과 소녀
제작년도 : 1893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128x86cm
소장위치 :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작품설명 :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무수한 세대와 장래의 세대와의 보이지 않는 연결을 상징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나타내고 있다. 벌거숭이의 천진한 소녀가 죽음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해골과 포옹을 하고 있다. 사랑과 죽음이 서로 공존하는 가운데 환희에 잠겨 있는 소녀는 죽음을 외면한 채 현실에만 충실하려 한다. 가장자리에는 정충이 그려져 있기도 하며, 태아가 웅크린 모습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사랑, 죽음이 동존 속에 같이 나타나며 남자, 여자 모두가 죽음에 지배되는 동물이다. 죽음을 느끼게 하는 테마는 후에 표현주의 회화에 간혹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 원형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뭉크의 작품 중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유명한 작품으로, 유화 작품 외에도 동판화 기법으로 완성한 작품이 있다. 뭉크의 숙명관을 보는 듯하다.
작품명 : 프르치비제우스카의 초상
제작년도 : 1893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148x99.5cm
소장위치 :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작품설명 :
작품명 : 귀가하는 노동자들
제작년도 : 1915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220x228cm
소장위치 :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작품설명 :
작품명 : 소 리
제작년도 : 1893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89.1x108cm
소장위치 : 보스턴 미술관 소장
작품설명 : 본래는 '여름 밤의 꿈'이란 제목의 작품으로서 사랑의 연작 중 한 작품이다.
뭉크는 간혹 자연 속에 인물을 상징화시킴으로써 자연에 대해 공명하는 한편, 인간의 심리적이고 정신적 경험을 시각화하려 하였다. 여기서 표현된 여인은 체념한 여인으로서, 고독과 슬픔에 찬 모습으로서의 삶을 갈망하는 상像인 것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달기둥이 자주 등장되어지는데 이것은 달에서 해로, 음陰에서 양陽으로 변화하여 이미지를 변화시킨다. 동경과 고독, 불안에 차있는 여인이 소나무 앞에 우뚝 서있는 것이 멀리서 보트 놀이 하는 남녀의 행복의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하다. 수직적인 나무와 수평선의 바다 구성은 여인을 친근성 있으면서도 더욱 돋보이게 하여 준다. 독특한 기법에 의한 좀 색다른 개성있는 작품이다.
작품명 : 병실에서의 죽음
제작년도 : 1893
작품재료 : 캔버스 . 크레용
작품크기 : 150x167.5cm
소장위치 : 오슬로 국립 미술관 소장
작품설명 : 그의 작품은 문학적이기는 하나 문학적이면서도 동시에 반사실적 성향이 뭉크 예술의 기본 요소인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의 개인적 일들을 비유적으로 재현하였으며, 개인적 체험을 근본으로하여 승화시켜 환원화된 창조력을 보였다. 여기에서의 내용이 뭉크 자신의 가족의 죽음을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나타낸 것인지는 불확실하나, 과거 가정 내에 있었던 병과 죽음에 대한 불행적인 기억을 상기시켰다고 할수 있겠다. 병실 내의 무력감이 가득차게 톤을 이루고 있으며, 인간 개개인 표정은 실의에 찬 가운데 슬픔, 기원, 상념의 모습들을 강한 형태로서 요약시켜 주관성있게 나타내고 있다.
뭉크 자신이 언급하였듯이 육체와 정신, 질환,죽음이 항상 자신을 찾아든 흑의의 천사였던 것처럼 이를 적절히 표현한 작례라 하겠다.
작품명 : 빨간 덩굴풀
제작년도 : 1900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120x120cm
소장위치 :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작품설명 : 노르웨이 풍경 중에서도 특히 오슬로 시가와 오스가르스트란드의 바닷가 풍경에서 뭉크는 정신적인 생명감을 표현하였으며, 자연을 통해 외로운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 보다는 자연 속의 분위기를 찾아냈던 것이 이 작품을 제작한 해가 1900년으로서 이때에는 베를린 화단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는데 문인과의 교류가 왕성하였으며, 한편 뭉크의 주관성의 강조가 고호 등과 함께 포비즘이나 표현주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화면 중심부에서 약간 휜 듯 수직적인 나무와 불규칙한 듯한 울타리의 직선적 효과가 중앙 건물 덩굴풀의 빨간색의 강렬함과 상호 대립을 가지면서도 공간 변화를 강하게 주고 있다. 원근법의 강조, 불규칙한 형태 변화, 주관성에 의한 곡선표현과, 정면을 바라보는 인물의 심리 상태로 뭉크의 내면에 고조된 심리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작품명 : 다리 위의 소녀들
제작년도 : 1900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83.5x128.5cm
소장위치 : 함부르크 미술관 소장
작품설명 : 강렬한 색채의 처리와 빛, 명암 관계를 조화있으면서도 대담하게 나타낸 것은 상당히 명쾌한 느낌을 주며, 뭉크의 작품들 중에서 보기 드물 정도의 선명한 색 감각을 발휘하고 있다. 원근법을 강조하였으며 비스듬히 놓여진 다리와 난간에 나란히 서 있는 소녀는 단순화의 형태를 보여주며, 동감動感과 리듬을 화면에 도입시켜 구성하고 있다. 뭉크는 자연을 주관적 분위기에 의한 반영으로 보았으며, 낭만적인 자연 속의 인간의 무의미를 투영하려 했다. 곡선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도 필세는 간명한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 외에도 판화로도 표현시키고 있는데, 구도는 거의 같으나 좌우가 완전히 반대로 된 동판화 '선창의 소녀'(1903년)와 같은 제명으로 된 목판화(1920년)가 있다. 뭉크는 판화를 유화에 필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중요시하였다.
작품명 : 다리 위의 소녀들 II
제작년도 : 1901
작품재료 : 캔버스 . 유채
작품크기 : 136x125.5cm
소장위치 : 오슬로 국립 미술관 소장
작품설명 :
작품명 : 마라의 죽음
제작년도 : 1907
작품재료 : 캔버스 . 유채
작품크기 : 153x149cm
소장위치 :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작품설명 : 마라는 프랑스 혁명 시대의 정치가로서 자코방 당을 이끌고 앞장서서 지롱드 당을 공격했으나 자롱드 강에 동조한 샬롯 코르데라는 여자의 칼에 찔려 죽었다.이외에도 여자에 의해 배반당하는 남자를 주제로 한 작품이 있는데 '아담과 이브'.'삼손과 데릴라'등이 그 일련의 내용이다.
뭉크 자신이 여자에 의해 불신과 굴역을 겪게 되는데, 1902년 가을에 그가 오스가르스트란드에 살고 있을 때 부유한 사업가의 딸 투라 랄손과 연애를 하게 되면서 결혼 문제로 다투던 중 그녀의 손에서 권총을 뺏으려다 왼쪽 약손가락의 일부를 잃게 된다. 그 후로 여자를 악마의 화신으로 보는
습관적 이유가 생기게 된 것 같다. 죽음과 증오와 사랑이 동시에 표출되어진 내용은 그의 심리를 적절히 묘사했다고 하겠다.
작품명 : 미역감는 남자들
제작년도 : 1915
작품재료 : 캔버스 . 유채
작품크기 : 203x230cm
소장위치 :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작품설명 : 만년에 뭉크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에 이르게 된다.
"내가 얻은 건강의 좋지못함도 나의 부분이며 더불어 나의 예술은 그 허약함을 원천으로 삼은 것이므로 나는 내가 건강해지길 원치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뭉크의 극한적인 상황은 강인하면서도 희망찬 남성을 동경의 대상으로 표현하려 했을 것이다. '바르네뮌데 트리프틱'(1907년과 1908년 여름에 뭉크가 가 있었던 독일 북부의 바르네뮌데에서 제작한 3장으로 된 그림) 중 한가운데의 성인 부분을 나중에 다시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나머지 두 장 '청'과 '노인'이다. 그 당시 무질서 하면서도 거친 생활에 술만 마시고 방황하던 때로, 건강을 되찾기 위해 바르네뮌데에 가 있었다. 뭉크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내면적이면서도 요약된 강인한 형태와는 다른 밝은 색채가 풍요스럽게 나타나 있다.
작품명 : 빨간 깔개 위에 앉은 소녀
제작년도 : 1922
작품재료 : 캔버스 . 유채
작품크기 : 81x65cm
소장위치 : 시투트가르트 국립 회화관 소장
작품설명 :
작품명 : 생명의 춤
제작년도 : 1925
작품재료 : 캔버스 . 유채
작품크기 : 143x208cm
소장위치 : 오슬로 국립 미술관 소장
작품설명 : 사랑과 죽음을 주제로 한 연작을 통하여 예술적 생명성을 나타내려 노력하였는데 1894년 스톡홀름에서, 1895년 베를린에서 사랑 연작을 발표한 후 1902년 베를린 분리파 전시회에 출품한 일련의 작품을 통해 '생의 프라이즈' 연작으로 확대되어 발전한다.
이 작품 역시 사랑과 죽음을 바탕으로 그의 체험적 심성을 표현한 것으로 내부적 사고에서 생겨 난 것이다. 뭉크는 여자를 세 가지 상像으로 보았는데 꿈꾸는 여인, 삶을 갈망하는 여인, 체념하는 여인의 상으로 여기에서 표현되어진 여인들을 통해 생명의 기쁨과 슬픔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매월 6월 23일마다 개최되는 하지제夏至祭의 무도회에서 느낀 것을 시도한 것으로써 인물의 대담한 배치, 색채의 강렬함, 해안선을 통해 나타난 강직함은 생명감이 충만하다.
작품명 : 목소리
제작년도 : 1893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88x108cm
소장위치 : 보스턴 미술관
작품설명 : 본래는 [여름밤의 꿈]이란 제목의 작품으로서 사랑의 연작중 한 작품이다.
여기서 표현된 등뒤의 뱃노래소리를 듣는듯 양팔을 뒤로하고 이쪽을 바라보는 여인은 여기서는 체념한 여인으로 고독과 슬픔에 찬 모습을 하고 있다.
뭉크는 이와같이 인간의 심적이거나 영혼의 상태를 자연관조에 동화시킴으로써 풍경 자체속에 인간의 정서를 나타내려고 하였다. 고독과 불안에 찬 여인이 소나무앞에 서서 멀리 보트놀이 하는 남녀의 행복의 소리를 듣는듯하다. 수직적인 나무와 수평선의 바다 구성은 여인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작품명 : 병든아이
제작년도 : 1896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42.1x56.5cm
소장위치 : 오슬로 뭉크미술관
작품설명 : 뭉크는 19세기 노르웨이 상류계급에 속하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다섯살인 1868년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후 누나 소피에도 그가 14세때 결핵으로 죽었다.
이런 환경에서 죽음을 응시하는 내향적 성격형성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소년시절의 경험은 일생 지워지지 않는 비극적인 제재를 자신의 회화주제로 삼게된다. [병든아이]는 누이 소피에의 모습으로 그녀에 대한 추억이 깊이 잠겨있는 그림이다.
이 작품은 병상에 누운 수피에의 모습에서 찾아낸 강렬한 인상을 작품화 한 것인데, 석판화에 의한 섬세한 필치게 돋보인다. 이 두점의 석판화는 같은 판에 잉크색을 바꾸어 찍어낸 것이다.
작품명 : 절규
제작년도 : 1893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91*73.5cm
소장위치 : 오슬로 국립미술관
작품설명 : 이 작품에 관해 작가인 뭉크 자신이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어느날 해질녘에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한쪽으로는 시가지가 펼쳐져 있고, 밑으로는 강줄기가 돌아나가고 있었다....마침 해가 떨어지려던 때여서, 구름이 핏빛처럼 새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그때 나는 하나의 절규가 자연을 꿰뚫으며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절규를 정말 들었다고 생각했다.>
다리위에서 공포에 휩싸인 얼굴을 하고 있는 이 작품의 인물은 바로 그 절규에 필사적으로 귀를 막는 형상이다. 그러나 그는 그 무서운 소리를 피할 수 없다. 하늘의 <핏빛> 같은 새빨간 구름도, 멀리 뒤로 보이는 강줄기도, 그리고 그 자신의 몸도, 마음속의 절규를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크게 파도치는 선으로 표현돼 있다. 이 곡선은 참으로 강렬한 표현성을 보인다. 뭉크는 고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간담을 서늘케 하는 요괴의 도움을 빌지 않고 그러한 공포의 체념을 시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으며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이 작품은 한층 설득력을 갖는다. 뭉크의 대표적인 명작의 하나이다.
작품명 : 결별
제작년도 : 1893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뭉크는 노르웨이가 낳은 위대한 화가로 사랑, 고통, 죽음, 불안 등을 주제로 하여 내면 세계를 시각화 하였으며 영혼의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독창적 작품세계를 통하여 미술사의 흐름에 전환점을 제기하였다.
그의 작품은 19세기말 자연주의, 인상주의의 반대로 대두한 상징주의나 아르누보와 관계를 가지는 주관주의적 표현이다.
그는 고갱, 앙소르, 고호, 호들러 등과 함께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으며 회화에 있어 극적 테마, 요약된 강한 형태, 강렬한 색채등을 통한 주관의 표현이 이들과의 연관성을 증명하여 준다.
뭉크는 병과 죽음에 의한 인간 생명의 불가사의에 대해 늘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의 죽음을 향한 불안은 그의 작품 전반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런 속에서 관찰된 인간의 슬픔과 기쁨을 주제로하여 [생명 프리즈] 시리즈를 위시한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